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다

from 책글창고 2009. 11. 6. 13:25

어루만지다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고종석 (마음산책,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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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이 쓴 어루만지다를 읽은지는 좀 되었다. 읽고나서 몇자 적어보려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보탤 구석이 별로 없다. 우리말의 속살을 긁어내어 펼쳐보인 글에 더 보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감탄했고, 지극히 평범한 표제로 글을 풀어내는 능력에 고개 숙였다. 읽으면서 틈틈히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보았다. 이렇게 한 문장씩 떼어내어 보면 맥락과 동떨어지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다시 보니 발췌해놓은 글로도 힘이 느껴진다. 잘쓴 글은 한 문장안에도 깊이와 생명력을 담고 있다.


가냘픔은 일종의 결핍이다. p49

심지어 자위행위 역시, 그것이 전제하는 것은 위로하는 육체와 위로받는 육체의 관념적 구별이다. p55

손톱은 슬플때 마다 돋고 슬픔은 기쁠때 마다 돋는다. p63

이별이 열정을 키우는 것은 부분적으로 기억의 미화작용 때문이다. 어렴풋한 기억속에서, 먼 곳의 연인은, 이미 죽은 연인은 한없이 고귀하게 치장된다. 그때 부재의 사랑, 곧 그리움은 최고의 사랑이 된다. p111

불교에서는 결과를 내는 직접적 원인을 인이라고 하고 외적 간접적 원인을 연이라 한다. p123

우리들 대부분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신론자다. p130

간지럼의 쾌감은 아무런 고통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간지럼은 부드럽고 절제있는 쾌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쾌감에 견줘, 죄의식이 따르지 않는 쾌감이기도 하다. p148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진 뒤에야, 그 스스럼은 점차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진다. 가슴 두근거림도, 얼굴 붉어짐도, 어눌함도 차차 잦아들어 이윽고 없어진다. 그것은 열정이 탈바꿈을 겪는다는 뜻이다. 열정은 정으로 도타워진다. 스스럼은 정다움으로 바뀐다. p176

어루만짐이라는 형태의 스킨십은 사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사람의 살은 다른 사람의 살과 닿을 때 생기를 얻는다. p234

순전한 사랑은 그 주체끼리 으뜸의 자리와 버금의 자리를 맞바꾸는 행위다. 또는 최소한, 자기 다음의 자리, 즉 버금 자리에 한 타인을 세우는 행위다. p247

의식 속에 한점 그늘, 한 점 구김살, 한 점 주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겪지 못하고 생을 지나쳐온 것이리라.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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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오연호 (오마이뉴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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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노무현 대통령관련 책이 많이 늘었다. 참여정부 비서실에서 펴낸 정책집도 있고, 치밀하진 않으나 그의 일생을 다룬 서평도 있다. 가능한 한 다 읽고 싶으나 아직 단단한 무게의 책으로 엮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듯 싶다. 몇장 더듬거렸는데도 설익은 책들이 보인다. 옥석은 가려지게 될 것이다. 그중 지난 6월 출간된 오연호 기자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꺼내어 들었다.

이상하다. 5개월 남짓 흘렀을 뿐인데도, 꽤 오래전 일인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스스로 잊지 말자고, 그의 죽음을 기억하자고, 그래서 노무현은 아직 현재진행으로 남겨야 한다고 다짐하였기에 그에 대한 기억과 말을 읽고 새긴다.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다.

블로그 왼쪽에 자리한. 그를 기억하자는 작은 배너를 볼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상처와 고통의 기억은 엷여지는 것이 당연하기에 5월의 기억으로 그를 호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 죽음이 주는 무게와 그 일생이 주는 가치는 무거운 짐이다. 말과 말 사이에 오연호 기자가 바라본 노무현에 대한 단상이 내내 기억에 남는다.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그저 노무현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장 한장 넘기며 읽었다. 그게 아니라면 차분히 읽어내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인터뷰가 생생해서인지, 글을 읽으며 그가 아직 살아있을 것만 같은 생각을 했다. 살아서 이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그를 죽음의 이미지로 씌우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의 말이 현재도 '꺼리'를 주고 있지 않은가. 현실에 대한 방향. 어떤 식으로 삶을 대하고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를 세심히 찾아보고 싶었다.

읽으며 또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참 여렸다. 그를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내칠 수 없었고, 끊임없이 그것을 의식했으며 그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을 가슴 아파했다. 그는 여느 대통령처럼 강하지 못했고, 강했으면 했으나 강하지 못하여 지지자를 힘들게 했다. 그런 그를 존경한다. 적어도 그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겸손했다. 부족함을 알았고, 그 부족함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위치에서 어디 그게 쉬운가.

쉽게 읽힌다. 한줄 밑줄도 긋지 않고 읽어내려갔다. 죽은 이에 대한 이런 복잡한 감정이라니. 언제쯤 정리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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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영도 (황금가지,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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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받기전에 추리소설 걸작선을 읽고 있었다. 요즈음 주로 사회과학이나 교양서적을 위주로 읽다보니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정신을 쏙 빼놓는 이야기의 매력을 느끼고 싶었다고 할까. 그런데, 잘 읽히지 않더라. 잘 와닿지가 않았다. 사건에 빠져 몰입이 되기 보다는 생뚱맞게 관조의 시선이 되더라. 이 책에 실린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실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어쩌면 현실이 더 소설같은 시대라 그런가 싶기도 하다. 소설읽는 감성이 퇴화되어버린 것인지 여튼, 다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그래서, 이 책이 부담스러웠다. 우연치 않게 티스토리 대쉬보드를 보고 신청을 했고, 감사하게도 '서평단'에 선발이 되었지만, 하필 여러권 중에 이 책이라는게 난감했다. 공지를 늦게 확인하여 다른 책을 신청했으나 수량관계로 손에 들게된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소설 모음집이었고, 게다가 환상문학 단편선이었다.

환상문학을 접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다. 누나의 서가에는 SF부터 추리소설까지 온갖종류의 소설이 꽂혀있었으나, 한번도 탐해본 적이 없었고, 블레이드 러너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읽지 않았다. 핑계일까. 멍석이 두텁게 깔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을 받아들었으니 서평이란걸 써야 하는데 그게 부담스러웠던 거였다. 책을 손에 쥐고 책장을 넘기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소요되었던 이유도 그것이고.

책은 쉽게 읽혔다. 두툼하게 10편의 소설이 실려있으나, 첫 작품을 읽고 다음 작품에 바로 손이 갔다. 물론 단편선집이다보니 모든 작품이 동일한 무게감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편차는 있다. 평가의 차원은 아니고, 개인적인 호불호라고 해야겠다. 모든 작품의 소재가 신선했다. 소설적 공간을 구성해내는 번득이는 촉수는 다들 파릇하게 날이 서있었다. 어쩌면, 환상문학의 성패가 소재에 달려있지는 않은가 싶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실망스런 작품도 있었다. 아래 짧게나마 적어낸 글들은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다. 

'학교'는 영화시나리오를 연상시킨다. (그걸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구성은 많은 학원영화들에 빚지고 있다. 배틀로얄이 겹쳐졌고, 고사도 겹쳐졌다. 충격적인 결말은 에일리언의 한장면이 생각났다. 아이에 대한 공포가 어디서 왔는지 좀더 생각해보고 싶었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이유는 학교가 가진 알레고리 때문이다. 학교와 사회, 그리고 숲의 대비는 우리의 공포가 어디를 향해있는가를 보여준다. '학교'의 비극은 학교가 아닌 '숲'에 있다. 숲은 두려움의 대상이다가, 삶의 희망이 되었고, 결국은 다시 죽음의 공간이 된다. 결국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고, 사람사이의 관계이다. 이 소설의 진짜 이야기는, 학교가 아닌 '숲'에 있다. 주인공의 죽음이 연민없이 다가온 까닭은 부적응의 관계가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야비한 이야기이지만, 선택은 두가지이다. 적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중간지대는 없다. 그들이 연명할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회가 숲이고 학교이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길이가 아쉬웠다. 흥미로운 소재였고, 이기적인 이타주의. 그 인간 군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으나, 많은 이야기가 남은채로 글이 마무리 되었다. 소재를 끌고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구상했으나 쓰지 않은 것인지, 더 다듬어진 글을 쓰기위한 초고인 것인지 의문이다. 작가가 더 세밀하게 써주었으면 좋겠다. '천국'으로 가기 위한 선행이라는 것이 환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천국'을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대치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행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현실에서, 천국에 가는 점수를 얻기위해 착한일을 하는 이들은 주변을 보듯 자연스럽다.

'노인과 소년'은 한편의 교훈소설이다. 논쟁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 흠잡기도 어렵다. 묵직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머리 탁치는 가르침이 아니라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같은 느낌이다. 꼭 노자 도덕경에 있을 것 같은 얘기. 환상문학이라는 장르가 혼란스러워진다.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얘기라고 할까. 너무 의도가 느껴져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표제작이기도 한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실험소설일까. 몇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반복되고 변주된다. 변주되는 지점은 흥미롭다. 화자는 바뀌지만, 말하는 바는 동일하다. '왜' 반복하는가. '또'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름대로 답을 말하고 싶었으나 명확하진 않다. "현실은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는 현실을 낳고, 그 둘은 서로를 낳으면서 우리의 삶을 만들었다"는 문장으로 힌트를 얻을 수는 있겠다. 이야기는 그렇게 변주되고, 수없이 반복되면서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이야기가 된다. 그게 환상이 아니고 뭘까.

'은아의 상자'는 편지글 형식을 띄고 있다. 상자를 둘러싼 두 친구의 편지글인데, 상자를 놓아둔 친구와 그에 대한 감사 편지 두통이다. 이야기의 초점은 당연하게도 친구의 답신이다. 진수의 편지는 분위기를 점점 고조시켜가며 선혜의 답신에서 '탁'하고 터진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하다. 은아의 상자는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은아의 상자는 보상이었을까. 은아의 상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글이 너무 길어진다. 가벼운 의무감으로 글을 쓰다보니 말이 많아진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 책을 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책장을 넘기며 작가들이 풀어놓는 환상의 공간, 그 이야기들을 즐기면 될 거다. 작가가 창조한 환상적 공간, 그 소재들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더더욱 좋을 듯. 단편선을 읽다보니 두툼한 소설책 한권을 읽고 싶다. 10권짜리 대하소설은 부담스럽고, 탄탄한 단행본 한권. 날도 추워지는데, 꽤 괜찮을 선택이 될 듯 하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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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예수. 두번째

from 책글창고 2009. 10. 7. 22:14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어떤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일 수 있으며,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죽어 하느님이 뭔지 예수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제3세계의 수많은 인민들 가운데에도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이 허다한 것이다.

보수교회에선 이런 사실을 엄격하게 부인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을 타협없이 섬기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태도는 실은 하느님을 자신들의 교회 체제에 가두어 놓으려는 말도 안 되는 수작일 뿐이다. 우리가 한낱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도, 혹시라도 내 생각이 그의 본디 생각에 못 미칠까 걱정하며, 그런 걱정을 함께 전하는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 오만하고 권위에 찬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어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예수전 P68~P69

이 땅의 한국 보수 기독교에 대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관습화된 현대 교회와 교리체계에 대한 강력한 발언이기도 할터이다. 그의 이런 견해가 반갑다. 자신만의 신, 자신만의 교회를 얘기하고 그것만이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라 말하는 신이라면 그런 신은 믿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확실한건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은 그런 협애한 하느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전 도처에 보이는 김규항의 교회비판은 날이 서있다. 강독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간에 뾰족하게 드러나있다. 나 또한 그에 동조하는 입장이라 책장을 눌러 넘기게 된다. 교회가 믿음을 독점할때, 교회를 통해서만이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고 말할때, 우리는 그 말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 혹은 독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는 자들로 하여금 사적이익을 취하기 위함이라면 우리는 과감히 "그건 교회가 아니다"라고 선언해야 한다. 예수가 그랬듯이. 다 그런 거지 뭐. 그렇게 눙칠 일이 아니다. 그 폐해는 역사가 증명하고, 현재 한국사회가 증명한다. 그들은 사회악이다. 

기독교가 지닌 역사적, 공간적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특수성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일이 우리에겐 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그당시 사회체제 내에서 배태된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니 그 시대의 풍경으로 이해하고, 공부해야할 필요도 많을 거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행한 가치를 설명하고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이 땅의 종교지도자들이 해야할 일이 참 많다. 허나 그들은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고, 더구나 그럴 필요도 없는 듯 하다. 그게 문제다.

기독교에서 교리적 특수성을 걷어내고, 예수의 행동을 다시 읽으면 기독교가 다시 보이지 않을까 한다. 거듭 말하지만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와 가능성은 굳어진 기독교를 걷어낼때 획득될 수 있다. 예수의 헌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석해주는 작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김규항의 책이 다 옳은 방향은 아닐지라도 예수전이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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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예수.

from 책글창고 2009. 9. 28. 20:59

예수전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김규항 (돌베개,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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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소식을 들은 후부터 읽고 싶었던 예수전을 읽는다. 읽던 다른 책이 있었는데, 출근길에 읽을 책을 뽑아들다가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이 가벼운 까닭이었다. 짧은 출근길, 버스안에서 잠깐 봤는데도 읽는 맛이 있다. 문장에 허툰 힘이 없이 편안하다. 2장을 읽고 있는데, 읽다보니 신약성경을 세세히 읽고 싶어졌다. 역시나 원전에의 갈증.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그늘 탓인지 성경은 언제나 두고 읽기 꺼려졌었다. 허나, 그야말로 바이블이므로 성경 또한 세상 모든 고전이 그렇하듯이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리라. 예수전을 덮고 신약성경을 읽게된다면 한줄한줄 더듬으며 인간 예수를 읽어내고 싶다. 이 책도 그런 과정과 비슷하다.

김규항의 의도는 명확하다. 기독교로 한정되어있는 예수의 존재를 현실적 관계망으로 끌어내리고 싶어한다는 것. 진정 예수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될 수 있겠다. 예수의 복음과 행동이 그저 교리속에서가 아니라 너와 나의 현실에서 재평가 받을 수 있도록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 온전히 김규항의 재해석에 기대어 이뤄질 작업이지만, 읽으면서 고개 끄덕이게 되는건 일단 그의 해석이 옳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예수를 기독교 교리속으로 점점 가두고, 그를 메시아적 존재로 신격화했어야 하는 이런저런 정황은 이해하지만, 그 때문에 예수의 가치와 가르침이 협소해지는 것은 매번 아쉬움으로 남는다. 예수를 깊이 이해했다면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다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가 이처럼 욕을 먹지 않았을텐데, 현재 상황을 보면 그들의 진실된 이해는 요원한 것 같다.

예수. 인간해방. 인간이해. 애끓는 인간애. 그것이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예수를 그렇게 폭넓게 이해할때, 즉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를 놓아줄때 역설적으로 예수의 저변은 늘어날 것임을 믿는다. 믿지 않아도 감화될 수 있듯이.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예수에게 진정 감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 책에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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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부, 독재정부

from 책글창고 2009. 9. 10. 09:40
어떤 민주주의인가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최장집 (후마니타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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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어떤 완성된 제도나 체제, 그 속에서의 정치적 실천이 아니다. 아무리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라 하더라도 그자체가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 과정 자체가 민주적이지 않을 때 언제나 책임이 추궁돼야하는, 이른바 항구적인 책임 추궁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p79

책의 서두에 실려있는 대담중에서 최장집의 말이다. 흔히 말하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라 할지라도 그 정부의 정책실천과정이 민주적이지 않을때에는 반드시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 그게 바람직하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민주정부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당위 명제이다. 선출된 정부가 민주적으로 작동하지 않을때,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선출된 정부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정당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 책임 추궁의 수단이 없다고 해도, 그래서 민의의 요구에 귀를 닫고 정책을 실현한다면 그 정부는 민주적인 정부가 아니라 권위주의 독재정권과 다를 바가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를 향해 독재정권이라 비판했을때, 청와대 핵심관계자(라고 쓰고 이동관이라고 읽는다)는 비서관 회의에서 이런 말을 전했다. "국민의 뜻에 의해서 530만 표라는 사상 최대의 표차로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마치 독재정권인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발언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틀렸다. 사상 최대의 표차로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라 해도 권력의 실천 과정 자체가 민주적이지 않다면 정당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민주정부는 선출과정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끊임없이 책임지고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런 매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을때, 그런 매커니즘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폐쇄할때 그 정부는 더이상 정당성을 갖는 민주정부가 될 수 없다.

최장집이 소개하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은 '대표, 책임의 연계'이고 본질적인 측면으로 '책임성' 혹은 '응답성'이 강조된다. 이는 선거이후 선출된 정부와 대표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가져야 하고, 통치자는 시민에게 책임지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이것이 없으면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이는 대표와 인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말과 같다.

문제는 현재 한국사회가 선거를 통한 대표선출의 민주성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고해진 반면, 선출된 대표에게 정당한 책임을 묻는 매커니즘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판과 책임을 가차없이 물어야할 정당, 언론, 시민사회단체, 어느하나 헤게모니를 쥐고 발언하지 못하고, 그런 물적토대조차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출된 비민주적 정권을 항해 주인된 당연한 권리로 책임을 물으려 하나 물을 수 있는 수단이 없기에 결국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가 소리를 지르고, 인터넷에서 서명을 하고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일거다. 다시 말해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통해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다. 허나 최장집 교수는 운동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아니고, 정당정치를 강화하는 것이 답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한국 현실을 바라볼때, 그 지점에서 참 답답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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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선망의 서사

from 책글창고 2009. 9. 3. 23:43

전환의 모색: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장회익 (생각의나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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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모색을 읽고 있다. 장회익, 최장집, 도정일, 김우창 네명과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한국과 현대에 대한 진단이다 보니 읽으면서 생각을 함께 정리하고 있다. 이곳에 올려둘지 모르지만, 쓰게된다면 여튼 꽤 길고 재미없는 글이 될듯 하다. 최장집의 대담은 그의 말에 반박과 비판을 하는 심정으로 읽었고, 도정일의 대담은 무릎치며 공감하며 읽고 있다. 당연하게도 최장집 대담에 대한 단상은 트집잡기이고, 도정일 대담에 대한 단상은 스크랩이 되는 것 같다. 이는 어쩌면 최장집의 이야기가 훨씬 민감함 정치사회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고, 일종의 진영론의 입장에서 발언하기 때문인 듯하다.

정치학자와 인문학자의 차이랄까. 그들의 말하기에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도정일의 이야기가 청자에게 훨씬 부드럽고 풍부하게 들린다. 최장집의 이야기는 건조하고, 단단하다. 도정일에 비해 훨씬 단호한 느낌이다. 대학때 최장집 교수의 '민주주의론'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글로 생각했던 것보다 말이 어눌하고 느릿해서 의외란 생각을 했었었다. 말을 글로 정리해놓은 것이라 그때 느낌을 갖기는 힘들지만, 군데군데 어눌하지만 울림을 줬던 그의 강의가 생각이 나더라.

도정일의 대담중에서 깊이 공감한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시장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나오는 말인데, '공포의 서사와 선망의 서사'에 대한 설명이다. 즉 시장전체주의, 현재 한국사회의 자본주의가 어떠한 작동기제로 개인의 삶에 작용하고 있는지를 진단하고 있다. 꽤나 설득력이 있고, 날카롭다. 공포와 선망을 통해 내 삶도 끌려가고 있는 듯 하다. 다를수가 있겠는가. 끝없이 공포를 느끼고, 나 하나는 이 공포를 벗어날 수 있을거라는 선망을 하면서 사는게 현재 한국사회에 발딪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싶다. 섬뜩하고, 억울하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불평등이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불안과 공포라는 문제입니다. '공포의 문화'란 삶의 안정적 전망을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공황심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입니다. 일종의 거세공포지요. 낙오자, 열패자, 노숙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거세에 해당합니다. 거세공포는 불안의 가장 강력한 기원입니다.

공포의 문화는 두 방향의 출구를 갖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에 속절없이 항복하는 방향입니다. 앞의 경우는 공포의 기원을 뒤지고 공포를 일으키는 현실적 조건들을 점검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사회세력들에 비판적으로 맞섭니다. 뒤의 경우는 공포의 기원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우선 공포 그 자체를 벗어날 탈출구부터 찾습니다. 여기서 '선망의 문화'가 퍼지게 되지요. 공포의 문화를 조장하고 대중의 공황심리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착취하려드는 사회세력은 "두려운가? 그렇다면 이렇게 하라"며 공포를 벗어날 방법, 행동지침과 목표, 성공의 모델들을 끊임없이 제시해서 사람들이 그 처방전을 따르도록 유도합니다. 이 고도경쟁시대에 낙오자, 열패자, 노숙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말하는 처방전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 처방전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행복열차의 마지막 칸에라도 올라탈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사람들을 휘어잡을 때 '선망의 문화'는 절정기를 만나지요. 이때 선망의 대상은 돈, 명예, 권력을 다 가지고 있어 뵈는 사람, 우리 시대의 귀족적 영웅, 곧 '부자'입니다.

서사문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시장은 공포를 퍼뜨림과 동시에 희망을 심어주고 너도 잘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길을 열어주는 듯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포의 서사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것이 그냥 두려움만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에 희망을 말하는 구원의 서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에덴서사와 동일한 구조지요. 에덴서사는 추락의 서사임과 동시에 희망과 구원의 서사입니다. 물론 그 구원에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라는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탈출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원의 서사는 선망의 서사이기도 하지요. 동전의 양면입니다.

전환의 모색, 도정일 대담 p21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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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의 삶과 문학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박해현 (문학과지성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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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20주기(관련 기사)를 기념하여 나온 '정거장에서의 충고'. 천천히 읽고있다. 이 시는 생전에 그가 첫 시집의 제목으로 삼으려했었다고 한다. 그랬다면 시집이 주는 무거움이 달라졌을까. 김현이 고른 '입 속의 검은 잎'은 언제나 어둡고 무겁고 슬프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 노제를 지켜보며 '입 속의 검은 잎'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었다. 어떤 기억할 만한 죽음을 앞에두면 언제나 그의 시가 생각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떻게 떠나간 넋을 추억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이 아닌가 싶다.

다시 그의 시집이 미친듯이 읽고 싶어졌다.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그의 젊은 죽음이 없었다면, 신화가 되어버린 그의 부재를 걷어내고 시집을 읽을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지금처럼 기.형.도라는 이름이 주는 비극성, 김현이 말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치열하게 삶을 고민했던, 한국 현대시의 하나의 미학을 세운 시인으로 그를 읽을 수 있을까. 그랬다면 그는 지금처럼 많은 청춘들에게 읽히고 기억될 수 있었을까.

세상을 떠난지 20년이 흐른 시점에서 그 또한 자신 앞에 굳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고 싶어하진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도저한 비극성의 이미지를 벗고 싶진 않을까. 그래서 다시 시집을 읽으며 새겨진 활자 그대로 읽으려했다. 눈, 바람, 물, 빈집, 진눈깨비, 고드름, 안개의 시인. 강렬한 울림으로 다가온 잠언 혹은 선언들. 지금보다 어렸을때 내가 시집을 받아들고 날밤을 세웠던 기억도 잠재우고 현대인의 소외와 절망, 희망없는 세상을 그린 시 그 자체로서 읽으려 했다. 그러자면 내 기억, 그 시집에 내 삶을 투영하며 읽던 시절도 걷어내야 했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시를 읽으면서 처음 그의 시집을 열며 떠올렸던 갑작스런 요절을 지워낼 수가 없다. 죽음이라는 단절을 떠올리며 읽었던 말들을 이젠 날것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쩌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다. 가까운 지인들이 그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시로서 재평가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겠다. 농담을 잘했고, 노래를 잘 불렀고, 이해심많고, 타인을 배려했던 따뜻한 친구 기형도가 죽음, 어둡고, 절망적인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것이 내심 속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그럴 수 없을것만 같다.

퇴근길이었다. 비가 흩뿌리는 지친 밤에 그의 시 진눈깨비가 생각났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으나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그저 익숙함일 뿐이다. 어느새 내 얘기가 되어버린다. 걸음을 옮기며 시선이 흐르는 발끝에는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생각나고 여전히 나는 흩날리는 진눈깨비처럼 결코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기에.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던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 길 위로 사각의 서류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개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지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개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기형도

기형도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말했다. 곧 마감할 삶을 예측한 것은 아니겠지. 더 살더라도 지금까지 했던 경험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던 거다. 그런 탓일까. 그 보다 더 긴 삶을 살고 있지만 문득 살며 시가 자꾸만 겹쳐진다. 어떻게 '입 속의 검은 잎'을 여느 시집처럼 읽을 수 있겠는가. 난 그럴 수 없다. 황인숙처럼 기형도라는 이름이 더이상 나를 울고싶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슬플때 난 그의 시를 호출할 것이므로. 살아있어 힘겨울때 그의 시를 읽을 것이므로.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황인숙 - 진눈깨비2-죽은벗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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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lyn Monroe, 영화 'The Misfits' 촬영장에서, 미국, 1960, HCB1960014W06357/19AC//1



마릴린 먼로의 시선은 그녀를 에워싼 일련의 시선들, 아니 적어도 일련의 겨냥과 쳐다보는 눈들, 유리창에 바싹 다가든 호기심 어린 카메라와 얼굴들 - 두 남자와 한 여자- 속에 걸려들어 있다. 한편 전경(前景)에는 우리들처럼, 카르티에-브레송처럼, 그녀를 향하고 있는 개 한 마리가 보인다. 장식 징을 박은 목끈이 그 개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으며, 그녀 뒤에는 부분적으로 가려진 거울 하나가 무한 반사의 조망을 열어 놓고 있다.

마릴린이 대체 무슨 광고 장면을 찍으려고, 무슨 허구적인 작품에 출연하느라고, 아니면 어떤 초상사진을 찍기 위해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이것은 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The Misfits)>의 촬영장면이지만 사진만 가지고는 그렇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다] 어쨌든, 머리에 쓴 베일과 소박한 의상은 도발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한 인물을 보여준다. 매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매혹이 더욱 가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마릴린 자신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쪽으로, 다른 카메라 혹은 그 어디도 아닌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듯이, 그 매력은 우리들이 아닌 딴 데로 관심을 돌린 그런 매혹이라 하겠다. 마릴린의 시선은 어딘지 좀 피곤하다는 듯, 아니 어쩌면 약간 따분하다는 듯, 그러면서도 입술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의 기미가 서린 채로, 미소가 지워지면서 금방이라도 우수가 밀려들 것만 같이 딴 데로 가고 있다.

또렷하게 오려낸 듯한 얼굴과 네크라인-널찍하지만 절제되고 정확하면서도 신중하고 조심성있는 맨살-이, 여러 시선들의 한가운데에 정지하고 있는 그 이미지, 그 아이콘을 고립시켜 놓고 있다. 그녀의 시선을 아무 관심 없다는 듯 그 여러 가지 시선들을 교묘히 피하면서 구경거리의 표적에서 슬그머니 물러나는, 그 자체가 구경거리가 되어 그 광경의 한가운데에 길 잃은 듯 던져져 있는 형국이다. 

'시선을 주었다'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글 중에서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p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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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릭 졸리오-퀴리 부부, 그들의 집에서, 파리, 1944, HCB1944001W0084AC//8



초상사진만큼 의도성을 배제한 채 찍어야 하는 사진도 없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인공 방사성 원소를 발견했던 유명한 물리학자 부부 이렌과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를 방문했을 때, 일이 순탄치 않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벨을 울리자 부부가 문을 여는 순간 그는 대번에 '장면'을 찍었다. 부부 두 사람이 함께 대문간에 서 있었는데, 수도원 분위기가 풍기는 어슴푸레한 박명 속에 중세의상을 연상시키는 차림새였다. 어색한 표정으로 수줍어서 손을 튀틀고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으로 사진작가를 기다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본인들의 장례식에라도 참석하는 듯이 완연한 사색이었다. 표정이나 뒤편으로 보이는 실내 풍경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들 부부의 어렴풋한 실루엣이 자아내는 장엄함으로 인해 부부는 마치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상인 부부 초상화를 연상케 했다...

문제의 사진은 마치 다른 시대에 사는 듯한 사람들의 풍모를 보여주는 만큼, 모든 예의범절의 관념이 배제돼 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부부가 문을 여는 순간 본능적으로 눈을 카메라의 접안구에 대고 셔터를 눌렀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러고 나서도 형식적으로 사진을 몇 장 찍는 시늉을 했다. 부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찍고 싶었던 사진은 이미 카메라 안에 담겨 있었다. 사실상 첫인상이나 처음 대하는 태도만큼 솔직한 순간은 없는 법이다...

"...졸리오 퀴리 부부는,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앞으로 닥칠 일을 예감하면서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잔뜩 긴장해 있다. 그들의 눈은 보이지 않는 줄에 의해 카메라 렌즈에 묶여 있는 듯 하다. 수태고지 천사가 등장하는 그 어떤 옛 그림도 이토록 불안한 표정을 보여주는 예는 없다..."

세기의 눈,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평전, p256, 피에르 아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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