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혁명성

from 책글창고 2011. 8. 23. 09:12
욕망은 타자의 육체(body)로부터 그 옷들을 벗길 뿐만 아니라 그 육체의 운동도 빼앗아, 타자의 육체를 순수한 살(flesh)로 존재하도록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애무는 타자의 육체를 내 것으로 가지려는 운동이다. 만일 애무가 단지 피부 표면을 건드리거나 쓸어주는 일이라면, 이런 행동과 애무가 충족시키려고 하는 강력한 욕망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관련도 없게 될 것이다. (...) 애무는 단순한 접촉을 원하지 않는다. 애무를 접촉으로 환원시키는 사람은 애무가 가진 독특한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무는 단순한 건드림이 아니라 어떤 모양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애무할 때 나는 내 손가락 아래에서 그녀의 살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애무는 타자를 육화하려는 그런 관계들의 앙상블인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1843)

상처받지않을권리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강신주 (프로네시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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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중에서 사랑과 매춘을 다룬 부분에 인용된 구절이다. 사르트르는 애무를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읽었다. 단지 쓰다듬는 다는 무의미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손 안에서 타자의 자유를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는 것.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닌 사랑의 본연적인 성질이다. 나의 소유욕과 타인의 소유욕이 부딪히는 그 긴장의 관계가 사랑이라는 것을 이 위대한 철학자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애무의 긴장감은 자본이 침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돈이 매개된 관계는 매춘의 성질을 가지며 애무 본질의 탄력성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사랑으로 포장하려해도 이미 사랑이 아니다. 감출 뿐이지.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유로운 사랑을 욕망한다는 점이다. 자본의 사회에서 돈으로 매개될 수 없는 사랑의 혁명성.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시절에 자본의 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은 점점 더 기대하기 어려워졌으나 그럼에도 이러한 가능성은 사랑 말고는 찾을 수 없다.

다행스럽지만,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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