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Luther King, 에비니저 침례교회(Ebenezer Baptist Curch), 애틀랜타, 조지아 주, 미국, 1961, HCB1961006w06970/78//2



그는 집회와 시위를 위해 모인 군중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느 사무직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다. 그는 일을 한다. 그는 바쁘다. 어쩌면 근심에 잠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편지, 서류 따위의 일상적인 일거리 속에 파묻힌 채 무슨 생각에, 무슨 의문에 푹 빠져 있다. 그게 아니라면 문득 비집고 나온 어떤 추억에 사로잡힌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가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의 이런 모습이다. 그래서 그를 한구석에 밀어 넣고 꼼짝도 못 하게 해 놓은 것이다. 사진가는 부산하게 사진 찍는 행위 속에서 그 인물의 관심이 완전히 떠나 있도록 최대한의 환경을 갖추어 놓는다. 그는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인물을 짓누른다. 마틴 루터 킹이 자신의 이마로 짓누르고 있는 손이 말해 주고 있듯이 그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다. 그의 손은 이마를 받쳐 주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들을, 아니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저지하면서, 그의 시선이 굽힌 팔 우묵한 곳의 허공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동안 오른손은 별달리 하는 일 없이 만년필인지 연필인지를 쥐고 가만히 멈추어있는 역할을 맡는다.

카르티에-브레송은 그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인물에게 반성 속으로, 생각의 반추 속으로, 혹은 근심 속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과중한 책무가 되기 십상인 어떤 무거움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든 시선을 준다. 그의 주변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 전화기, 라디오, 서류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모자, 페이퍼 나이프, 그의 끈질긴 몽상이 발버둥치듯 어른거리고 있는 - 우리는 그걸 느낄 수 있다- 다사다망한 온갖 일거리는, 그 감당하지 못할 압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시선을 주었다'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글 중에서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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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김경미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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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언어, 수(數)

from 책글창고 2009. 5. 7. 14:45

과학의 언어 수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토비아스 단치히 (지식의숲,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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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책이 두권 있었는데, 첫문장을 읽어보고 이 책을 골랐다. '인간' 대신 '사람', '수 세기' 대신 '셈'이라고 번역해놓은 이 책의 첫문장이 맘에 들었다. 책을 고를 때 번역자의 이름을 전보다 점점 더 확인하게 된다. 영화를 볼때 감독의 이름을 확인하듯이 말이다. 딴 얘기지만 몇몇 책에서 번역자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 적이 있어서 기피하는 번역자 X리스트가 있기도 하다. 

몇권의 수학교양서를 읽어보았지만 갈증이 가시질 않았다. 너무 깊은 내용은 이해하기 난망할테고, 그렇다고 수학의 역사를 겉할기로 훑는 책이나 수학자 위인전은 성에 차지 않았다. 나같은 일반 대중을 위한 교양서이지만, 읽으면서 책을 덮고 한번쯤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책은 없을까 싶었다. 이 책은 1930년대 첫 출간되어 1950년대에 개정판이 나온 고전이다. (근데 한국판 번역은 2007년...항상 그런식이다.) 그런 까닭에 현대 수학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1930년대의 생생한 수학적 지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이 책에서 페르마의 마지막정리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난제이다!)

아인슈타인의 격찬보다 머리말에 있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수학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수학 지식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흔치 않은 능력, 바로 아이디어를 흡수하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라는 말이 맘에 들었다. 물론 바로 뒤에 "이 책은 체질적으로 식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위해 쓴 책은 아니다"라고 겁을 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개정판에 추가된 부록 부분은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저자는 이 부분은 건너뛰어도 이해에는 무리가 없다고 했지만, 처음엔 오기를 좀 부려봤는데 아니다 싶어 포기했다. 

책은 12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수 개념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이후 자리표기법, 진법에 대한 얘기, 영(zero)을 다루는데 여기까지는 역사적인 서술이 대부분이라 차분히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이 때부터 정수론의 여러테마들, 피타고라스의 정리, 러셀과 힐베르트, 오일러, 데카르트, 페르마, 칸토어, 데데킨드, 제논의 역설, 산술과 연속성, 무한과 극한, 집합론, 불변의 법칙등 산술의 중요한 테마들이 빠짐없이 튀어나오는데, 한줄 한줄 읽어내는게 힘겨운 부분들도 많다. 당연하게도 이런 수학적 성과를 저자의 설명만으로 이해하기는 나의 지적수준으로는 무리였다. 그렇다 해도 고등학교때 정석책을 앞에두고 느끼는 부담감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종종 훑어 건너뛰어도) 이 책은 재미있었다.

이 책의 미덕은 (역자가 촌평하듯이) 수학이 신과 같은 논리적 완벽성을 가지고 설계된 구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는 점에 있다. 즉, 수의 체계, 자연수, 정수, 유리수, 무리수, 허수(복소수), 초월수등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논박불가능한 완벽성을 기초로 연역적으로 구성된 구조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수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때 인간은 해결불가능한 문제를 수학 내적으로 포섭하기 위해 수 개념을 확장하였고, 인간의 직관과 수 개념을 일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런 과정을 겪어야 했던 수학은 다른 학문처럼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인 결과물이 되기도 했다. 수학이 자연과 동떨어진 논리적 구조체,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은 아닌 것이다. 

대표적으로 무리수라는 수 개념이 그렇다. 밑변과 높이가 1인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를 수로 대응하기에는 기존의 유리수 체계로는 불가능했다. 이를 산술하기 위해 즉, 빗변이라는 연속체를 서술하기 위해 무리수 체계가 필요했다. 요약하면 무리수는 인간의 직관 영역을 산술이라는 영역으로 대응하려하다 보니 새로운 수영역으로 '별수 없이' 확장한 결과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피타고라스 정리의 통약불가능한 빗변'이라고 말하고, 이를 "수로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리수의 존재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P134) 라고 말한다. 

허수(복소수)의 존재역시 무리수와 같은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존재할 수 없는' 수였던 허수는 그 수학적 이용가능성으로 인해 수학내로 편입되었고, 현대 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허구란 적절히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형상" (P254)이며 "복소수라는 허구가 지니는 장점은 오로지 우리가 그 허구를 익숙하게 잘 알고 있다는 점뿐" (P300)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수학의 이런 '보다 인간적인' 모습이 놀라웠다.

이 쯤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해볼 수 있다. (다소 장황하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라 정리하고 넘어간다.) 그렇다면 무엇이 수학적 증명을 구성하는가. 수학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직관주의자와 형식주의자의 대립도 이러한 자연과 그 자연을 해석하려는 과학과의 불일치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의 직관은 연속체를 끊어지지않고 이어져있는 것, 분할할수 없는 것, 부분들로 잘라낼 경우 바로 연속이라는 속성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에 부분으로 분해할수 없는 것으로 파악" (P173)하고 "무제한 분할이 가능한 연속체, 그래서 극미한 양을 얻어낼 수 있는 연속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최종적으로 얻어졌" (P290)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한 수많은 천재적인 수학자의 노력들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칸토어와 데데킨트 같은 수학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무한'에 대한 집요함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결국 무한 개념을 통해 "세계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연속적으로 변해간다는 개념과, 띄엄띄엄한 대상을 셈하면서 생겨난 수 개념, 이 둘사이의 간극을" (P302) 메우려 한다. 이를 통해 수를 무한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 얻어진 존재로 간주하게 된다. 수학이 자체적인 언어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철학적 직관이 녹아있는 실체라는 것을 깊이 새긴다.

결국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수학도 결국은 인간과 자연을 설명하려는 도구이며, 그러한 역사적 실재가 수의 역사라는 것. 피 한방울 나올것 같지 않은 엄밀성 안에 흐르는 긴 자연과 직관의 역사가 어렴풋이 만져졌다. 이런 기분이라면 수학을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진지하게 공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저 왜 그러한가에 대한 질문없이 외우고 푸는 방법만을 배웠던 학창시절이 조금은 야속했다고 할까. 가장 '왜'라는 질문을 했었어야 할것 같은 수학시간에 한번도 제대로 '왜인지'를 묻거나 답해주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비극이다. 

아직도 때때로 고등학교 수학시험지를 앞에놓고 한문제도 풀지 못해 끙끙대는 악몽을 꾸는 주제에 너무 오버질인 듯해서 여기까지 써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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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2000년을 하루앞둔 1999년12월31일 한겨레신문에서 재미있는 기획기사를 내보냈었다. 이름하여 20세기를 기록한 책 100권. 읽어야 했으나 뭘 읽어야 할지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시절이라 무척이나 반가웠던 기사였다. 어쩐지 '대학생이 읽어야할 책 100권'보다는 훨씬 신뢰가 갔다고 할까. 세기말을 코앞에 둔 시점, 새천년에 대한 전망은 난무를 넘어 활개를 치고 있었다. 혼란한 시기, 20세기를 관통했고 다가올 21세기를 이루어놓았을 저작을 돌아보며 한세기를 돌아보는건 변혁의 세기를 살아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열심히 한겨레신문을 탐독하던 시절이라 기사를 보자마자 스크랩해두었었다. 물론 목록을 훑어보며 나의 지적수준의 한계를 절감하긴 했었지만...(책 읽지 않은 내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다.) 웹에서 리스트를 긁어 엑셀 리스트를 만들어두고 진척관리를 하자 싶었다. 이미 20세기를 하루밖에 안남긴 시점이라 20세기가 지나기전 읽어낼 수는 없었으니, 21세기가 시작하는 날부터라도 열심히 읽어보자 다짐했었다. 어떤 책인지도 모르고, 왜 읽어야 하는지도 몰랐으나 읽어야만 할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벌써 10여년이 흘러간다. 그때 만들어둔 리스트를 열어본다. 읽어낸 책들이 꽤 있어 기분이 좋다. 그래도 아직 완료체크가 되어있지 않은 책들이 더 많다. 읽었더라도 이해하지 못한 책들까지 합하면 빈란은 더 많을 거다. 이 책들 말고도 읽어야 할 '20세기를 기록한 책'은 더 많겠지만, 이 책들 한번 씩은 손에쥐고 끙끙대야만 한다. 21세기를 기록한 책 100권도 이미 열심히 쌓여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한겨레 사이트에서 기사를 찾아보고 싶었으나 검색이 되지 않아, 간만에 카인즈에 들러 기사를 찾아봤다. 전문 리스트는 그 아래에 긁어두었다. 혹시나 무엇을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 이 리스트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하나를 읽으면 다른 많은 책들이 가지를 친다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무게중심 구실은 해줄거라 믿는다.


20세기를 기록한 책 100권[한겨레] 1999-12-31 20면  총04면  문화    5799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성의 정치학'까지한 세기가 저문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격랑의 연속이었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컴퓨터 혁명을 낳았고, 이 혁명의 적자인 인터넷은 지구촌을 촘촘한 그물로 뒤덮었다. 과학기술의 어두운 면도 남김없이 드러났다. 대량살상무기 앞에서 인류는 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파시즘의 발호는 '이성의 인간'을 잔인한 살육의 짐승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사회주의 실험은 한때 인류의 희망이었으나, 한 세기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는 중에도 인간은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성하고 모색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모든 기억은 책으로 남았다. 책은 인류의 희망과 절망, 열정과 좌절을 고스란히 문자로 담았다. (한겨레) 문화부는 지난 한 세기를 특징짓는 책 100권을 골라 소략하게 한 시대를 스케치한다. 책 선정은 영국의 서평지 (로고스), 일간지 (더 타임스) (뉴욕타임스), 국내 서평지 (출판저널) 등의 도움을 받아 자체 기준을 더해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편집자

문학
세기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영화와 컴퓨터 등에 밀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20세기 전체를 놓고 볼 때 문학은 역시 주도적인 장르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 등 풍부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나라에서도 역작이 나왔지만, 특히 영국과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 주요한 작품이 출현했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엘리엇의 (황무지), 그리고 울프의 (등대로)와 함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창작 방법을 시대의 주류로 만들었다.

로런스의 (아들과 연인)과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성이라는 주제를 세기의 화두로 부각시켰으며,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라이트의 (토박이), 아체베의 (무너져내린다)는 저항문학의 전통을 이어 갔다. 카프카의 (심판)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카뮈의 (이방인) 등이 삶의 부조리에 눈을 돌렸다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오웰의 (1984년)은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말로의 (인간의 조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조지프 헬러의 (캐치 22)는 20세기가 무엇보다도 전쟁의 세기였으며, 20세기 인간의 조건은 전쟁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였음을 웅변했다.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테네시 윌리엄스나 아서 밀러의 작품들과 함께 영어 희곡의 르네상스를 일구었으며, 만의 (마의 산)과 그라스의 (양철북),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는 각각 독일과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히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렸다면, 루쉰의 (아큐정전)과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루슈디의 (악마의 시)는 '변방'의 목소리를 '중심'을 향해 타전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념과 독점적 진리의 해체라는 세기말 시대정신의 소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문
20세기 인류의 정신은 프로이트와 함께 열렸다. 1900년 태어난 (꿈의 해석)은 인간이 의식의 존재임과 동시에 무의식의 존재임을 '폭로'했다. 프로이트의 표현으로는, 의식이란 기껏해야 무의식의 바다에 떠 있는 섬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안에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또다른 자기가 있다는 깨달음은 인류를 혼란에 빠뜨렸다. 지성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프로이트는 생략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는 거대한 폭약을 내장한 지적 폭발물이었다. 언어가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결합일 뿐이라는 지적, 기표들의 자율적인 체계야말로 언어의 본질이라는 지적은 언어학을 넘어 인문학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구조주의는 소쉬르를 태반으로 삼아 자라난 20세기적 사유의 한 정점이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인류학의 영역에서 '구조'를 드러낸 본격 저작이었다. 구조주의적 사유의 물결은 푸코의 (말과 사물)로, 푸코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록될 것"이라고 토로하게 만든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오이디푸스)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 '구조주의'가 잉태될 무렵 독일에서 후설은 '현상학'을 탄생시켰다. 현상학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통해 실존주의라는 또다른 20세기적 풍경을 착색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으로 이어졌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은 비판이론의 토양에서 자란 다채로운 꽃이었다. 그 한편에서 루카치는 사회주의혁명의 열정으로 (역사와 계급의식)을 썼고, 포퍼는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항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썼으며, 보부아르는 (제2의 성)으로 여성해방의 횃불을 올렸다. 서양이 이렇게 격동할 때 동양에선 펑유란이 (중국철학사)를, 라다크리슈난이 (인도철학사)를 각각 지성의 전당에 들였다.

사회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은 20세기 사건의 맨 윗자리에 놓일 격변이다. 그 선두에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있었다. 그가 32살에 내놓은 (무엇을 할 것인가)는 혁명가라면 놓아선 안 될 필독서였다. 그람시는 감옥 안에서 쓴 (옥중수고)로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안정된 상황에서 혁명의 가능성과 방략을 제시했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자본축적의 정신적 동력을 발견한((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자본주의는 위기를 겪었으나 수정주의라는 형태로 살아남아 번창했다. 케인스의 (고용.이자.화폐 일반이론)은 그 계기가 된 저작이었다. 그보다 먼저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은 자본주의적 노동통제 방법을 과학의 이름으로 제출했다. 자본주의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내부의 모순을 완화시키려 했다(베버리지의 (사회보험과 관련 사업)).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에 이르러 여성해방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고, 킨지의 (남성의 성행위)는 음지의 성을 양지로 끌어냈다.

과학.예술.기타
20세기만큼 과학기술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혁명의 중심이자 극점이었다. (상대성원리)는 250년간 부동의 진리였던 뉴턴의 역학적 세계관을 뒤엎었다. 시간과 공간은 더이상 불변의 좌표가 되지 못했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적 세계관의 단절적 변화를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에 담아냈다. 러브록의 (가이아)는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의 힘을 받아 과학의 영역으로 입장했다. 호킹은 (시간과 역사)에서 천체물리학의 최신이론을 소개했다.

20세기는 간간이 위인을 낳기도 했다. 현대의 성자 간디는 (자서전)에서 비폭력과 관용의 정신을, 맬컴 엑스는 이슬람교에 기반한 흑인해방의 이념을, 남아공의 흑인 영웅 만델라는 피부색이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설파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장차 유럽을 피로 물들일 광기의 집념을 피력했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서양의 예술 역사를 알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최재봉 고명섭 기자 bong@hani.co.kr


I. 문학
1. 로렌스 (D.H. Lawrence),『아들과 연인』(1913)
2. 루쉰 (魯迅, 1881~1936),『아Q정전』(阿Q正傳, 1921)
3. T.S. 엘리어트 (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황무지』(The Wasted Land, 1922)
4.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1882~1941),『율리시스』(1922)
5. 토마스 만 (Thomas Mann, 1875~1955),『마의 산』(Der Zauberberg / The Magic Mountain, 1924)
6. 프란츠 카프카,『심판』(1925)
7.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In Search of Lost Times, 1913~1927)
8. 버지니아 울프,『등대로』(1927)
9. 헤밍웨이,『무기여 잘이거라』(1929)
10. 레 마르크,『서부전선 이상없다』(1929)
11.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1932)
12. 앙드레 말로 (Andre Malraux, 1901~1976),『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 1933)
13. 존 스타인벡,『분노의 포도』(1939)
14. 리처드 라이트,『토박이』(1940)
15. 브레히트,『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41)
16. 카뮈,『이방인』(1942)
17. 조지 오웰,『1984』(1948)
18. 사무엘 베케트 (Samuel Beckett, 1906~1986),『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1953)
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1955)
20. 유진 오닐,『밤으로의 긴 여로』(1956)
21. 잭 케루악,『길 위에서』(1957)
22. 파스테르나크,『닥터 지바고』(1957)
23. 치누아 아체베,『무너져 내린다』(1958)
24. 귄터 그라스 (Gunter Grass, 1927~ ),『양철북』(Die Blechtrommel, The Tin Drum, 1959)
25. 조지프 헬러,『캐치 22』(1961)
26. 솔제니친,『수용소 군도』(1962)
27. 마르께스 (Gabriel Garcia Marquez, 1928~ ),『백년 동안의 고독』(Cien Anos de Soledad, 1967)
28. 움베르토 에코,『장미의 이름』(1980)
29.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30. 살만 루쉬디,『악마의 시』(1989)


II. 인문
1.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꿈의 해석』(Interpretation of Dreams, 1899)
2. 페르디낭 드 소쉬르 (Saussure),『일반 언어학 강의』(1916)
3. 막스 베버 (Max Weber, 1864~1920),『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1904~1905) 
4. 라다크리슈난,『인도철학사』(1923~1927)
5. 지외르지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1923)
6.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 Sein und Zeit, 1927)
7. 풍우란,『중국철학사』(1930)
8. 아놀드 토인비,『역사의 연구』(1931~1964)
9. 마오쩌둥,『모순론』(1937)
10.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이성과 혁명』(1941)
11. 장 폴 사르트르,『존재와 무』(1943)
12. 칼 포퍼,『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
13. 아도르노ㆍ호르크하이머,『계몽의 변증법』(1947)
14. 시몬 드 보봐르,『제2의 성』(1949)
15. 한나 아렌트,『전체주의의 기원』(1951)
1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1953)
17. 미르치아 엘리아데,『성과 속』(1957)
18. E.H. 카,『역사란 무엇인가』(1961)
19.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야생의 사고』(1962)
20.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1917~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 1789~1848, 1962)
21. 에드문트 후설,『현상학의 이념』(1964)
22. 미셸 푸코,『말과 사물』(1966)
23. 노엄 촘스키,『언어와 정신』(1968)
24.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 1901~1976),『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d Ganze, 1969) 
25. 질 들뢰즈ㆍ펠릭스 가타리,『앙티 오이디푸스』(1972)
26. 에리히 프롬,『소유냐 존재냐』(1976)
27. 에드워드 사이드,『오리엔탈리즘』(1978)
28.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물질문명과 자본주의』(Civilization and Capitalism, 15th~18th Centuries /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15e~18e Siede, 1979)
29. 피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1979)
30. 위르겐 하버마스,『소통행위이론』(1981)


III. 사회
1.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무엇을 할 것인가』(1902)
2.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과학적 관리법』(1911)
3. 안토니오 그람시,『옥중수고』(1926~1937)
4. 라인홀트 니버,『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
5. 존 메이너드 케인스,『고용ㆍ이자ㆍ화폐에 관한 일반이론』(1936)
6. 윌리엄 베버리지,『사회보험과 관련 사업』(1942)
7. 앙리 조르주 르페브르,『현대세계의 일상성』(1947)
8. 알프레드 킨제이,『남성의 성행위』(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 1948)
9. 데이비드 리스먼,『고독한 군중』(1950)
10. 슘페터 (Schumpeter, 1883~1950),『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11. 존 갤브레이스,『미국의 자본주의』(1951)
12. 다니얼 벨,『이데올로기의 종언』(1960)
13. 에드워드 톰슨 (Edward Thompson, 1924~1993),『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1963) 
14. 마루야마 마사오,『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64)
15. 마샬 맥루한 (Marshall Mcluhan, 1911~1980),『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 1964)
16. 케이트 밀레트,『성의 정치학』(1970)
17. 롤즈 (John Rawls, 1921~2002),『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
18. 임마누엘 월러스틴,『세계체제론』(1976)
19. 앨빈 토플러,『제3의 물결』(1980)
20. 폴 케네디,『강대국의 흥망』(1987)


IV. 과학
1. 알버트 아인슈타인,『상대성 원리』(1918)
2. 노버트 비너,『사이버네틱스』(1948)
3. 조지프 니덤,『중국의 과학과 문명』(1954)
4. 토마스 쿤 (Thomas Kuhn, 1922~1996),『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
5. 제임스 워트슨,『유전자의 분자생물학』(1965)
6. 제임스 러브록,『가이아』(1978)
7. 에드워드 윌슨,『사회생물학』(1980)
8. 칼 세이건,『코스모스』(1980)
9. 일리야 프리고진,『혼돈으로부터의 질서』
10. 스티븐 호킹,『시간의 역사』(1988)


V. 예술ㆍ기타
1. 헬렌 켈러,『자서전』(1903)
2. 아돌프 히틀러,『나의 투쟁』(1926)
3. 간디 (Gandhi, 1869~1948),『간디 자서전: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1927, 1929)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1927, 1929)
4. 에드거 스노우,『중국의 붉은 별』(1937)
5. 아놀드 하우저 (Arnold Hauser, 1892~1978),『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Art /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1951) 
6. 안네 프랑크,『안네의 일기』(1947)
7. 곰브리치,『서양미술사』(1948)
8. 말콤 엑스,『자서전』(1966)
9. 에른스트 슈마허,『작은 것이 아름답다』(1975)
10. 넬슨 만델라,『자유를 향한 긴 여정』(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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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경제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댄 애리얼리 (청림출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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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낚이며 산다. 특히나 요즘처럼 정보가 범람하는 상황에서 제정신차리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내 선택에 확신이 없는 상황. 물건을 살때 매번 수십번의 클릭질을 통해 세심하게 판단한다고 하면서도 그 끝은 후회로 가득한 상황들. 주식시장을 좌우하는 심리적인 요인들. 전통적인 경제학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금융위기. 자,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인간은 과연 합리적인가. 경제활동은 전통경제학이 가정하듯이 합리적인가. 이성은 믿을만한가. 이 책은 명쾌하게 답을 내린다. "그렇지 않다"라고.

특정한 상황에서 언제든 비합리적이 되기 쉬운게 인간이고, 이런 비합리성은 충분히 예측가능하기 때문에 (따라서 비합리성에 대한 모델링이 가능하다.) 이를 제거하거나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비합리성을 인지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자 정도 될까. 쉽게 말하자면 "내가 몇가지 실험을 통해 알려줄테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낚이지 마세요"라고 할 수 있겠다. 사회제도, 경제제도에 대한 심오한 얘기나, '알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 심리에 대한 분석은 소원하다. 잊지말자. 이 책도 경제학책이니까.

이 책의 미덕은 비합리적인 사례들을 무수히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통찰력 있게 설계된 실험상황은 매력적이다. 사회과학에서 '실험'이 가진 설명력에 의문을 가진다고 해도, 이해할 만한 범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쉽고 재미있다. 실험에 '나'를 대입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재미있는 실험중에서 두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 인상적인 실험은 주간지 구독 선택의 문제였다. 다음과 같은 선택이 있다고 하자. 

1. 한겨레21을 온라인으로만 구독할때는 5만원
2. 한겨레21을 오프라인으로 받아볼때는 10만원
3. 한겨레21을 온라인 + 오프라인으로 볼때는 10만원

이 경우 대부분 사람들 (실험에서는 80%사람)은 3번의 선택을 하게된다. 그런데 다음의 선택을 보자.

1. 한겨레21을 온라인으로만 구독할때는 5만원
2. 한겨레21을 온라인+오프라인으로 받아볼때는 10만원

이 경우에는 3가지 선택이 있을때보다 2번을 선택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낮아지게 된다. 두번째 선택에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장단점. 가격의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주간지를 구독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그 두가지 선택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경우 면밀한 가치판단이 전제되어야 하고 필요와 상황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겨레 21을 오프라인으로 10만원에 구독하는 옵션을 끼워넣었을 경우이다. 이때 판단은 단순해진다. 장단점이 명확한 두개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 (동일 가격에 제공조건이 상이한 경우) 비교하기 어려운 1번의 선택은 '비합리적으로' 배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로 비교하기 쉬운 것만 비교하려는 경향 탓에 3번을 선택하기 쉽다. 2번보다는 3번이 유리하고, 판단이 어려운 1번은 포기하기 쉽다. 

문제는 3번이 가장 합리인 선택이라 믿는다는 점이다. (비교가 어려워 그냥 배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저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비합리적인 선택'이다. 의도적으로 비교하기 쉬운 대상을 끼워넣었을때 우리는 '낚이기' 쉽다. 공급자가 10만원짜리로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2번을 의도적으로 끼워넣는 경우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리에게는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자하는 성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교하기 쉬운 것만 비교하려드는 경향이 있다. p35

두번째는 사회규범과 시장규칙과의 관계였다. 

한 탁아소에서 부모가 아이를 늦게 찾으러오는 일이 잦았다. 늦게 찾으러 오면서 대부분은 매우 죄송해했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궁리끝에 탁아소에서는 늦게 찾으러오는 부모에게 벌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는데, 재밌는 점은 벌금을 부과하자 부모들이 늦게 오는 빈도가 오히려 증가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전에는 죄송해하거나 미안해하던 부모들이 벌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떳떳해졌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이다. 결국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별다른 효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 탁아소에서는 벌금제도를 폐기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늦게오는 빈도도 줄지 않았고, 돈을 받지 않았음에도 이전처럼 미안해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더라는 점이다. 

왜 그럴까. 저자는 사회규범과 시장규칙으로 설명한다. 예를들어 변호사가 변론을 해주는 것은 시장규칙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그 댓가로 '돈'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변호사에게 무거운 물건을 들어달라고 '부탁'했을때는 시장규칙이 아닌 사회규범의 적용을 받게 된다. 이 경우 물건을 들어준 댓가로 돈을 제공하는 것은 (다시 말해 시장규칙을 적용하면) 부적절할 뿐더러 불쾌해 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시장규칙은 '돈'이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돈을 매개로한 등가 교환관계가 성립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는것이 당연하다. 규범이 개입할 여지도 없다. 반면 사회규범의 영역은 인간적인 측면이나, 정(情), 혹은 규범논리가 적용된다. 문제는 이 두 영역이 충돌할때 발생한다. 정책을 입안할때 시장규칙을 적용할 것인가, 사회규범을 적용할 것인가하는 선택의 문제는 특히 중요하다. 가령 내 집 앞 눈 치우기를 하기 위해서 안 치웠을 경우에 벌금을 부과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규범적인 측면을 강조 혹은 교육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까. 정답은 없겠지만, 주의할 점은 한번 시장논리가 개입되면 다시 사회규범으로 회복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회규범과 시장규칙이 충돌하면 사회규범이 밀린다. 다시 말해 사회적 관계는 다시 세우기 어렵다. 다 피어버린 장미처럼 사회규범이 한번 시장규칙에 밀리게 되면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다. p122

이 책은 행동경제학의 측면에서 전통경제학에 대한 비판 사례로는 읽을만 하다. 경제학에서 공리로 간주하는 것들이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며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규칙한것이 아니라 예측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비합리성을 경제학 모델로 도입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예측가능한 비합리성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 부분에서 '자기계발서'의 모습을 띄는데 이게 좀 당혹스럽다.

이 책은 경제활동이 과연 합리적인가, 비합리적인가에 대한 하나의 판단근거로서 한정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예를 들어 넷북을 사야 하는데, 수많은 광고와 광고를 가장한 리뷰를 보고 최종 선택을 내릴때 '과연 나의 소비는 정확한 가치판단을 근거로 한 것인가'를 질문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실험이 보편적인 행위에 대한 엄밀한 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판단의 참고로 보는 것은 의미있다는 생각이다. 비합리적인 기대를 이용하여 '낚시질'하려는 행위자에게 대항하는 방법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책을 꺼내들었을때는 좀더 깊이있는 분석을 원했었는데 재미있었던 만큼 조금은 가벼워서 실망스러웠다. 물론 이 책의 매력은 실험에 있긴 하지만 "인간은 비합리적이니 우리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대목은 아니다 싶었다. 실험의 상황은 기발하고, 도출된 결론도 수긍이 가고, 내가 피실험자의 입장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거다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정작 '왜 그렇게 행동할까'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 없다는게 치명적이다. 답은 그저 실험을 통해 설명하는 식이다. 

행동의 원인, 비합리적인 인간에 대한 설명을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치환하다보니 집단의 영향이나, 사회, 군중의 영향에 대한 고찰도 별로 없다. 저자가 행동주의 경제학자이다보니 사회,인문학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부족한건 아닌가 싶다. 실험주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통제된 실험결과가 과연 인간이 그러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버릴 수 없다. 그것의 보편성, 모델로서의 목적성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 사회과학의 한계로 들 수 있는 '가치중립'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비합리적이다라는 말은 전달되는데 왜 그 상황에서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하게 되는가에 대한 저자 나름의 분석이 없어 깊이있게 공감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매 챕터 끝에서 자기계발서의 뉘앙스로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었던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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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행, 백낙천

from 책글창고 2009. 3. 30. 17:55

주말에 큰맘먹고 집에있는 데스크탑을 정리했다. 이것도 봄맞이 대청소의 일환인데, 정작 집은 치우지 않았다는... (흠) 작업은 디렉토리 정리. 하드 파티션 재분류. 파티션별 사이즈 조정 등등등이었다. 몇시간 투닥거리고나니 많이 쾌적해졌다.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던 다큐멘터리들도 당장 보지 않을것들은 삭제해버렸다. 꽤 많은 파일이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와 EBS의 '세계테마기행'이다. 

그냥 모조리 지우기는 맘이 너무 아파 꼭 보고 싶었던 칠레관련 다큐를 아이팟으로 보기위해 컨버전했다. 비행기로만 30시간이 걸린다는 그 곳을 내 발로 가보는 것은 나의 오랜 바램이기도 하니 내칠수가 없었다. 세계테마기행 칠레편은 소설가 성석제씨가 다녀왔는데, 그 긴 길을 주파하기에는 좀 힘에 겨워하는 느낌이었다. 좀더 길었으면 좋았을텐데. 4편에 담기에는 너무 좁다. 여튼, 1편의 끝에 그가 칠레의 장관을 앞에두고 읊은 시가 한구절 나왔는데, 이 글이 눈을 사로잡았다.

모두 다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되었는가

만남과 헤어짐, 인연에 대한 시인의 말이 곱씹어 볼 수록 혀끝에 맴돌았다. 메모를 해두었다가 구글링해봤다. 이 시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의 '비파향'의 한 구절이다. 성석제의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비)>에 두번째로 수록된 단편 '천애윤락'(天涯淪落)에도 수록되어 있단다. (제목이 시의 한 구절이다) 전문을 읽어보니 과연 그가 칠레의 '초현실적인' 장관을 앞에두고 기억해냈을만 하다 싶게 절창이다. 그때 그 정경이 눈앞에 그려질듯이 생생하다. 칠레를 여행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물가에 배띄워두고 동동주 한잔을 하고 싶어지다니. 

당나라 백낙천(白樂天)이 심양에 귀양가 있을 때에 밤에 강 위에서 비파소리를 들었는데, 비파 타는 그 여인은 장안(長安)의 기생으로 상인(商人)에게 시집와서, 남편이 장사하러 간 사이에 비파로 시름을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백낙천이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비파행(琵琶行)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시인에게 이런 시상을 떠올리게 한 걸 보면 그 여인의 시름이 그리도 깊었나 보다. 하긴 그 여인의 비파소리가 구슬퍼 모두를 눈물짓게 하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늦은밤, 비파소리 애절하게 흐르고, 듣는 이들 모두 서로의 인연을 떠올리며 외로움에 슬피울던 풍경. 이렇게 긴 호흡으로 시를 따라 읽는 것만으로, 잘 익은 술 한병이 그리워진다.



비파행 琵琶行   - 백낙천(白樂天)


-?陽江頭夜送客 楓葉荻花秋瑟瑟。
심양강 머리에서 밤에 손님을 보내니
풍엽적화에 가을바람만 쓸쓸하구나.

-主人下馬客在船 擧酒欲飮無管絃。
말에서 내려 손님의 배로 오르니 
술을 들어 마시려하나 흥을 돋울 음악(管絃)이 없도다.

-醉不成歡慘將別 別時茫茫江浸月。
취해도 즐겁지 않고 (석별의 정으로)장차 마음 아프게 이별하려 하나니
이별의 강은 망망하고 달은 물위에 잠긴 듯 하구나.

-忽聞水上琵琶聲 主人忘歸客不發。
홀연히 강물위로 비파소리가 들려오니
나는 돌아오는 것을 잊고 객은 뱃길을 떠나지 못했다.

-尋聲暗問彈者誰 琵琶聲停欲語遲。
소리를 찾아 어림짐작으로 ‘비파타는 자가 누구인가’ 묻기를,
비파소리는 멎고 뭐라 말하려는 듯한데, 답이 참으로 더디다.

-移船相近遙相見 添酒回燈重開宴。
배를 옮겨 가까이 가서 이편에서 저편으로 서로 마주 만나
술을 더 하고 등을 밝혀 다시 잔치를 여니,

-千呼萬喚始出來 猶抱琵琶半遮面。
천호만환(천 번 만 번 불러)하여 비로소 나타났건만
여전히 비파를 품에 안고 얼굴을 반쯤 가리더라.

-轉軸撥絃三兩聲 未成曲調先有情。
비파의 축을 돌리고 줄을 튕기며 두 서너 소리
아직 곡조도 제대로 타지 않았건만 소리에 사연이 먼저 담겼더라.

-絃絃掩抑聲聲思 似訴平生不得志。
줄과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니 소리 마다 사연이 서려
평생 이루지 못한 정을 하소연 하는 듯하고,

-低眉信手續續彈 設盡心中無恨事。
이마를 숙이고 손길 따라 연이어 비파를 타니
심중의 무한한 사정을 모두 말하는 듯하다.

-輕?慢撚撥復挑 初爲霓裳後六?。
가볍게 눌렀다가 천천히 매만지고 다시 올려치며
처음엔 예상곡을 타더니 후에는 육요곡이로다.

-大絃??如急雨 小絃切切如私語。
대현은 조조(??)하여 그 소리가 세찬 소나기(急雨)와 같고
소현은 절절(切切)하여 속삭임 같도다.

-??切切錯雜彈 大珠小珠落玉盤。
조조(??)하고 절절(切切)하게 뒤섞여 타니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반에 떨어져 구르는 듯하고,

-閒關鶯語花底滑 幽咽泉流水下灘。
때로는 꽃 사이를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날아가는 앵무새 같고
유열(幽咽)하는 샘(泉)의 물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같다.

-水泉冷澁絃凝絶 凝絶不通聲暫歇。
물 줄기가 차게 얼어 붙은 듯 비파줄 또한 엉겨 소리가 끊어지니
얼어 붙은 듯 잠시 비파소리가 끊어져 이어지지 않았다.

-別有幽愁暗恨生 此時無聲勝有聲。
소리가 끊어진 순간 깊은 시름과 맺힌 한이 슬픔이 되어 전해져 오는가?
정적의 순간 소리 없음이 소리 있음 보다 오히려 낫구나.

-銀甁乍破水漿? 鐵騎突出刀?明。
그 순간 은병(銀甁)이 갑자기 깨어져 물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듯
철기(鐵騎)가 갑자기 나타나 칼과 창이 부딪혀 울리듯 곡이 급전하여 바뀌더라.

-曲終抽撥當心劃 四絃一聲如裂帛。
곡이 끝나매 발(撥)을 빼고 비파를 가슴에 안고 줄을 그어대니
네 줄이 일시에 울려 마치 비단 찢는 소리와 같더라.

-東船西舫?無言 惟見江心秋月白。
동쪽의 배도 서쪽의 배도 초연히 말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한데
오직 강물 속에 가을 달 만이 창백하게 비치는구나.

-沈吟收撥揷絃中 整頓衣裳起?容。
침울한 표정으로 발(撥)을 거두어 줄 가운데 꽂고
옷차림을 정돈하고 일어서 얼굴을 가다듬었다.

-自言本是京城女 家在蝦?陵下主。
스스로 말하기를, 본시 경성(京城)의 여자로,
집은 하마릉(蝦?陵) 근처에 있어 거기에 살았는데,

-十三學得琵琶成 名屬敎坊第一部。
13세에 비파를 배워 훌륭히 이루어 경지에 이르렀고
이름이 교방(敎坊) 제 1부에 속했다네.

-曲罷常敎善才服 ?成每被秋娘妬。
곡을 마칠 때 마다 선재를 감복케 했고 곱게 단장을 하면
언제나 추랑의 투기를 받았었지.

-五陵年少爭纏頭 一曲紅?不知數。
오릉의 소년들이 다투어 선물을 머리에 둘러주고
한 곡을 켤 때마다 붉은 비단을 수도 없이 받았고,

-鈿頭銀?擊節碎 血色羅裙飜酒?。
청패(靑貝)로 장식한 은빗(鈿頭銀?)은 장단을 맞추느라(擊節) 깨어졌고
피 같이 붉은 비단 바지는 술을 엎질러 젖었었더라.

-今年歡笑復明年 秋月春風等閒度。
올해도 즐겁게 웃고 명년을 또 그렇게 맞으니
추월 춘풍 세월을 걱정 없이 등한하게 지내었는데,

-弟走從軍阿姨死 暮去朝來顔色故。
동생은 군대를 가고
양모는 죽고 그렇게 세월이 가는 동안 얼굴이 늙어갔네.

-門前冷落鞍馬稀 老大嫁作商人婦。
북적이던 문전은 몰락하여 손님도 드물어지고
마침내 늙어서 시집가 상인의 아내가 되었는데,

-商人重利輕別離 前月浮梁買茶去。
상인은 돈벌이만 중히 여기고 아내와의 이별은 가볍게 생각하여
지난 달에 부량으로 차(茶)를 사러 갔으니,

-去來江口守空船 ?船明月江水寒。
강가를 서성거리며 빈 배를 지킬제
밝은 달은 배를 맴돌고 강물은 차갑기만 하여라.

-夜深忽夢少年事 夢啼粧淚紅?干。
밤이 깊어 홀연히 어린 시절의 꿈을 꾸니
꿈에 울어 화장한 연지가 녹은 붉은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네.

-我聞琵琶已歎息 又聞此語重??。
나는 비파소리를 듣고 이미 탄식하였는데
또 이말을 듣고 거듭 탄식하네.

-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曾相識。
우리는 모두 고향을 멀리 떠나온 불쌍한 사람들일진데
이 같은 만남이 어찌 일찌기 서로 만나 안 사람들 뿐이라고 할 수 있으랴.

-我從去年辭帝京 謫居臥病心陽城。
나는 작년 제경을 떠나온 후,
심양성에서 병들어 누운 몸.

-?陽地僻無音樂 終歲不聞絲竹聲。
심양은 벽지라 음악이 없으니
해(歲)가 다하도록 거문고(絲) 피리(竹) 소리를 듣지 못했노라.

-住近?江地低濕 黃蘆苦竹?宅生。
분강 가까이 사는데 땅은 낮고 습하여 
황로와 고죽이 집 주위를 무성하게 둘러서 있으니,

-其間旦暮聞何物 杜鵑啼血猿哀鳴。
그 가운데서 아침(旦) 저녁(暮)으로 무슨 소리를 들었으랴!
두견새 피 토하는 듯한 울음 소리와, 원숭이의 슬픈 울음 소리뿐.

-春江花朝秋月夜 往往取酒還獨傾。
강의 꽃 피는 아침 달 뜨는 가을밤에
자주 술을 들고 돌아와 혼자 술잔을 기울였노라.

-豈無山歌與忖笛 嘔啞??難爲廳。
어찌 나무꾼의 노래와 촌동의 피리소리가 없었으랴 마는
가락이 맞지 않고 조잡하여 듣기 거북하였다.

-今夜聞君琵琶語 如廳仙樂耳暫明。
오늘 저녁 그대의 비파소리를 들으니
마치 신선의 음악을 듣는 것 같아서 순간 귀가 번쩍 틔었노라.

-莫辭更坐彈一曲 爲君飜作琵琶行。
다시금 앉아 한 곡조 더 타기를 사양하지 말라!
그대를 위하여 ‘비파행(琵琶行)을 지으리라.

-感我此言良久立 ?坐促絃絃轉急。
나의 말에 감동하여 잠시 서 있다가
다시 앉아 급히 줄을 튕기니 곡조가 점점 급해지고,

-?凄不似向前聲 滿座聞之皆掩泣。
전 보다 더욱 더 슬프고 처절한 비파소리에
자리에 앉은 모든 이가 얼굴을 가리고 소리없이 울었노라.

-就中泣下誰最多 江州司馬靑衫濕。
그 중에서도 누가 가장 많이 울었는고 하면
강주 사마인 백낙천(백거이) 나 자신의 푸른 적삼이 제일 많이 젖었다.


전문은 (默昊堂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꼭 들러 읽어보는게 좋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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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시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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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간만에 시집을 샀다. '청춘'이라는 시를 읽고, 서점에서 몇개의 시를 더 읽어본 뒤 주저없이 꺼내들었다. 94년 등단후 오랜시간 모아온 탓인지 꽤 두툼한 심보선 시인의 시집. 어쩌면 두번째 시집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형도 처럼. 시들이 어떤 시간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걸까. 궁금해졌다. 

시집을 여는 첫 시부터 압도적이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있다" (슬픔의 진화) 시인은 말한다. 세계가 없으면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있는 것일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던 하이데거의 말이 떠오른다. 세계도 없고, 존재도 없다는 그의 언어는 비겁해보이지만,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든다. 도대체 시가 세계 혹은 존재를 온전히 담을수 있는가. 그런 척을 한다해도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 식후에 이별하다

시집을 들고 다닌건 좀 되었는데,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시의 마지막 줄을 읽고나면 시선은 다음 장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첫 줄로 되돌아간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 탓일까. 책갈피를 해두고 다시 열어도 언제나 첫장부터 다시 보게된다. 퇴근길이었나. 침침한 눈으로 '식후에 이별하다'를 읽다가, 또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이 시만 계속 읽었다. 이별, 헤어짐. 좁힐 수 없는 간격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을 바라본다. 언제나 그대가 서있는 곳은 열만 세어도 환하지만, 나는 천 만 억을 세어도 빛나지 않는 어둠이거나 폐허이다. 아마도 이 시인의 이별 또한 지독했으리라. 나의 이별은 어떠했던가. 할말이 많이 남는다. 결국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시집 한 구석에 하고싶은 말을 놓아둔다.

심보선을 알게해 준 '청춘'이라는 시는 3부의 처음, 바로 다음에는 '삼십대'라는 시가 놓여있다. 시집의 시간순서가 궁금했던건 그 때문이다. 두툼한 시집에 촘촘히 배열된 시 사이에서 청춘과 삼십대는 기묘하게도 나란히 놓여있다. 삶에서 청춘과 삼십대의 간격이 그러하듯이. 한장을 넘기면 마주치게되는 청춘과 삼십대. 하지만 그 간격은 너무도 크다. 좁힐 수 없는 간격, 낯설음이 느껴진다. 시인의 말처럼 청춘은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고, 삼십대는 "청춘을 껌처럼 씹고 버"린 후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라고 반문하게 되는 시절이 아니었던가. 먹던 껌을 다시 씹는 것처럼 씁쓸하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 청춘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 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 (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고 떠나도, 한 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 삼십대

아직 이 시집을 채 절반도 읽지 못했다. 언제쯤 다 읽을지도 사실 모르겠다.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가며 찔러도 아프지 않을 몸 어딘가에 오래 지니고 다닐 것만 같아 불안하다. 다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은 느낌. 존재도 세계도 담지 않은 이 시들 앞에서 난 자꾸만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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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를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이 있어서 적어본다. 사실 이상(李箱)의 죽음을 더듬어보는 부분이었는데, 시절이 시절이다보니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의 태평양전쟁시절 유언비어 처벌을 명목으로 제정된 치안유지법, 해군, 육군형법의 적용을 받아 처벌된 사례들인데, 놀라운건 이게 밖으로 어느정도 공표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노트나 편지를 검열해서 처벌했다는 점이다. 지금 같으면 이메일을 뒤져서 유언비어 유포죄로 처벌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한걸로 보이는데, 뒤가 구릴수록 그걸 음모론으로 폄하하고, 유언비어라며 처벌하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게 없다. 전혀 개연성이 없는, 그야말로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라면 처벌할 필요조차 없는것 아닌가. 미쳤다고 혀 끌끌차면 그만이니까. 지배권력으로서는 들으면 뜨끔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진실을 향해있을때 처벌할 필요가 생긴다. 아래 사례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중에 시행한 일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씁쓸하다. 미네르바 사건이 자꾸 겹쳐진다.

일본인 와까쯔끼 야스오가 쓴 "일본 군국주의를 벗긴다"라는 책에 실려있다고 한다.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김연수 "여행할 권리" 251p에서 재인용)


속물들은 마음먹고 바보 같은 놀이에나 열중해서 잊어버리는 것이 좋아. 죽으면 부모나 친척이나 국가나 천황이 무슨 소용이냐. 천황 바보 놈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보 같은 머리로 네 놈을 위해 죽었는가.
-가고시마 현의 온천여관에 투숙 중인 제7고교생의 노트. 경찰에서 조사.


무엇이 천황의 자식들인가. 자식들이라면 천황은 왜 이 가엾은 불행한 아이들을 구하려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천황의 자식이라는 거짓말을 해서 자기 밑에 둬두기 위한 것이다. 뭐가 천황이야. 천황이 무슨 살아 있는 신이야.
- 도쿠시마 현 나카시마의 국민학생 4년생이 만주에 사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검열에 걸려 불경죄로 송치,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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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장하준 (부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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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전쟁을 읽고 거시경제 혹은 국제무역과 관련한 책이 더 읽고 싶어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을 골랐다. 국방부 금서사태때 이슈가 되었던 책이라 관심은 갔는데, 작금의 경제상황에서 읽자니 더 흥미롭다. 거시적인 관점, 특히나 국제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때 뉴스의 이면을 추론해보는데 좋은 책이란 생각이다. 본래 영어로 쓰인 책을 다시 한국말로 번역했는데 그게 좀 아쉽긴 하다. 하지만 저자가 한국사람이다보니 한국경제에 관한 실증적인 언급이 많아(특히나 한국 기업에 대한) 이해가 쉽다. 아쉬운 점은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 중언부언이 많고 반대의견을 너무 간략하게 언급하고, 너무도 성의없이 논박해서 당황스러울때가 있지만 풍부한 자료들은 꽤나 공을 들인 발품이 느껴진다.

읽으면서 불편했던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저자는 6,70년대 (나아가 80년대까지 포함해서) 한국의 경제발전 방향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보호무역 對 자유무역의 구도에서 볼때 개도국의 경제발전론의 성공사례로 한국을 들고 있기 때문일거다. 즉, 경제발전론에서 국가주도형 경제발전의 상대적 우위를 증명할 논거로 한국을 자주 들고 있다는 말이다. 싱가포르, 인도, 일본, 중국도 다루고 있으나 논거의 풍성함에서는 차이가 크다. 한국의 특수한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이 이 책을 봤을때는 한국의 발전모델이 부작용 내지는 역작용 없이 이뤄진 것으로 오독할 우려도 있어 보인다. 저자의 논지를 밀고 나가기 위해 사용한 방법론 탓일지도 모르고, 곁가지라 생각해 제외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의 시선치고는 조금 당혹스럽다.

다시 말하자면, 그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개방형 자유무역주의가 올바른 것이었는가, 아니면 유치산업론을 기반으로한 국가주도형 보호무역주의가 올바른 것이었느냐에 대한 답이라면 장하준의 논지에 적극 찬성한다. 단기적인 수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산업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부의 의도적 시장조정과 배분정책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식 모델이 올바른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악랄한' 국가주도의 보호무역주의, 성장을 위한 분배의 철저한 파괴를 기반으로했던 한국의 경제성장모델은 그 결과가 바람직했다해도 그 과정까지 올바르진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장하준이 말하는 국가주도형 발전모델이 역사적으로 봤을때 '당연히' 일인독재, 엘리트주의, 개인 인권파괴 등의 기반위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는 특히나 더욱 심하지 않았나.

물론 논지의 선명함을 위해 알면서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의 시선이 보호무역을 기반으로한 발전모델의 '결과'에만 향해있다면, 그래서 그의 눈에 이면의 부작용과 역작용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점에서는 동의해줄수 없으며 그 논지도 일방적이기에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발전'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가치차이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간만에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책이다. 그런데 읽다보며 내내 든 생각이긴 한데 도무지 국방부는 왜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정했는지 감이 안온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는데도 감이 안오긴 마찬가지다. 목록작성자가 바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지만, 역시나 어렵다. 국방부 장관께서 (생각지도 않게) 자유무역의 신봉자였거나 아니면 그 분의 아드님이 WTO에 몸담고 계신건 아닐까 싶은 어이없는 추측까지 하게 만든다. 뭐, 아마도 이 책에서 찬성하고 있는 개도국의 보호무역주의와 일종의 국가계획경제를 공산주의로 쉬이 치환하지 않았을까 싶고, 또 그들의 '색안경'으로는 이게 반미로 읽혔을거라 생각해본다. 아니면 민영화와 신자유주의를 '전파'할 새정부와의 코드맞추기였을수도 있고. 그들의 얕은 지적수준으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신봉해마지 않는 박정희 및 전두환 시절의 우리 경제는 보호무역주의 및 국가계획경제였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존 갈브레이스가 한 말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데, 공산주의에서는 그 반대이다." 짙은 냉소가 느껴진다. 저자가 말하듯이 그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다는 양비론은 아닐거다. 평등 사회를 지향해왔던 현실 공산주의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일거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대안은 무엇일까. 뭐가 발전일까. 어떻게 생래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을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게 이타적으로 만들면서 발전을 이룰수 있는 모델은 있을까. 그런 질문들. 뜬금없는 전면공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중동의 꼴이나, 작금의 탐욕스런 이명박 정부의 꼴이나, 서울 한복판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어나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면 정말 대안이 뭘까 싶다. 인류라는 족속이 그들 스스로 평등하고 행복한 공간을 만들 능력이나 의지가 있을까 근본적인 회의가 든다고 할까. (이건 나에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존 갈브레이스의 촌철살인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여튼 그렇다. 이런 생각하다보면 세상사가 전부 보잘것없고, 답답해진다. 내 상황도 그렇게 느껴지고 말이지. 그래서 적당히 생각을 닫아걸어야 한다. 이렇게 뭔가 외부로 열려야있어야 할 예민한 촉수가 한없이 달아 없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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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연수 (창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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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정보센터에서 신간이 나왔다길래 4권을 빌렸다. 그중에 한권이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 본래는 그의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그건 구비되어있지 않아서 이 책을 빌렸다. 제목을 보고서는 뜬금없이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가 생각났다. 아직 읽진 못했는데, 조금 훑어보고나니 '읽는 맛'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다크 블루톤에 원근이 느껴지는 여행길 사진, 그리고 그 위에 놓여있는 여행가방 하나. 길위를 부유하는 '여행할 권리'라는 활자. 읽는 이에게 여행 가방을 쥐어주는 것만 같다. 너에게는 생래적인 여행할 권리라는 것이 있으니 어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좋은 표지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표지그림을 보자마나 떠오르는 사진 하나가 있었다. 짐작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신디 셔먼의 무제영화스틸 연작 48번 (Untitled Film Still #48)이었다. 1940년대의 흑백필름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해놓은 것 같은 이 사진은 히치하이커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 한 장이지만, 보는 순간 미스터리하고 숨겨진 이야기가 떠오른다. 언젠가 숨죽이며 보았던 영화의 어떤 장면과 겹쳐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올지 모를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쩐지 불안한 그녀 옆에 놓여진 가방하나. 떠나고 싶은 것보다는 떠나야만 하는 절박함이 읽힌다. 그래서 불안하다.

어떻게 보면 옅은 희망의 그림자를 맡을 수도 있겠다. 떠난다는 것, 그리고 떠나기 위해 무엇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떠나는 길 옆에 여행 가방을 놓아두는 것은 그런 것이니. 허나 여행은 신디 셔먼의 사진처럼 언제나 혼자이고, 외롭고, 불안하지 않은가. 혼자 여행가방을 싸던 기억이 난다. 새해 벽두. 두툼한 여행가방을 메고 문을 나서며 여행할 권리를 누려볼까 싶다.


Cindy Sherman Untitled Film Still #48 1979, reprinted 1998 Courtesy Cindy Sherman and Metro Pictures Gallery © Tate Photograph 76.2 x 101.6 cm

 

"These are pictures of emotions personified, entirely of themselves with their own presence - not of me. When I prepare each character I have to consider what I'm working against; that people are going to look under the make-up and wigs for that common denominator, the recognizable. I'm trying to make other people recognize something of themselves rather than me."
-Cindy Sherman, 'Untitled' Stat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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