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아포리즘

from 생각창고 2008. 7. 31. 08:23

오후무렵부터 일을 서둘러 일찍 퇴근을 하고서 투표장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투표하기 위해 조금 일찍 퇴근한다는 내 말이 동료들에게 '별종'으로, 혹은 '극성'으로 보이는 상황이 씁쓸했다. 썰렁해서 한산하기까지한 투표장. 방문자가 없었는지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들 해주는 투표장 사람들.

15%가 안되는 투표율. 그와중에 강남몰표. 이게 우리 민주주의의 현주소이다. 현재의 대의제가 '대의'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가진자들은 그걸 지키기위해 그리도 영민한데,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고있다. 아니 외면하고 있다.

지친다. 지친다. 염증 같은게 올라온다. 뜨겁던 6월의 촛불이 그냥 그렇게 사그라드는 것 같은 실망감. 행동은 의식으로 연결되지 않는 건가. 무관심이 문제인지, 사회구조의 문제인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우연히 김대중의 아포리즘을 찾아 읽어본다. 봄이 기적처럼 올것인가. 진심으로 묻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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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봄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이 말은 만고의 진리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의 봄은 정확히 시간을 지켜 오지만
인생의 봄의 리듬은 아주 불규칙하다는 점이다.
빠를 때도 있고 아주 영원히 안 올 것같이
느껴지는 때도 있다.
일제시대 때 많은 독립투사들이
늦은 봄을 참지 못해 기다림을 포기했다.
 
그러나 봄은 왔고,
그것은 기적처럼 갑자기 왔다.

<김대중 잠언록>


 
가장 적합한 때 가장 적합한 생각
 
우리는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며,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해하지 말며,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김대중 잠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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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한겨레신문사 인터넷뉴스 편집국에서 복학하기전 아르바이트를 할때, 학교선배였던 안수찬 선배를 잠깐 본적이 있었다. (선배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시험공부하듯이 매일 6시 초판이 나오면 탐독하던 한겨레신문. 초짜 기자였을 선배이름을 사회면에서 발견하고 반가워 할때였다. 자판기가 놓여있던 어둡고 침침한 한겨레신문사 휴식공간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힘든 기자생활에 대해 몇마디 들었었다. 특히나 넉넉하지 않은 기자월급얘기도 씁쓸했었다.

우연히 오늘 아침 선배의 글을 읽었다. 91인가 92학번일 선배는 그의 말대로 절망적인 세대였을지도 모른다. 80년 광주의 역사적 재평가, 87년 민주항쟁의 승리의 기억에서 모두 떨어져 있으며, 어쩌면 학생운동의 와해를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었을 우리 바로 위 선배들. 96학번인 나는 대학생 운동세력이 결정적으로 와해되어가던 96년 연대사태의 언저리에 걸쳐있다. 그래서 그들의 절망감과 패배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촛불의 위대함은 그것이 대의를 위한 것이지만 젠체하지 않고, 포장하지 않으며, 모든걸 걸고 나아가는 비정함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즐거움, 잔걸음, 해방감, 작은 목소리는 얼마나 대견한지. 그래서 촛불은 결집이 아니라 꾸준함이다. 그런 촛불을 선배도 보고있어서 다행이다. 우리의 촛불에 위로를 받아서 참 다행이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니 뜨거운 것이 솟아나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떨린다.

우리가 이긴다.


진걸아,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우리 데모하자.
안수찬/ 한겨레 기자

그러니까, 넌 열일 제쳐두고 반성부터 심각하게 해야 돼. 며칠 전 당국이 널 감옥에 잡아 가둔 건 차라리 다행한 일이야.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지만 말고, 이번 기회에 생각 좀 해봐. 시민운동가들이 모여 석방대책위원회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거기에 끼어들어 네 석방 따위를 요구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굳이 석방을 촉구하려면 그건 촛불시민들을 위한 것이어야겠지. 넌 그저 그 곳에서 책도 읽고 좌선도 하면서, 시민운동가의 역할과 자질에 대해 성찰이라는 걸 한번 해봐.
 
도대체가 말이 되느냔 말이야. 지난 10년 동안 너는 시민운동에 매진했잖아. 그것 말고 달리 한 게 없잖아. 그런데 가히 ‘운동 전문가’라 할 만한 네 지성과 감성이 이번 촛불집회에 기여한 바가 뭐 있느냐고. 집회 사회도 보고, 거리행진도 이끌었다고 말하고 싶겠지. 다시 물어볼게. 그거 정말 네가 한 거야?
 
거리와 광장을 채운 촛불 시민들의 상상력을 봤지? 하나의 거대한 문화공연과도 같았던 그 기발함과 발랄함을 봤지? 어느 운동가보다 단호하게 발언하고, 어느 교수보다 분명하게 논리를 밝히는 고등학생, 주부, 대학생, 직장인들을 봤지? 넌 지금까지 한번이라도 그런 식으로 데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넌 도대체 뭘 했냐고. 시민운동가로서 이번 촛불집회에 대해 책임질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거, 이거 부끄러운 일 아닐까? (이쯤에서 너는 기자로서의 내 구실에 대해 따지고 싶겠지만, 흠흠, 오늘은 네 이야기만 하도록 하자고)
 
하긴, 우리가 기억하는 데모란 그저 숭고하고 치열하고 엄숙하고, 그리하여 절망적인 그런 것들이긴 했지. 너와 내가 만나 이 기묘하고도 질긴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그 치열하여 절망적이었던 ‘데모들’의 기억 때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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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안진걸 조직팀장이 지난 6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 경복궁역 앞에서 장관고시 철회와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강제 연행되고 있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9년, 전교조가 만들어졌지. 너는 광주에서 나는 대구에서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킨답시고 데모 흉내를 냈지. 그때 우린 촛불집회 같은 건 생각도 못했지. 고작해야 종이비행기를 접어 교실 밖으로 던지거나,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시국 집회의 한켠에 모여 앉는 따위가 전부였지.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날, 교문을 붙잡고 엉엉 울어버린 게 우리의 마지막이었지. 우리는 누구에 맞서는 것인지도 잘 모른 채 그저 항의하고 분노했지. 어떤 친구는 퇴학당했지. 어떤 친구는 스스로 학교를 그만둬 버렸지. 어떤 친구는 항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지. 그리고 우리는 또 울었지.
 
그때 기억나지? ‘교사는 노동자’라고 말하는 전교조 교사들은 모두 빨갱이다. ‘참교육’이란 중고생들을 의식화시키려는 책동이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썼잖아. 교사와 학생들의 집단행동에 처음엔 주춤했던 정부도 보수 언론들의 보도를 계기로 전교조 교사들을 모조리 해직하고 그것도 모자라 감옥에 집어넣었잖아.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 데모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사춘기 시절에 알아 버렸지. 올바른 것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돼 버렸지.
 
대학 신입생이던 1991년, 그 해 봄을 잊을 수가 없지. 3월부터 6월까지 10여명이 죽었어. 고등학생, 대학생, 노동자가 죽었지. 시위하다 전경에 맞아 죽고, 거기에 항의해 투신 또는 분신하여 죽었지. 일주일에 한명씩 죽어나가는 거리에 나가려면 말 그대로 죽을 결심을 해야 했지. 그 시절엔 밤이 되면 라이터를 켰어. 종로를 메운 군중이 구호를 외칠 때마다 무수한 별빛처럼 명멸했던 라이터 불을 보며 우리는 환호했지. 해직된 옛 선생님들도 만났지. 이젠 대학생이 된 제자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선생님들도 함께 데모를 했지. 87년 6월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드디어 뒤집어진다고, 우리는 흥분했지.
그 다음의 일도 기억나지? 다시 한 번 조선일보가 ‘죽음의 굿판’ 운운하며 우리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었지. 동료의 투신자살을 부추겨 유서까지 대신 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빨갱이들이라고 몰아갔지. 각계각층에 주사파가 침투해 있다고 선전했지. 장관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대학생들을 희대의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했지. 공권력이 대학생을 때려죽일 때, 우리는 왜 밀가루조차 던지면 안 되는 것인지, 우리는 정말 알지 못했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상은 조용해졌지. 신문과 방송은 소련의 붕괴를 축하하고, 빨갱이들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지.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둔 1996년, 아마도 90년대의 진정한 마지막이라 할 만한 그 때, 우리는 연세대에 있었지. 조선일보는 한총련 출범식에 모여든 대학생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주사파 집단으로 매도했지. 일본 전공투와 비교하면서 극렬 테러집단으로 몰아갔지. 경찰은 들어오는 길, 나가는 길을 통째로 막았지. 배가 고파도 먹을 것조차 없었지. 그렇게 열흘 동안 학생들을 굶겨 힘을 빼고, 일시에 진입해 모두 잡아갔지. 몰아놓고 때려잡는 토끼몰이식 진압의 초대형 버전이 그때 만들어졌지. 10여대의 헬기를 띄워 사실상의 군사작전을 펼쳤지. 그렇게 5800명의 학생들이 일시에 끌려갔지. 우리 같은 놈들을 선배라고 믿고 따라온 1학년, 2학년 후배들이 많이 잡혀 갔지. 선배들은 분해서 울었고, 후배들은 무서워서 울었지.
 
다시는 데모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자아도취에 불과한 시위 따윈 아예 때려 치고, 진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만한 일을 하겠다고. 우리는 결심했지. 너는 시민운동을 택했고, 나는 언론을 택했지.
그리하여 진걸아, 너와 내가 기억하는 모든 데모는 장렬했지만 절망적인 것이었지. 우리는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번개처럼 달려와 시위대의 머리를 잡아채 강력한 헤드락을 걸고 니킥으로 명치를 가격하는 백골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지. 닭장차에 갇히는 순간 시작되는 전경들의 무수한 발길질이 왜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지. 누구건 마음만 먹으면 빨갱이로 낙인찍어 감옥에 보내버리는 조선일보가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한지를 잘 알지. 공안정국이 일단 시작되면, 세상 모든 항의의 목소리가 통째로 사라져버린다는 것도 잘 알지. 그게 보수정치의 본질이라는 것도 너무너무 잘 알지.
 
1998년 초,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기억을 모두 나누고 있었지. 80년 광주항쟁처럼 시대를 넘어 추앙받지 못하고, 87년 민주항쟁처럼 승리의 기억으로 뭉친 하나의 세대를 낳지도 못했던 너와 나의 그 ‘데모들’은 오직 우리끼리만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었지. - 거대한 절망. 그것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지. 아무도 우리의 비극을 모를 거라고 제 슬픔에 취해 술잔을 기울였지.
 
나는 말이야, 진걸아. 촛불시민들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어떨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아마 잘 안될 거야.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나는 지금도 가끔 울컥해. 나이를 먹어 그런지, 예전처럼 눈물이 막 쏟아지고 그러진 않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지는 일이 많아. 절망하는 게 아니고 말이야, 위로받는다는 생각, 드디어 우리의 그 불행한 ‘데모들’이 위안 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야.
 
촛불시민들은 사제단의 미사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은 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온을 주고 있는 것 같아. 그렇구나. 데모는 엄숙하고 장렬하여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기쁘고 발랄하고 상쾌한 어떤 것이었구나. 바로 그래서, 성취하여 얻는 바가 적어도 데모 자체로 즐겁고 행복한 것이었구나. 그런 ‘행복의 힘’이야말로 조선일보와 정치검찰과 백골단과 청와대를 모두 넘어서는 원천이구나. 그걸 모르고 우리는 그저 죽을 결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구나. 진정한 운동이란, 그 성취가 대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행복해야 하는 것이구나. 대통령이 항복할까 하지 않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우리 같은 옛날 데모쟁이들과는 달리, 이들 촛불시민들은 오늘은 어떻게 보다 새롭고 즐거운 방법으로 거리와 광장에서 시간을 보낼까를 고민하는구나. ‘해방구’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권력자들을 몰아낸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한 해방의 욕망을 끄집어내어 표현하는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을 일컫는 것이구나. 뭐, 그런 상념 끝에 또 한 번 감상에 젖어 울컥하는 것이지.
 
시민운동가와 언론인으로서 너와 나는 이제 촛불시민들의 앞길을 진지하게 고민해야겠지. 그게 우리의 몫일 테고. 그렇지만 말이야. 그런 짐을 잠시 벗어놓고, 그저 이 촛불의 물결에 지친 몸과 마음을 맡기고 그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 더 중요할 지도 몰라. 어쩌면 지도가 필요한 것은 촛불시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일수도 있으니.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공권력에 대한 공포, 보수언론에 대한 열등감, 정치권력에 대한 집착 따위의 ‘80년대식 트라우마’를 모두 벗어던지는 촛불의 의식화를 먼저 거쳐야 할 것 같아.
 
그럴려면 우리 데모 좀 더해야겠지? 무슨 해결책 따위를 성급하게 기대하기 전에 너와 나는 케케묵은 20세기의 허물부터 벗어 던져야겠어. 그러니 진걸아, 나와라. 공부 좀 하고 난 다음에 감옥에서 나와서 거리에서 만나자. 그리고 지칠 때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을 때까지, 실컷 데모하자. 저들이 말하는 질서와 평화 따위는 그런 걱정에 날밤을 새는 저들에게 줘버리고, 우리는 해방구의 질서와 평화를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조금 더 누려보자.
 
권력을 얻어 그 권력으로 인해 자유로워질 것을 기대하기 전에,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유쾌하게 만드는 진짜 데모의 기억을 만들자. 가난하고 초라한 지성과 감성을 가진 탓에 이 촛불의 물결에 조금도 보탬이 된 바 없는 듯 하여 더욱 쑥스럽고 미안한 나는 그저 그런 정도의 소박한 기대만 갖고 이 여름을 버티려 해. 그러고 나면 아마도 가을 무렵엔 조금 더 깊은 혜안이 생기지 않을까, 장담하기 힘든 그런 희망도 곁들여서 말이야. 천둥벌거숭이 같은 시민운동가 안진걸도 아마 나와 비슷할 거라고 믿어.
 
술 마시면 말이 많아지는 것 말곤 닮은 데라고 하나도 없는데도 사람들이 우리 둘을 자꾸 비교하려고 하여 서로 기분이 많이 나쁜, 참여연대의 안수찬, 너 안진걸에게 한겨레의 안진걸, 나 안수찬이 보낸다. 씩씩하게 잘 지내라.
 
 
출처 : 인권시민실천연대
http://www.hrights.or.kr/note/read.cgi?board=susan&y_number=81&nne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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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근처에서 직장생활을 한지도 5년이 되어가는데 올해처럼 한국사에 여러페이지를 장식할 사건들을 쉼없이 마주하는 시절은 처음인듯 하다. 대선,총선,남대문,촛불... 이렇게까지 번져버릴줄 몰랐던 5월의 청계광장. 그곳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다소 발랄한 발걸음으로 참여했었다. 6월에는 파김치가 되어 돌아가는 퇴근길. 도저히 외면할 길 없어, 몇번 시청에 들러 촛불을 들기도 했다. 토요일에는 나보다 더 열정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아내와 같이 가기도 하고, 6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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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청계광장에서



작년말 그리도 '당선될까봐 잠이 안오던' 인물이 우려의 목소리를 조롱하듯이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부터 나에게 2008년은 그리 기분좋은 한해는 아니었다. 이건 정치적인 입장에 입각한 선택의 문제도 아니고, 단순히 인물 개인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도 아니다. 대안부재가 결국은 최악의 선택으로 이어진 투표 결과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만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도 알수가 없는 두루뭉실한 '경제'라는 프로파겐다, 혹은 지역적 기반, 반노무현이라는 정서에 기대 한표를 행사하는 국민 대다수의 선택행위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총선.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 계급적인 이해관계, 경제적 이익, 사회적 가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건강한 정당이 전무한 상태에서 총선의 결과가 민의의 대변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당이 성숙해지고 각 구성원이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참담하게도 한나라당 + 친박연대 + 자유선진당 이렇게 3각 극우 트라이앵글에 몰리는 의석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대의제 정당정치가 가능하긴 하겠는가라는 체념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통과한 시점이라는 것도 더욱 절망스러웠다.

총선이 끝나고, 결국 내각은 아래를 향하긴 커녕 높은 자들을 향해 들어섰다. 국민의 생존권 건강권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굴욕적인 쇠고기 협상은 대선과 총선으로 이어지는 '레짐의 변화'의 최악을 보여주는 사태가 되고 말았다. 시민은 정부를 상태로 고치고 바꾸라고 외치는데, 이를 받아줄 수 있는 그리고 그 목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부재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물리적 힘이 충돌하는게 아닌가.

최근에 최장집 교수는 (평소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론대로) 현재의 촛불시위를 이렇게 진단한 바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작금의 촛불집회는 대의제 정당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제는 갈등해결을 위해 대의민주주의를 어떻게 강화할지를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촛불집회를 정부 안정성을 위협한다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보수적 관점’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운동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측면만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적 관점’ 역시 제도정치에 대해 비판적이기에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일보 기사 참조)

이것이 현재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생각은 다분히 '이상적이다'. 그 점에서 최교수의 촛불집회에 대한 진단은 틀렸다. 촛불을 거두고 이제는 국회에 맡겨야 할 때라거나, 등원론을 부추기는 목소리도 매한가지다. 왜냐하면 촛불시위는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된 '대의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국회를 해산하고 다시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치세력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를까, 그래서 다시 대의 민주주의를 형성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지형을 유지한 채 대의제 민주주의의 회복을 얘기하는 것은 맞지도 않고 해결이 될 수도 없다.

촛불이 지속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그걸 자각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정치지형이 민의가 정책으로 표출되지 않고 왜곡되고 무시되며, 언론 또한 그런 목소리를 정확히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는 현실. 그에 대한 분노가 촛불이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시위는 더 거세게 한국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을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아직도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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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서 기획한 "글로벌 리더와 미래를 만다나 촘스키, 대한민국에 말을 걸다"를 뒤늦게 봤다. 요즘 자주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방송프로그램을 보다보니 정작 본 방송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게 되었는데, 이런 대담프로그램은 더더구나 (불가피하게) 플레이와 포즈를 반복하면서 보는 경우가 많아 가급적 다운받아 보는 편이다.

별도의 화면이 없는 1대1의 대담프로그램이라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도 관심있었던 촘스키가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영어로 진행된 대담에 성우의 목소리를 입혀서 진행되었는데, 자막에 익숙해져있어 그런지 몰라도 촘스키의 목소리 그대로 듣는것이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성우의 목소리가 너무 편안해 오히려 집중을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몰입을 얘기하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대담은 그래서 중간에 포기. 몰입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 얘기에 몰입하긴 커녕 점점 산만해지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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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야 국내에 책도 많이 번역되어있고, 워낙 유명한 사람이다보니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사실 그의 유명세가 이 분이 오랜세월 꼿꼿이 견지해온 비판적인 사회역사인식과 관련 저술에 국한되어있는게 사실이다. 1950년대 변형생성문법이라는 탁월한 언어학연구를 발표한 저명한 학자이기도 한데 (MIT언어학교수), 그렇다고 알고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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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담중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언급이 기억에 남아 캡쳐해봤다. '규칙을 세운자'는 서구선진국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바꾸어도 될 것이고, '규칙을 지키는 남들'은 우리를 포함한 개발도상국, 후진국으로 바꿔도 무방하리라. 이 언급은 '자유무역'을 이야기 하면서 나왔는데, 미국은 겉으로 자유무역주의를 표방하며 철저한 보호무역주의로 발전해왔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자유무역이라는 규칙을 타국에 강제하며 그들은 그렇게 발전해온 것이다. 그 상대인 규칙을 지키는 자는 가까이는 멕시코가 있을 것이고, IMF환란이후 그리고 한미FTA까지 달려온 한국도 비켜갈 수는 없다.

그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를 절대선으로, 그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반시장경제로 무시하며 일방통행을 강제해왔던 한국의 친기업 시장경제론자들은 한번쯤 귀기울여봐야 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었고, 누구의 배를 배부르게 한 것이었는지. '규칙을 만든자'를 위한 게임의 룰에서 우리는 항상 패배할 수 밖에 없는건 아닌지 진지한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굳이 그의 이런 언급을 국가간 경제관계에 국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긴 세월을 나와 사회와 세계를 고민하며 살아온 노학자의 통찰, 그 한마디는 가깝게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 나와 조직과의 관계, 나와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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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 아나운서가 2004년 사고로 생을 마감한지 벌써 3년이 넘어간다. 갑자기 다시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떠올린건 얼마전 피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그녀 방송파일 때문이었다. 점심먹고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그녀 죽음을 전해들었을때 느꼈던 심한 상실감이 기억난다. 더이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상실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정영음과의 기억, 그 좋았던 추억 때문이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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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일이었던, 고등학교때 토요일마다 밤을 세워 숨죽이며 라디오를 들었었다.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라디오. 많은 음악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라디오를 난 참 사랑했었다. 그중에서도 정영음의 토요일 방송은 빼놓지 않고 들었다. 토요일 새벽 '내인생의 영화'라는 청취자들 각자의 인생이야기와 어우러진 다섯편의 영화를 소개해주는 코너 때문이었다. 극장가서 영화볼 여유가 없었고, 지금처럼 손쉽게 다운받아 영화를 볼 환경이 안되는 그런 상황에서 어쩌면 난 정영음을 통해 영화를 봤고, 읽었던것 같다. 지금 보면 꽤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커다란 라디오 앞에서 들었던 정영음. 가끔 그녀 방송 클립을 들을때마다 그 과거의 추억때문에 그녀 죽음이 못내 야속하다.

1995년 3월 31일 (4월 1일 새벽) 마지막 방송이 기억난다. 들을때마다 울컥한다. 흐느끼며 멘트를 이어가던 익숙한 그 목소리. 구광본 시인의 시로 시작한 마지막 방송의 오프닝.




꽃 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고요.
마당 한 모퉁이에 꽃씨를 뿌립니다.
꽃 피는 날에서 꽃 지는 날까지
마음은 머리 풀어 헤치고 떠다닐 테지요.
그대만이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꽃 지는 날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요.
그대의 뒷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새로 잎 피는 길을 갑니다.

1995년 4월 1일 마지막 방송 오프닝 멘트


배유정이 영화음악을 진행하면서부터 몇개월 듣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라디오와는 점점 멀어졌고, 정은임도 그렇게 잊혀졌다. 나 자신 그녀가 새로 영화음악을 시작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당연히 그녀의 두번째 마지막 방송도 듣지 못했다. 이미 내 주변엔 인터넷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새로 시작한 회사생활도 늦은밤 라디오를 즐기게 하지 못했다. 내 주변의 상황이 그러했지만, 2003년에 영화음악에 다시 복귀한 그녀에게 주어진 극악의 방송시간(새벽 3~4시)은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더이상 그녀의 라디오는 대중 프로그램이 아니라 소수만 깨어있는 시간에 어울리는 마이너 프로그램이 되었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95년 마지막 방송때, 라디오를 진행하게 되어, 또 정영음같은 좋은 프로그램과 연애하듯 방송해서 행복했다며 소회를 털어놓은 그녀에게 다시 돌아온 시절은 냉혹하고 좌절스러운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두번째 영화음악 폐지된 후 그녀는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겨두었다. 뒷맛이 씁쓸하고 글을 읽으며 공감하게 되는 내 현실이 무겁게 나를 누른다.


프로그램이 끝나서 맘이 아픈 것은
제가 떠나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갈수록 자리가 좁아지는 '진심'에 대해,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추억을 잃어버리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용천역 폭발이나 사람이 죽어가는 이라크의 하루하루를 생각해보면,
아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생사의 고비에서 신음하고 있을 사람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문제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방송 프로그램 하나 있고 없고가 뭐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언제쯤이면, 식탁 앞에 앉아 미안한 마음이 없어질까요.
저 혼자 잘살고 저 혼자 잘 먹는 것 같아 항상 미안합니다.

요즈음, 세상과 사람(저를 포함해)에 대해서 생각이 많았던 참이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령처럼
무지막지하게 무엇이건 먹어치우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해,
'회사'에 있는 사람으로서 요즈음에는,
내가 회사를 바꿀수나 있는 것일까,
내가 회사 안에 먹혀들어가는 것일까,
다르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
다르게 산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일일까..
아니, 돈의 논리가 좌우하는 세상에 대한 근심을 떠나,
과연 사람이란 존재가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조화롭게 살 수나 있는 것일까,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등등 새삼스레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살면서 무엇이든 너무 깊이 파고들면 안될것 같아요.
사람이니 세상이니 그 속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그러면 참 살기 싫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꽃 피면 꽃 이쁘다, 꽃 지면 또 피겠지..
날 좋은면 어디 구경갈까... 하면서 사는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 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나왔는데, 살 힘을 잃으면 아니 되잖아요?


그녀를 투사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나보다. 하긴 나도 MBC노조투쟁때 손석희, 백지연과 함께 앞장서던 그녀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 방송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켄 로치 영화를 소개하며 틀던 인터내셔널가의 이미지가 각인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보다 정은임은 답답한 고3생활에 라디오를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라 믿으며 지내던 나에게 작은 샘이었고, 위로의 목소리였을 뿐이다.

그녀 인생의 영화이자, 그녀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하며 봤다는 (그리고 또한 내 인생의 영화이기도 한)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그녀 삶은 허공으로 질주하듯 사라져 버렸지만, 난 이렇게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기억하며 듣고 있다. 들으며, 들을때마다 그때 품었던 꿈과 지금의 삶을 돌아본다. 그녀를 추억하며 1995년 정영음의 마지막 방송의 클로징 멘트를 올려본다. 그곳에서 그녀의 방송을 들으며 행복했던 사람들로 인해 웃을 수 있길...



이제 마지막 인사를 정말 드려야겠네요. 이 FM 영화음악은 제가 mbc 아나운서로 입사해서 처음으로 맡은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그러니까 정식으로, 그 전에 TV를 임시로 맡은 것도 있었지만 정식으로 맡은 것은 라디오 프로그램 FM 영화음악이 처음이었어요. 그 때가 1992년 11월 2일이었는데 덜덜 떨면서 첫 방송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뭔가 특별한 날, 아침 햇살이 남다르게 느껴질 때라든지, 아주 예쁜 꽃을 봤을 때, 낮에 길거리에서 특별한 광경을 봤을 때, 책에서 멋진 글을 발견했을 때, 그럴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엔 꼭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굉장히 가슴 두근거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고 또 어떨 때는 마이크 앞에서 막 숨막힐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었었어요 그래서 문득 이거 꼭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과.........

방송하는 사람의 가장 큰 행복이 바로 이것 같습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 2년 반 동안 참 많은 분들을 만났구요. 소중한 인연을 맺은 것 같습니다.......

저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우리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중에서 김창완씨의 노래, '마지막 인사'로 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1995년 4월 1일 마지막 방송 클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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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盧대통령의 사과를 듣고 싶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2210149) 는 당신의 칼럼을 읽으며 분통한 마음에 몇자 적습니다.

이전에 써갈겼던 글 보면서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 여러말 필요없을것 같고,
기자로서의 자존심. 그거 다 버리고 밥벌이의 지겨움에 온몸 바치고 계시는게 안쓰럽네요.
 
기자도 먹고 살아야 하고, 편집국장에 대한 욕심도 있으시겠지요.
그거 이해합니다. 밥벌이는 위대하고, 생활은 위대한 것이니.
거스를 용기 없음을 비난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기자로서의 양심이 있다면 (요즘은 그런게 없는 세상이니),
한때는 있었을지 모르는, 당신이 굴리는 펜대 끝의 치떨림을 조금이나마 기억하고 있다면
이따위 글을 계속 지면에 싣고 있는 스스로를 부끄러워 할때가 있을겁니다.
 
정치적인 입장, 가치판단은 다를 수 있고, 그 차이는 존중해야 하지만
'더러운' 동아일보 지면에 기대어, 한그릇 밥벌이를 위해 써갈기는 당신의 글이 못내 화나게 합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정치적 지향성에 문제일 수도, 누구를 지지하냐와 관련된 토로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거결과를 두고 그 결과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고 윽박대는 당신의 글,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남은 '인간에 대한 희망'마저도 잃을거라는 당신의 글은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그건 (이제는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건전한 비판이 아닙니다.

"국민에게 상처를 입혀 미안하다"는 당신의 말에서 의미하는 국민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 국민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음습한 저의. 그 가진자의 냄새. 굴복하라는 윽박.
밥벌이를 위한 글 뒤에 숨어 젠체하며 뒷짐지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드러내 말하지 그러십니까.

그만 하지요.
 
어쩌면 당신은 이런 글조차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혹여 그 부끄러움만은, 자신의 글이 실리는 지면을 보며
그래도 때로는 가슴 한구석 저어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한자 적습니다.
 
동아일보를 찢어버린지 오래되었고,
그 지면에 어떤 글들이 실리는지 관심을 끊은지 오래되었지만
이렇게 인터넷으로 옮겨다니는 그 글들을 우연히 볼때면 가슴 한구석 답답합니다.
매체적 자존심, 다 팽개치고 먹고 살기위해 바둥거리는 그 가벼운 존재가 안타깝고 씁쓸합니다.
어쩌겠습니까. 다 그런것을.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위해, 일신영달을 위해 쓰는 기사는 기사가 아닙니다.
그건 그냥 밥벌이일 뿐이지.
 
아래 당신이 써둔 글을 첨부합니다.
이 글을 다시 읽으며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런지 못내 궁금합니다.


盧대통령의 사과를 듣고 싶다 - 동아일보 김순덕칼럼 (2007/12/21)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2210149

작년 말엔 "부동산 말고 꿀릴 게 없다"고 했다. 한 달 전엔 "국민이 지금 몽둥이를 들고 청와대로 안 쫓아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언론이 전달한 것을 국민이 절반만 믿는다면 이 대통령은 쫓겨나야 되지만…참여정부 실패론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고도 했다.

아직도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가

그래서 정말이지, 인간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궁금하다. 아직도 "내가 뭘 잘못했나? 뭐가 틀렸나?" 하고 따지고 싶은지. "나와 국민 사이에 언론들이 적절하게 이간질을 잘해 가지고" 국민이 몽둥이 대신 투표용지를 들고 쫓아와 범여권을 참패시켰다고 믿는지. 아니면 대통령은 21세기에 있는데 국민이 19세기에 있다고 한탄하면서 국민 계몽 정치학 집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지.

악취미여서가 아니다. 대선 뒤 무게중심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로 옮겨 간 것 같아 보이지만 그건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 판단일 뿐이다. 대통령은 아직도 임기가 두 달 이상 남은 '살아 있는 권력'이다. 대통령의 인식과 태도에 따라 앞으로 두 달이 차기 정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당선자 확정 뒤 청와대에서 "인계인수와 함께 임기 마지막까지 국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책임을 다하겠다"고 발표한 논평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20일엔 "당선자의 국정철학과 이념이 다르므로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주요 정책들을 순조롭게 이양할 고려사항이 필요한 것 같다"고 아예 못을 박았다.

국민의 착각은 자유지만 대통령의 착각은 위험하다. 국민이 참여정부 정책들을 대대손손 잇고 싶었다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는 낙선하지도 않았다. 이번 대선은 국민이 경제를, 실용적 보수를, 이명박을 흔쾌히 선택했다고만 할 수 없다. 오히려 참여정부에 대한 심판이고 더 정확하게는 노 대통령에 대한 응징이다. 패자는 정동영이 아니라 대통령 노무현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책을 했다는 기색은 아직 없다. 청와대는 되레 노무현 심판론에 극도의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대통령은 늘 자신만 옳았던 사람이다. 국민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 아니면 적으로, 언론은 악으로 간주해 온 걸 모르지 않는다. 심지어 지난주엔 잘못을 자인했던 부동산정책에 대해 "부동산 값은 조금 올랐지만 금융위기로 전이되는 것을 막았으니 한국 정부가 제일 잘했다"고 자랑했다.

5년 전 '시민혁명'을 일으켜 '노짱'을 대통령으로 만든 지지자들까지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대철 신당 공동선대위원장이 "정동영이 아니라 노무현이 대상이었다"고 했을 만큼, 국민은 대통령으로 인해 맺힌 게 너무나 많다. 제 백성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북한 김정일에겐 '유연한 협상가'라고 칭찬하면서 몇번씩 만회할 기회를 준 대한민국 국민에겐 너무도 모질게 대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다를 수 있고, 선의의 정책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만 옳고 자신의 선의만 중요하다고 믿는 건 전체주의적 독재자나 다를 바 없다. 정 씨조차 자신이 부족해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낙선 인사를 하는 판에 그 원인 제공자인 대통령이 침묵하는 건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5년 전 '노짱'을 찍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의 눈물은 기억한다. 설령 표를 위한 전략이었대도 한때 국민은 노 대통령을 보며 희망을 가졌었다.

우리 사회엔 평등과 분배의 좌파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국민에게 상처를 입혀 미안하다"는 한마디쯤은 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좌파의 가치는 물론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까지 송두리째 매도당하고 낙인찍히지 않는다.

남은 두 달을 막판 대못질로 지새우는 대통령을 보며 인간에 대한 희망까지 잃게 될까 두렵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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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대학생들과 지금의 대학생들은 질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전에는 책을 읽지 않으면 대학생 취급을 받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책을 읽지 않아도 대학생 대접을 받는다. 예전의 대학가에서는 서점이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가에서는 술집이 호황을 누린다.

예전에는 호스티스들이 여대생 흉내를 내면서 거리를 활보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대생들이 호스티스 흉내를 내면서 거리를 활보한다. 예전에는 국민학생들이 선호하는 대중음악이나 장난감을 대학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들이 선호하는 대중음악이나 액세서리를 대학생들이 똑같이 선호한다. 대학생들과 초등학생들이 똑같은 수준의 문화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오늘날은 모든 문화가 정체성을 상실해 버렸다. 어디를 들여다보아도 뒤죽박죽이다. 양심도 죽었고 예절도 죽었다. 전통도 죽었고 기품도 죽었다. 낭만도 죽었고 예술도 죽었다. 그것들이 죽은 자리에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밤이 깊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이외수 장외인간 中


대선의 20,30대의 투표율을 보고, 또 그들의 투표결과를 보고나니 이 글이 생각났다. 요즘 대학생들, 요즘 젊은이들을 초딩이라 놀리면 초딩에 대한 모욕이라는 우스개가 단지 우스개만은 아난것 같다. 머리는 가벼워지고, 도무지 고민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그 분위기가 언젠가 또다시 암울한 시간을 돌려 줄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 온전히 20,30대 탓이겠는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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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시당선시 영국 가디언의 표지. 이 말을 오늘 하게 될지 몰랐다.


대선 출구조사결과가 나왔다.
이렇게 짜증스런 선거는 처음이다.
차차악을 선택하기도 쉽지않은 선거.
이렇게 분하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입안가득 쓸쓸한 경멸만 가득한 기분이란.

5년동안 눈감고, 귀닫고 살란다.
50%에 육박하는 지지를 해준 그들의 선택을 단 한줌도 존중해줄 수 없다.
그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

젠장...
Oh,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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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남 함양 산골에서 가난한 집안의 칠형제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내 출생은 그다지 경사스런 일이 아니었다. 뱃으니 낳을뿐, 기대도 기쁨도 없는 출생이었다. 있는 자식도 하루세끼 밥먹이기가 버거운데, 또다시 자식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어머닌 날 낳으시고 우셨을 것이다. 암죽 서말이라고, 젖배기가 돈이 더 드는 법 아닌가.

하여, 나는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인 채 윗목에 올려졌다. 군불 닿지않는 윗목에서 사나흘 있으면 제 스스로 목숨줄이 떨어져나가 집안의 고단을 덜어 줄꺼다, 할머닌 우는 어머니를 밀치고 나를 윗목에 놓고는 누구든 얘를 건사하면 혼쭐이 날거다 하셨다 한다. 나는 한겨울 싸늘한 윗목에서 그렇게 보름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살아남았다. 기적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큰 언니가 할머니가 밭에 나가고 들에 나간 시간 생쌀을 씹어 내 입에 넣주었던 것이다. 내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이후 집안이 위태로울 때마다 짐처럼 여겨졌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네 살무렵엔 효창동 주택가에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돌아서신 적도 있었다. 물론 착하고 여린 어머닌 몇걸음 못가 나를 다시 끌곤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그때, 집으로 돌아와 내 등짝 을 후려치며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에미가 너 버리고 가는데, 어째 울지도 않느냐'.

이후 나는 마치 나를 버리려했던 가족들에게 복수라도 하듯 정말 지겨우리만치 그들의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담배를 배우고(물론 들키는 바람에 이내 피울 수 없게 됐다), 고등학교 땐 못 먹는 술을 먹어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툭하면 사고를 쳐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다니고, 대학은 전문대를 들어가고, 셀 수도 없이 집을 나가 떠돌고.

내가 기억하는 잘못만 이러한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런 연고로 나는 사흘들이 '천하에 쓸데없는 기집애'란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조차도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보았다. 오죽했으면 직장을 들어가 첫월급을 탄 날, 친구가 내 손을 잡고 '니가 사람이 됐구나'하며 울었겠는가. 그 시절은 이제와 내게 좋은 글감들을 제공한다.

나는 한때 내 성장과정에 회의를 품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만약 가난을 몰랐다면 인생의 고단을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만약 범생이었다면 낙오자들의 울분을 어찌 말할 수 있었겠으며, 실패뒤에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작가에겐 아픈 기억이 많을수록 좋단 생각이다. 아니,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게나 아픈 기억은 필요하다. 내가 아파야 남의 아픔을 알 수 있고, 패배해야 패배자의 마음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갖는 내게도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밥벌이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드렸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 방황하는 사람들, 그대들의 방황은 정녕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어머니가 살아있는 그 시기 안에서 부디 방황을 멈추라.

아픈 기억이 아무리 삶의 자양분이 된다해도, 부모에 대한 불효만은 할게 아니다. 대학 때 가출한 날 찾아 학교정문 앞에서 허름한 일상복으로 서 있던 어머니가 언제나 눈에 밟힌다. 그때도 이후에도 왜 난 그 분께 미안하단 말 한마딜 못했을까. 바라건대, 그대들은 부디 이런 기억 갖지마라.


노희경이라는 작가. 드라마도 그렇고 이런 짧은 글도 그렇고 삶이 묻어난다. 너무 절절하여 조금은 괴로운 여운을 준다. 아직 엄마가 살아계시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그리고 미안하단 말을 전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러나 어쩌나, 방황은 언제나 끝날지 모르고. 이렇게 번듯한 척  살아가고 있으나 한번도 방황을 멈춘적이 없었으니. 그런 방황의 기억, 무섭고 죄송하여 한번도 보인적이 없었으니. 나는 불효는 아닐지 모르나 솔직하지 못했다. 가슴이 저린 까닭이 그 때문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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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대처하는 방법

from 생각창고 2007. 11. 12. 10:00

르네 마그리트 - 순례자


Sometimes the appropriate response to reality is to go insane.

우연히 발견한 필립 K 딕의 글귀. 가끔은 현실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이 미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신통한 점쟁이의 미래예측처럼 귓가에 맴돈다. 20년도 넘은 그의 소설에 적힌 글귀이지만, 그 촌철살인이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정확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현재도 SF이겠지. 미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 미치지 못하면 미친척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씁쓸함이 꽤 오래 남는다.

그가 적어두었던 몇마디 더 옮겨본다.

Reality is that which, when you stop believing in it, doesn't go away.
The basic tool for the manipulation of reality is the manipulation of words. If you can control the meaning of words, you can control the people who must use the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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