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변증법

from 책글창고 2008. 12. 18. 12:58

1968(희망의 시절,분노의 나날)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타리크 알리 (삼인,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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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크 알리가 쓴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을 덮다. 68년 혁명의 기운에서 뭉클함을 느끼기도 하고, 그 시대의 희망에 감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은 답답함이 더 컸다. 공동체주의, 국제주의, 인간애, 문화혁명. 1968년 전세계를 달구었던 이념들이 지금 어떤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가. 결국은 실패한 혁명이 되어버린 68년, 그후의 벌어진 상황은 그 시절을 낭만적인 시선으로 보게 한다. 그게 답답했다. 변혁이나 연대가 낯설어진 '차이의 문화'를 강조하는 세상. 무관심, 수동성, 신중함, 보수적인 경향들이 '개인주의'의 외피를 쓰고 앉아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해 등돌리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자기 자신의 관심 영역 너머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이것이 대중을 바보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러한 과정은 철저하게 반민주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은 진정한 정보를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독점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타리크 알리의 지적이다. 읽으면서 뼈 아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리는 풍요, 다양성은 변혁의 가능성, 실현가능한 정치를 '이미 끝난 것'으로 치부하고, 삶의 고통을 끊임없이 감추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다. 옅은 체념과 한줄기의 비판일지 모르겠으나, 매년 최면처럼 지나치는 크리스마스를 한번쯤 뒤집어 보고 싶어진다. 이 책에 실려있던 의미있는 글 한편 '크리스마스 변증법'을 옮기면서 다시 곱씹어 본다. 크리스마스는 즐겁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위해 우린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왜 다른 날들은 '크리스마스처럼' 즐거울 수 없는지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전형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선물, 칠면조 고기, 푸딩, 장식, 눈, 축제 분위기 그리고 술 등.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친숙하고 매년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크리스마스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것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향락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망각해 버릴 때는 과연 무엇이 정상적인 미덕인가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이 매우 병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바로 이러한 보편성과 중요성 때문에 크리스마스도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공동축제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즐기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후기 자본주의의 축제들은 부족 사회와 봉건 사회의 축제 못지않게 사회의 결속과 통합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제공한다. 억압적인 세계에서도 풍요의 계기들은 존재한다. 그래서 억압을 무시한 축제와 억압의 축제가 공존한다.

여기에 크리스마스의 변증법이 있다. 크리스마스는 서양의 가장 위대한 음악과 미술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크리스마스가 고통받는 사람들의 깊디 깊은 염원, 즉 평화와 행복과 좋은 음식과 사회적 평등과 상품의 자유로운 향유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매년 한겨울, 그리고 연말에 이러한 에너지들이 모두 분출된다. 그러나 선사 시대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해방된 감정의 표현은 사회적 儀式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한 의식의 기능은 기존의 사회 구조를 파괴하지 않은 채 인간의 감정을 용해할 수 있는 통제된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들을 제도화함으로써 크리스마스의 해방은 통제된다. 정신없이 기뻐하며 소리치고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사랑을 나눌 때 사람들은 선택해야만 했다.그러나 크리스마스는 그것들을 정돈시키고 의례화한다. 일 년 중 단 하루만 이러한 것을 축하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 날에는 표현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로 자유를 표현하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의 표현이다. 크리스마스의 행복은 사회의 불행을 감추고 있다.

여기에 크리스마스의 변증법적 의미가 있다. 행복에 대한 욕망은 고통의 도구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가지런해진다. 그리고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상징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지닌 비판과 해방의 내용을 망각하게 만들기 위해 세심하게 이용된다. 제도화된 행복을 격파하는 일은 인간을 신화에서 구출하고 구원을 신이나 자비에 맡길 필요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희망을 의식적인 역사적 행동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분명히 독이 없는 크리스마스의 외피 속에는 억압과 함께 해방과 혁명에 대한 갈망도 발견된다. 청교도들은 그것을 금지했고 쿠바 사람들은 그것을 뒤로 미루었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크리스마스는 이제 후기 자본주의의 형태로 정돈되어 버린 혁명적 잠재력의 해방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물론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다.

프레드 할리데이 '블랙 드워프' 1968년 연말호
타리크 알리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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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세기의 눈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피에르 아술린 (을유문화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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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uila degli Abruzzi (1952) 곰브리치는 그의 책 서양미술사에서 사진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브레송의 이 사진을 소개했다.



사진이란 감각과 정신이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행위이다. 사진은 시각적으로 표현된 세계이며, 끊임없는 추구이자 질문이다. 동시에 사진은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확인 행위이며, 이런 사실을 나타내거나 의미하는 형태들을 엄정하게 조직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파인더를 통해 분할하는 현실 속에서 대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도구는 이를테면 시공에 그리는 크로키 노트나 매한가지이다. 카메라는 삶을 제시되는 그대로 포착하는 놀랄 만한 도구이다.
앙리 카르띠에 브레송 평전 p412


테크놀로지 시대를 맞이하여 곳곳에 이미지들이 넘쳐나는대도, 그는(브레송) 점점 더 사진작가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느낀다. 만 레이가 스스로를 "포토그라프(fautographe)" '허물을 가진 사진작가'라 칭하고, 두아노가 자조적으로 "후튀그라프(foutugraphe)" '끝장난 사진작가'라고 했던 농담도 더 이상 입에 올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시중에 카메라가 넘쳐나지만, 진정한 사진작가의 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형국이다. 너무 많은 이미지가 이미지 자체를 죽인다. 그는 이미지란 말을 문학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데생은 기초를 이루는 반면, 사진은 그저 도구를 사용해서 이룬 즉석 데생인 셈이다.
앙리 카르띠에 브레송 평전 p447


삶, 그리고 시선.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그에게서 호기심이 사라지는 날은 바로 그가 죽는 날이다. 본다는 것은 곧 습관에 맞서서 싸우고, 타성을 벗어던지며, 의외의 순간에 자기를 끊임없이 내던지고, 충동에 복종하며,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비례를 포착하는 일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언제나 강조하듯이, 바라는 보되 식별하지는 않는 것이다.
앙리 카르띠에 브레송 평전 p402


틈틈히 읽었던 카르티에 브레송의 평전을 덮는다. 읽으면서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두었던 수많은 구절중에서 세개를 옮겨본다. 특히나 마지막 장은 한구절 한구절 쉬이 넘길 수 없었다. 그래서 포스트잇이 수북해졌다. 본다는 것,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은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찰나의 시간을 분절하여 그 안에 시간을 영원히 담아두었던 그의 사진에 한없는 존경을 느낀다. 그의 사진집을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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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를 다시 보고 있다. 불끈 솟아오르는 열정. 유쾌하고 멋진 그들. 볼 때마다 그리운 북산의 선수들. 이 책을 다시 펴보는 이유다. 중학교 때였을거다. 슬램덩크가 소년챔프에 연재됐을때가. 만화책이 나오면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잔뜩 모여 한장 한장을 함께 봤었다. "야, 아직 안봤어 넘기지마" "너 빨리 좀 봐 임마" 진풍경이었다. 책상위에 만화잡지 하나가 올려져있고, 그 주위를 아이들이 잔뜩 모여 한컷 한컷의 움직임에 탄성을 지르던 교실. 그만큼 슬램덩크는 그 당시 아이들의 젊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슬램덩크, 그리고 마지막승부가 만들어놓은 '농구'에 대한 갈망. 지금 중고등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90년대 농구는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NBA의 조던이 있었고, 농구대잔치에는 이상민, 문경은, 전희철, 현주엽이 있었다. 겨울이 되면 대학팀이 실업팀을 꺾어버리는 반란이 있었던 농구대잔치의 열기. 그리고 장동건이 있었고, 심은하가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의 BGM은 당연히 마지막 승부 :) 또 강백호가 있었고, 서태웅이 있었고, 정대만이 있었다. 그런 로망에 우리 또래는 너도나도 농구공을 두드리며 학교를 다녔다.

중고등학교때 점심시간이 되면 몇개있지도 않은 농구코드는 발디딜 틈없이 붐벼댔다. 농구잘하는 선배들의 '빅게임'이라도 있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운동장 코드를 빙 둘러싸고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구경했다. 농구잘하는 친구는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너도나도 '스타 농구공'을 만지작 거리며 멋진 레이업, 깔끔한 3점슛을 꿈꾸곤 했다. 그런 우리들을 슬램덩크 세대라고 불러도 될까. 명작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는 이 농구만화는 그렇게 우리를 뜨거운 농구코드로 몰아갔다. 몸과 몸이 부딪히는 진한 우정과 사랑이 있는,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있는 그 코드 말이다.

다시 슬램덩크를 읽으며 인상적인 장면들을 찾아봤다. 멋진, 그리고 기억할 만한 장면들이 너무 많아 뽑는게 무의미하다고 해야겠다. 그저 농구를 통해 사회를 배웠던, 지금 보아도 깊은 울림을 주는 '촌철살인' 장면들. 다시 읽을 때마다 슬램덩크가 주는 느낌은 그때 내 상황에 따라 참 달랐던 것 같다. 같은 영화를 다시 봐도 그때마다 다가오는 느낌이 다른 것처럼. 다양한 인간군상.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만화라 그랬을 거다. 중고등학교때 처음 읽을때는 그저 재미있었다. 공부가 유일한 일이었던 시절이라 답답함을 풀어주는 슬램덩크의 뜨거움이 좋았다. 농구를 잘하고 싶었고, 농구잘하는 친구가 부러웠던 시절. 난 서태웅이 제일 좋았다.

대학을 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에 힘들어하고, 사랑을 하고, 때론 사람에 상처받아 맘을 닫아놓기도 하고, 쓰린속에 소주를 부어가며 아파했던 시절. 다시 펴본 슬램덩크는 북산팀의 진한 우정이 수놓아져있었다. 믿음. 함께 간다는 다짐.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그들이 그리웠다. 더 뜨거워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다섯명이 모여 서로를 믿으며 단단해져가던 그들이 그렇게 보기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덩그라니 내던져지고 다시 읽은 슬램덩크에서는 전보다 훨씬 더 안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급해하지 않고 선수를 믿고 이해해주는 안선생님. 이 분이 나의 상사였으면, 그리고 후배들에게 나도 이런 선배였으면 했다. 다시 읽는 슬램덩크는 안선생님의 모습 하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포기할 수 있는 순간에도 용기를 주고, 조용히 지켜봐주는. 그리고 선수 하나하나를 누구보다 믿어주고 믿으면 끝까지 바라봐주는 안선생님. 강백호가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었던것. 그리고 북산의 그들이 그렇게 강할 수 있었던건 뒤에 서있던 안선생님 때문이라는걸 이제는 알것 같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누군가 내가 지치고 힘들어할때. 그리고 좌절할때, 기대만큼 해내지 못해 괴로워할때,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힘겹게 꺼낼때. '다음엔 잘하게' 이렇게 말하지 않고, '그럼 쉬울줄 알았어?' 이렇게 말하지도 않고. '뭐가 잘못됐는지 확인해봐' 이렇게도 말하지 않고. 그저 '대만군,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까지 가라앉아있다가도 그런 말해주는 사람 앞에서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다. 믿어주는 것. 바라봐주는 것. 너의 존재가 힘이된다고 말해주는 것. 쉽지 않기에 더욱 그리운거다. 다시 편 슬램덩크를 덮으면서 하는 생각이다.


정대만과 채치수의 뜨거운 하이파이브.


강백호의 자신감. '막을 수 있다면 한번 막아보시지' 어쩌면 어처구니없는 자만이지만. 살면서 이런 말 해본적이 있었던가.


더이상 강백호가 우습지 않다. 그가 그립다.


'왼손을 거들 뿐'과 함께 인생을 말해주는 아포리즘.


골밑은 우리사는 세상이 아닐까. 발 디딜틈 없이 빼곡하게 경쟁해야 하는. 전쟁터. 치열해야 한다고 채치수는 말한다.


그래. 너희들은 강했다. 강해졌다. 서로로 인해서.


능남과의 게임이었던가. 상대가 강팀이지만, 너희들도 강하다며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안선생님.


뜨내기 백호를 처음 실전에 기용하는 안선생님의 용병술. 워밍업이 뭔지 모르는 강백호를 워밍업하라며 무릎을 쳐주는 안선생님이다.


이 말을 한번도 놓지 않았다. 무한신뢰. 기대. 믿음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유명한 장면. 단념하면 모든게 끝난다. 포기하는 순간 모든것은 끝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안선생님의 말. 명장면. 이 장면을 보면 항상 두주먹을 불끈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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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평전을 읽고있다. 사둔건 꽤 오래되었지만, 읽은지는 며칠되지 않는다. 사실 아껴읽고 있는 중이라고 해야 정확할 거다. 미술, 초현실주의, 아프리카여행등 브레송 인생의 가치관 형성기는 조금 더디 지나갔다. (수려한 그의 인맥은 부럽기만 했다.) 그러나 사진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카메라를 잡기 시작한 시절의 이야기는 읽는데 설레기까지 한다. 그 부분을 읽다가 눈에 띄는 이야기가 있어 스크랩해봤다.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사진의 거장. 브레송의 사진작가로서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진은 과연 어떤 것일까. 무엇이 그를 사진작가로 인도했을까. 평전에는 사진이 삽입되어있지 않아 호기심을 누를 길이 없어 찾아본 사진. 마틴 문카치가 찍은 탕가니카 호수로 뛰어드는 아이들. 흑백으로 표현된 강렬한 에너지가 가슴 가득 들어온다. 뜨거운 아프리카의 대지와 호수가 느껴지는 사진. 꿈틀대는 삶의 역동이 녹아있다. 이 한장이 브레송에게는 잊지못할 '결정적 순간'이었던 것이다.

피에르 아슐린이 그려놓은 브레송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가 그토록 찍고자 했던 사진이 어떤 것이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진이란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키는 일이란 사실" 그에게 사진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압도할 만한 한 장의 사진을 도저히 잊을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은 그 사진을 처음 봤을대도 그렇지만 나중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어찌나 감동적이었던지, 카르티에 브레송의 생애는 그 이전과 그 이후로 갈릴 정도이다. 그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기막힌 조형미로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은 오로지 이 사진 한장뿐이다.

이 사진은 1929년과 1930년 사이에 찍은 것으로, 잡지 '포토그라피 Photographies'에 수록되었다. 사진작가는 마틴 문카치였다. 처음엔 스포츠 사진을 찍다가 장거리 르포사진작가가 된 인물이다. 그는 자기가 가진 철학을 몇 마디 말로 요약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현상을 1천분의 1초 동안 포착한다. 바로 이것이 르포 사진의 원칙이다. 1천분의 1초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이 이미 본 것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르포의 실천적 측면이다."


Martin Munkacsi, Boys running into the surf at Lake Tanganyika, ca. 1930, © Joan Munkacsi, Courtesy of Ullstein Bild



문제의 사진은 흑인 청소년 세 명이 탕가니카 호수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뒤에서 포착한 것이다. 이 사진은 카르티에 브레송이 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만큼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가 밤마다 꿈에서 만나는 아프리카가 담겨 있고, 초현실주의자들에 따르면 은밀하게 무의식에 잔뿌리를 뻗고 있다는 깊디깊은 바닷물이 재현돼 있고, 실루엣과 모래 언덕과 파도 거품이 자아내는 발군의 구도를 갖췄고, 움직임과 젊음, 에너지, 속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삶, 바로 삶 그 자체가 약동하는 사진이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 사진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평생토록 한순간도 잊지 않는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사진이란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키는 일이란 사실을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유일하게 영향을 주었던 사진이다. 거기엔 강렬함과 솔직함, 환희, 경이가 담겨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눈이 부실 정도이다. 형식의 완벽함, 삶의 의미, 남다른 전율감.....나는 어떻게 이런 사진을 기계로 찍을 수 있었을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누가 내 엉덩이를 세게 걷어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뭘 하고 있어, 이 게으름뱅이!'"


Blind Woman, New York, photograph by Paul Strand, 1916. This photograph appeared in Camera Work in 1917. Copyright 1971, Aperture Foundation, Inc., Paul Strand Archive



한 사진작가가 본의 아니게 다른 사진작가의 길을 인도해준 셈이었다. 사진 한 장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이 사진을 대하고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워커 에반스는 폴 스트랜드의 '여자 맹인 Blind Woman'을 보고서 했다. 나중에 가서 수많은 사진의 거장들이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러저러한 사진들을 놓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 사람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피에르 아슐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평전 p110~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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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여, 침을 뱉어라

from 책글창고 2008. 9. 22. 12:26

김수영 평전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최하림 (실천문학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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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여 견디기 힘들었던 20대. 시로 말하고 싶어 몇날 밤을 뜬눈으로 세운 적이 많았다. 시로 적어두면 누구든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 막연한 희망으로 하얀 백지같았던 노트를 채워가던 그 시절. 부끄럽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시를 적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그 시절, 그 노트들. 지금 들춰보면 알수없는 두려움과 창피함에 채 한편을 읽어내려갈 수 없는 글들이 되었지만, 그때 그 시들은 고스란히 내 삶이었다.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다.)

김수영 평전을 읽고 나서였던가. 시를 끄적이던 내 손이 부끄러웠던 건. 그리고 감히 시라고 말할 수 없어 노트를 채우던 내 손을 거둬들였던건. 치열함이 결여되어있던, 그저 감상에 불과한 나의 시들은 너무도 가볍게 무의미로 날아가버렸다.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시들이 품고 있었던 의미, 김수영이 시를 쓰며 고민했을 숱한 시간들을 생각하니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때 그의 언설은 그렇게도 강력했고, 아마 많은 이들의 가슴을 내리쳤을 거다. 전위문학, 참여시, 불온성. 그저 내 눈앞의 현실에 바둥거리는 초라한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그때 아주 가늘게 부여잡고있던 '문학'에 대한, 다시 말하면 '직업으로써의 글쓰기'에 대한 지향을 거둬들였다. 

다시 김수영의 아포리즘을 읽는다. 그의 시가 주었던 울림은 여전하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있는 雜글이 너무도 부끄러워진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 - 詩여, 침을 뱉어라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나가는가. 그러나 -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 -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詩여, 침을 뱉어라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다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 詩여, 침을 뱉어라

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의 서술이나 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진정한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 生活現實과 詩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實驗的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전위적인 문화가 불온하다고 할 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재즈 음악, 비트 족, 그리고 60년대의 무수한 앤티 예술들이다. 우리들은 재즈 음악이 소련에 도입된 초기에 얼마나 불온시당했던가를 알고 있고 추상미술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유명한 발언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암스트롱이나 배니 굿맨을 비롯한 전위적인 재즈 맨들이 모던 재즈의 초창기에 자유 국가라는 미국에서 얼마나 이단자 취급을 받고 구박을 받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재즈의 전위적 불온성이 새로운 음악의 꿈의 추구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예는 재즈에만 한한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베토벤이 그랬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세잔이 그랬고, 고흐가 그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고, 아이젠하워가 해석하는 사르트르가 그랬고, 에디슨이 그랬다. 이러한 불온성은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不穩'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우리의 38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다. 이 강파른 철덩어리를 녹이려면 얼마만한 깊은 사랑의 불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한가. 그것은 내가 느낀 목욕솥의 용해보다도 더 조용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조용함을 상상할 수 없겠는가. 이것이 다가오는 봄의 나의 촉수요. 탐침이다. 이 봄의 과제 앞에서 나는 나를 잊어버린다. 제일 먼저 녹는 얼음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철이고 싶다. 제일 먼저 녹는 철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얼음이고 싶다. -解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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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고종석 (개마고원,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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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5공화국 초기 삼청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구비구비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석 - 감염된 언어

책을 펴고 얼마 읽지 않아서였다. '감염된 언어'는 긍정의 의미였음을 알고 적잖히 충격을 받았던건... 언어의 감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감염을 통해 언어는 풍부해졌기 때문에 언어를 순화해야 한다는 모든 시도는 전체주의적이고 내재된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고종석의 이야기. (너무 나간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읽고서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돌이켜생각해보면 국어의 오염을 걱정하는 사람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언어 순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닌것 같다. 특히 중국, 일본어에 영향받은 말들을 이야기할때 그렇다.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으로 우리말이 중국어와 일본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건 사실이다. 그로인해 기존에 사용했던 우리말이 밀려나 차용된 언어로 대체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제는 우리말이 되어버려 의미를 획득한 언어를 모두 순화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언어는 이미 사용자에 의해 (다수의 지위를 획득한) 선택된 언어이고, 이미 그 언어는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를 순수한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는가? 번역어 성립사정이라는 책에 나오는 많은 언어들, 일본인들이 만들어냈지만 차용되어 이미 우리말이 되어버린 그 말들을 순화해야 하는가? 설사 합의를 이루어 고쳐나간다고 해도 많은 불편과 혼란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감염된 언어의 한구절을 꺼내어 읽은 이유는 최근 읽기 시작한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표현의 한계는 언제나 느끼는 것이기에 좀더 다듬고 싶어 골랐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취지는 공감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꼭 이렇게 바꿔야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의문. (단편적인 예가 되겠지만) 매표소 -> '표 파는 곳' , 독서하는 -> '책 읽는', 재개 -> '다시 열어', 감속운행 -> '속도 줄 일것' 과 같은 수정은 공감하기 힘들었다. 사실 좀 답답했다.

'的', '超', '大' 따위의 불필요한 말의 사용, '~에 있어서의' 같은 일본식 번역표현, 외계어는 물론 꾸준히 바꾸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말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말들, 표현들, 한국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긍정적인 감염에는 조금 너그러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언어와 언어, 문화와 문화가 치열하게 부딪히고, 상호영향을 받는 요즘같은 시대에 '순결성에 대한 집착'은 가능하지도 않고, 부자연스럽고, 고종석이 말하듯 오히려 우리말에 대한 '죽임의 충동'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고종석의 얘기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고종석의 '영어 공용화론'(뿌리는 복거일의 논리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요약하면 영어 헤게모니, 즉 영어의 언어적 지위는 강화될 수 밖에 없고,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그런 실용적 필요를 무시하고 민족주의라는 담장과 울타리로 쌓아놓아서는 안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영어의 공용어화를 미룰 이유는 얼른 발견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하지 않는 것이다. 영어의 공용어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적극적으로 영어공용어화를 추진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영어가 공용어로 되어가는 추세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추세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벽돌로 담장을 두른다고 해서, 영어의 물결이 그 담장 바깥에 머물러 있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법령으로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한국인들의 영어학습열기는, 대부분의 비영어권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날이 더 커지고 있다. 그 흐름을 막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어려서부터 가르친다면, 사람들이 이중언어 사용자가 되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고종석 - 감염된 언어


짧은 생각으로 영어의 실용적 필요성때문에 영어를 우리말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을 필요도, 그래서도 안된다는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감염된 언어의 긍정성은 우리말을 풍부하게 하고, 우리말의 외연을 넓힐때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말의 당연한 특권적,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까지 민족주의로 공격하는 것은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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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김두식 (교양인,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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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상황이 답답해 다시 집어든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 책을 띄엄띄엄 읽다보니 한달정도 들고 다니며 읽고 있다. 올 여름만큼 헌법의 가치를 다시 보게된 적이 있을까. 머리아픈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브레송의 평전을 구입했는데도, 아직 입맛만 다시고 있는 상황이라니.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한구절을 스크랩해본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를 위해서, 그 근본을 흔들고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공산당을 불법화할 수밖에 없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의 주장은 일단 타당해 보이지만,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우선 민주주의가 많이 성숙한 나라에서는 이런 논리가 실제로 적용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방어적 민주주의가 처음 구체화된 독일에서도, 1968년부터 공산당의 활동을 허용하고 있고, 통일 이후에는 동독 공산당이 이름만 바꾼 채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탄탄한 민주주의의 기반이 형성된 이후에는 공산당이라 해도 굳이 방어적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해산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나라에서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논리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박정희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걸핏하면 북한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원래는 공산주의자들처럼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사상의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알맹이는 빠져버린 민주주의의 껍질만 남게 됩니다. 여기에 방어적 민주주의의 허점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알맹이 빠진 민주주의를 자랑스러워하며 사는 허수아비 시민이 되지 않으려면, 방어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그리 쉽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닙니다. 왜나하면 무신론도 일종의 신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국에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종교의 자유를 지키려고 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지켜주는 데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자기 사상의 자유를 지키려는 공산주의자라면 기독교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지켜주는 데 남보다 더 열심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음란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예를 들어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출판되었다고 칩시다. 기독교인인 저는 그 작품에 대해 청소년의 영혼을 좀먹는 쓰레기 같은 책이라며 구입거부 운동을 벌일 수 있습니다. 서점 앞에서 "기독교인들이라면 <즐거운 사라>같은 쓰레기를 파는 이런 서점에서 절대로 책을 구입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보이콧을 선동하는 시위를 벌여도 좋습니다. 이것도 역시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 공권력이 <즐거운 사라>의 저자 마광수를 붙잡아 가려고 할 때에는, 마광수와 어깨를 걸고 함께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저의 책이 청소년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명분으로 판매금지되고 제가 붙잡혀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는 반드시 필요한 태도입니다.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일종의 형제관계이듯, 그 우산 아래 보호를 받는 우리 '이상한 사람들'도 헌법 아래에서는 일종의 형제이기 대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본권을 인정한 헌법 정신입니다. 결국 '관용' 또는 '똘레랑스'라 표현되는 '서로 받아들임'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지요.

헌법의 풍경 p230~232


김두식 교수가 그의 책 '헌법의 풍경'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최근의 조중동 광고거부 운동을 둘러싼 정부, 검찰, 언론의 삼각동조는 굳이 볼테르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지킬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 충분히 '반헌법적'이다.

밑줄 친 위의 인용문에서 <즐거운 사라>를 조중동 왜곡기사로 바꾸고(마교수님 죄송합니다) <즐거운 사라>를 파는 서점을 조중동에 광고하는 기업으로 바꾸고, 그 서점앞에서 피켓을 들고 보이콧을 선동하는 이들을 지금 광고거부운동을 하는 많은 시민으로 바꿔보라. 만약 표현의 자유, 정당한 소비자운동을 보장하고 있는 우리 헌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국가공권력이 피켓을 든 이들을 잡아간다면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그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만약 조중동이 그들이 생산해 낸 기사로 인해서 (그것이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이라면) 기자와 편집국장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처벌받는다 해도 답은 마찬가지이다.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럴리 만무하겠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싸우고 저항해야 한다.

국가공권력은 대다수 시민에게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제어와 감시의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헌법적 가치, 법의 테두리, 적극적 행동을 통해 공권력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눈을 부릅떠야 한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조중동이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공권력을 이용하려 하고 군불을 때려하는 상황은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그들. 언제나 정신을 차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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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타계한 박경리의 마지막 산문을 읽었다.

"나는 평소에 어떤 이데올로기도 생존을 능가할 수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살아가는 행위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요즘에는 그러한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살아있는 것,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요즘처럼 그렇게 소중할 때가 없습니다." - 물질의 위험한 힘 (계간 아시아 中에서)

죽음을 앞두고 적어내려간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살아있는 데 대한 감사함이 눈길을 끈다. 죽음을 마주해야 삶의 위대함을 느낄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 삶 앞에 어떤 이데올로기, 가치도 아래일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왜 우리는 열렬히 살아 움직일때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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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23/2008052301296.html


명동 한복판에서 저린 다리를 풀며 광고판을 들고 있는, 시급 5천원의 돈을 모아 대학에 가 컴퓨터 공부를 하려한다는 그의 삶. 우리의 삶, 그들의 삶. 이 삶에 감사할 수 있다면, 내 주변의 삶이, 세상이 많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조선일보,,,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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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기형도

from 책글창고 2008. 3. 7. 15:54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시인선 80)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기형도 (문학과지성사,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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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때마다 한때 심정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시들이 있다.
내가 가슴 떨며. 때로는 울컥하며.
아니. 같이 슬퍼하며 읽었던 시들.
어떤 심정 상태에 있다고 해도.
읽는 순간. 그때의 느낌이 몰려들게 하는 시들.
기형도의 시도 그중에 하나다.


'입 속의 검은 잎' 


제목부터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시집은.
읽는 내내 무언가 확실히 알 수 없던 모호함으로 다가왔지만.
어느 순간. 정확히는 김현의 글을 읽을때쯤.
그동안 젖어들었던 기분이 몰려들었던 시집이었다.

시집을 덮자마자 난 다시 그 시집을 읽기 시작했지만.
처음의 그 느낌은 같은 시에서. 똑같이 배어나왔다.
언제까지 기형도의 시집을 앞에두고 그 기분 계속 느낄지 모르지만.
나보다 7년 앞선 선배도 그의 시집을 앞에두고 아직 뒤돌아서지 못한다고 말했으니까.
나에게도 그정도의 시간의 자취를 남기리라 짐작한다.

어제 소주와 통닭을 먹었다.
허기진 상태에서 먹었더니.그걸로도 알딸딸하다.
계속 먹으면 아무래도 후회할 기분이 될 것 같아서.
미리 들어왔다. 근데. 기형도의 시가. 가슴을 때린다.

일찍 일을 접고. 집에 가고 싶다.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마포대교쯤에서. 한강풍경을 오래 쳐다보고싶다.
열심히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 그 강박과도 같은 느낌에서.
한 며칠 벗어나고 싶다.
어쩌면 의미있는 것들은 나를 비켜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서도 떨어져 있고 싶다.

바다도 보고 싶고. 그 곁에서 술도 마시고 싶다.
반기는 곳 하나 없지만. 기꺼이 가고 싶은 곳은 많은 날이다.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었으면 좋겠다.

기형도가 그랬던가.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어디 눈 뿐일까.그걸 그도 알았을 거다.
그래서 기형도는 나에게 항상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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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형도의 기일.
그의 시처럼 아프지 말고, 하늘에서 사랑하며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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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시로 느끼고 싶어졌다. 가을이 내 곁에서 가고 있는데 내가 느끼는 가을이 멀리있는 것 같아, 주변에 있는 가을시들을 꺼내어 읽었다. 읽다가 그래 가을이 그랬지, 맞아 가을이야 생각하며, 내 안으로 가을을 넣어두고 싶어졌다. 시네이드 오코너의 음악을 틀어놓고 좋아하는 가을시를 꺼내어 본다.




 

시를 쓰고 싶어졌다. 참 오랜만의 기분이다. 시를 쓰고 싶다니 얼마만일까 먼지 묻어있는 오래된 노트를 꺼내 끄적여봤다. 그런데 시한줄에 내 마음 담아두는게 쉽지 않다는 걸 느낀건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가을을 내 노트 안에 그려넣으려다. 가을이 너무 크게 다가왔으니까 그걸로 족하다. 가을에 떠날수 없다면 가을시로 마음을 달래볼 일이다. 나의 가을에 대해 소리없이 내 곁을 흘러가는 가을에 대해 한번쯤 마음 열어 느껴볼 일이다.
아, 이 가을에도 어디로 떠나야 하는 사람아
기어이 오래도록 지우지 못할 뒷모습만
왜 그립게 하는가

가을시편 中

누군가에게 그리운 존재가 되어 뒷모습 보이며 어디론가 떠나도 좋을 일이다. 가을에는, 나라면 그 뒷모습에, 너에게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기다려달라는, 마음의 조각하나 남겨두고 싶다. 이 가을 사랑하고 싶다. 내 뒷모습을 애처로이 바라봐줄 혹은 기다려줄 한 사람에게,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예쁜 시하나 건네어 주고 싶다. 이 글이 시가 될 수 있다면 너에게 주고 싶다. 그러기엔 가을은 너무 차분하다.

푸르른 하늘과 플라타너스 넓은 낙엽들.
마주치는 사람도 없이 긴 골목길에
아, 벌써 가을입니다.

가을의 길목 中

아, 그래 벌써 가을이다.









200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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