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하지 않는자, 모두 유죄 - 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 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
ㅡ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 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서늘해지는 글을 만났다. 다시 읽어도 처음 읽었을때의 서늘함이 생생히 기억난다.

떠올려도 가슴 뜨거워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 이 글을 읽고 쉽게 눈 뗄수 없을 것 같다. 선언처럼 단호하게 얘기하는, 먼저 사랑하지 않아 후회하는 이가 던지는 회한섞인 글을 보며 누군들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만이 순수한 것이라고, 사랑만이 조건없이 이타적일 수 있는 관계라 믿는다면 노희경의 글이 가슴을 칠 것이다. 내 가슴도 울린다.

그런게 진짜 사랑이겠거니 생각하지만 그래도 빠져나갈 틈이 없는 사랑은 위험하다. 사랑이 끝난 뒤안의 쓸쓸함을 기억한다면, 그 아픔을 가슴에 담고 있다면 모든걸 던지는 사랑은 위험하다. 사랑에 모든걸 주는 '그녀가 아는 여자'도 한번의 사랑이 아니라, '매번' 다른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 늘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다시 하기까지 아파야 했던 아픔을 짐작한다면, 보호본능 없는 사랑은 위험하다.
예전에 읽었던 사랑은 지독한...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읽고서 갖게된 생각 때문일까. 사회적 관계속에서 규정될 수 밖에 없는 사랑. 그리고 그걸 감추고 사랑은 순수하다고 믿어버리는 의도적 은폐. 그래서 혼란스러운 사랑.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 생각난다. 미련스레 사랑만 주었던 그녀의 일생이 행복했을까. 정말 나를 버리니, 그가 왔을까.
사랑하지 않는 것이 유죄라면, 그것이 자신에게 사랑 받을 대상을 유기했으니 유죄라면. 모든걸 던지는, 자신을 버리며 사랑하는 것도 유죄다. 사랑뒤에 내가 느껴야할 아픔을 방기했으니 그건, 유죄다.

200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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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추운 아침, 잔뜩 옷깃을 여미며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출근후 책상위에 인스턴트 커피한잔을 올려놓고, 시한편 읽어본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삶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진 기형도.
사랑에 대해 아프지만 날카로운 그의 말이
이 시를 읽을때마다 주변을 떠도는 것만 같다.

200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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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시한편

from 책글창고 2006. 11. 27. 09:18
민들레 - 김상미

《너에게 꼭 한마디만, 알아듣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눈에 어려 노란 꽃, 외로워서 노란 꽃, 너에게 꼭 한마디만, 북한산도 북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골목길 처마 밑에 저 혼자 피어 있는 꽃, 다음 날 그 다음 날 찾아가 보면, 어느 새 제 몸 다 태워 가벼운 흰 재로 날아다니는, 너에게 꼭 한마디만, 나도 그렇게 일생에 꼭 한 번 재 같은 사랑을, 문법도 부호도 필요 없는, 세상이 잊은 듯한 사랑을, 태우다 태우다 하얀 재 되어 오래된 첨탑이나 고요한 새 잔등에 내려앉고 싶어, 온몸 슬픔으로 가득 차 지상에 머물기 힘들때, 그렇게 천의 밤과 천의 낮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예쁜 노란 별, 어느 날 문득 내가 잃어버린 그리움의 꿀맛 같은, 너에게 꼭 한마디만, - 시집 ‘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 시작) 중에서》


이번주 교육이다. 올해 처음가는 업무교육.
월요일이고, 역삼까지 지옥철이고, 비는 오지만
맘은 가볍다.

토요일 신문에서 발견한 시한편,
이런 절절한 사랑시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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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폴 오스터 (열린책들,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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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치 않게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문 팰리스, 미스터 버티고를 손에 잡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신선하고 새로운 글쓰기에 매료되었다가 계속 읽으면서 흥미가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점은 그 소설이 가진 판타지적인 설정 때문이었던 듯 하다. 특히나 미스터 버티고의 약간은 황당한 설정(혹자는 그게 폴 오스터의 매력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은 끝까지 읽어내는데 곤혹스러움을 주기도 했다. 그 당시 대학시절에는 사회과학서적이나 인문, 철학적인 책을 즐겨 읽었고, 대부분은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말하자면 현실에 발 딛고 있는 글들) 텍스트에 눈길이 가있는 상태라 우연히 잡은 폴 오스터의 책은 작가는 인상적이되 책은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소설에 시큰둥 했던 많은 이유들중 폴 오스터의 책도 있었을 거란 짐작은 한다.

그리고 한참 영화를 먹어치우던 시절, 스모크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제목이 주는 모호함, 가벼움, 권태… 크레딧을 유심히 보지 않는 나는 그것이 온전히 웨인왕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 강요하지 않은 웃음, 살아있는 캐릭터들, 있을 법한 이야기… 난 두시간동안 브루클린을 무대로 펼치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져 있으면서도 독립적이지 않고 또 무대 속에서 실타래처럼 얽히는 만만치 않은 이야기 구조. 잘은 모르지만 로버트 알트만 영화도 이러하리라 짐작했던 것 같다. 그 이후 그 영화가 폴 오스터의 단편 소설을 시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아~ 그랬구나”라는 놀라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뉴욕 삼부작’인지 아닌지도 모른채 말이다. 스모크는 그렇게 하나의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일하다가 회사 근처의 생활문화센터를 방문하고는 하는데, 그곳을 휘휘 둘러보다가 열린책들에서 나오는 폴 오스터의 소설들을 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이한 제목의 소설을 꺼내들었는데, 그게 바로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였다. 난 직감적으로 그것이 영화 스모크의 원작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아니나 다를까 책을 열어보니 중간 부분에는 스모크의 스틸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그 사진을 훑어보는 것 만으로 영화의 느낌이 되살아 날 정도였다.

퇴근길에, 일 시작하기 전에, 집에 돌아와 쉬는 시간에 틈틈히 읽으면서 스모크라는 영화는 폴 오스터가 뉴욕타임즈에 게재한 짧은 단편 소설에서 시작했고, 그 소설을 본 웨인왕의 컨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스모크에 대한 얘기부터,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단편이 그대로 실려있었고, 그 뒤는 스모크의 시나리오가 실려있었다. 영화에 대한 세세한 기억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읽으며 그 장면들을 떠올리는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폴 오스터가 영화를 만들어가며 느끼는 점들, 감독과 배우들과 서로 깊이 이야기 하며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인물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을 읽으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적어도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전에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내러티브가 영화적 영상보다 훨씬 더 크게 영화를 떠받치는 힘이 아닐까 자문했던 기억이 난다. 그 반대로 영화가 주는 이야기의 힘이 너무도 빈약해서 껍데기 같은, 그냥 그림에 불과한 영화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건, 영화 속에 내재한 이야기들 ,그 이야기가 나에게 발언하고자 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폴 오스터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이 책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보면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내가 스모크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그 영화 전면에 흐르는 브루클린 사람들, 그들의 일상 묘사에 있기도 하겠지만 더 큰 것은 폴 오스터가 자신의 주변에서 관찰한, 생활 그 자체를 엮어놓은 이야기에 있는 것이다. 꼭 리얼리즘의 겉옷을 입지 않더라도 그렇기에 스모크는, 폴 오스터의 이 책은 체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읽으면서 내 주변을,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도 그 비슷한 이유 때문일거다.

블루 인 더 페이스를 보고 싶다. 구하기 쉽지 않겠지만, 그 영화를 보고나서 그 일상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러다가 나도 내 삶을 빚어내고 싶은 충동이 들지도 모를일이다.

200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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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에게 - 나희덕

from 책글창고 2006. 5. 24. 17:24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 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맨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름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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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울리히 벡 외 (새물결,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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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점점 황량해져 가는데, 사람들은 사랑이 깨졌을 때조차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커다란 희망을 사랑에 걸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온갖 개인적 배신이 난무하는 불쾌한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버팀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음 번엔 모든 것이 나아질 거야"라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은 희망과 절망이라는 두 측면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헤어진 두 사람 모두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각자를 개인화시켜준다. 우스꽝스럽고 진부하고 희비극적이며 때로는 비극적이기까지 한, 온갖 복잡한 문제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모든 것 ... 이 책은 바로 이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쩌면 단지 사람들이 다른 문제로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랑', 혼갖 기대와 좌절에 짓눌려 버린 이 '사랑'이야말로 전통이 해체된 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새로운 삶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희망, 배신, 갈망, 질투로 나타날 수도 있다. 독일인들처럼 심각한 국민들까지도 괴롭히고 있는 이 모든 중독들 말이다. 사랑이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야 말로 현 상황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中 24쪽-25쪽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지음


지하철에서 이 책을 뽑아들었다...빌린건 일주일정도 됐지만...첫장을 넘기는 곳이 사람 그득한 지하철 1호선이라는 점은 조금 아이러니 하다...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사랑은 지독하고, 그렇지만 지독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무엇'이다...아직 첫부분도 채 읽지 못해서 뭐라 말한다는 것이 무리있는 것을 인정하지만...이건 나의 오랜 버릇중의 하나이다...한권의 책속에서 저자가 오직 변함없는 일관된 생각으로 쓰는 것은 아니듯이 (물론 저자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더더구나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따라가면서 달라지는 내 생각의 결을 떠보는 것도 의미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항상 오독의 위험을 지니고 있고 또 매번 그래왔지만...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사실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책을 읽어본적은 없다)와 그의 아내가 함께 쓴 이 책은 어디선가 한번쯤 보았을 '통속적인' 제목을 지니고 있다...이건 그들의 의도였을 것이라 짐작한다...어쩌면 내가 끄적거린 시한줄, 글 한조각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우습게 박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다...이건 그들이 이 책이 지극히 사회학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을 피하고 적어도 사랑을 다루는 방식에서는 다른 분위기를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풍부한 인용구들도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이 주는 '낭만'처럼 사랑에 대한 내밀한 분석은 아닐것 같다...(감상적인 측면은 아니라는 것이다...그걸 알았다면 이책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지침서도 아닐것이다...저자들은 분명 구조와 사회속에서 규정되어왔던 인간이 아니라 '개인화'라 이름지워진 사회적 변화속에서의 인간을 다루려 하는 것 같다...하지만 그들이 사랑은 다루는 방식은 기존의 도덕, 윤리, 종교의 성스런 영역이 아니라 사랑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개인적인 영역으로 전이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이즈음의 혼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사랑에 대한 혼란은 그러한 사회적 변화 맥락속에서 개인에게 감당하기 힘들게 증폭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 아닐까...

내가 앞부분을 조금 읽고 끄적이는 이유는 '벡' 부부가 우리가 흔히 사랑에 기대려하고, 사랑의 영역에서만큼은 모든 사회적 권력관계, 경제적 생산관계, 계급질서를 배제하고 '고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앞의 인용글에서 보듯이 우리는 사랑에 항상 희망을 품고 깨어진 사랑 앞에서도 '새로운 사랑'을 해결책으로 떠올린다...우리는 삶속에서 늘 부딫히고 겪게 되는 사랑의 문제들은 온존히 나와 너라는 대인관계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결혼은 사랑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아주 절박하게) 사랑은 언제나 순수하다고 믿고자 한다...그래서 늘 사랑은 '지독하게도 혼란스럽다' 문제의 원인은 다른데 있음에도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감추고자 하기 때문이다...왜냐면 사랑은 이 각박하고 황량한 사회속에서 우리가 돌아가야할 그리고 위안을 얻어야할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믿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사랑의 혼란스러움을 다르게 바라보고자 하는 듯 하다...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은 성채처럼 굳건히 우리를 '저 푸른 초원위에서'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라...사회적 관계속에서 이미 규정되고 사회의 혼란함...인간의 관계 변화, 노동 환경 변화, 사회적 제도의 변화에 따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말이다...그래서 새롭게 변해가는 사랑의 관계, 사랑속에서의 관계를 '정상적인' 혼란으로 바라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써놓고 보니 너무 나간거 같다...이 쯤되면 거의 초절정 '오독'과 니맘대로의 '독해'를 버무려 놓은 것 같다...뭐 다 읽지도 않았는데 당연하겠지만...저자들은 기분 나쁘겠지...상관없다...어차피 책을 빌어 끄적이고 싶었을 뿐이니까...눈치 챘겠지만 책을 핑계로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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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상처

from 책글창고 2006. 5. 23. 01:07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허수경 (문학동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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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내 속 - 허수경

녹차와 아주 친한 아는 분이 언젠가 물의 상처에 대해 들려주셨다. 물은 서로 부대끼며 흘러가다가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또 상처를 받는다. 녹차를 끓일 물은 그러므로 그 상처를 달래주어야 한다. 물을 두서너 시간 전에 받아두어라. 그런 다음 물을 끓이는데, 물은 또 끓을 때 상처를 받는다. 그러므로 끓고 난 뒤 물을 미지근하게 식혀라. 모두 물의 상처를 달래주는 일이다. 그런 다음 차에 물을 부어라.

내 속이란 얼마나 컴컴한가. 아마도 물에게는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제일 상처 입는 일은 아니었을까. 흐르다가, 끓다가 입은 상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진탕에서 입는 상처...

허수경의 『길모퉁이의 중국식당』中에서...


내가 자주가는 인사동의 지대방에서 '세작'을 시키면 여러개의 잔이 나온다. 정확한 잔의 용도를 몰라 헤메곤 했는데, 그래서 그 잔중 몇개는 쓰지도 않고 보온병의 물을 다 우려 마셔버렸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그 잔중에 하나는 뜨거운 물을 식히는 용도라는 걸 알게 되었다. 뜨거운 물보다는 조금 식은 물에 녹차를 잘 우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허수경의 이 글을 읽으니 녹차에 물을 식히는 잔이 필요한 이유를 이제서야 알겠다. 팔팔끓인 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그 잔이 필요했으리라. 다음에 지대방에 가면 물이 식을때까지 그 상처가 아물때까지 차분히 기다릴 수 있을 것만 같다.

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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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 김정환

from 책글창고 2006. 5. 22. 17:18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황토길을 그리워하듯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이제 초라히 부서져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져버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 바 몰라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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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 마종기

from 책글창고 2006. 5. 22. 17:16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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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 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198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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