'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343건

  1. 블랙미러 2012.01.30
  2. 김광석, 열여섯해. 2012.01.06
  3. 홈랜드 2011.12.19
  4. 이사 (20111216) 2 2011.12.16
  5. 인 콜드 블러드 2011.11.18
  6. 스무살 도쿄 2011.10.10
  7. 동물원의 탄생 2011.08.23
  8. 사랑의 혁명성 2011.08.23
  9. Hi, There. 3 2011.08.11
  10. 여전히, 오 나의 여신님 4 2010.02.11

블랙미러

from 영화창고 2012. 1. 30. 14:38

K의 추천으로 함께 보게된 영국 드라마 블랙미러 (Black Mirror). 블랙미러는 디스플레이 화면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미러는 미디어가 될 것이다. 1편과 2편과 다르게 3편은 개인간의 미디어가 될 수 있겠지.

미디어가 휘황한 화면을 보여주고난 뒤의 암전. 그 뒷편의 서늘함을 너무도 섬세하게 그린 드라마. 스킨스, 미스피츠와 셜록을 보면서 때때로 느낀 영국 드라마의 특유의 우울함의 잿빛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이야기의 기발함과 그 안에 주고자하는 메시지 어느것 하나 기울지 않는다.

1편에서 보이는 대중의 집요함. 보면서 대중임이 치욕스러웠다. 극단적인 소재이지만 그 경중은 다를뿐 이런 일들은 지금도 빈번히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대중은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그 피해와 아픔은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블랙미러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지만, 다시 화면이 켜지면 다시 그 표독스런 대중이 되고 만다. 

1편 후에 2편을 보면 더 암담하다. 밝은 화면과 재기넘치는 구성이 있지만, 그 메시지는 헤어나올 수 없는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미디어에 대한 반성적 인식 또한 미디어를 거치지 않고서는 전달될 수 없고, 그 반성적인 목소리 조차 기존 미디어에 편입되어버리는 현실. 탄식이 절로 나온다.

1인미디어 시대. SNS가 창궐하는 시기이지만, 1인미디어라는 말은 허구에 가깝다. 1인이 미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미디어로 기능하려면 여전히 대중이 필요하다. 팔로워의 수가 메시지 아닌가. 또 파워블로거라는 언어는 또 어떠한가. 기존 미디어의 관심밖에서 생존 가능한가. 기존 미디어는 매체가 어떻게 변하든 헤게모니를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미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게임의 형식은 견고하고 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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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열여섯해.

from 음악창고 2012. 1. 6. 23:49
내가 매년 기억하는 죽음이 얼마나 될까. 1996년 1월 6일. 내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1996년 겨울에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갔다. 그래서인지 그의 죽음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가면 학전 소극장에 들러 그의 공연을 보겠노라 생각했었다. 그게 대학가서 하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100회를 넘어갔던 그의 소극장 공연을 한번도 내 눈으로 보지 못한게 한이 되어 그의 죽음뒤 그의 음반을 사고, 그의 노래를 들었다. 노래이야기, 인생이야기 앨범은 술한잔 마신 날이면 늘상 플레이 되었고 담겨있던 공연 멘트중에서 어느 60세 노부부의 이야기는 애잔하고 또 애잔했다.

삶에 지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나이를 먹으며, 뭐든 자신이 없을때 그의 노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김광석의 노래는 거리감 있는 충고가 아니라 술잔 너머 앉아있는 어느 친한 형의 위로 같은 것이었다. 나이가 먹어 들어도 여전히 그 따스한 온기가 식지 않아 다행이다.

그의 죽음을 추억하는 것이 벌써 열여섯해째가 되었다. 난 그보다 오래 살아 올해로 서른 여섯이 되었지만 여전히 삶은 쉽지 않고, 그럴때마다 그의 노래를 꺼내듣는다.

그립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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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랜드

from 영화창고 2011. 12. 19. 13:27


올해 드라마 중에서 가장 괜찮았던 드라마를 꼽는다면 한국 드라마로는 당연히 '뿌리깊은 나무'일 것이고 미국 드라마중에서는 '홈랜드'를 꼽겠다. 이제 1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앞두고 있는데,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라크 이후의 미국, 아부 나지르로 대표되는 중동 테러위협을 8년동안 납치구금되었다가 풀려단 해병대군인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CIA의 첩보작전도 깊이있게 그려지고 있고. 시즌 내내 잔잔하지만 밀도있는 반전을 선보이며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바짝 조이고 느슨하게 풀어내는 이야기가 흠인력있게 다가온다.

미국의 불안과 그 적대적 대립의 뿌리. 균형잡힌 시각이라 볼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 미국의 불안은 캐리를 통해서 (클레어 데인즈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처절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녀의 조울증과 히스테리는 그 가해의 역사로 인해 미국 국민이 지닐 수 밖에 없는 불안과 비극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매파쯤 될 인물은 당연히 부통령. 반대 극단은 아부 나지르. 그 극단의 스펙트럼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은 모두들 피해자들이다. 부통령은 정치적 이득을 위해 상황을 이용하고, 아부 나지르도 개인의 분노와 상실을 '성전'을 치르는 연료로 삼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로 향해가는 드라마의 예고편에서도 해결의 기미는 없고 일촉즉발의 극단을 향해서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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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20111216)

from 일기창고 2011. 12. 16. 16:33
이러저러한 SNS를 거치고 몇가지 블로깅 툴을 써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이 곳인가 싶다. 벽에다 얘기하는 것 같던 블로그의 답답함 때문에 페이스북으로, 또 텀블러로 이사를 다녔지만 그런 '관계'가 때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종교적 신념도 아니니 상황에 맞게 쓰면 그만이겠지만 그때 그 시점에 마음가는 건 있는가 보다.

그 마음가짐으로 끄적거리고 싶어 글쓰기창을 눌렀을때 흐르려던 생각을 닫아버리는건 제목창이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쓰려했는데 제목창을 마주하는 순간 뭔가 정제된 무엇을 써야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게 된다. 블로그의 제목창이 옵셔널이었으면 나을것 같다.

아무도 읽지 않는건 아니고 가끔은 우연이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 이기적일지 모르지만 페이스북이나 텀블러나 트위터나 나의 이야기가 읽혀지기 위해서는 나도 읽어야 한다. 반응하지 않고서는 사람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으니. 그러다 보면 타임라인은 읽고싶지 않은 글들로 가득차고 읽고 싶은 글은 읽을 수가 없게된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곳에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시간에 책을 읽어야 하는데... 이 블로그에 들를때마다 치열하게 읽고 보았던 그리고 적었던 시절들 때문에 부채감 같은게 느껴진다.

요며칠 이승환의 옛앨범들을 듣고 있다. Karma, Human, Hwantastic앨범. 여전히 좋다. 이승환의 발라드가 싫을때가 있었는데, 이승환처럼 참 오랜시간 묵묵히 노래불러주는 가수가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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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from 책글창고 2011. 11. 18. 10:24
인콜드블러드(incoldblood)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트루먼 카포티 (시공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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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스펙터클하고 쫄깃한 스릴러를 기대하는 사람은 읽지 않는게 좋다. 트루먼 카포티가 수년간 인터뷰한 두명의 살인자에 대한 기록. 녹음과 노트 없이 기억만으로 구성해냈다는게 새삼 대단하다. "무고한 사람들이 무자비한 사람들로 인해 살해되었고, 그 살인자는 결국 사형을 당했다"라는 무미건조한 뉴스기사 한줄은 우리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하지만 인 콜드 블러드는 그 사건을 파헤치고 구성해 내 가장 밀도있는 르포타주 한편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섹션에서 묘사된 재판과정과 그 이후. 딕과 페리가 사형은 언도받고 5년 넘는 시간동안 지낸 '구멍'에서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삶의 마지막을 보냈을까.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었던 그 시절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그들이 생을 마감하던 그 순간을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형수의 마지막 말이 궁금해 찾아본 기사도 기억해둘 만 하다.

주말에 '카포티'를 봐야겠다. 페리의 뇌속까지 들여다 본 것 같던 카포티의 심리기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책을 읽고나니 클러터 가족과 홀컴 마을, 페리와 딕이 마치 오래 알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책을 덮고 인터넷을 뒤지며 그들의 남겨진 기록과 사진을 찾아봤다. 가장 쓸만한건 위키피디아의 글일 것이다. 언제든 여기서부터 출발하면 될 것 같다. 낸시를 떠나보낸 바비 럽은 이제 예순이 넘었고, 클러터 가족이 살던 집은 다른 누군가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시간은 언제나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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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도쿄

from 책글창고 2011. 10. 10. 14:35
스무살도쿄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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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풀풀 쌓여있던 대학시절 일기장을 열어본 적이 있다. 세상에 대한 고민보다는 내 자신의 꼬라지에 대한 고민이 더 컸던 까닭이었는지 몇장을 열어보다 이내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손대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꾸며지고 기름진 단어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던 그 노트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열어본 적이 없는데도 무척 부끄러웠다.

그 시절 사람들, 공간의 이야기가 버무려져있었으면 그 노트를 읽어 낼 수 있었을까. 왜 그때 그리도 외로움에 떨었을까. 그저 적혀있는 것이라 곤 읽은 시집, 본 영화 그리고 그에 대한 감상이 전부였는데도 항상 결론은 외로움을 향해있었다. 그 시절 내 꿈은 문학이었다. 시를 쓰고 싶었고, 그 마저도 안되면 평론이라도 해보겠다 잠깐 맘을 먹었었던 것 같다. 너무도 희미하다.

스무살 도쿄의 주인공 히사오의 꿈은 음악평론가였다. 18세 도쿄로 상경하던 그 때까지는... 세월은 하루같이 지나 대학을 중퇴하고 카피라이터로 이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났다 헤어지고, 결혼을 생각한다. 지독한 클라이언트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보다 한참 떨어질 것 같은 후배로 인해 고민한다. 존 레넌이 죽고, 나고야는 서울에 밀려 올림픽 개최에 실패하고, 동서독은 통일이 된다. 세상은 급하게 흘러가지만 그저 '뉴스'에 불과하고 내 삶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주변은 관심거리에 불과한 미미한 삶. 많이도 닮아있구나.

59년생 오쿠다 히데오는 18살 시절부터 서른을 코앞에 둔 29살까지의 빛나는 청춘의 페이지들을 여섯날의 이야기로 엮어냈다. 나도 너도 알아채기 힘든 관념의 어휘들은 쏙 뺀 가벼운 문체는 쉬이 읽힌다. 그래도 알차게 일상을 채워넣었다. 호흡 긴 성장소설이라기 보다는 세월이 흘러 뒤적여보는 일기 같은 소설. 저자도 소설을 써내려가며 많이도 부끄러웠을거다. 내가 먼지 쌓인 그 시절 일기장을 읽을 때처럼.

나고야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살면서 보내는 히사오의 시절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건 가까운 서울에 사는 스무살 청춘들도 비슷하게 살아왔기 때문일 거다. 어딘들 다르겠나. 29살에서 끝난 소설의 끝에 내 삶을 이어도 덜컥거리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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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탄생

from 책글창고 2011. 8. 23. 10:48
동물원의 탄생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니겔 로스펠스 (지호,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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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을 보고 내내 이 책이 생각났다. 신약이라는 인간 탐욕의 비극성에 눈길이 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원작에서 핵공포의 우울이 배제된 스토리가 실망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고, 시저와 폴을 통해서 가족주의를 느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저가 동물원(감옥의 메타포임이 분명한)에 갇히고 벌어지는 일들은 현대 동물원의 비극성을 상징한다. 어쩌면 영화가 다룬 인과의 사회적인 조건은 그런 감금에 있다. 동물에 대한 감금의 정당화는 감금되는 개체가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반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허나, 시저가 신약을 통해 각성하든 하지 않았던 간에 동물원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비극적이다. 정신적인 고통이전에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한 자유의 제약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다. 동물의 고통은 그저 인간의 즐거움과 유희를 위해 무시된다. 아래 동물원의 탄생의 인용문을 잠깐 읽어보는 것으로도 아이의 손을 잡고 동물원을 활보하는 것, 훈련된 재롱을 보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저가 갇히고 나서 탈출하기 까지 이 영화는 흔한 오락영화가 아니라 슬픈 우화로 느껴졌다.

결국 이런 고릴라들은 얼마 뒤 죽어버리곤 했는데, 주로 땅에 얼굴을 처박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소콜로브스키가 보기에 고릴라가 감금 상태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동물의 집단적인 행동으로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잡혀온 고릴라들의 건강을 해치는 요인이 무엇보다 정신적인 영향이라는 점이다. 완전한 자유 상태에 있는 동물들이 향유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기생충들이 끼치는 위험을 극복하기에 충분하다"면서 소콜로브스키는 결론 맺기를, 감금 상태에서 "이들의 생명 에너지가 파괴되고 자신들의 운명에 굴복하면서, 음식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소진해버리고 만다"고 했다. 결국 고릴라들은 자신들의 숙명을 비극적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깊은 슬픔과 우울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p10~11

하겐베크 동물원에서 방문객들은 심지어 "이국" 동물들과 더불어 "민속촌"(아프리카 정글, 러시아 스탭, 미국 대평원, 북극얼음)에 있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것도 철창이나 눈에 띄는 장벽 없이, 그리고 자신들의 "문명"이 주는 편리함을 떠날 필요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 p24

이 쇼가 먹혀든 것은 관객들이 스스로 다음과 같은 점을 확신할 때만 가능했다. 그것은 먼저 전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 아니면 전시된 사람들이 어느 먼 지구 반대편 고립된 곳에서 "불쌍하게" 지내느니 독일의 동물원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었다...(중략)... 쇼에 전시된 사람들이 말을 받아서 하기 시작하자, 대신 동물들은 세심하게 "침묵하도록" 하는 훈련을 받았다. 이 강요된 "침묵"이 아마 현대 동물원을 규정짓는 특징일 것이다.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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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혁명성

from 책글창고 2011. 8. 23. 09:12
욕망은 타자의 육체(body)로부터 그 옷들을 벗길 뿐만 아니라 그 육체의 운동도 빼앗아, 타자의 육체를 순수한 살(flesh)로 존재하도록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애무는 타자의 육체를 내 것으로 가지려는 운동이다. 만일 애무가 단지 피부 표면을 건드리거나 쓸어주는 일이라면, 이런 행동과 애무가 충족시키려고 하는 강력한 욕망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관련도 없게 될 것이다. (...) 애무는 단순한 접촉을 원하지 않는다. 애무를 접촉으로 환원시키는 사람은 애무가 가진 독특한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무는 단순한 건드림이 아니라 어떤 모양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애무할 때 나는 내 손가락 아래에서 그녀의 살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애무는 타자를 육화하려는 그런 관계들의 앙상블인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1843)

상처받지않을권리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강신주 (프로네시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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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중에서 사랑과 매춘을 다룬 부분에 인용된 구절이다. 사르트르는 애무를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읽었다. 단지 쓰다듬는 다는 무의미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손 안에서 타자의 자유를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는 것.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닌 사랑의 본연적인 성질이다. 나의 소유욕과 타인의 소유욕이 부딪히는 그 긴장의 관계가 사랑이라는 것을 이 위대한 철학자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애무의 긴장감은 자본이 침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돈이 매개된 관계는 매춘의 성질을 가지며 애무 본질의 탄력성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사랑으로 포장하려해도 이미 사랑이 아니다. 감출 뿐이지.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유로운 사랑을 욕망한다는 점이다. 자본의 사회에서 돈으로 매개될 수 없는 사랑의 혁명성.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시절에 자본의 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은 점점 더 기대하기 어려워졌으나 그럼에도 이러한 가능성은 사랑 말고는 찾을 수 없다.

다행스럽지만,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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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There.

from 일기창고 2011. 8. 11. 18:03

그동안 비공개로 해두었던 글들을 공개로 돌렸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우연히 키워드를 붙잡고 이곳에 온 사람들에게 나의 글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닫을때 만큼 충동적으로 열었지만, 더 보탤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블로그를 닫아 두었던 시간동안 나는 호흡이 긴 글을 쓰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긴 글을 쓰는 법을 잊어가는 시간동안 긴 글을 읽는 법 또한 잊어버렸다. 가벼운 글들만 쌓이는 시간들이 이제서야 견디기 힘들어진다. 생각하고, 길게 읽고, 길게 쓰고 싶다.

아직도 블로그를...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블로그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버릇이랄까 치열하게 글을 쏟아내던 이 공간이 내내 익숙하다. 하여 나에게 블로그는 내방에서 두드리는 타이프라이터와 같다.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쓰여진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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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좀 왔으면 하는, 눈 오는 출근길. 짜증을 뒤로 하고 자리에 앉아 듣는 노래. 최근 발매된 Lisa Ekdahl의 Give Me That Slow Knowing Smile앨범. 그중에서 I'll Be Around가 끌린다. 그녀를 처음 알게된건 (아마도 선물받았을) Sings Salvadore Poe 앨범이었다. 오묘한 목소리가 호오를 갈랐지만, 나에겐 무척이나 좋았다.

그게 2000년대 초반이었으니 벌써 10여년이 되어간다. 여전히 그 목소리로 노래 불러주어서 새삼 고맙다. 71년생이니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나 나이의 무게가 무색하게, 여전히 그 모습인 것도.

노래 들으며 외친다. 오 나의 여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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