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론 커리 주니어 (비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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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책을 읽는건 용기가 필요하다. 사전지식이 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릴 수도 있지만,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없이 읽는 책은 감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모험이었다고 해야겠다. 아는 것이라고는 광고카피 몇줄 뿐이었으니.

'우주적 예언'을 표제로 하는 책이었으니,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아주 잘 짜여진 SF소설이 아닐까. 혹은 코맥 맥카시의 '로드'같은 건조한 스토리는 아닐까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 초반부를 읽으면서 이건 낚인건 아닐까 싶은 옅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내밀한 가족사가 줄기였다. 롤렌드 에머리히 감독의 '2012'를 예상했으나 막상 영화는 '트레인스포팅'의 느낌이었다고 하면 당혹감이 다가올까. 책의 초반부, 주니어의 예언은 그것이 정신분열적인 것이었는지, 진실한 것이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마약과 술에 쩔어 환각을 헤매는 주니어에게 예언자의 아우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를 믿을 수 없다. 소설이 넘기기 힘들었던건 짧은 기대와 소설이 너무도 엇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갭은 책장을 넘기면서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지구가 멸망할거라는 예언은 오히려 그의 삶을 파괴적으로 바꿔놓고 주변의 비극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인물은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지만, 그것은 앞으로 닥칠 멸망과 무관하다. 이야기는 한 흐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계속 분화되고 굴절된다. 

내밀한 가족사, 성장기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탈바꿈을 하는 지점은 주니어가 불가리아에 있게 되면서 부터이다. (불가리아라고만 말하는 이유는 혹시나 스포일러가 될까 싶어서다) 이전 스토리와 완벽히 이질적인 이 부분부터 소설의 내러티브는 확장된다. 호흡도 빨라지고 이야기도 다채롭게 변형된다. 어쩌면 워치맨의 닥터 맨하탄을 연상시키는 존재감으로 갑자기 다시 태어난 주니어는 예언자로서의 운명을 위해 일한다. 

재밌는 것은 이 소설이 그런 내러티브의 확장을 그대로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끊임없이 축소된다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스케일을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지구적 재앙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이야기를 버무리는 방식이 아니라) 시점을 이동하여 다시 인간사, 가족사의 그 내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전환이 덜컥거리지 않고 나름의 흡입력으로 읽히는 것은 다양하게 변주되는 시점탓이다. 이야기마다 등장인물로 화자가 바뀌고, 번호가 매겨진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있는 전지적인 시점으로 구술된다. 번호로 매겨놓은 챕터의 화자는 주체가 불분명하지만 일관된 발언을 하고, 각각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도 다분이 다층적이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면서 큰 줄거리로 수렴하는 미국 드라마 히어로스가 떠오르고,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즐겨보고 있는 플래시포워드가 겹쳐졌다. 영화적 편집처럼 교차로 사용되는 이야기.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시절을 예측하기 힘든 방식은 책에 적응하는데 쉽지 않았지만, 새로웠다.

지극히 미국적인 소재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각각의 현대사를 나름대로의 재기로 버무린 작가의 센스는 칭찬할만하다. 공을 많이 들인 소설임에 분명하다. 소설의 일부를 가지고도 하나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작가가 집착하는 가족애는 이 소설이 헐리웃 영화를 닮아있다는 점과 무관하진 않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 얘기하자면 이 소설의 또다른 재미는 후반부에 있다. 마치 결말이 다른 감독판 영화를 보는 것처럼 순식간에 소설의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읽고나면 책표지에 새겨진 카피 하나가 꽤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구나 느낄거다. 

"영원보다 아름다운 멸망의 순간, 한 사람의 우주가 또다시 시작된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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