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라는 거짓

from 그림창고 2008. 12. 10. 08:22




몇년전 손에 쥐었던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가공할 만한 '역주'에 지레질려 페이지는 더듬거리듯 넘어갔지만 책 표지에 실려있던 Pierre et Gilles(피에르와 질)의 Sarida가 눈을 잡아끌었다. 매력적인 작품. 책 표지 한장이 보드리야르의 텍스트와 맞물려 풍기던 묘한 느낌. 피에르가 찍은 사진위에 질이 그림을 그려 이뤄지는 그들의 작업. 동성연인관계인 그들. 사진찍기와 그림그리기는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구상하고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라는데, 20년이 되어가는 작품이지만 신선하다.

흔히 사실적이다라고 말하는 사진, 그 위에 덧씌워진 페인팅. 그건 대상의 실사 이미지를 가리는 것일까 아니면 드러내는 것일까. 본래의 진실은 은폐되는 것일까, 드러나는 것일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본래 그 모습'은 있기는 한 것일까. 진짜는 허구이고, 그저 진짜라고 믿는 것만이 남아있는건 아닐까. Pierre et Gilles의 작품은 키치적이고, 동화적인 유치함을 갖고 있긴 하지만, 사진과 그림이 겹쳐지며 나타나는 충돌은 가볍지 않다. 현실과 가상의 사이를 줄타기하는 오묘함. 현대사회의 모든 가상의 이미지는 스스로 끊임없이 진실임을 '거짓 발언'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

'시뮬라르크'라는 인공물로 구축된 '시뮬라시옹'의 세계. 미디어의 수용이 그렇지 않은가. 인터넷,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우리들의 관계망도 그저 '진짜'라고 믿고있을 뿐, 그래서 더 진짜같이 느껴지는건 아닌지. 구축되고 만들어진 가상의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함. 그 촘촘할 것만 같은 시뮬라르크가 균열을 내는 순간,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무수한 이미지, 관계망은 허물어질 것이다. 이 공간은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한건 아닌가. '진짜 나'임을 거짓발언하고 있는 실체. 내가 축적한 단 몇 MByte의 디지털 데이터를 삭제하는 순간, 이 공간에서 나는 사라질 뿐이다. 두렵다. 그 시간들이, 그 관계들이.

You're the real thing.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 U2가 Actung Baby앨범에서 말한 것처럼.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가상. 진실보다 더 진실같기 때문에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역설. 블로그, 인터넷. 그 관계들이 불안하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긴장이 두렵다. 이 공간의 나는 나일까, 아닐까. 난 내가 아닌 나를 여기에 구축한 건 아닐까. 때아닌 잡설을 쓰다가, 점점 무력감이 기어나온다. 가상의 공간에 흔적을 남기는 나는, 나인가 아닌가. 나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나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혼란스럽다.



Pierre et Gilles - Sarida (1985)



Pierre and Gilles - La Madone au coeur blesse (1991)



Pierre et Gilles - Legend (1990) Model : Mad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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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알았다. 내년 한국에서 클림트의 전시회가 열린다. 2월1일부터 5월15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부제는 'Once In A Lifetime'. 전시때가 되면 플래카드도 펄럭이고, 뉴스에도 나왔을테니 모르고 지나칠 수는 없었을테지만 오늘 알게된 그 소식은 반갑기 그지 없다. 그의 작품 250점중에서 10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라는데, 이 말대로라면 멀리 비행기를 타고 유럽여행을 가지 않고서는 눈으로 볼 수 없을 그의 작품을 눈 앞에서 보게되는 셈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사실 제일 많이 알려져서 그렇겠지만) Kiss는 오지 않는것 같다. 하지만 그다지 아쉽지 않은게 'Judith I', 'Adam und Eva', 'Danae', 'Love', 'The virgin', 'The Dancer' 등등이 올 예정이란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사실 설렌다. 유디트도 그렇지만, 다나에는 정말 보고 싶다. 정사각형 안에 갖혀 제우스와 사랑을 나눴던 다나에. 클림트가 펼쳐놓은 그 은밀한 성적황홀감. 그 표정을 두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소위 말하는 블록버스터 전시회는 차분히 그림을 볼 수도 없고, 또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아서 망설이게 되는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클림트는 외면하기 힘들것 같다. 몇달전 열렸던 일산에서 열린 모딜리아니展을 보고서도 그랬다. 갈까 말까 하다가 망설이다가 찾아갔었는데, 그의 유화 한점을 보고서 바로 오길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으니. 모딜리아니가 몇십년전 그었을 터치의 결을 눈으로 더듬어보던 경험은 좀체로 잊을 수가 없다.

1미터 떨어져 모딜리니아니가 내려 그었을 붓질을 따라가는 감격. 그림은 내 눈 앞에서 볼 때 도록이나 디지털이미지로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준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했다. '시대의 우울'이라는 유럽미술기행책을 썼던 최영미가 무척이나 부러웠었지. 시집팔아 그렇게 멋진 여행을 했다는 것, 그 수많은 명작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 모두다. 가격만 좀 착해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비참하게 돈의 가치로 발걸음을 망설이게 하지 말았으면. 당분간 오스트리아로 날아가 클림트를 보게될 일은 그다지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공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klimtin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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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ss

from 그림창고 2008. 10. 1. 13:02



미술관을 가본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난다. 가끔 인사동에 들어선 가나아트센터는 오며가며 들러보긴 하지만 그건 동선에 따라서 들리게 되는 것이니. 정말 그림을 보고 싶어서 시간과 장소를 알아서 찾아가는 건 참 오래된 듯하다. 일부러 찾아간 성곡미술관이 마지막이 아닐까. 그림을 보면서 난감한 경우도 있고, 담겨진 감춰진 이야기에 힘겨울때도 있지만 잔잔하게 보고 있으면 맘이 가라앉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다 보면 내가 처음 대출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빳빳한 책표지, 알싸한 새 책의 냄새. 기분마저 좋아지는 경험이었다. '뭉크뭉크'라는 제목의 책도 그랬었다. 1판 1쇄가 2000년 11월. 학교 도서관에서 뽑아들었었다. 빽빽히 책이 꽂힌 서가 곁에서 이 책을 건져올렸던 이유는 표지의 '마돈나'였다. 어딘가 아픈, 불안한, 분열적인, 어두운 그의 그림들. 그래서 뭉크의 그림은 현대인의 고독이 녹아있다.


예술은 자연과 대립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오직 인간의 내면에서만 생겨난다. 예술은 인간의 신경, 심장, 두뇌, 눈을 통해서 창조된 영상인 것이다. 자연은 예술에 양분을 주는 영원히 위대한 왕국이다. 자연은 그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내적인 영상이다.

책 뒤 적혀있던 뭉크의 말이었다. 예술이 단지 자연의 '미메시스'가 아니라, 인간을 통해 창조된 영상으로 본, 또 인간 영혼의 내적인 영상으로 본 그였기에 그의 그림속에 현대인의 불안함, 아픔이 묻어있었을 거다.


The Kiss, 1897, Oil on canvas, 99 x 81 cm



그래서 일까. 사랑을 나누는 두사람을 표현한 '키스'라는 그림에도 어딘가 모를 불안함과 곧 헤어질것만 같은 절박함이 느껴진다. 따스한 불빛이 아니라 어두운 커텐 뒤에서 나누는 그들의 입맞춤은 해서는 안될 사랑을 하는 이들의, 혹은 금기의 사랑을 하는 이들의 입맞춤 같다. 따스한 불빛아래 열정적으로 나누는 키스보다 더 애처로워보이고 안타까워보이고 사랑스러워보인다.
 

In my art I have tried to explain to myself life and its meaning I have also tried to help others to clarify their lives. - E.M


뭉크가 말한 것처럼, 그가 설명하고자 했던 삶과 삶의 의미가 그들이 나누는 키스에는 있는지도 모른다. 키스가 언제나 달콤하고, 달뜨는 것일 수는 없으니. 때로는 비극적이고 불안하고 키스를 나누는 순간에도 한없이 불투명한 키스도 우리 삶에는 있는 것이다. 꾸며지지 않은 우리 내면의 모습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로뎅의 키스같은 불안한 이야기가 뭉크의 그림에도 담겨있는 것만 같다.



The Kiss,1901-4,Le Baiser, Pentelican marble, object: 1822 x 1219 x 1530 mm, 3180 kg,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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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새없이 울리던 전화가 잠잠해지고, 허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오늘 나의 하루도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 같다. 뭔가 하고는 있지만 뭘하고 있는지 가끔은 막막해지기도 하는 하루. 피곤하고, 졸린 한주의 화요일.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치열하게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데, 왜 이런 생각이나 하고있는 걸까. 시원스레 질주하지 못해 답답한 이 느낌은 뭘까. 정신한번 제대로 차리기 위해, 충격요법으로 까유보트의 그림을 다시 본다.

Caillebotte, Gustave - The Floor-Scrapers

Caillebotte, Gustave The Floor-Scrapers (1875) Oil on canvas 40 x 57 3/4" (102 x 146.5 cm) Musee d'Orsay, Paris


이렇게 일했는가, 이렇게 살았는가, 두 팔이 뻐근해지도록 오늘 하루 치열했는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바닥을 긁어내는 이들 처럼 내 앞의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 하루가 막막하다고 쉽게 떠벌이던 내 입, 도저히 할말이 없다.

그들 옆에 놓인 힘겨운 노동을 달래줄 술병 함께 기울이며 묻고싶다. 오늘하루, 어떠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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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미술관에서 12월 20일부터 르네 마그리트 전을 하고있다. 대부분 개인소장 작품이 많아 대규모 전시회가 쉽지 않다는 르네 마그리트. 그 수수께끼같은 그림을 집안에 두고 즐기는 사람이 많은 탓이다.

돈이 된다면 정말 한 점쯤은 소장하고 싶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묘한 매력을 준다. '초현실'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그건 그림의 표현방법이 '초현실'적인 것이지 그가 나타내고자 한 메시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감'하고, 그래서 위로받게 되는건 그의 그림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잡아낸 까닭이다. (개블린의 책에서였나 정확하진 않지만, 그의 그림이 정신치료에도 사용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시립미술관 같은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흔치않은 기회이다. 게다가 그게 르네 마그리트라면 더더욱. 내가 최영미처럼 책 판 돈으로 전세계 돌아다니며 보고싶은 그림을 볼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최영미처럼 '시대의 우울'같은 미술기행 책을 써서 여행비를 충당할 능력도 안되기 때문에 (여행하며 책쓰고, 그 책 판돈으로 또 여행짐을 꾸리는 이들은 정말 부러운 사람들이다) 눈 앞에서 하는 이런 좋은 전시회는 놓쳐서는 안될 기회인 셈이다.

내년 4월까지 진행되는 전시회라 아직 여유는 있지만, 오늘 아침 회사 후배 책상위에서 전시회에서 판매하는 듯한 르네 마그리트 탁상달력을 보니 마음이 '動'한다. 그 달력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도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눈길이 더 오래 멈췄다. 염치없이 "줘"라고 말하고 싶었다.

가뜩이나 인간냄새 안나는 사무실 책상위에 스케줄로 가득 적힌 '그냥 주는' 달력이 아니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장식된 달력을 올려놓는다면 꽤나 근사할 것 같다. 그가 풀어놓은 알듯말듯한 알레고리와 비유로 가득찬 사무실 책상위.

Homesickness

나를 르네 마그리트로 인도해준 그림...향수병 (homesickness)

달력은 없으니, 르네 마그리트의 '향수병'이나 프린트해서 붙여놓아야 겠다. 떠나온 자가 느끼는 그리움.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은 비껴서있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잊지 않을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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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수생각'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일부러 찾아보는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메일의 첨부로 보내주곤 한다.

광수생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만화가 실리는 조선일보라는 매체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신문논조를 중화시키는 조선일보의 문화전략의 일환이라고 이라고 할까. 왠지 그런 까칠한 느낌.

그것도 그렇고 만화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이 나에게는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해가 안되는 '그냥그런' 얘기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감동'은 없고, 단 몇초간의 시선만을 붙잡는 카툰.

마지막으로는 (이건 좀 오버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몇년전 신문가쉽란을 장식했던 작가의 '예비군훈련불참'으로 인한 고발사건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어떤 개인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랬다면 할말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일종의 '불성실'로 비춰질 수도 있는 노릇. 그런 사람이 그리는 '삶'을 얘기하는 만화는 진실성을 가질수 없다는 생각. 이것도 선입견인가?

그런대도, 이 한컷의 카툰은 가슴을 울린다. 보내지 못한 편지를 가슴에 안고 절절맸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손이 뻐근해질때까지 꼭 눌러쓴 편지를 곱게 접어본 사람이라면, 편지를 우체통에 넣을때 들리는 '텅' 소리의 울림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한컷의 울림이 남다르지 않을까.

선입견이라는건 역시 이성의 영역은 아닌것 같다. 작가의 감수성. 이메일과 메신저가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 지금, 그의 편지 이야기가 조용히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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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hard Richter - Reading

from 그림창고 2006. 10. 15. 04:36

[1994 Oil on linen 28 1/2" x 40 1/4" (72.4 x 102.2 cm)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리히터의 그림중에서도, 내가 참 좋아하는 느낌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많이 좋아해서 킨코스에서 프린트까지해서 들고다닌적이 있다...

리히터의 그림답게 언뜻봐선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하기 힘들지만,
사진이 잡아내기 힘든 감정선이 느껴진다면 오버일까?
책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경건함 마저 느껴진다...

내가 책을 들고 있는 모습에 이런 아우라가 느껴진다면 좋으련만...
나의 책읽기는 언제나 후순위이거나, 아니면 처절한 어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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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좋은 전시가 있으면 신문로 길을 타고 올라가 성곡미술관을 찾아가곤 했었다. 올라가다가 역사박물관 구경도 하고, 한적한 골목을 끼고돌아 그 근처 구경도 하고는 했었는데. 점심때 시립미술관 앞뜰에서 밥을 먹기도 했었던것 같다.

몇년 전이라면 투표 마치고 미술관 한번 들려볼까 생각이라도 했을것 같은데, 난 어제 사람 바글거리는 톰 크루즈가 보여주는 액션을 멍하니 침흘리며 구경했다. 간만의 극장구경이라 그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내 태도의 차이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오랜만에 찾아온 날이라면 효진이랑 차분히 그림구경하는 것도 좋았을거라는 생각이다.

우연히 시현님의 블로그에서 지석철의 '시간, 기억 그리고 존재' 라는 그림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미술관 순례, 그림에 빠져 지나가는 발걸음 멈추고 시선고정, 한적한 산책. 이런 일들은 그 그림처럼 내가 모르는 사이에 덤프트럭에 가득담아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흘려두고 일상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였을까? 그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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