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콜드 블러드

from 책글창고 2011. 11. 18. 10:24
인콜드블러드(incoldblood)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트루먼 카포티 (시공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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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스펙터클하고 쫄깃한 스릴러를 기대하는 사람은 읽지 않는게 좋다. 트루먼 카포티가 수년간 인터뷰한 두명의 살인자에 대한 기록. 녹음과 노트 없이 기억만으로 구성해냈다는게 새삼 대단하다. "무고한 사람들이 무자비한 사람들로 인해 살해되었고, 그 살인자는 결국 사형을 당했다"라는 무미건조한 뉴스기사 한줄은 우리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하지만 인 콜드 블러드는 그 사건을 파헤치고 구성해 내 가장 밀도있는 르포타주 한편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섹션에서 묘사된 재판과정과 그 이후. 딕과 페리가 사형은 언도받고 5년 넘는 시간동안 지낸 '구멍'에서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삶의 마지막을 보냈을까.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었던 그 시절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그들이 생을 마감하던 그 순간을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형수의 마지막 말이 궁금해 찾아본 기사도 기억해둘 만 하다.

주말에 '카포티'를 봐야겠다. 페리의 뇌속까지 들여다 본 것 같던 카포티의 심리기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책을 읽고나니 클러터 가족과 홀컴 마을, 페리와 딕이 마치 오래 알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책을 덮고 인터넷을 뒤지며 그들의 남겨진 기록과 사진을 찾아봤다. 가장 쓸만한건 위키피디아의 글일 것이다. 언제든 여기서부터 출발하면 될 것 같다. 낸시를 떠나보낸 바비 럽은 이제 예순이 넘었고, 클러터 가족이 살던 집은 다른 누군가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시간은 언제나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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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도쿄

from 책글창고 2011. 10. 10. 14:35
스무살도쿄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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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풀풀 쌓여있던 대학시절 일기장을 열어본 적이 있다. 세상에 대한 고민보다는 내 자신의 꼬라지에 대한 고민이 더 컸던 까닭이었는지 몇장을 열어보다 이내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손대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꾸며지고 기름진 단어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던 그 노트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열어본 적이 없는데도 무척 부끄러웠다.

그 시절 사람들, 공간의 이야기가 버무려져있었으면 그 노트를 읽어 낼 수 있었을까. 왜 그때 그리도 외로움에 떨었을까. 그저 적혀있는 것이라 곤 읽은 시집, 본 영화 그리고 그에 대한 감상이 전부였는데도 항상 결론은 외로움을 향해있었다. 그 시절 내 꿈은 문학이었다. 시를 쓰고 싶었고, 그 마저도 안되면 평론이라도 해보겠다 잠깐 맘을 먹었었던 것 같다. 너무도 희미하다.

스무살 도쿄의 주인공 히사오의 꿈은 음악평론가였다. 18세 도쿄로 상경하던 그 때까지는... 세월은 하루같이 지나 대학을 중퇴하고 카피라이터로 이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났다 헤어지고, 결혼을 생각한다. 지독한 클라이언트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보다 한참 떨어질 것 같은 후배로 인해 고민한다. 존 레넌이 죽고, 나고야는 서울에 밀려 올림픽 개최에 실패하고, 동서독은 통일이 된다. 세상은 급하게 흘러가지만 그저 '뉴스'에 불과하고 내 삶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주변은 관심거리에 불과한 미미한 삶. 많이도 닮아있구나.

59년생 오쿠다 히데오는 18살 시절부터 서른을 코앞에 둔 29살까지의 빛나는 청춘의 페이지들을 여섯날의 이야기로 엮어냈다. 나도 너도 알아채기 힘든 관념의 어휘들은 쏙 뺀 가벼운 문체는 쉬이 읽힌다. 그래도 알차게 일상을 채워넣었다. 호흡 긴 성장소설이라기 보다는 세월이 흘러 뒤적여보는 일기 같은 소설. 저자도 소설을 써내려가며 많이도 부끄러웠을거다. 내가 먼지 쌓인 그 시절 일기장을 읽을 때처럼.

나고야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살면서 보내는 히사오의 시절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건 가까운 서울에 사는 스무살 청춘들도 비슷하게 살아왔기 때문일 거다. 어딘들 다르겠나. 29살에서 끝난 소설의 끝에 내 삶을 이어도 덜컥거리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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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탄생

from 책글창고 2011. 8. 23. 10:48
동물원의 탄생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니겔 로스펠스 (지호,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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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을 보고 내내 이 책이 생각났다. 신약이라는 인간 탐욕의 비극성에 눈길이 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원작에서 핵공포의 우울이 배제된 스토리가 실망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고, 시저와 폴을 통해서 가족주의를 느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저가 동물원(감옥의 메타포임이 분명한)에 갇히고 벌어지는 일들은 현대 동물원의 비극성을 상징한다. 어쩌면 영화가 다룬 인과의 사회적인 조건은 그런 감금에 있다. 동물에 대한 감금의 정당화는 감금되는 개체가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반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허나, 시저가 신약을 통해 각성하든 하지 않았던 간에 동물원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비극적이다. 정신적인 고통이전에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한 자유의 제약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다. 동물의 고통은 그저 인간의 즐거움과 유희를 위해 무시된다. 아래 동물원의 탄생의 인용문을 잠깐 읽어보는 것으로도 아이의 손을 잡고 동물원을 활보하는 것, 훈련된 재롱을 보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저가 갇히고 나서 탈출하기 까지 이 영화는 흔한 오락영화가 아니라 슬픈 우화로 느껴졌다.

결국 이런 고릴라들은 얼마 뒤 죽어버리곤 했는데, 주로 땅에 얼굴을 처박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소콜로브스키가 보기에 고릴라가 감금 상태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동물의 집단적인 행동으로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잡혀온 고릴라들의 건강을 해치는 요인이 무엇보다 정신적인 영향이라는 점이다. 완전한 자유 상태에 있는 동물들이 향유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기생충들이 끼치는 위험을 극복하기에 충분하다"면서 소콜로브스키는 결론 맺기를, 감금 상태에서 "이들의 생명 에너지가 파괴되고 자신들의 운명에 굴복하면서, 음식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소진해버리고 만다"고 했다. 결국 고릴라들은 자신들의 숙명을 비극적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깊은 슬픔과 우울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p10~11

하겐베크 동물원에서 방문객들은 심지어 "이국" 동물들과 더불어 "민속촌"(아프리카 정글, 러시아 스탭, 미국 대평원, 북극얼음)에 있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것도 철창이나 눈에 띄는 장벽 없이, 그리고 자신들의 "문명"이 주는 편리함을 떠날 필요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 p24

이 쇼가 먹혀든 것은 관객들이 스스로 다음과 같은 점을 확신할 때만 가능했다. 그것은 먼저 전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 아니면 전시된 사람들이 어느 먼 지구 반대편 고립된 곳에서 "불쌍하게" 지내느니 독일의 동물원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었다...(중략)... 쇼에 전시된 사람들이 말을 받아서 하기 시작하자, 대신 동물들은 세심하게 "침묵하도록" 하는 훈련을 받았다. 이 강요된 "침묵"이 아마 현대 동물원을 규정짓는 특징일 것이다.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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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혁명성

from 책글창고 2011. 8. 23. 09:12
욕망은 타자의 육체(body)로부터 그 옷들을 벗길 뿐만 아니라 그 육체의 운동도 빼앗아, 타자의 육체를 순수한 살(flesh)로 존재하도록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애무는 타자의 육체를 내 것으로 가지려는 운동이다. 만일 애무가 단지 피부 표면을 건드리거나 쓸어주는 일이라면, 이런 행동과 애무가 충족시키려고 하는 강력한 욕망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관련도 없게 될 것이다. (...) 애무는 단순한 접촉을 원하지 않는다. 애무를 접촉으로 환원시키는 사람은 애무가 가진 독특한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무는 단순한 건드림이 아니라 어떤 모양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애무할 때 나는 내 손가락 아래에서 그녀의 살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애무는 타자를 육화하려는 그런 관계들의 앙상블인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1843)

상처받지않을권리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강신주 (프로네시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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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중에서 사랑과 매춘을 다룬 부분에 인용된 구절이다. 사르트르는 애무를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읽었다. 단지 쓰다듬는 다는 무의미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손 안에서 타자의 자유를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는 것.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닌 사랑의 본연적인 성질이다. 나의 소유욕과 타인의 소유욕이 부딪히는 그 긴장의 관계가 사랑이라는 것을 이 위대한 철학자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애무의 긴장감은 자본이 침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돈이 매개된 관계는 매춘의 성질을 가지며 애무 본질의 탄력성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사랑으로 포장하려해도 이미 사랑이 아니다. 감출 뿐이지.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유로운 사랑을 욕망한다는 점이다. 자본의 사회에서 돈으로 매개될 수 없는 사랑의 혁명성.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시절에 자본의 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은 점점 더 기대하기 어려워졌으나 그럼에도 이러한 가능성은 사랑 말고는 찾을 수 없다.

다행스럽지만,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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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유시민 (돌베개,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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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을 미루다가 후불제민주주의를 읽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책에 대해 적는건 아래에 옮긴 프롤로그 때문이다.

나는 지금 목격하는 역사의 퇴행을 나에게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인다. '나에게는 불가피한 현실'이란, 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내힘으로는 당장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의미한다. 아무리 욕하고 저주하고 한탄해도, 그 현실을 바꾸는 데는 별로 효과가 없다. 이럴 때는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욕하고 저주하고 한탄해도, 그 현실을 바꾸는 데는 별로 효과가 없다. 이럴 때는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 자신의 주관적 소망에 대해 적당히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행복학'을 강의하는 차동엽 신부가 즐겨 인용하는 말씀도 도움이 된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다. 이 역사의 퇴행 또한 지나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다음에 올 변화는 무엇일지 예측하고 준비하는 데 필요한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취하고자 하는, '원하지 않는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이다. - 후불제 민주주의 18p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는 한다. 쓰디 쓴 자조의 의미가 대부분이었다. 격분했던 2008년이 지나가고, 그 보다 더 최악의 2009년을 지나치면서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는 현실에 '무기력'할 수 밖에. 뉴스를 멀리하게 되고, 현실이 한줄 농담으로 치환되었다.

어쨌든 현 정권은 헌법이 부여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집권하지 않았나. 그 정권이 어떤 꼴을 만들던 '혁명'을 들먹이지 않는다면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물론 권력이 잘 행사되는지 감시하는 일도 있겠다. 허나, 제대로 감시해야할, 그리고 그런 의무가 있는 것들은 두 손 놓고 있고, 도리어 감추고만 있다. 스스로 분노해봐야 달라질 것 없는 현실. '무기력'은 너무도 빨리 학습되었다.

유시민이 책의 서두에 적어놓은 글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맞다. 그의 태도가 소극적이라 비판할 수 있다. 지나가기를 바라며 준비하는 것이 당장 현실에 충격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좀더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운 사람들도 있을거다.

하지만, 나에겐 '학습된 무기력'에 허우적대는, 그래서 절망까지를 떠올리게하는 상황에 괴로워하기 보다는 이 역사의 퇴행이 결국은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이후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고민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겠냐는 답하기 쉽지 않은 의문은 미뤄놓고 싶다.

지금은, 그저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만으로도 힘이 되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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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음반리뷰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박준흠 (선,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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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툼한 책을 책으로만 읽는다면 하루면 읽을 수 있을거다. 단, 앨범에 대한 글을 읽으며 듣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건 쉬운 일은 아니다. 잘 참다가도 몇몇 앨범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덕분에 참 오랜만에 듀스의 앨범을 찾아들으며 그루브에 몸 맡기며 팔다리를 허공에 허우적대기도 했다. (그야말로 허우적이다.)

100편이 넘는 앨범 리뷰글 중에 김민기 1집 앨범의 리뷰가 인상적이었다.

1971년에 나온 김민기의 유일한 정규 앨범은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이른바 '전설'이라 명칭에 값할 많지 않은 음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 전설은, 이 음반이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전량 압수 수거되고 이후 음반가의 초희귀본으로 고가에 거래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민기 본인이 오래 동안 정치적 박해와 금지의 사슬에 묶인 채 금기의 시절을 살아야 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나 이 음반의 가치는 그런 데에만 있지 않다. 이 음반은 당시까지 서구 모던 포크의 번안 수준에 머물렀던 한국의 이른바 통기타 가요가 한국 젊은이들의 정신과 감성을 표현하는 음악 양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음반이고, 스스로 작사 작곡하고 노래부르는 싱어송라이터 시대의 도래를 알린 음반이며, 대중가요가 그저 그런 사랑과 이별, 눈물뿐 아니라 깊은 철학적 사색과 시대적 고민을 담는 예술적 산물일 수 있음을 보여준 음반이기도 한 까닭이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음반리뷰 p56, 김창남/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대상에 무한한 애정과 경외심이 느껴진다. 김창남은 김민기 1집이 우리 가요가 청년의 정신과 감성을 표현하는 양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철학적 사색과 시대적 고민을 담는 산물임을 증명한 음반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듣기 좋은 노래를 넘어서서 '명반'의 반열에 오르려면 음악이라는 그릇 안에 시대의 정신과 감성을 표현해야하고, 응당 해야할 깊은 사색과 고민을 담아야 한다.

모든 음악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이 존재할 뿐이라는 말도 맞다. 그러니 음악을 가리는 기준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도 매 시대를 감동시키는 음악은 존재한다. 음악이 담고 있는 시대정신이 수용자에게 깊이 각인된 '명반'. 미학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명반이 짠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치있는 명반은 그걸 들으며 감동했던 이들이 함께 만드는 관계의 산물이다.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말 또한 사실 발언하는 그 시대의 재평가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이런 100대 명반 리뷰를 읽으며, 또 그 앨범들을 찾아 들으며 현재 한국 대중음악 메인스트림을 아쉬워할 수 밖에 없다. 냉소적인 시선 또한 거둘 수가 없다. 생명력 없는, 필요를 위한 음악들은 그저 듣기 좋은 음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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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기업, 몬산토

from 책글창고 2009. 12. 22. 10:34

몬산토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마리 모니크 로뱅 (이레,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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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집어들고 몇 페이지 읽고나서 혼란에 빠졌다.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 몬산토라는 기업은 생명공학회사가 아니었던가. GMO라는 제초제에 강한 유전자변형 물질을 만들어내는 기업. 먹을게 넘쳐나는 세상이라지만,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는 여전히 즐비하지 않던가. 그러니 GMO가 건강에 '미약한' 해약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하더라도 생산량 확충이라는 '녹색혁명'을 통해 굶는 이들에게 풍부한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면 무조건 비난은 답이 아니라고 '바보같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몬산토가 만들어낸 GMO가 극심한 논란의 한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 비단 GMO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해온, 그리고 이 소중한 지구에 뿌려댄 해약을 보고서 이해할 수 있었다. GMO는 몬산토 공포의 시작이 아니라 그 열매다. 파괴력을 짐작할 수 없기에 더 공포스럽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책을 100여 페이지 읽다보면 알게된다. 몬산토의 역사만으로도 GMO에 대한 공포는 현실로 다가온다.

초기 사카린을 만들어 코카콜라에 납품하던 몬산토는 세계대전중에 막대한 이윤을 쌓게된다. 미국방성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맨하탄프로젝트에 가담하여 플루토늄 정제에 힘을 쏟는다. 당시 책임자는 전후 몬산토 CEO에 올랐다고 한다. 몬산토는 화학분야를 솔루시아에 매각했으나 솔루시아는 2003년 잦은 소송으로 파산했고, 1999년 12월에 파마시아앤드업존과의 합명으로 파마시아로 회사명을 개정했으나 2002년 몬산토는 제약 부문을 파이자에 매각하고 농업 관련 산업에 주력했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몬산토이다.

그러나 기업의 모태와 그 기업을 이루고있는 경영방침, 내부자들의 태도로 미루어보건데 그간 해왔던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기업활동을 현재도 지속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편견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렇게 말하기에 이들이 해왔던 짓은 상상을 초월한다. PCB하나만 봐도 그렇다. 이들이 퍼부어놓은 독극물은 현재도 잔류하여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너무도 충격적이라 인터넷을 잠깐 뒤져서 찾아본 자료인데, PCBs의 유해성은 다음의 자료만 봐도 알 수 있다. PCBs는 폐기하기도 어려운 물질이다. 연소시에 다이옥신이 발생된다고 하니 그 처리가 얼마나 골머리를 썩히는 일인지 알 수 있다. 다이옥신의 경우는 더 충격적이다. 80그램을 식수원에 뿌려도 800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만들 수 있다는 공포의 물질 DDT를 만들어 납품한 곳이 바로 몬산토이다. 베트남전에 사용된 에이전트 오렌지는 무려 8000천만리터에 달하고, 그 피해는 익히 알려진 그대로다.

앞 세단락이 100페이지 정도 읽고 나온 얘기들이다. 500페이지 가깝게 기술된 이 책. 사실 더 읽어나가기가 겁이 났었다. 한장 한장 넘길때마다 공포가 엄습해온다. 어떤 공포의 물질이 지구상을 헤매고 다닐지. 이런 기업이 아직도 이윤활동을 계속해나간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이 기업이 100여년 넘게 생산해낸 물질들이 내가 살고있는 주변에 아직도 잔류하여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실존적 두려움 탓이다.

다시말하지만 몬산토는 생명공학기업이 아니다. 그들이 현재 스스로를 어떻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들은 지구 역사상 최악의 화학물질을 만들어낸 공포의 기업이다. (현재도 라운드업이라는 제초제가 회사 매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파괴물질의 굵직굵직한 것들은 몬산토가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PCB, 다이옥신, DDT, Agent Orange, 라운드업. 고엽제. rBGH. 이런 무시무시한 물질을 만들어 막대한 이윤을 만들어온 기업이 몬산토이다. 자연분해되지 않고 체내 축적의 단계로 갈 수 밖에 없는 해약물질. 폐기도 쉽지 않은 독극물. 그 위험성을 알고서도 팔아댄 기업이 바로 몬산토이다. 이를 위해 몬산토는 대조군과 실험군을 조작한 불공정한 과학연구를 통해 면죄부를 얻었고, 정부기관과의 '회전문인사'를 통해 은폐했다.

읽으면서 내안의 독성물질이 어느정도인지 정밀한 검사를 받아보고 싶게 만드는 책. 몬산토는 번돈을 뿌려대며 스스로를 감추고 있지만, 이 책은 고맙게도 쉼없이 까발린다. 두터운 책이지만 (몬산토의 해약을 다 담기에는 그래도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고 놀라워 지루할 틈없이 읽힌다. 수많은 인터뷰와 생생한 자료가 담긴 이 책의 펄떡거리는 생명력은 상당부분 저자의 발품 덕이다. 고맙기 그지 없다.

사명감이 없었다면, 이런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공개된 자료들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책으로 엮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저 녹색혁명이라는 허울 앞에서 아직 그 폐해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GMO에 무딘 사람들. 꼭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조금 배고프더라도 쓸만한 먹거리로 우리 삶을 살찌우는 것은 존엄에 관한 문제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몬산토와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환경과 인간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 당연히 몬산토의 반대편에 설 그들에게 이 책이 큰 힘이 될 것이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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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숨겨온 6가지 거짓말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피트 런 (흐름출판,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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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꿈질이라는게 있다. 오디오나 카메라, 크게는 자동차를 대상으로 이뤄지는 것인데, 갖고 있던 물건을 중고로 내놓고 다른 기기를 새로 들여놓는 행위를 말한다. 이 바꿈질을 통해서 쓰고싶은 물건을 적은 비용으로 들여놓을 수 있고, 많은 물건을 써볼 수 있다.

이런 바꿈질을 잘하는 사람들은 중고로 물건을 팔고, 중고로 물건을 사는 행위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런 바꿈질이 활발하고 가능한 이유중에 하나는 이런 바꿈질에 참여하는 경제행위자들이 대부분 상품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 제품의 가치를 대체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특히나 오디오같은 경우는 나름의 폐쇄적인 거래망을 가지고 있어 행위참여자의 신뢰도를 가늠하기 쉽다. 고가 물건의 경우는 거래의 위험성 탓에 밀접한 인간관계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또한 물건을 구입할때 바꿈질 할 것을 예상하여 구입하기 때문에 '보유효과'(내가 소유한 것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매기는 현상)에 대해서 자유로운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을 바꾸어 일반적인 시장상황에서는 어떨까. 정보의 비대칭이 일반화되어있고, 누군가는 알고서도 사기칠 가능성이 있고, 개인은 보유효과로 인해 자신의 물건을 과대평가하고 있고, 시장의 신뢰가 무너져 행위 당사자의 건전한 거래가 불가능한 상황. 이런 상황이라면 바꿈질은 성공적이지도 참여자간의 '윈윈'도 불가능 할 것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중고차 시장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신뢰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지만 말이다.

보통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이러한 거래 실패를 저자는 MISLED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꽤 설득력이 있다. (mistake, information, surprise, luck, event, dishonest) 즉 MISLED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전통경제학이 최대이익을 보장하는 경제활동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는 더 이익일 수 있다는 점이다. MISLED상황에서라면 거래 자체가 손해를 가져온다.

예를들어, 100달러짜리 카메라, 130달러짜리 카메라가 있는 상태에서 선택하는 문제와 180달러짜리 카메라가 추가되었을때 우리의 선택이 달라지는 문제를 보자. 전통경제학이라는 가격대가 하나 추가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완벽한 정보를 통해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선택에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180달러짜리가 추가되었을때 일반적으로 130달러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 인간은 위험회피성향, 불확실성 제거라는 경제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실패확률이 적은 중간을 선택한다. 저자는 이러한 선택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경제환경에서 형성된 혹은 학습된 본능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행동주의 경제학이고, 보다 현실경제에서 설명력을 지닌다고 말한다.

문제는 남는다. 즉 의도적으로 판매자가 130달러짜리가 이윤이 가장 많이 남기 때문에 180달러를 의도적으로 끼워넣었을 경우 130달러짜리는 잘못된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즉 시장이 불합리한 이윤추구를 한 것인가 아닌가가 우리의 경제활동 본능이 바람직한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수 있다. 행동주의경제학에서 130달러짜리 선택을 경고한다면 그것은 시장의 의도를 불순하게 보는 것이고(상식밖의 경제학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듯이), 130달러짜리 선택이 실패할 확률이 적은 선택이라는 것은 시장이 불순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또하나의 판단기준(즉 시장의 건전성, 불확실성에 대한 정보)이 없다면 경제행위가 옳은 것인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고비용의 정부개입 혹은 법적 강제가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경제학이 숨겨운 6가지 거짓말이 하려는 말의 핵심은 이것이다. 즉 전통경제학이 가정하고 있는 합리적인 인간은 경제생활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링적 가정에 불과하고 수학적 용이함을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전통경제학은 경제활동을 적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저자는 행동경제학적인 입장에서 경제학을 비판하고 있다.

기본전제로 저자는 경제학과 경제생활을 구별한다. 마케토피아와 미들톤이라는 가상의 사회를 상정하여 전통경제학이 가정해온 합리성, 시장의 개념이 현실과 유리되어있는지를 설명한다. 즉 이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이 고쳐볼 수 있다. '전통경제학이 숨겨온 6가지 거짓말을 행동경제학으로 설명한다'

사실 이런 지적들이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이 책을 통해 경제학이 '나만 모르게' 감추어놓은 비밀을 파헤쳐줄거란 기대를 갖는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책 제목이 내용에 비해 너무도 '섹시'하게 뽑혔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행동경제학적인 입장들이 이미 많이 소개되었고, 기존의 전통경제학의 입장들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탄 터지듯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전통경제학의 가정들은 설명력을 잃어왔고, 비판을 받고 있지 않은가. 대안을 찾아야하는 혹은 또다른 설명을 원하는 시점에서 행동경제학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행동주의 경제학에 차분한 설명에 가깝다.

전통경제학의 보완으로서 대안으로서 행동경제학은 의미가 있다. 행동경제학적 관점을 확장하여 거시적인 경제정책이나 대안발전론에 적용하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특히나 경제행위에서의 '신뢰'나 '인간본성'에 대한 강조는 새겨봄직 하다. 그러나 매스이코노미 환경에서 수많은 경제활동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행동경제학이 일반이론을 제공해줄 것인가, 설사 부정확하더라도 미래예측이 가능하도록 해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내 생각에는 모델링의 관점 자체가 상이하지 않은가 싶다. 굳이 따지자면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 관점의 차이라고 할까. 일반화의 실패. 일반론에 대한 반대근거로는 유의미하지만, 그 자체로 일반론을 세우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제행위의 '집합'적 동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예측될 수 있고,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이렇게' 설명될 수는 있으나, 개별적인 행위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다양한 변인으로 인해 상이한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책을 덮으면서 한 생각은 행동주의 경제학이 대안이론으로서의 포지션을 갖기에는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실험심리학적인 포지션의 한계라 할 수도 있을까. 대안이라기 보다는 보완이라는 느낌이 아직은 강하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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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칙한 한국학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J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 (은행나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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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나의 감상보다 먼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두명의 인터뷰를 옮겨본다. 박노자 교수의 책을 읽었을때의 당혹감(한국인이라는 나에게 많은 부끄러움을 주었던)과 비슷했다. (한국에 여행온 것이 아닌) 한국에 살고있는 엑스팻들의 말과 행동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들이 차가운 타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이를테면 애정어린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한국이나 한국문화 중에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자기를 외국인에게 맞추려 하는 게 좀 거슬린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 성씨를 '박 Bak'이라고 하는 대신에 '팍 Park'이라고 하는게 정말 싫다. 한국 음식을 바꾸려 노력하는 것도 싫다. (중략) 사람들이 외국 사람에게 영어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싫다. "한국이라고, 그냥 한국어로 말해요!" 사람들은 "제 이름은 현수예요. 하지만 뭐라고 불러도 좋아요."라고 하는데, 그건 웃긴 일이다. 완벽하게 훌륭한 이름이 있는데! 그냥 자기 이름 써야지, 왜 그걸 바꾸는가? 외국인에 맞춰 바꿀 필요가 있나? 왜 "한국말은 배우기 어렵죠? 그냥 영어 써요. 우리가 영어 배울 테니!"라고 할까? 자기 유산에 대해 좀 더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외국인들이 똑바로 따라할 때까지 자기 이름을 25번 정도 반복하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그걸 말할 수 없다는 건 변명 아닌가? 한국인들을 그 사람들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다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 

p141 Ceda Bough Saeji 시이달 새지 (미국)

"한국의 전반적인 개발 형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나? 이곳에서는 개발이 나라의 발전에 '좋다'거나 '이롭다'는 식으로 맹종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차라고나 할까. 가령 청계천 공사는 2년 만에 해냈지. 대체로 심미적인 감각에 대해 고심하지 않은 채 개발을 위한 개발을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있나? 아니, 그저 지루한 고층 건물을 또 하나 올릴 뿐이다. 종로1가처럼 역사적인 동네조차도 그저 '새로운' 것이 좋다는 듯 밀어버린다. 콘크리트로 만든 거면 다 좋다는 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된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강남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맛골 같은 곳은 그저 '더러운 동네'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그들은 그곳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어버린다. 마치 자신들은 결코 가난했던 적이 없었다는 듯,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듯.

p182 Matt VanVolkenburg 매트 밴볼켄버그 (캐나다)

시이달은 우리 안의 문화 사대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이 땅에서 영어 못하는 것은 부끄럽고, 열등감을 느껴야할 일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외국인 앞에서 당당하게 우리말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이 보기에는 그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것이다. 여행서적에 '여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정확한 영어를 병기하는 것과 나의 이름을 외국인이 부르기 편하도록 바꾸는 것은 다르다. 외국인을 배려한다는 마음가짐 속에 우리 문화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글로벌 스탠더드, 세계화라는 허상. 그녀 말대로 우리는 그들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울림이 크지 않은가.

아나키스트라 소개된 매트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개발이데올로기에 대해 반성하게 해준다. 심미적인 감각에 대한 고민없이 개발을 위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 얼마나 날카로운가. 지금도 도처에서 행해지는 개발을 위한 개발의 시선은 옛것은 부끄럽고 더러운 것이고, 그런 역사를 '마치 그런 역사가 없었다는 듯이' 깨끗이 밀어버리는 천박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른바 '민속지'를 남기려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개발대상인 그곳의 많은 역사는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걸 안타까워하는 엑스팻의 시선이 고맙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했다.

서로 고착화된 문화적 배경으로 자라온 사람들이 타인의 문화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스테레오타입을 걷어내고 이해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거다. 외국인 노동자. 영어강사, 미군, 보따리 장사 등등등. 그런 이미지는 미디어를 통해 더 고착화 되어가는 듯 하다. 그런 인식의 벽에 막혀서 서로의 진솔한 교류나 이해가 가능하겠는가. 

한국인이 같은 외국인을 놓고 보는 시선부터 차별적이다. 백인을 보는 시선과 중동이나, 아시아 지역 외국인을 보는 시선은 말하지 않아도 다르다. 서양의 차별적 시선을 경험한 우리가 그런 서구화된 시선을 통해 외국인을 본다는 것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스콧 버거슨이 지적하듯이 백인 영어교사에 대한 시선도 그러하다. 성욕과잉이거나, 마약을 먹거나, 난잡한 생활을 한다는 시선들. 마찬가지로 엑스팻들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 또한 차별적이다. 오랫동안 거주한 이들은 그런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그들도 한국 사회에 대한 고정되고 왜곡된 시선을 거두기 쉽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양방향의 왜곡과 편견이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는 알아채기 어렵지 않다. 머리는 그렇게 간다고 해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아름다운 땅, 한국에서 살아가는 엑스팻들은 애정을 감추지 않는다. 거침없이 한국사람이라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 다양한 문화적 가치가 공유되고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의 3장을 보면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문화적 접점은 다양해야 한다. 문화는감염되어야 하고, 영향 받아야 하고, 그 경계가 흐릿해져야 한다. '국수'란 죽은 것이다. 열려있어야 하고, 영향받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문화적으로 동등한 자신감으로 마주해야하고, 이식이 아니라 어울림이 되어야 한다.

이 땅의 외국인들이 어떤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느껴보고 싶다면 읽어도 좋겠다.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탓에 일관된 메시지를 읽어내긴 힘들지만, '경험'해본다는 차원에서는 크게 부족하지 않다. 난 이 땅에 살고있는 외국인들이 더 많이 늘어나고 그들이 뿌리내려 오래도록 살아가길 원한다. 한국이 그들이 살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론 그들로 인한 부정적인 감염도 있을 수 있겠으나 결국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 줄 것이라 믿는다.

몇가지 덧붙이자면, 첫부분의 소일담은 차라리 뒤로 뺐으면 좋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책의 무게감을 도리어 해치고 있는 듯 하다. '엇! 이건 아닌데'하며 책을 덮을 뻔했다. 그리고 스콧 버거슨의 촛불집회관련한 얘기는 '그냥 패스'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정도로만 정리하는게 나을듯. 이 아저씨 조선일보를 너무 열심히 본 것 같다. 신화로 감춰진 이데올로기, 민족주의적 전체성을 촛불집회에서 읽어내려 하는 것 같으나, 그 분석이 지극히 일면적이고 내재된 의미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원인분석에서 '숨겨진 음모'를 가정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그가 이 책을 펴내면서 결국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4장이었을까.  

이 책의 백미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삶을 이뤄가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진솔한 엑스팻들의 인터뷰였다. 그리고 3부의 이야기들도 그러하다. 읽으며 그들의 삶과 생활을 깊이있게 포착한 책을 만나고 싶었다. 스콧 버거슨은 싫고, 또 다른 진지한 엑스팻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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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론 커리 주니어 (비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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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책을 읽는건 용기가 필요하다. 사전지식이 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릴 수도 있지만,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없이 읽는 책은 감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모험이었다고 해야겠다. 아는 것이라고는 광고카피 몇줄 뿐이었으니.

'우주적 예언'을 표제로 하는 책이었으니,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아주 잘 짜여진 SF소설이 아닐까. 혹은 코맥 맥카시의 '로드'같은 건조한 스토리는 아닐까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 초반부를 읽으면서 이건 낚인건 아닐까 싶은 옅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내밀한 가족사가 줄기였다. 롤렌드 에머리히 감독의 '2012'를 예상했으나 막상 영화는 '트레인스포팅'의 느낌이었다고 하면 당혹감이 다가올까. 책의 초반부, 주니어의 예언은 그것이 정신분열적인 것이었는지, 진실한 것이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마약과 술에 쩔어 환각을 헤매는 주니어에게 예언자의 아우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를 믿을 수 없다. 소설이 넘기기 힘들었던건 짧은 기대와 소설이 너무도 엇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갭은 책장을 넘기면서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지구가 멸망할거라는 예언은 오히려 그의 삶을 파괴적으로 바꿔놓고 주변의 비극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인물은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지만, 그것은 앞으로 닥칠 멸망과 무관하다. 이야기는 한 흐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계속 분화되고 굴절된다. 

내밀한 가족사, 성장기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탈바꿈을 하는 지점은 주니어가 불가리아에 있게 되면서 부터이다. (불가리아라고만 말하는 이유는 혹시나 스포일러가 될까 싶어서다) 이전 스토리와 완벽히 이질적인 이 부분부터 소설의 내러티브는 확장된다. 호흡도 빨라지고 이야기도 다채롭게 변형된다. 어쩌면 워치맨의 닥터 맨하탄을 연상시키는 존재감으로 갑자기 다시 태어난 주니어는 예언자로서의 운명을 위해 일한다. 

재밌는 것은 이 소설이 그런 내러티브의 확장을 그대로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끊임없이 축소된다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스케일을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지구적 재앙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이야기를 버무리는 방식이 아니라) 시점을 이동하여 다시 인간사, 가족사의 그 내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전환이 덜컥거리지 않고 나름의 흡입력으로 읽히는 것은 다양하게 변주되는 시점탓이다. 이야기마다 등장인물로 화자가 바뀌고, 번호가 매겨진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있는 전지적인 시점으로 구술된다. 번호로 매겨놓은 챕터의 화자는 주체가 불분명하지만 일관된 발언을 하고, 각각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도 다분이 다층적이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면서 큰 줄거리로 수렴하는 미국 드라마 히어로스가 떠오르고,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즐겨보고 있는 플래시포워드가 겹쳐졌다. 영화적 편집처럼 교차로 사용되는 이야기.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시절을 예측하기 힘든 방식은 책에 적응하는데 쉽지 않았지만, 새로웠다.

지극히 미국적인 소재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각각의 현대사를 나름대로의 재기로 버무린 작가의 센스는 칭찬할만하다. 공을 많이 들인 소설임에 분명하다. 소설의 일부를 가지고도 하나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작가가 집착하는 가족애는 이 소설이 헐리웃 영화를 닮아있다는 점과 무관하진 않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 얘기하자면 이 소설의 또다른 재미는 후반부에 있다. 마치 결말이 다른 감독판 영화를 보는 것처럼 순식간에 소설의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읽고나면 책표지에 새겨진 카피 하나가 꽤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구나 느낄거다. 

"영원보다 아름다운 멸망의 순간, 한 사람의 우주가 또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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