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이스

from 생각창고 2014. 8. 13. 09:17

티스토리 아이폰앱이 새로 출시됐다. 깔아서 둘러보고있는데 여타 모바일 SNS 같은 가벼움이 느껴진다.

피시화면이 펼쳐지는 블로그의 무거움탓에 일상의 가벼운 얘기를 적기 부담스러웠는데 이정도라면 해볼만하다 싶다.

모바일은 주로 소비를 위한 디바이스다보니 역시나 접근성과 편리함이 생명이다.

,

온라인 게임 속 세계의 종말이라는 글을 읽었다. 서버가 꺼져가는 그 순간에 게임속에서 삶의 일부를 놓아두었던 사람들은 조용히 모여 종말을 기다렸다. 그동안 나누었던 기억들을 함께하며 끝을 기다리는 이들. 서비스를 중단하는 온라인 게임 서버에 플러그가 뽑혀지는 순간이 우리 삶이 통째로 날아가버릴 '종말'과 같을 수 없겠으나, 어쩔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 체념하거나 먼저 무너지지 않고 서로 마주하며 가까운 사람들과 채워왔던 '추억'을 되새겼다는 관찰은 그 의미가 가볍지않다.


함께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제는 사라져가는 현실 앞에서 그것이 아름다웠고, 즐거웠으며, 행복했다는 회고가 그 절망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되었을 것이다가 아니라 그것 말고는 단절을 마주 볼 수 없다는 것이 맞겠다. 상상해보라. 삶은 그래도 아름다웠노라고, 내 삶에 씨줄 날줄로 단단히 엮여있는 사람들과 기억에 미소짓는 것. 그렇다면 종말이라도, 담담해질 수 있을 것 같다.

,

베이징 이야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린위탕 (이산, 2001년)
상세보기

8월1일 일반에게 공개된 광화문 광장의 모습을 보고 건축가 승효상은 경향신문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적으로 광장 사면이 차로로 둘러싸인 광장은 거의 없습니다. 이건 도로의 중앙분리대지요. 고립된 섬을 어떻게 시민들의 일상화된 삶이 묻어나는 광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광장은 익명의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자유로이 공동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목적이 있지 않으면 접근하기 쉽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다. 사진을 한번 봐라. 씁쓸하기 그지 없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자들이 만들어놓은 광장이다보니 광장은 광장이 아니고 기형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사진으로 봐도 광화문 광장은 '세계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냉소적인 별칭이 아주 잘 어울린다. 매일 출근길에 지나치지만 밟아보진 않았다. 공간배치나 네이밍이 풍기는 거북한 ''의 냄새탓에 앞으로도 가지 않을 것 같다. 광화문 광장은 광장이지만 사람을 모이게 하지 않고 밀어낸다.

이런 조잡한 상상력이 서울 한복판에 구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도시계획이 도시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없이, 그저 자신의 치적의 하나로 굵직한 흔적을 남기려는 천박함 때문이다. 주어생략이 실행한 청계천 이벤트를 기반으로 한 청와대 입성기를 너무 감동해서 보신 까닭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 싸지른 흔적이 자신이 숨쉬는 동안만 남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살아갈 도시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는 점이다.

린위탕이 베이징 곳곳을 애정어린 숨결로 보듬어 놓은 베이징 이야기의 첫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도시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인간은 짦은 순간 왔다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래서 모든 도시는 한때 그곳에 살았던 인간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p8


그렇다. 도시는 영원히 존재한다. 인간은 그 도시에 자신의 삶을 잠시 풀고 스쳐지나갈 뿐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도시에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울은 그곳에 살았던 인간보다 위대하다. 官에 의해 진행되는 빈약한 상상력의 도시 프로젝트들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도시에 녹아들지 않은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철거대상이 될 뿐이다. 세운상가가 그렇고, 하나둘 철거되고 있는 서울의 고가다리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나저나 이 도저한 삽질을 막아줄 영웅은 결국 시간 뿐인가 보다.



,

아버지와 김대중

from 생각창고 2009. 8. 19. 11:25

1. 어린시절 일이다. 매년초가 되면 학교에서는 일종의 '호구조사'를 했다. 아버지 직업은 뭐고, 본적은 뭐고, 집은 자가인지 전세인지 같은...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조사였지만 새로 배정받은 담임에게 나의 물적토대를 다 까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으며 이유없이 부끄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런 정보가 그 아이를 '교육'하는데 어떤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담임의 어떤 차별적 시선에 영향을 미쳤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때 다른 항목도 그랬지만, 본적란을 쓰는데도 머뭇거리곤 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전남 영광이었고, 나의 본적도 전남 영광이었다.

2. 87년이었나, 상도동에 살때 동네가 들썩인 적이 있었다. 동네 이곳 저곳에는 김대중 후보의 유세를 알리는 벽보가 나붙었다. 장소는 개장한지 1년남짓 되었던 보라매공원이었다. 아버지는 들떠 보였다. 그날 아버지는 어린 내 손을 끌고 유세장에 갔다. 소풍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물과 도시락을 싸주었다. 선거유세에서 동원된 인원이 그 후보의 지지세로 환원되던 그 시절. 난생처음보는 사람들 물결, 노란색 깃발들.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던 김대중의 목소리. 생경한 이미지들이 계속되었고, 난 아버지의 그런 열광을 이해하지 못했다.

3. 몇해 뒤, 아버지는 나의 본적을 서울로 옮겼다. 새학년이 시작되던 날, 아버지는 본적란에 써넣을 주소를 알려주셨다. 왜 옮겼냐는 질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때 본적이 전남으로 되어있으면 불이익을 받는다기에 그렇게 했다고 하셨다. 그깟 본적을 옮기는 일이 뭐 대수라고, 세상이 예전과 달라 그런 호남차별을 하지는 못할 거라 얘기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순진하다고 말했다. 아직 세상이 그렇지 않다고. 여소야대 정국을 뒤집어버린 3당합당이 있었고,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시절이었다.

4. 아버지에게 호남은 드러냈을 경우에 받게될 불이익으로 인해 감추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목소리를 그나마 대변해 줄 김대중에 대한 심정적 지지는 깊어졌다. 지역을 삼분할 했던 3김 정치의 한가운데에 김대중이 있었다. 김대중도 자신의 지역적 기반을 자산으로 삼기도 했으나 그는 적극적으로 이용했다기 보다 지역주의의 피해자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호남출신이라는,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을 안고있는 한계로 인해 김대중은 폄하되고, 좌익용공으로 덧칠해졌다. 호남은 헤게모니 싸움에서 철저히 소외되었고, 정치적 필요에 의해 호남고립론은 심화되어갔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김대중을 사랑했고, 신문을 보며 욕을 내뱉는 일이 잦아졌다. 그를 열렬히 지지해주는 호남사람들로 인해 김대중의 정치적 스탠스는 오히려 좁아졌고, 그를 내내 붙잡았다.

5. 서경원방북사건으로 안기부에서 구인장을 발부했을때, 김대중은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검찰출두 장면이 TV에 방영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동교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두를 결정했을때, 그가 자신의 집 앞에서 검찰로 가는 차에 올라설때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내 눈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최초의 눈물이었다. 검찰조사를 하러 차에 오르는 그의 기우뚱한 모습. 아버지가 왜 그리도 서러운 눈물을 흘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즈음 나에겐 김대중 자신도 처참한 시대상황의 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해주었냐고 묻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6. 김대중은 내 손으로 뽑은 최초의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을 뽑았을 때처럼 세상이 바뀔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뛸듯이 기뻐했다. 날밤을 세우며 개표방송을 지켜보셨고, 신문을 뚫어져라 읽으셨다. 혹처럼 달고있던 김종필.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외환위기가 잦아들 무렵, 권력분배 문제가 점차 수면위로 올라섰고, 잡음은 계속되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절름발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김대중은 그가 지닌 한계를 행동을 통해 이겨냈다. 그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가장 많은 대통령이었다.

7. 그가 세상을 떠났다.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는다. 허나, 시대가 그를 너무도 폄하했기에, 그가 가진 가치를 온전히 바라보지 않았기에 그 억울한 마음을 역사에 돌리고 싶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삼키기 힘든 가시를 비루하게 맘에 새긴다. 그의 서거소식을 지켜보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긴 울음을 우셨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김대중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기에, 선뜻 전화드리지 못했다. 내가 느끼는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한다.





 
,

[릴레이] 나의 독서론

from 생각창고 2009. 6. 18. 18:35

블로그의 인간관계도 내 주변의 인간관계를 닮아서 이런 릴레이에 걸릴일이 그동안은 없었는데, 다행이 리스군님이 바톤을 넘겨주셔서 감사히 몇자 적어봅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잠시 잠수중이었는데, 리스군님덕에 빼꼼히 물밖으로 나오게 되네요. 그것도 또한 감사를. :)

근데 덜컥 바톤을 받긴 받았는데, 주제가 무겁네요. 깊이 생각해야 몇자 끄적일 수 있을만한 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사실 생각많이 못하고 몇자 끄적인다는 핑계일수도. 내일 비가 예정되어있다는데 지금 보이는 하늘은 참, 따뜻하네요. 책 생각하기 좋은 순간인 듯. 자, 그래서 잡설은 그만하고 진도 나갑니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리스군님에게서 받은 릴레이

1. 나에게 독서란 [그에게 말걸기]이다.

독서가 일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제 손에서 놓을 수는 없네요. 말할 사람이 많고, 들어줄 사람이 많았을때는 독서를 소홀히 해도 괜찮지 않았나 합니다. 두툼한 책 한권보다 잠깐의 대화가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곤 했으니까. 오히려 그들과 더 열심히 말걸기 위해 독서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나에게 독서란 좁게는 책을 쓴 사람에게 말거는 일이고, 나아가 책이 다루는 사람들, 혹은 현실과 소통하기위한 '말걸기'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들은 들을 수 없겠지만, 한줄한줄 읽으며 때로는 반박하고, 때로는 공감하며 책장을 넘기곤 해요. 그래서 나에게 독서란 불완전한 대화이고, 어쩔 수 없는 말걸기입니다.

2.앞선 릴레이 주자

- Inuit님 (http://inuit.co.kr
- buckshot님 (http://read-lead.com/blog)
- 고무풍선기린님 (http://withthink.textcube.com)
- 에고이즘님 (http://blog.naver.com/ddinne)
- 류한석님(http://www.peopleware.kr)
- mahabanya님 (http://mahabanya.com)
- 어찌할가님 (http://eozzi.textcube.com)
- 김젼님(http://scat.textcube.com
- 누님(http://masquera.net
- astraea님(http://withstory.net)
- 블루윈디님(http://bluewindy.com)
- 네코야마님 (http://nekoyama.tistory.com)
- 령주/徐 님 (http://moodsyndrome.com)
- 딸기뿡이님(http://moongsiri.tistory.com/)

3. 릴레이 받으실 분


이 글을 보신다면 적어주시면 좋겠어요. 못보신다해도 원망 안할게요. :)




,

살인이 별게 아니다.

from 생각창고 2009. 5. 28. 09:39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전 몇달. 뉴스를 외면하고 살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지경이었구나.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어줍잖은 블로그에 상처받는 댓글하나 달려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데 이 걸 두눈뜨고 보고 있었다면 어떤 심정이었을지. 잔인한 호러영화를 보듯이 너무도 참혹해서 도저히 끝까지 보기가 힘들다. 신경무란 작자의 만평을 막판 반전까지 끝까지 보면 이게 정말 일간지 만평이 맞는지 뒷목잡게 된다. (예전 글에 PTSD증후군이라고 말했었는데 증세는 악성이 된듯하다.)

우린 이런 찌라시가 언론행세를 하는 비극적인 나라에 살고있다. 살인이 별게 아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유시민 전장관이 말하듯이 정권, 검권, 언권에 서거 당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언권의 중심에 조선일보가 서있다. 이들을 정말 어찌해야 하나.




,

결국 MOT의 노래를 꺼내들었다. 잠들 수가 없다. 1집에 실린 '나의 절망을 바라는 당신에게'를 듣는다. 노무현이 그에게 치명적인 흉기를 들고 달려들던 이들에게 이 노래를 돌려줄 만큼 냉혹한 사람이었더라면 그리도 허망하게 가진 않았으리라. 견딜만큼, 견뎌낼만큼 그는 강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견뎌낼 수 없었으리라. 

대한문에 가지 못했고, 봉화마을에 가지도 못했다. 그는 참혹한 언어로 끝끝내 '나를 버리라'고 말했지만, 난 그를 버리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지켜주지도 못했다. 버려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단호하게 버리지 못한것이 잘못일까. 아니다. 이리도 눈 붉히며 잠들지 못하는 까닭은 항상 바보처럼 우리를 짝사랑했으나 단 한번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못했던 후회 때문일거다. 이 야만의 대한민국에서 나 또한 야만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쳤다. 그가 그렇게 바꾸고자 했던 더러운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를 외면했다. 영상으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며, 이렇게 긴긴 불면의 밤을 지세우는 이유가 그런 짧은 후회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황망한 마음에 읽고 또 읽고, 그마저도 어쩔 수 없어 글을 끄적인다. 나도 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바랬는지. 그의 죽음뒤에 우리가 잊어선 안될 몫이 있다는 것을. 할말도 많고, 분노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 땅에 기대를 갖는건 제로에 가까운 기대확률 같은 무의미함이다. 그저 체념과 황망한 욕지거리만 섞여 나온다. 

인터넷에 올려진 글들을 읽다가 꾹 참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딴지일보에 실린 추모글이 가슴을 친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 고집불통의 노무현이지만, 40대의 젊은 나이에 아직도 서슬이 퍼런 전직 대통령을 향해 호통치던 성깔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에게만큼은 한번도 성질을 부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기는커녕 너무 권위가 없어 세간의 비웃음만 당했던 대통령. 그게 인간 노무현이 추구하던 민주주의였다. 너무 앞서 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옳은 방향이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 찾았던 담배 한개피. 한대 피워물기라도 했으면 마음이 덜 아팠을텐데. 서늘한 새벽녘 그 절벽에 몸 으스러지며 그가 느꼈을 절망과 두려움과 갈증에 목이 메인다. 그가 홀로 온전히 짊어져야할 것은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 짐을 던져주고 처절하게 외면하고 말았다. 

미디어오늘 이용호 화백의 만평.



K가 안봤으면 했는데, 어느샌가 내 옆에 와 두툼한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이 서른셋. K앞에서 한번도 보인적 없는 눈물을 오늘 보이고 말았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사러간다. 그가 못다 피운 담배 한개피라도 대신해주고 싶다. 함께모여 그를 추모하기도 쉽지 않은 무서운 대한민국이 새삼 정말 무섭다.



,

EBS의 인간의 두얼굴을 재밌게 봤다. 일부 실험은 결과가 과장되어있을 수도 있고, 비교기준이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공감이 갔고, 그런 인간이 재미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부분은 외국인 두명을 비교대상으로한 길 찾기 실험과, 옷차림으로 비교한 반응 실험, 그리고 아이사진을 가지고 판단한 실험이었다. 그런 판단이 경험적으로 옳은가, 아닌가 하는 부분은 둘째치고서라도 만약 그런 상황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씁쓸함은 가지질 않았다.

우리가 가진 스테레오타입이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고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고있었지만 다시 확인하는 건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나라면 달랐을까'라는 수차례의 반문에 당당하게 고개 저을 수 없다는 것도 짜증이 났다. 나의 감성은 그대로이니 이성이라도 꽉꽉 채워서 끊임없이 반성하며 사고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래서 학습이 중요하다. 반성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 「연애에 대해서, 사람의 외모를 운동경기에 비한다면 지역대회 예선에 불과하다. 그 사람의
       내면이야말로 진정한 본선무대라고 할 수 있지」 

밥 「즉, 내면을 갈고 닦으라는 것이군요!」

존「아니, 지역대회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면 본선에는 진출할 수 없다는 거지」
,

출근길 꺼내든 아이팟터치에서 '고스트뉴스' 실행하고, 언론사의 뉴스피드를 읽다가 한 칼럼에 눈이 멈췄다. 경향신문 기사목록.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이대근 칼럼. (용산 테러리스트) 읽고나서 쉼호흡을 하고 다시 읽었다. 좋은 글이다. 용산사태를 다룬 글 중에서 이렇게 진실되게 철거민을 이야기한 글은 처음이었다. 간만에 좋은 글을 읽었다.

피디수첩의 특종보도로 '수사같지도 않은' 수사를 하고 어물쩡 뭉개려했던 짜증스런 상황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웃기는건 다른 언론사에서도 이 장면들을 미리 찍어놓았다는 것.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몰랐던 것인지 모르지만 반성좀 해야 한다. 검찰 수사를 보면 근본적인 원인은 제껴두고 그저 누가 불을 질렀는지 발화지점만으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상황. 제대로된 수사를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검찰에 뭘 기대한건 아니지만, 이건 심하다 싶을 정도의 수사상황들. 유가족에게 이 상황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칼럼을 읽으며 눈을 뗄 수 없었던 문장. "그러나 마지막 방법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망루로 올라갈 때는 이유가 있었다." 이 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망루의 불이 아니라, 이들이 망루에 올라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그 위에서 경찰(및 용역깡패)과 대치해야만 했던 그 저주같은 상황이었다. 불이 누구때문에 났느냐가 중요한가. 이걸 다들 알면서도 직시하기에는 '너무 슬픈 이야기'라서 그런지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또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며 필요에 따라 그들을 '도심의 테러리스트'로 쉽게 덧칠하고 있다.

언론이 가진자, 힘있는자의 목소리만을 말하는 시절이다. 6개월만에 KBS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고 (시청료 거부운동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조중동은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다. 이 막장의 와중에서도 이런 칼럼을 읽을 수 있어 고맙다. 힘이들 때 자신을 이해해주는 목소리가 하나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기에 이 글을 유가족분들이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용산 테러리스트

이명박은 민주화 시대에 어느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느냐고 했다. 민주화 시대 모든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려 했고, 이명박 정권도 그랬다. 다만, 이명박 정권이 더 노골적이고 그 방법이 좀더 거친 것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맞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사는 일 중심으로, 일 잘하는 사람 써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왜 그렇게 못했는지 그 이유를 들으려 사람들이 TV 앞에 앉은 것일 텐데 말하지 않았다. 분단 60년 중 1년의 경색은 있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마치 자신이 59년간 남북 화해 잘하다 딱 1년만 안된 것처럼 주장하는데 정확히 하자. 그의 취임 이후 1년 내내 경색되었다. 오래지 않아 남북협상할 거라고? 아마 오래 걸릴 것이다. 그는 현안들에 대해 제대로 변명하지도, 자기 논리에 따라 효과적으로 설득하지도 못했다.

불교계로부터 그렇게 혼나고도 ‘하나님의 소명’ 운운하고, 오바마처럼 화합하면 어떻겠느냐는 주문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미국수준이면 좋겠다며 비웃었다. 옛날엔 자동차 타고 가다가 신문에 장관이 잘못했다고 나오면 전화해서 ‘어이 내보내’ 그런 식이었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그런 요구를 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아마 그는 자기에 대한 고언을 종종 이렇게 오해하는 것 같다. 너무 많은 조언과 지적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평하는 사람들-특히 그의 주변 사람들, 여당 사람들이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그만 입 닫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죽은자에 사과는커녕 모독만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군주가 현명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은 군주가 정말 현명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조언자들 덕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견해이다. 군주의 지혜가 좋은 조언을 낳는 것이지, 좋은 조언이 군주의 지혜를 낳을 수는 없다.’ 이명박의 말대로 조언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

SBS TV <대통령과의 원탁 대화>는 안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특히 용산 참사 이야기 때 그랬다. 그는 자기 감정에 충실했다. 빈 말로나마 미안하다고 슬프다고도 하지 않았다. 철거민, 그들은 누군가. 30년 넘게 장사한 거리에서 쫓겨나 다 잃고, 결국 그 자리에서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칠순의 노인이었다. 외환위기로 일식집 문을 닫은 뒤 다시 살아보자고 복어집을 낸 지 3년 만에 그 꿈은 거품처럼 꺼지고, 살아갈 기운을 잃은 쉰여섯의 가장이었다. 이 거리를 떠나야 했기에 물과 전기 없는 천막집을 짓고 노점상, 막노동을 하며 철거된 인생을 살다 뜨거운 불속에 사라져야 했던 쉰 살의 가난한 아저씨였다. 땀 흘려 일군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고, 살아갈 희망을 잃었다. 이렇게 다 빼앗긴 이들이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했는가. 권력과 재벌과 건물주의 욕망을 위해 온순한 양처럼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았는가. 미국 연수 때 가족과 국립공원에 놀러갔다가 곰 출현 경고판을 본 적이 있다. 충분한 거리가 아니면 달아나지 말고 손을 벌려 크게 보이도록 하라. 그래도 안 물러나면 소리를 내고….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방법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망루로 올라갈 때는 이유가 있었다.

누구는 그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라고 했다. 부동산 부자인 청와대 부대변인이라는 이는 그들의 죽음이 과격시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통령은 법질서를 잡으려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죽음은 법질서의 제단에 바쳐지기 위해 이렇게 재해석되었다. 죽은 자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명백한 이 사건을, 너무 슬픈 이 이야기를 그들조차 외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국가와 시민간 사회계약은 깨져

그러나 큰 죄를 진 재벌총수를 죄다 용서함으로써 법이 정의와는 무관한 기득권 보호 장치임을 전 국민에게 학습시켰을 때 법질서는 이미 무너졌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철거민들은 벌써 법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고, 한 명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테러리스트였다는 선전으로는 무너진 법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법의 정신이 이 정권에 의해 너무 많이 훼손되었다. 어쩔 텐가. 이제는 국가의 이름으로,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다. 국가와 시민의 사회계약은 거의 깨졌다.

<경향신문 정치·국제 에디터>



,

MBC뉴스를 즐겨 보는 사람들을 다들 알겠지만, 언론노조가 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언론법 개악에 반발해 총파업중이다. 캡콜드님의 포스트를 보고 작은 몸짓이지만 동참하는 차원에서 캠페인에 참여하고자 한다. 이른바 "표현의 자유가 눈내리는 동네" 사실 스킨파일에 스크립트 한줄을 추가하는데 불과하지만, 그것마저도 안하기에는 내 얼굴이 아직은 그다지 두껍지 않은듯 하다.

인정한다. 점점 방관자적인 입장. 아니면 "그래, 너네 맘대로 해봐라"라는 '분노 1그램' 섞인 체념이 컸다는거. 블로그에 한줄 스크립트 적고서 달라질거 별로 없다는 거 알고 있지만, 혹시 이 글을 보고서 언론노조가 파업을 하고 있구나. 왜 하는걸까. 언론법이 어떻게 되어가길래 개악이라고 하는 것일까. 라는 정도의 환기만 된다면 그걸로 족하다. 게다가 눈발 흩날리는 모양새도 한겨울에 참으로 적절하기도 하고.

무엇이든 말아드시는 '국밥명박'님이 만들어가는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 결자해지라고 그런 대통령을 뽑아놓은 국민들이 정신차리도록, 최악이라도 최악이 계속되면 '아! 이게 아니었구나'라는 반대급부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안이했던것 같다. 어쩌면 그런 반성이 생길 여지조차 남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더 크다. 의도적으로 이 공간에서는 그걸 '회피'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부끄러워 캠페인에 동참한다.

언론의 소유구조를 흔들려는 언론법개악,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릴려는 사이버모욕법(법안 이름도 거지같다). 국회가 해머들고 설친다며 개판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내부논리에 눈감고 개판에만 초점을 맞추고 혀를 끌끌차며 '네 놈들 하는 짓이 그렇지'라고 지탄하고 끝내기에는 그 파급효과가 작지 않을 것 같다. 이 공간에서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말하기전에 그 무엇도 '자기검열'하지 않는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지금 말하길 주저해서는 안된다. 참, 갑갑한 주말밤이다.

그래도 조금은 뜨거운 마음으로 이 말을 한다. "언론노조의 총파업을 지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