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미러

from 영화창고 2012. 1. 30. 14:38

K의 추천으로 함께 보게된 영국 드라마 블랙미러 (Black Mirror). 블랙미러는 디스플레이 화면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미러는 미디어가 될 것이다. 1편과 2편과 다르게 3편은 개인간의 미디어가 될 수 있겠지.

미디어가 휘황한 화면을 보여주고난 뒤의 암전. 그 뒷편의 서늘함을 너무도 섬세하게 그린 드라마. 스킨스, 미스피츠와 셜록을 보면서 때때로 느낀 영국 드라마의 특유의 우울함의 잿빛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이야기의 기발함과 그 안에 주고자하는 메시지 어느것 하나 기울지 않는다.

1편에서 보이는 대중의 집요함. 보면서 대중임이 치욕스러웠다. 극단적인 소재이지만 그 경중은 다를뿐 이런 일들은 지금도 빈번히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대중은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그 피해와 아픔은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블랙미러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지만, 다시 화면이 켜지면 다시 그 표독스런 대중이 되고 만다. 

1편 후에 2편을 보면 더 암담하다. 밝은 화면과 재기넘치는 구성이 있지만, 그 메시지는 헤어나올 수 없는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미디어에 대한 반성적 인식 또한 미디어를 거치지 않고서는 전달될 수 없고, 그 반성적인 목소리 조차 기존 미디어에 편입되어버리는 현실. 탄식이 절로 나온다.

1인미디어 시대. SNS가 창궐하는 시기이지만, 1인미디어라는 말은 허구에 가깝다. 1인이 미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미디어로 기능하려면 여전히 대중이 필요하다. 팔로워의 수가 메시지 아닌가. 또 파워블로거라는 언어는 또 어떠한가. 기존 미디어의 관심밖에서 생존 가능한가. 기존 미디어는 매체가 어떻게 변하든 헤게모니를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미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게임의 형식은 견고하고 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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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랜드

from 영화창고 2011. 12. 19. 13:27


올해 드라마 중에서 가장 괜찮았던 드라마를 꼽는다면 한국 드라마로는 당연히 '뿌리깊은 나무'일 것이고 미국 드라마중에서는 '홈랜드'를 꼽겠다. 이제 1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앞두고 있는데,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라크 이후의 미국, 아부 나지르로 대표되는 중동 테러위협을 8년동안 납치구금되었다가 풀려단 해병대군인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CIA의 첩보작전도 깊이있게 그려지고 있고. 시즌 내내 잔잔하지만 밀도있는 반전을 선보이며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바짝 조이고 느슨하게 풀어내는 이야기가 흠인력있게 다가온다.

미국의 불안과 그 적대적 대립의 뿌리. 균형잡힌 시각이라 볼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 미국의 불안은 캐리를 통해서 (클레어 데인즈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처절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녀의 조울증과 히스테리는 그 가해의 역사로 인해 미국 국민이 지닐 수 밖에 없는 불안과 비극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매파쯤 될 인물은 당연히 부통령. 반대 극단은 아부 나지르. 그 극단의 스펙트럼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은 모두들 피해자들이다. 부통령은 정치적 이득을 위해 상황을 이용하고, 아부 나지르도 개인의 분노와 상실을 '성전'을 치르는 연료로 삼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로 향해가는 드라마의 예고편에서도 해결의 기미는 없고 일촉즉발의 극단을 향해서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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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세이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4 / 미국)
출연 진 핵크만, 신디 윌리엄스, 앨렌 가필드, 엘리자베스 맥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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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면. 넓은 광장에서 도청이 이뤄진다.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 단절되고 분절되어 들리는 대화. 모두에게 열려있는 광장, 그와 대비되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도청. Bird's-eye view 앵글에서 타겟으로 슬슬 좁혀지는 카메라는 눈을 잡아끈다. 인상적인 도입씬이다.

제목은 Conversation이지만, 정작 대화는 없다. 너무 조용하다. 대화는 의미 교환이 아니라 일방적이다. 누군가는 말하고, 그 말하는 것을 누군가는 몰래 훔쳐들어야 한다. 듣는 것과 다르게 '옅'듣는 것은 항상 은밀하다. 그러니 대화는 있지만, 진짜 대화는 없다는게 정확하겠다. 모든 대화는 무기력하다.

도청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해리 콜은 대화를 은밀히 듣고 그걸 의뢰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지만, 자신은 그 누구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인물이다. 대화는 비밀이 보장될 수 없고, 무의식적으로 흘린 이야기가 흉기가 되어 자신을 헤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안다. 타인의 들리지 않는 대화조차 테크놀러지의 힘을 빌어 들어야만 하는 콜이지만, 타인이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할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도청을 해야하는 그로서는 '도청당하지 않기 위해' 고독을 품안에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감추지 않으면 들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혼자이다. 영화속에서 혼자이거나 혼자가 아니어도 둘이거나 혹은 셋이다. 그때에도 건조한 대화가 이어진다. 박람회를 마치고 그의 작업실에 여러명이 모여있을때에도 콜걸을 데리고 작업장 한켠 조용한 구석으로 간다. 그의 답답하고, 고독한 삶이 애처롭다. 파편화된 소리들, 낮게 깔리는 재즈음악, 스피커를 앞에두고 연주하는 테너 섹스폰 소리, 공간은 달리 채울 수 있는 것이 없다.

대부시리즈에 비하면 7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코폴라의 소품같은 느낌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도청기계들은 지금으로 보면 '장난감'수준의 조악함이 보이지만, 옅듣는다, 옅들으려한다, 감춘다는 그 행위의 비밀스러움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청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되고, 도청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비밀스럽게 얘기를 해야만 한다.

사장의 의뢰로 넓은 광장에서 남녀의 대화를 옅듣는 해리 콜. 여자는 사장의 아내였고, 남자는 아내의 정부였다. 도청을 옅듣고 그걸 복원하면서 사장이 그 둘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된다. 자신의 도청으로 인해 이뤄질 결과에 괴로워하면서 그 장소에 있지만, 결말은 예상과 다르게 빗나간다.

넓게는 워터게이트 이후의 미국사회의 충격이 만져진다. 영화를 보며 9.11이후의 미국사회가 겹쳐지고, 한국 현대사를 뒤흔들었던 수많은 도청 및 감청사건이 떠오른다. 옅듣는 것은 그 자체로 은밀한 행위이지만, 그걸 공개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겹쳐진다면 그것은 파괴력을 가진다. 극중 해리콜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도청으로 인해 타인의 삶을 파괴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 그것에 대해 갈등하고 고민한다.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끊임없이 도청사건이 터지고, 감청이 횡횡하는 사회. 넓은 광장에서, 아니면 왁자한 카페에서 떠들면서도 문득 주변을 볼 수 밖에 없는 시대. 휴대폰도 옅들을 수 있는 가능성. 점점 개인으로 수렴하는 삶을 살고 있으나, 테크놀러지로 인해 그 은밀함도 까발려질 수 있는 공포. 내가 인터넷공간 어딘가에 로깅한 흔적이 어느 순간 흉기가 되어 나를 헤칠 수도 있는 상황. 매체는 타인을 향해 열려있으나 결코 나를 보호할 수 없다.

반전의 충격보다, 길게 남아있던 고독과 허무한 대화, 말하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기억에 남는다. 테크놀러지가 열어놓은 가능성, 매체의 확장이 가져올 그 이면의 공포를 포착해낸 예민함. 그래서 30년전 칸은 황금종려상의 수상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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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도어에서 나온 오래된 LP판이었을거다. 80년대 온갖 히트곡이 수록되어있던 음반. 앤디 깁의 노래도 있었고, Bells의 노래도 있었다. 어린 시절이니 LP를 구입할 여력은 안되었을테고, 그 앨범을 손에 넣게된 계기가 재미있다. 어느날 옆집에서 대청소를 하는지 대문앞에 책과 LP판들이 수북히 쌓여있었는데, 신기한 마음에 들춰보다가 운좋게 들고온 판 중에 하나였다. 물론 아주머니한테 허락은 받았다.

어떤게 좋은 곡인지 알턱이 없는 시절에 '잡히는 대로 몇개' 집어왔는데, 그때 들고온 판중에는 파란색으로 칠해진 Brothers In Arms도 있었으니 꽤 대박이었던 셈이다. 이 80년대 팝 모음집은 내 방에 턴테이블이 있던 시절까지 꽤 오랫동안 함께했는데, 이사를 다니다가 버렸거나 잊어버렸거나 했을거다. 아쉽게도 행방이 묘연하다.

그 앨범에서 가장 좋아했던 곡이 Irene Cara의 Out Here on My Own였다. Fame에서 이 곡을 발견한 건 그 이후였을거다. 영화에서 피아노 전주가 흐를때 놀라고도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 곡이 흐르던 씬. 단단하게 피아노를 누르며 부르던 Irene Cara의 목소리는 참 아름다웠다. 풋풋한 그 시절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 그녀 나이 스물한살. 30년이 되어가는 영화지만 터질듯한 젊음은 다시 봐도 생생하다.

영화를 다시 열어, 유튜브에 올린다. 그녀 노래를 다시 들으니 그들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어디쯤 닮아있을 내 시절이 스쳐간다. 늦은 밤 탓이다. 장구, 춤사위, 가을축제. 그 팍팍한 고등학교 시절. 두드릴 장구와 부를 노래가 있어 때론 벅차던 시절. 그 젊음이 참 아스라하다. 야속하게도. 벌써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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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 위 댄스
감독 수오 마사유키 (1996 / 일본)
출연 야쿠쇼 코지, 구사카리 다미요, 모리야마 슈이치로, 타구치 히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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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Shall we dance'를 발음할때는 '쉘 위 단스'라고 말해야할 것 같다. 영화의 끝부분,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선생 마이가 스기야마에게 손 내밀며 말하던 설렘은 그렇게 말해야 다가온다. 춤추실래요. 뱉었을때 그 끝에서 맴도는 '서울의 달'의 음습함은 쉘 위 단스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따스한 볼룸에서 펼쳐지는 우아한 춤이랄까. 춤출래. 아름다운 우리말의 설렘이 축축해진 까닭은 춤이 아닌 그 너머를 꿈꾸고, 그걸 이용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자들 탓이다. 

이 영화는 공짜표로 구경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목동의 '킴스시네마'에서 나누어주던 초대권으로 늦은 시간에 영화를 봤다. 일상의 모습을, '일상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따스함이 화면가득 담겨있었다. 춤, 몸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지는 동선이 새겨지던 플로어가 생각나고 그 춤 주변에 이리저리 자리잡은 각각의 삶들도 기억난다.

누군가는 스기야마의 중년의 위기가 너무도 깔끔하게 잘 봉합되었다는 점. 아무런 불협화음없이 현실로 돌아왔다는데서 이 영화의 비현실성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물론 갈등이 없는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영화 정서와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라 보는 내내 아무런 긴장도 주지 못한다. 일종의 양념같은 느낌이랄까. 허나, 판타지를 정색하며 따질 순 없듯이, 이 영화도 그러하다. 마냥 기쁘고, 행복한 그 영화적 현실에 딱딱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도리가 아닐듯 싶다.

이 영화 보고 춤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스기야마와 토요코가 춤대회에서 사뿐히 무대로 뛰어가던 벅찬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목동역까지 걸어가는 몇분간, 절대 티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뛸듯이 지나올 정도로 영화의 리듬은 낮게 오래 남았었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서 단정하게 차려입고 춤을 추던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쿠사카리 타미요'라는 이름을 가진 극중 '마이'의 아름다운 동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볼룸댄스에 무지한 내게도 꽂힐만큼 고혹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니 몇년 후, 어느 퇴근길(노량진역쯤이면 되겠다), 학원 창문을 여는 마이의 모습이 보인다면...참으로 뻔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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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loved you so long

from 영화창고 2009. 10. 27. 10:19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감독 필립 크로델 (2008 / 프랑스)
출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엘자 질버스타인, 로랑 그레빌, 클레어 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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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은 아들을 죽인 혐의로 15년을 복역했다. 영화는 왜 줄리엣이 그랬어야 하는지 저간의 사정을 좀처럼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영화적 장치라기보다 쉽게 입밖에 낼 수 없는 가슴아픈 일에 대한 침묵에 가깝다. 그 침묵은 그 자체로 그녀를 짓누르고, 어쩌면 그녀는 그 고통을 당연히 받아야할 형벌처럼 품에 안고 살아간다. 

가족으로부터, 동생으로부터, 손에 쥐고 있었던 삶으로부터 외면당한 세월.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던 시절, 석방을 며칠 앞두고 동생이 찾아오고 뜻밖에도 동생은 함께 지내자고 말한다.

편견과 오해는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다. 노력은 하지만 쉽게 걷어낼 수는 없다. 아들을 죽인 혐의. 그녀는 지나친 주변의 편견에 저항하지도 않고 그저 감당해야할 짐을 들듯이 아들 죽인 엄마라는 시선에 몸을 내 맡긴다. 15년의 감옥생활, 어쩌면 그녀는 평생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어 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줄리엣은 동생 가족과 지내면서 점점 마음을 열게 된다.

이 영화는 아들을 위해 아들을 죽여야했던 한 여인의 적응기라 할 수도 있겠다. 내 것이 아닐 것만 같았던 따스한 삶, 벅차게 기다렸을지 모르는 생활에 다가가는 과정은 지난하다. 허나 차분히 삶에 다가설 만큼 그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연기는 표정에 긴 여백과 한숨이 있다. 아이죽인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된 사장이 그녀를 내쫓을 때 그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분노도 아니고 체념도 아닌 표정. 한마디 반항하지 못하고 뒤돌아서는 그녀. 지릿한 쉼호흡을 하게 만드는 얼굴.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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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렇다. 집청소를 하듯이 컴퓨터에 저장되어있는 데이터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 날도 후덥지근하고 이래저래 짜증도 나다보니 좀 비워내고 싶어졌다고 할까. 폴더채로 삭제를 하다가, 이 클립을 발견했다. 러브레터가 너무 좋아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모조리 찾아보던 시절. 불꽃놀이, 피크닉, 고스트스프 등등등... 러브레터와 4월이야기로 알고있던 이미지와 너무도 생경해서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만, 인상에 많이 남았었다. 초기작부터 봤더라면 그렇진 않았을텐데.

무작정 클립을 올리는데, 세세한 영화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적을 말도 그닥 없다.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이와이 슌지를 표현해주는 이미지들이 가득했었는데, 다시 봐야 겠다. 앨범 Montage가 기억난다. Yen Town Band는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밴드인데, 이들은 프로젝트 앨범 Montage를 발매했다. Chara가 멋지게 해석한 마지막곡 My Way는 원곡을 포함해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리메이크 버전이었다. 언제였더라, 락페에서 Yen Town Band의 버전을 부른 가수가 있었는데 들으면서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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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감독 강이관 (2008 / 한국)
출연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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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미안해서 내뱉는 말임이 분명하지만, 또 미안한 마음이라는 것을 상대에게 '표현'하기 위해 하는 말이기도 하다. 후자의 경우에 그 말은 일종의 자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미안해 하고 있으니 나를 그렇게 미워하지말아줘, 혹은 원망하지 말아줘라는 당부 내지는 부탁. 미안하다는 말보다 그 말을 건네면서 상대가 그 말에 고개 끄덕여줄때 비로서 나는 나의 미안함을 용서 받는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으니.  

이런 미안하다는 말이 설익은 상태일때, 다시 말해 미안하다는 말로 서로 감정을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미안하다'는 말은 도리어 핑계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말이면 다야'라는 반응. '진짜 미안하긴 한거야'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 그래서 진심어린 사과가 아닐때는 미안하다는 말은 날카로운 말보다 더 차갑고 비겁한 것이된다. 사과하다, 용서하다라는 것의 매개로서 '미안하다'는 말에는 어떤 타협이 있는 것이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고자 내뱉는 '미안하다'와 상대의 진심이 느껴지는 '미안하다'는 서로 인정할 수 있는 지점이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남녀의 관계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관계의 지속으로서의 미안하다와 관계의 단절로서의 미안하다이다. 상대가 내미는 미안하다라는 말 자체로는 언뜻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관계의 지속으로서의 미안하다라는 말로 이해하다가 결국 그것이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됐을때 상처는 쉽게 치유할 수 없게 된다. 상대가 미안하다라고 했을때 '그래, 용서하고 다시 시작하자'라는 내 마음. 그건 너에게 아직 돌아서지 못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더이상은 안되겠어. 이제 그만하자. 그 차가운 말이 남기는 생채기는 지독히도 오래 간다. 사랑의 지속이 아닌 단절로서의 미안하다는 말은 결코 미안한 맘을 전달하기위한 말이 아니라 그저 너의 자기 위안의 말일 뿐이다. 설령 너의 본심이 그게 아니었다 해도, 나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없다.

민석이 이미 결혼한 현정 앞에서 그때 헤어지지고 해서 미안했다는 말. 현정에게 거짓말하고 구미로 내려와버린 상훈의 미안하다는 말. 민석과 다시 만나며 건조한 키스를 나누고 난 뒤 미안해, 그만하자라는 현정의 말. 끝장면. 이혼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침대맡으로 찾아든 상훈에게 미안해라며 속삭이던 말.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 말끝의 침묵. 체념하는 표정들. 결국 그 말 뿐인 것을. 달라질 것 하나없는, 풀 수 없는 매듭을 앞에두고 칭얼대는 일인 것을.

사과. 200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 서늘하고, 차갑다. 그 이유는 현정의 사과가, 상훈의 미안하다는 말이, 민석의 미안했어라는 말 모두가 관계의 단절을 예비하는 지점에서 터져나오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건 상대에게 미안함을 전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위안으로서의 사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 이미 마음은 떠났고,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의미없는 지점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공허한 울림이 된다. 그 말은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지점에서 나오고,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은 어떤 뜨거움 없이 무기력하다.

어쩌랴, 미안하다고 말해야하는 그 순간에는 이 말 밖에 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이 비록 이제 그만하자라는 의미라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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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는 오지 않는다

from 영화창고 2009. 5. 8. 11:35

 

최근에 종종 사람들은 베케트가 자신의 구상을 반복 사용한다는데 대해 비난해왔다. 그는 도발적으로 그런 비난에 자신을 내맡겼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그의 의식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의 전 작품을 꿰뚫는 근본 형상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는 제스처는 이런 상황에 대해 꼭 들어맞는 반응이다.
Theodor W. Adorno - Asthetisch Theorie (미학이론 중에서)


나에게 사무엘 베케트라는 이름은 먼저 아도로노의 언급속에서 다가왔다. 아도르노가 진리의 마지막 도피처나 화해의 장소로서의 진정한 예술을 거론할 때 베케트의 이름은 빠짐없이 등장했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진정한 예술은 철저한 내적 형상화가 되어야 하며 또한 가장 진보된 의식의 예술이어야 했다. 베케트의 연극이 그가 말하는 그러한 진정한 예술인지 과연 어떠한 '현혹연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예술인지 난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펴보았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절대 끝장까지 읽을만한 참을성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고, 결국 지극히 피상적인 몇가지의 단어만이 남아있었다.

 

내가 아는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소위 부조리극이라는 작품을 썼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피상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는 유효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무런 사전지식없이 그렇게 멋모르게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고도'를 내 살에 와닿는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분석해야할, 또 미학적 측면에서의 의의를 논해야할 위치에 있었다면 난 그렇게 쉽게 산울림 소극장에서 재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추운 겨울날 설레이는 마음으로 찾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 연극을 보고난 뒤 한가지 마음에 와닿았던 것도 예술이라는 장르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내 삶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에 대한 막연한 고민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문학이든 영화든 연극이든 음악이든 간에 작품과 나사이의 본질적인 대화를 넘어서는 담론은 의미가 없다. 그 담론이 나의 경험, 나와 작품간의 대화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 3자의 이해를 바탕으로한 (소위 비평이라는) 담론권력 그 자체로서 다가올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작품이 어떠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고, 또 자명하게 어떠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감상과 이해를 바탕으로 내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후의 논의나 생각은 왜곡의 가능성을 지닌다. 그것은 바로 나와 작품간의 왜곡이다. 결국 작품에서도 주체적이지 못하고 그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도 주체적이지 못하게 되는 이중의 함몰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주변의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사고 작용 이전에 다가오는 본질적인 1차적 반응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난뒤 내 삶에 의미있는 것들을 찾아보려하고 내 삶에 적용시켜 보려하는 것도 결국 그 영화가 내 삶과 나라는 존재를 감응시키는 직접적인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동에는 다른 사람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전적으로 나와 영화간에 발생하는 지극히 순수한 만남이어야 한다.

 

내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에 대한 글을 쓰려하고 또 그러면서 그 연극에서 나 나름의 의미를 찾고 되새겨 보는 이유도 그 조그마한 극장에서 나와 작품이 만난 그 순수한 순간이 내 삶과 나를 분명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 극장에 들어선 순간 난 되도록 사무엘 베케트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지우려고 애썼으며, 또 그 이름을 둘러싼 다른 많은 이들의 판단과 평가를 버리려고 애썼다. 그 연극과 내가 만나는 그 자체를 간직하고 싶었고 그러한 일들이 의도적인 행위였다기 보다는 무대의 막이 오른 후에 무대를 바라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되는 일들이었다. 결코 단언하지만 그 무대위 배우들의 몸짓에서는 단 한번도 부조리라는 언어가 보인적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고도'를 보려고 마음 먹은 뒤에 걱정스러웠던 점은 내가 연극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연극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어서 내가 과연 연극과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경우에 카메라 자체가 사물과 사건에 대한 시선이기 때문에 내가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은 한번 걸러진 시선을 다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화면에서는 내 시선이 가야할 곳과 내가 영화에서 중점을 두어서 볼 곳들이 쉽게 드러난다. 화면도 드러나야 할 것들을 드러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 드러나야 할 것을 중심으로 구성되게 된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주 편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어디를 봐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고서 난 조금 당황했다. 어디를 응시해야 하는가, 어디를 보아야 극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가 명확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말하고 있는 배우를 쳐다봐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 사람의 손짓을 봐야 하는지 얼굴을 봐야 하는지 그 사람의 동선에 시선을 둬야 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배우를 봐야 하는지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봐야 하는지...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게 참 어려웠다. 최소한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어떠한 행동이든 하고 있었고, 그것들이 분명히 소홀히 될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난 곧 무대를 내 삶의 공간으로 바라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그냥 바라보면 된다는 것을...나에게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되는 것은 유심히 바라보고 내가 판단하는데 중요하지 않거나 일부러 보기 싫은 것들이라면 외면하면 된다. 나에게 연극무대가 특이하게 다가온 점은 우리의 삶처럼 내 시선이 닿는 곳, 내 생각이 머무는 곳이 나에게 진정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간단하다. 보고 싶은 곳을 바라보면 된다. 영화와는 다르게 대상에 대한 한번의 걸러짐을 내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과 수용이 가능하다는 능동성을 무대를 바라보면서 했다. (물론 이건 무대에 올려진, 또 카메라로 찍히기 이전의 연기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 특이했던 점은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연극은 지금 이순간 이 극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유일한 연극이라는 점이다. 물론 같은 내용을 오랜 시간 공연하고 수많은 연습을 통해서 그 극의 차이점은 적겠지만 그래도 미세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지금 그 연극은 유일한 것이고 결코 다시는 똑같이 재현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연극의 중요 구성요소 중에서 관객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을 봐도 즉 그 관객의 존재가 극을 이룬다는 것을 봐도 지금의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나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은 결코 다시 같은 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멋진 것이었는지 모른다. 보는 순간 다시 반복되지 않고 지금 이순간 사라지고 있는 거라는 것(어쩌면 삶의 매순간이 그렇듯이), 무척이나 특별한 경험이 아닌가?

이번 산울림의 '고도' 공연은 도코초청 공연을 기념하는 귀국 공연이었다. 평일에는 7시 공연을 했는데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보조석에 앉게 되었다. 약 75석을 구비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매를 해야 평석에서 볼수 있을만큼 성황리에 공연중이었다. (4월까지 연장공연을 한다.) 근데 보조석이라는 것이 무대 뒤편의 구석진 자리가 아니라 제일 앞줄이었다. 앉는 데는 조금 불편했지만 배우들이 관객쪽으로 조금만 다가오면 그들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온기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였다. 어느 곳에서 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거리상의 근접성으로 인해서 무대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면이 부족했고 또 내 시선쪽으로 배우가 가까이 서면 시선 끝에있는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 연극이 극단 산울림의 대표작이고 그 극단의 처음 작품이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연극은 이 산울림 소극장에서 몇번에 걸쳐서 되풀이 올려진 극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공연과정에서 보다 우리의 말과 생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번역후의 초기 상연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이질감이 공연을 거듭하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언어로 가다듬어졌을 것이고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각색되고 수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느정도 연륜이 쌓이고 가다듬어진 극을 이제서야 처음 볼 수 있다는 것은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흘깃 팜플렛을 보니 제법 국제연극제에도 많이 참가했고, 국내외 많은 공연을 거듭한 작품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공연전에 외국인들이 산울림의 '고도'를 평가하는 글을 읽어봤는데 그들이 한결같이 원작에 충실하다는 말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재미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반응들이 었는데, 나도 연극을 보는 중간에 지루하지 않고 참 재미있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짧은 생각으로는 원작에서 많은 부분 벗어나 있지 않은가하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런 판단에는 어렵고 훌륭한 것은 즐겁지 않다는 지극히 편협한 선입견이 작용되어 있는 것이리라. 분명 연극으로 보는 '고도를 기다리며'와 수많은 비평과 책속에서 보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술작품의 감상에 있어서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된 처음에서 생각해야 진정한 감상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 된다. 만약 내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극을 보지 않고 글로서 평론으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난 고도를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보다는 심오한 철학과 형식적인 차원의 부조리로서 인간의 문제를 건드린 그러나 재미없는 어려운 극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베케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오. 그러나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많은 부분 우리는 극장에서의 경험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집에 돌아가서 해야할' 인생에 대한 생각을 그 작품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 작품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전자의 직접적인 경험이 더없이 중요한 경우가 많다. 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의 '생각'은 의미가 없다. 이건 내 스스로도 깊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원작의 본래 뜻을 살리면서 그 안에 연출가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담아낸 연극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한가지 예로서 무대에는 조그마한 언덕과 그 위에 이상스레 휘어진 나무 한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사실 베케트의 연극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나무의 형상을 지시한 점은 없는데 연출가 임영웅은 한 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무의 형상이 한국의 '소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극중에서 그들이 '목매달아 죽을까'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못내 우리의 한을 떠올리게 한 이유도 그러한 '소나무'가 주는 감정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연극을 거쳐간 배우들도 익숙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이번연극에서 안석환이 분한 에스트라공 역할을 바로전에는 '송영창'이 했다는 점도 이색적이었다. 극 전반에서 느낄 수 있었던 에스트라공의 느낌은 익살스럽고 애처롭고, 때로는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어쩐지 내가 알고 있는 송영창의 모습과는 일치되는 면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극중 포조는 김명국이 맡았는데(맥도날드 CF에서 나오는 아저씨) 평소 광고에서 보이는 면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 참 독특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그런 기존의 이미지가 유발하는 웃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알고보니 그도 연극무대에서는 잔뼈가 굵은 배우인듯 했다. 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포조역으로 여섯번째 출연을 한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눈앞에서 직접 보니 그는 무척이나 커보였다.

 

연극은 2중주, 혹은 4중주라는 말이 있듯이 철저히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포조, 럭키 4명의 떠나지 못한 자들의 지겹고 되풀이되는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연극에서 상연되는 부분은 단 이틀간의 이야기이지만 극중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단순히 그들은 이틀동안에 그곳에서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 둘이 처음 만난 그 몇십년전부터 계속 그 자리에 있어왔고 또 앞으도도 몇 년간 계속 있을 것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그렇게 많은 시간동안 덩그라니 하나의 나무가 자리한 그곳에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그 고도는 내일 오겠다는 약속만을 계속 할뿐이지만 결국 그들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지루한 기다림(어쩌면 인간 본질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을 덜기위해서 그들은 수많은 언어를 내뱉으며 어쩌면 아주 바보 같은 동작을 열심히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의 기다림 속에 포조와 럭키라는 주인과 노비관계의 둘이 등장한다. 이들이 어떤 상징적인 함의를 가지든 간에 그들도 마찬가지로 계속 그자리에 맴돈다. 권력관계를 암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포조와 럭키의 등장은 내가 느끼기에 극에 큰 활력이 되었고 또 이들의 이튿날의 반복된 등장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극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는 기다림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든 아니면 어떠한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든 아니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어떤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든 본질적으로 그들은 계속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그 기다림의 대상, 그들이 그토록 오도록 바라는 존재가 올 것인지 그러면 그렇지 않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데서 이들의 기다림은 비극적인 것이고, 또 불안한 것이다. 그 기다림은 기나긴 시간속에 걸쳐있으면서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난 그들의 기다림을 결코 능동적인 것으로 볼 수 없었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듯이 그들의 기다림은 주어진 것이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도 모를 그 기다림을 숙명처럼 받아안으면서 그들은 또 하루를 살아나가고 이전의 하루를 살아왔다. 이 점에서 시간은 무의미 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 한 것이 되고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흔히 말하듯이 희망적이고 진보적인 삶의 동력이 아니라 지극히 비관적이고 다를 것 없는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다. 난 이점에서 고도의 정서를 동양적인 정서로 보고 싶었다. 이것은 과연 '고도'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나 자신의 판단과도 연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고도'에서 보이는 기다림은 한점과 한점 사이에 걸쳐있는 진행이 아니라 한점에서 한점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런 순환의 기다림의 경험은 그들 넷만의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것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본다.

 

이튿날 그들은 블라디미르를 제외하고 그들이 그 전날 만났다는 것도 또한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어떠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까마득히 잊고 만다. 오직 블라디미르 만이 그 반복, 망각의 경험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전날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뒤집어 쓰고 폭포수 같은 언어를 내뱉은 럭키는 다음날 원래 벙어리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포조 또한 눈먼 장님으로 등장한다. 내가 느끼기에 전날의 그들과 다음날의 그들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동일한 감정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공유할 기억이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하루간의 차이를 조금 확대시켜본다면 그 '기다림'은 인간의 보편적인 숙명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였을 뿐이고, 그 이튿날 나타난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또하나의 존재라는 것이다. 시간을 평행적인 것으로 그래서 전과 후가 있는 일률적인 흐름으로 본다면 그들은 다시 그자리에 설 수 없고 그 지겨운 기다림도 결국 만남이라는 보상으로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다림'이라는 것이 삶의 본질적인 한 측면을 나타내 준다면 그것은 나의 삶에서도 그렇고 너의 삶에서도 그렇고 이전세대에서도 그랬고 이후 세대에서도 그럴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인간이 지녀야하는 본질적인 기다림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그렇게 지겨운 시간의 흐름속에서 기다려온 기다릴 고도는 무엇일까? 이런 고도에 대한 판단이 내 삶에서 이 연극이 의미를 지닐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한다. 앞서 말했듯이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가 너와 나의 보편적인 경험이라면 그 고도를 자리매김하는 것이 삶에서 좋은 시사점을 줄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도의 의미는 절대시간, 즉 시간의 종말이다. 헤겔의 의미에서 말한다면 절대정신, 혹은 세계정신일 수도 있고 맑스의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가 완벽한 사회로 상정한 공산사회 같은 것을 말할 수도 있겠다. 즉 내가 말하는 것은 시간의 끝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시간의 흐름이 필요없는 어떠한 상태, 즉 더 이상의 기다림이 필요치 않는 완전한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라는 존재일 수도 있다. 불완전한 신이 아닌 완벽한 해결을 지향하는 존재로서의 신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의 의미는 흔히 말하는 구원자나 어떠한 희망의 의미로서의 신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즉 '고도'를 현재 삶의 조건을 해결해줄 구원자, 현재의 기다림을 보상해줄 존재로서의 신보다는 어떤 완전무결한 상태로서의 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발전사관에서 말하는 완벽한 개념체로서의 신, 선형적인 인류발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모순이 배제된 개념으로서의 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신 개념은 서양역사가 상정하는 발전의 끝에 존재하는 상태를 포괄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도'는 올수 없다. 절대로 고도는 나타날 수 없고 고도는 우리의 기다림을 해소해 줄만한 존재로 우리에게 등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고도는 없었고, 있지 않았고 그건 우리의 삶, 즉 본질적이고 숙명적인 기다림(기다리기만 하는 삶)을 해결해줄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 개념적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를 상정해놓고 삶의 기다림의 끝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 '고도'를 기다리는 인간의 삶, 오지도 않을, 올 수도 없는 그 '고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삶은 비극적인가? 무의미하고 지겹기만한 삶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본질인가? 그렇지 않다. 고도라는 존재,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어디로 향해갈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버리면된다.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올지도 모르는 또 온다고 하고는 수없이 많은 날을 오지않은 그리고도 또 온다고 소년을 통해서 거짓말을 할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왜 우리 삶속의 기다림을 기다림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렇게 수없이 많은 날들이 반복되어 왔다면 그 기다림을 인정하고 그 기다림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기다릴 것이 없다면 기다림의 무의미한 반복도 없을 것이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는 그 언덕에서 시간을 죽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기다리지 않고도 그들의 삶 자체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극속의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면서 언젠가는 그들도 '고도'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난 베케트의 소박한 희망을 본다. 그는 우리 삶과 역사에 존재하는 막연한 기다림, 기다림의 대상을 위한 삶이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결국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살아온 삶의 의미는, 내 눈앞의 무대에서 펼쳐졌던 그들 삶의 의미는 '고도'를 기다리는 그 지겨운 반복의 과정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의 진정한 삶일지 모르는 '기다림'을 둘러싼 그들의 하루하루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들도 '고도'라는 존재보다는 하루하루 그 언덕에서 내뱉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들의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내가 연극을 보면서 '고도'라는 존재에 대한 궁금함과 언제 올것인가 하는 기다림보다는 그들의 말과 행동, 그들이 했던 과정들에 기쁨과 감동을 느꼈던건 그게 그들의 진정한 삶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시 만난 기쁨으로 두팔을 벌려 찐한 포옹을 나누는 그 장면에서 난 우리의 삶을 보았다. 결국 우리 삶은 끈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려야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가 그 기다리는 존재로서 규정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들의 삶이 '고도'로서 정해질수 없는 것과 같다. (그들 삶에 등장하지 않았던 직접연관이 없는 '고도'라는 의미에서) 그것 보다는 기다림 그 자체, 그게 우리 삶이고 무의미한 기다림이 아니라 너의 삶, 나의 삶, 그리고 또 앞으로 다른 삶을 살아갈 사람들의 삶의 의미이다. 그것은 헤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반복되는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하루하루의 고민속에서 가치를 가지는 우리 삶의 솔직한 모습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아도르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진정한 예술로 본 것은 그런 역사진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진보의 논리를 넘어서는 점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것 보다는 인간자체의 문제들, 개별자의 아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화해를 '고도'를 기다리는 네명의 삶에서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도르노 자신도 인간의 역사가 진보한다는 어쩌면 당연시되는 사관에서 자유롭고 싶었고 그 비인간성을 반성하고자 노력했던 점에 비춰보면 이러한 나의 성급한 생각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러한 격찬이 '고도를 기다리며'가 가진 이야기가 자체 뿐 아니라 기존의 형식을 넘어서는 반 이성적인 반 구성적인, 또 극단으로 치달은 논리의 부정적 기능에 대한 연극의 틀에 방점을 두는 것이긴 해도 말이다.

 

인상적으로 연출된 달밤의 어스름속에서 극이 끝나고 시계를 보니 7시에 시작했던 연극이 9시 4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중간 5분간의 휴식 속에서 내가 텅빈 무대를 응시하며 조금전까지도 꽉차있던 무대를 떠올렸을 만큼 '고도를 기다리며'는 참 아름답고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내가 처음에 걱정했던 '연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낯설음이 기우였던 것이 여실히 드러났고 결국 어떤 예술 장르나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삶을 얘기하는 것은 감동을 줄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좋은 연극을 만들어가는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다음번에 다시 '고도'를 기다릴 때 다시 그들의 기다림을 애정을 갖고 보고 싶다. 그건 결국 내 삶을 바라보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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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2004 / 미국)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버논 도브체프, 루이즈 르모이네 토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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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영화를 본다. 왜 다시 꺼내보았는지 말하고 싶진 않다. 영화란 그런것이니. 마음 한구석 원했을거다. 속편 개봉 소식을 들었을때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 봤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9년의 단절쯤은 아무것도 아닐거라 생각했기에 그들이 처음 만난 시점부터 다시 따라가고 싶었다. 그들이 함께 눈뜨던 어스름 공원처럼, 나 또한 새벽을 채우며 비포 선라이즈의 엔딩을 봤을때, 맘은 얼마나 뜨거워졌던가. 서로에게 남아있는 짧은 시간. 그 사이를 채우던 감정. 그들이 다시 만나기를 바랬기에, 그들의 재회가 너무도 궁금했다.

영화의 시작. 서점씬. 셀린의 얼굴이 보이자 제시는 당황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뛰어나가길 바랬지만, 제시는 행사를 대강 마무리하고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hi", "hello", 9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건조한 인사들. 이런. 이게 뭐야. 뜨겁게 포옹이라도 해야지. 비포 선셋을 보던 20대의 끝무렵, 난 그들의 뜨거운 재회를 원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으며, 재회란 휘발되지 않은 감정을 되살리는 생생한 어떤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이 속편은 '사랑, 그 후'가 아니라 '추억, 그 후'를 말하고 있다는 걸.

깊은 고민없이 걷는다. 망설임은 별로 없다. 서로의 일상에 고개 끄덕이고, 기억을 조용히 보듬으며 말을 이어가는 그들. 그게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그들만큼 나이들었기 때문이겠지. 그렇겠지. 스무살이었다면 더 뜨겁지 않아서 아쉬웠을테지. 다시 만나서 처음 만날 때 만큼의 열정으로 부딪힌다면 어떻게 견뎌낼수 있을까. 그들이 되새기며 확인했던 것처럼 추억은 감당할 만큼만 아름다운 것이니 말이다.
  
Memory is a wonderful thing, if you don't have to deal with the past.

파리의 햇살, 카페, 공원. 삶. 제시와 셀린의 로맨스는 6개월과 9년 사이 어딘가쯤에 놓아둔 것 같다. 건조하고 차분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6개월 후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정이 있었고,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기다렸니. 왜 나오지 않았어, 너를 찾아 헤메였어라고 말하지만, 그 뿐이다. 어긋나버린 운명을 나무라지 않고,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에 눈물 흘리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히 지나버린 추억을 더듬어 갈 뿐 추궁하지 않는다. 한다해도 어쩔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나이니까. 이야기가 놓이는 화면은 무디고 건조하다. 그래서일까. 제시의 고백은 내뱉기까지의 망설임이 느껴진다.

- (Jesse) In the months leading up to my wedding, I was thinking about you, all the time.
  I mean, even on my way there...
  I'm in the car, and a buddy of mine is driving me downtown, 
  and I'm staring at the window...
  and I think I see you. Not far from the church, right.
  Folding up an umbrella, and walking into a deli, on the corner of 13th and Broadway.
  And I thought I was going crazy, you know?
  But now I think it probably was you...

- (Celine) I lived on 11th and Broadway.
- (Jesse) You see.

그래, 왜 생채기가 없었겠는가. 마주선 지금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운 시절은 아닐지 모르지.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조금 무뎌졌을 뿐이지 왜 아프지 않을까. 아득하지 않을까. 그런 제시에게 나 또한 그리웠노라고 셀린은 바로 답하지 않는다. 영화 끝무렵, 끝도 없이 이어지던 말 대신 동화같은 노래로 그녀는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제시와의 아름다웠던 그 밤을 노래하며. 이 노래는 그저 'Waltz'에 대한 노래라며. 




말의 성찬. 아무나 붙잡고 볕좋은 벤치에 앉아서 실컷 수다를 풀고 싶을 만큼 언어는 풍성하다. 말은 서로 어긋나지 않고 끄덕임 속에, 응시 속에, 짧은 긍정의 단어 속에서 차분히 자리잡는다. 그러고 보면 할말이 남아있다는 건 얼마나 벅찬 일일까. 9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마주섰음에도 어색하지 않게 재잘거리며 재회할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해 말이 통한다는 건.

물끄러미 앉아 그들의 얘기를 마저 듣는다. 이렇게 할 얘기가 많으면 좋을텐데. 그리워, 보고싶었어. 사랑했었어. 기다렸었어. 내뱉은 말끝의 어색함이 두려운 뜨거운 말들, 그래서 공허할 말들로 채우지 않고 살아온 이야기, 하는 생각, 주변이야기로 그간의 그리움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참 멋지다.

왈츠에 대한 노래가 끝나고 제시가 가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걱정하는 것일까 아쉬워하는 것일까 의도를 할 수 없는 셀린의 말. "아마, 이러다간 너 비행기를 놓치고 말거야." 다시 이별하며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이 느껴질때, 제시는 묘한 표정으로 셀린에게 대답한다. "알고 있어".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를 덮어둔채 영화는 끝난다.

- Maybe. you are gonna - miss - that - plane!
- I know.

질문은 다시 반복된다. 제시는 비행기를 탔을까, 타지 않았을까. 아니면 다음 비행기를 탔을까. 알 수 없다. 게다가 속편은 더이상 없을 것이니. 그러니 그저 "알고 있어"라는 제시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짐작해볼 뿐이다. 또다시 반복되는 질문. 답은 어디쯤에 있을까. 있기는 한 것일까.

셀린의 집으로 가는 차 안. 격하게 감정이 부딪히는 장면. 9년이 지난 그들의 삶은 쉽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때 만났으면 어땠을까." 힘든 결혼생활, 꿈, 셀린에 대한 그리움. 눈물이 맺히고, 조용히 듣던 셀린은 살짝 손을 들어 제시를 만지려 하다, 결국 손을 거둔다. 느껴지는 감정의 결. 나만큼이나 힘들었던 너의 삶. 너도 힘들었구나. 그렇게 위로한다. 그 걸로 된거다. 또다시 만났을까. 모르겠다. 제시를 향해가던 떨리는 그 손이, 반복되는 질문에 대한 그들 나름의 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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