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문장으로 글을 여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을 꼽으라면 '병원'이다. 물론 가고싶어 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겠지만(있을까?), 병원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과 공포때문에 병원에 가야 할때가 됐음에도 '꾹' 참고 마는 경우가 있다. 오래된 책이지만 인상적인 통찰력을 보여준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나서는 병원과 의사, 의학에 대한 불신은 더 커졌지 않았나 싶다. 병원중에서도 더 가기 싫은 곳을 꼽는다면 '치과'.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렸을때의 기억때문일 게다. 그 나이때 삶이 팍팍했던 많은 어머니들처럼 우리 엄마도 산후조리라는 걸 제대로 해보지 못한 탓에 다른 곳 보다 이가 성하질 못하셨다. 게다가 완치를 위해 들여야 하는 치료비도 만만치 않아,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제대로된 치료를 받기가 힘겨웠었다. 그러다가 정말 견디기가 힘드셨는지 늦게나마 치과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치료받으러 가시는 엄마손을 붙잡고 치과에 갔던 기억이 깊이 아로새겨졌던게 아닐까. '징~'하고 갈리는 둔탁한 기계음.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고통을 호소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감히 말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상황은 내가 경험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주지 않았을까. 그런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내 안에 아로새겨져 있어 치과는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런 내가 치과를 내 발로 친히 걸어 방문을 하고야 말았으니, 며칠전부터 아파오던 오른쪽 어금니쪽의 잇몸 때문이다. 양치 할때 마다 피가 섞여나오기 시작하는 증상. 치과에 대한 공포탓에 왠만하면 꾹 참고 내 몸의 '자연치유능력'을 믿어보고자 했으나, 그런 나의 다짐을 무력화시키는 사건이 오고야 말았으니 바로 음식물을 씹을때 느껴지는 아픔이었다. 먹는 즐거움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마는 치통은 결국 나를 병원으로 인도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며 더이상 사태를 수수방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나는 부서장께 말씀을 드리고 오후시간을 도려내어 회사근처 새로생긴 병원을 찾아갔다. 치과와 결별한지 10여년 만에 다시 찾은 치과는 서울 한복판에 직장인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병원 답게 깔끔하고 친절했다. 정말 잔뜩 긴장하고 바짝 엎드려 있던 나는 겉으로 보기에도 첨단같아 보이는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최신식 안마의자처럼 내 몸을 편하게 뉘여주는 의자에 앉아 속닥거리는 치위생사와 치과의사의 눈만 껌벅껌벅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나도 인정하듯이 내 이와 잇몸이 최상급의 건강상태를 유지하지는 못했기에 내 입을 쩍 열어 보여주기가 내내 민망했지만, 그래도 아주 엉망은 아니라는 뉘앙스(친절의 표현인 듯한)의 위로아닌 위로에 다소 안심을 했다. 치석이 있고, 아마도 C2라고 칭하는 듯한 충치가 몇개 있고, 사랑니가 양 어금니에 수평으로 누워 잇몸아래 잠복하고 있다는 충격발언. 그 탓에 재수없으면 큰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발언뒤에 (다행이도) 아직까지는 괜찮다는 얘기를 이어주었다.

잇몸의 염증은 (여차하면 돋아날 듯 큰일을 도모하고 있는) 사랑니가 오른쪽 어금니로 살짝 자리를 옮겨 그 사이에 틈이 생겨 발생한 거란다. 없는 줄만 알았던 사랑니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돋아나지 않기만을 바래야 하는 간절한 심정탓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랑니가 영어로는 wisdom teeth라고 한다) 휴화산이 활화산이 되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항상 대비를 해야하는 심정이랄까. 그냥 평생토록 그 자리에 그대로 (태어나 한번도 빛을 보지 못한 사랑니에게는 가혹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생을 마감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담번에 들려 그 이미지 파일을 달라고 할 생각이다)

징후에 대한 충분한 설명, 시술에 대한 명확한 고지, 처방약에 대한 정확한 지식,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에 대한 '환자가 이해가능할 수준'의 설명, 환자의 질문에 대한 절대적으로 친절한 답변은 의사가 해야 하는 옵션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지키지 않는지 한숨난다) 회사 근처 새로생긴 병원이 그나마 '화나게 하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들어 내 이를 기꺼이 맡기기로 했다. 40여분간 돌을 깎아내는 듯한 치석제거작업을 끝내니 내 손에는 땀이 났다. (생각보다 아프진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치석이 있었던 자리에 생긴 공간탓에 어색했지만 기분은 시원스러웠다. 3일치 약을 받아왔고, 1주일뒤에 다시 들러 체크를 받기로 했다.

3일이 지난 지금은 잇몸의 통증도 조금 가라앉고, 내 혀도 이전의 기억을 잊고 새로운 느낌에 적응해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나치지 않은 수준으로 믿을 만한 치과의사에게 정기적인 검진을 받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뢰가 쌓인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는 그 어떤 치료약보다 더 좋은 치료가 아닌가) 하루 하루 시간이 갈수록 내 몸의 자연치유능력은 줄어들테고, 내 몸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은 날아가버릴지 모르니, 준비라는 걸 해야한다는 생각. 정말 오랜만에 생긴 잇몸질환, 그리고 엑스레이 한장으로 알게된 '사랑니'의 존재. 그것들이 내몸에 대해, 나의 건강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난 30년간 해왔던 칫솔질의 버릇을 뜯어고치기로 했다. 대견하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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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홈페이지인 구글포털서비스 iGoogle의 콘텐츠 중에는 "Love Quote of the day"가 생뚱맞게도 있는데, 매번 흘려보다가 이 글에는 문득 눈길이 갔다. 글이 너무도 절절해 우리말로 옮겨봤다. 사랑을 잃은 사람들, 사랑에 가슴 아파해 본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누군들 이런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진짜 비극은...사랑이 준 아픔에 사랑이 싫다며 되돌아서도 또다시 반복되는게 사랑이라는거. 너무 빨리 잊는다는게 진짜 비극이다.


"Have you ever been in love? Horrible isn't it? It makes you so vulnerable. It opens your chest and it opens up your heart and it means that someone can get inside you and mess you up. You build up all these defenses, you build up a whole suit of armor, suit of armor, so that nothing can hurt you, then one stupid person, no different from any other stupid person, wanders into your stupid life...You give them a piece of you. They didn't ask for it. They did something dumb one day, like smile at you, and then your life isn't your own anymore. Love takes hostages. It gets inside you. It eats you out and leaves you crying in the darkness, so simple a phrase like 'maybe we should be just friends' turns into a glass splinter working its way into your heart. It hurts. Not just in the imagination. Not just in the mind. It's a soul-hurt, a real gets-inside-you-and-rips-you-apart pain. I hate love."
==>  Neil Gaiman (The character "Rose Walker" in The Sandman #65)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나요? 끔찍하지 않나요? 사랑은 당신을 상처받기 쉽게 만들어요. 사랑은 당신의 가슴을 열고, 당신의 마음을 열어 놓지요. 그건 누군가가 당신 안으로 들어와 당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당신을 해치지 않도록 온갖 방어막을 치고, 온갖 무기를 쌓아두겠지요. 그러다 한 바보같은 사람이, 다른 바보같은 사람과 다를것이 없는 사람이 당신의 바보같은 삶속으로 헤메며 들어오겠지요. 당신은 그에게 당신의 일부를 줍니다. 그가 당신에게 그걸 원하지 않았더라도 말이죠. 그는 어느날 당신을 보며 웃어주는 벙어리같은 행동을 하고, 그리고 나면 당신의 삶은 더이상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사랑은 담보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당신 안으로 들어와 당신을 갉아먹고, 당신을 어둠속에서 울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단지 친구로 남아야 할지 몰라'라는 간단한 말은 당신의 마음에 길을 내듯이 조각난 유리가 되어버립니다. 사랑은 아프게 합니다. 그저 상상이 아니라, 그저 마음 뿐만 아니라, 영혼에 상처를 내고 당신 내부로 들어와 당신을 고통속에 찢어내 버립니다. 나는 사랑이 싫습니다.
==> 닐 가이먼 (로즈 워커 The Sandman 6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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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 http://home.paran.com/iamkyg/flvplayer.swf?&file=http://gscdn50.mncast.com/2007/0923/10025924820070923004543.flv&autostart=false


무한도전을 좋아하지 않아 즐겨보지 않는다고 또래에게 얘기라도 하면, "그럼 뭐가 재밌냐?"라는 힐난섞인 반문이 들어온다. 그만큼 무한도전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재미도 있기 때문이겠지만, 난 그들의 코미디가 재미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랬던건 아닌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정준하 관련 얘기가 인터넷을 달구기 시작하면서 가끔 보던 다시보기도 그만 둬 버렸다.

그래도 이 편만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김연아가 출연한 무한도전...가냘프지만 단단한 몸짓, 우아함. 코너 끝에 잠깐 보여줬을 뿐이었지만 보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감상을... Once Upon A Dream과 잘 어울려, 꼭 숲속에 있는 얼음에서 공연하는 느낌이 든다. (표현 참 구리다) 방영된지 좀 됐지만, 뜬금없이 블로그에 올려본다. 피겨 스케이팅을 자주 본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본 선수중에 가장 아름다운 몸짓을 보여주는 선수...트리플 악셀이 아니어도 세계최고라 부를 수 있는 김연아. 기술적 성취를 위해 우아함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ps1 : 무한도전이 싫은 이유에 덧붙여. 솔직히 김연아 옆에 서있는 정준하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내가 도덕군자도 아니고, 연예인에게 공인으로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연예인도 술장사 할 수 있고, 접대부를 고용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불법만 저지르지 않는다면...하지만 그래도 김연아 옆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개그하는 정준하는 보기 싫었다

ps2 : 영상이 내 계정에 올린게 아니라 언제 짤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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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P211를 읽다가 스크랩한 글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무자비하게 침략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때 환자 중에 '타리크'라는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 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했지만 끝내 오른손은 못 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음식도 안 먹었다. 완전히 절망한 것이다. 어느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아이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부유한 쪽에서 사는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다. '새로운 십자군'을 들먹이는 부시의 망언들을 당연한 것처럼 듣는 우리는 그 거대한 '십자군'에 희생당할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 2001년 9월30일자 노르웨이 <다그블라데트>가 표지 기사로 보도한 트럼소 지역의 국립병원 외과의사 후숨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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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이스라엘 탱크이고, 돌팔매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것이다. 힘의 불균형, 누가 가해자인가.


나는 과연 총을 들고 있는 중동의 어린 손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의 시선은 정말 '나의' 시선인가. 지금의 불평등한 역학관계에서 "어찌됐든 테러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말이 과연 옳은가. 총을 들고, 목숨을 위협하는 그들의 모습뒤에 감춰진 '어쩔 수 없음'을 우리는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가.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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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전재용과 박상아의 결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뭐,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한게 뭐 구설수에 오를 일이겠냐마는 아마도 아버지는 전재산 29만원으로 '허덕'이며 살고있는데 고급아파트와 고급자동차를 굴리며 살고있는 그의 아들의 결혼이 마냥 좋아보일리는 없었던 까닭이려니 싶다. 우스갯소리로 박상아가 (29만원밖에 없는) 시댁의 처참한 상태는 아랑곳없이 전재용을 선택했으니 요즘 보기드문 심지굳은(?) 며느리라는 칭찬을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촌철살인, 그 씁쓸함이 가시질 않는다.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하는데, 축복은 못할 망정 왜 시아버지의 과거사를 들먹이고 딴지거냐고 핀잔줄 수도 있겠다.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전두환이라는 아버지를 두었다고 전재용의 삶을 재단할 권리는 누구도 없는게 사실이다. 게다가 잘 모르지만 며느리는 그저 사랑한 죄 밖에 없는것 아닌가. 하지만 그의 결혼 앞에서 전두환의 파렴치를 거론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전재용과 그의 아내 박상아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가 누군가의 고통을 먹고자란 것이라는 의심, 그의 총칼에 허망하게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많은 이들의 아픔을 먹고자란 것일지도 모른다는 분노 때문일 것이다.

29만원밖에 없다는 유치찬란하기 그지 없는 거짓말로 세상을 속이고,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완벽한 현찰 은닉기술 신공을 선보이고 있는 전두환. 검찰의 추징을 피해 아직도 연희동 어디에선가 '천수를 누릴 준비'를 하며 세상을 비웃고 있을 전두환을 생각하면 내 심뽀가 고약한건지, 정말 그의 둘째아들의 결혼을 곱게 봐줄 수가 없다. 그의 둘째 아들이 무슨 돈으로 그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조사하면 다나올' 것 같은데 전두환의 은닉재산을 추징할 의무가 있는 검찰은 정말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검찰들에게 이 와탕카 만화를 추천해주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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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래 적어놓은 고종석의 심정이 100퍼센트 이해가 간다. 무심코 제목보고 누른 뉴스기사 한켠에 '조선일보'를 발견하게 되면 느끼게되는 불편함.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라는 참 좋은 기획의 책을 손에 쥐고서 느껴지는 껄끄러움. 무에 그리 까칠하게 구느냐. 좋은것, 샤방샤방 한것들은 그냥 봐주면 되지 않느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정확히 확인한 건 아니지만) 전두환을 옹호하는 한 카페에서는 '화려한 휴가'에 쏠리는 관심을 돌리기 위해 '디워보기 운동'을 하는 별 우습지도 않은 짓들을 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디워를 흠집내기 위한 낭설일지도 모르겠다) 그 영화가 현재 2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걸 보면 우리들의 보편적인 의식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런 불편함, 껄끄러운 마음을 잊고싶지 않다. 아니 적어도 아직은 잊어서는 안된다.


고종석 - 경계긋기의 어려움
 
출퇴근 인생을 접은 뒤에도 의식(衣食)까지 접을 수는 없어 한 출판사의 군식구가 된 게 두 해 전이다. 한 달에 한 번 출판사에 나가 기획회의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내 일이다. 이 출판사는 서평용 책을 조선일보에 보내지 않는다. 새 천년 앞뒤로 안티조선운동이라는 것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그랬다. 안티조선이 시민적 양식의 상징이었던 시절엔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지 않는 출판사들이 더러 있었다. 그 운동이 시들해지면서(거기 두드러진 공훈을 세운 이들이 대통령과 소위 ‘노빠’들일 게다) 그런 출판사들이 하나둘 줄어들었고, 이젠 내가 한 다리 걸치고 있는 출판사가 거의 유일하게 조선일보와 데면데면 지내는 모양이다.

객식구라는 인연도 작용해,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나는 이 출판사에서 책을 낸다. 내 책은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도 보내지 않는다. 내가 그리 부탁했다. 안티조선운동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 두 신문이 조선일보와 어딘지 달라 보이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그 차이를 또렷이 짚어내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조중동’이 세쌍둥이라는 판단을 내린 이상, 조선일보는 무뚝뚝하게 대하면서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살갑게 대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지난해에 무슨 책을 내면서부터는 ‘면납(免納)’ 리스트에 문화일보를 새로 올렸다. <미디어 오늘>에 인용된 문화일보 기사들에 몇 번 눈길을 주다가, ‘살굿빛 조선일보’라는 이 신문의 명성이 허전(虛傳)이 아님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출판사로서는 마케팅의 적잖은 부분을 포기하는 셈이다.

다른 출판사에도 내가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와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하는 걸 이 출판사가 기왕 원칙으로 삼고 있으니, 그 원칙을 낳았으리라 짐작되는 기준에 맞춰 다른 신문 몇을 거기 보탰을 따름이다. 딴 출판사에서 책을 낼 땐, 조선일보에 책을 열 부 보내든 동아일보 기자에게 기사 로비를 하든 출판사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물론 출판사 쪽에서도 내가 이 신문들의 취재 요청을 거절하는 걸 양해한다.

몇 년 전, 한 서적 전문 웹진 기자가 그 즈음 내가 낸 책을 읽고 전화를 걸어와 인터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라 출판사 편집장에게 그 웹진에 대해 물었다. 걱정했던 대로였다. 그 웹진은 어느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경영하는 대형출판사에 딸린 것이었다. 나는 그 웹진 기자에게 전화해 정중히 사과하고 인터뷰 약속을 취소했다.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갑자기 일이 생겨 서울을 꽤 오래 비우게 됐다고만 말했다. 나는 연좌제를 두둔하지 않는다. 정서 수준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1980년 5월을 피로 물들인 내란수괴에게는 적의가 있을지언정 그의 아들에게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이런저런 추문으로 제 아버지의 낯을 깎은 다른 전직 대통령 아들들에 견주어,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사업에 매진하는 그 지혜로운 처신이 외려 보기 좋기까지 하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그의 출판 사업이 저리 번창한 것이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힘입은 것만은 아닐 테다. 적어도 그 사업의 시초에는, 경영자의 아버지가 국부에서 갈취한 피묻은 돈이 들어갔을 게다. 그가 운영하는 매체에 대고 내가 내 책을 홍보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 손에 죽고 상한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내 ‘윤리성’을 뽐내고 있는 게 아니라 논리 강박을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두 달쯤 전 그 강박적 논리가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일을 경험했다. 알고 지내는 한 출판인이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아무리 애써봐야 내 한 몸조차 깨끗이 건사할 수 없음을 일깨워 준 것이다. “C씨(전직 대통령 아들)가 커다란 책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선생님 책들 상당부분도 그 도매상을 통해 독자들에게 갈 겁니다.” 머리가 어찔했다. 얼마 되지 않는 내 독자들의 일부는 내가 그리도 관련되지 않고 싶어 하는 특정 자본을 통해 내 책을 만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신문에 내 책을 보내지 않고 그 신문들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 내 ‘자기만족적’ 실천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더 침울해졌다. 삼성의 기업윤리는 조선일보의 기업윤리보다 나은가? 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삼성은 조선일보보다 더 너그러운가? 그럴 거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성 제품을 기꺼이 사서 쓰는 내가 조선일보를 지네 보듯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한 쪽은 그저 물질을 팔고 다른 쪽은 거기 사악한 정신을 끼워 파니 둘을 나란히 놓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분명히 그런가? 그 둘은 늘 또렷이 구분되는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윤리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소시민으로서 내가 넘어서는 안 될 경계가 정확히 어딘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지천명을 코앞에 둔 나이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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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칸 인질피랍사태. 뭐, 요즘 이 얘기 하루도 안듣고 지나갈 수 없는 최대이슈라 거기에 얘기 보태고 싶진 않지만, 아무말 안하고는 도저히 열통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다. (포스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좀 했다.) 예전에 노무현대통령관련 글 써놓고 후회를 해서, 논란이 되는 얘기는 가급적 하지 않으려 했는데, 느낀것들 좀 적어본다.

오늘도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볼수록 한숨만 나온다. 도대체가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 한군데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볼때 근본원인은 대략 두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는 한국의 '원치않는' 중동문제 개입. 두번째는 더 말하면 입아플 한국의 '미친'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정말 미쳤다고 밖에 할 수없다) 9/11이후 중동이 돌아가는 시츄에이션으로 볼때 탈레반이 미국(또는 파병국들)과 기독교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정말 '모르면 바보'다. 게다가 탈레반은 간다라 미술의 걸작이라는 바미얀 석불을 이슬람에 반한다며 대포로 때려부순 (단군상 때려부수거나, 아프간에 선교하러 가신 분들만큼이나) 앞뒤 꽉 막힌 놈들이다. 그들에게는 미국에 얻어맞아 정권을 내주고 시골로 쫓겨가 있는 작금의 현실이 열불 나는 일인거다.

그런 탈레반이 득시글거리는, 호시탐탐 납치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알리려는 그들의 눈앞에 '잡아드세요'라고 찬송가로 무장하고 뛰어들었다니 어의가 없다. 덩그라니 관광버스타고 지나가는 놈들을 불러세우니 국적은 파병국인 한국이요, 더구나 이슬람이 금하는 선교를 하러왔고, 설상가상으로 증오대상인 '기독교'를 이슬람의 땅에 전파하러 온 놈들이라니 탈레반이 잡아놓고도 '얘들 제정신이야?'하고 반문할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사태를 예견하지 못하고 자신의 교세확장을 위해, 선교라는 명목으로, 치열함과 결연함 없이 '관광가듯이' 그곳에 가서 인질로 붙잡혀 있는 그들을 보면 정말 '동정심'이 가질 않는다. 왜 한국인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피튀기는 종교전쟁의 한복판에 놓여 인질로 붙잡혀 그 고생을 하고 있는지. 물어도 물어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꼬득여, 220만원의 여행비를 받아, 젊은이들을 그곳에 보낸 목사 및 책임자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반성이나 하고 있는지 묻고싶다. 어쩌면 빨리 이 사태가 마무리되어 자신의 '교회'가 아무 이상없이 그냥 그렇게 온존하기를 무릎꿇고 기도 하고 있겠지.

이런 넷상의 목소리를 표현의 격함을 문제삼아 '악플'로 매도하고(심한 것들은 논외로 하고), 여론이 아닌 일부의 목소리로 축소하고, 선교를 '봉사'라고 굳이 바꿔달아 연일 매크로 돌리듯이 기사를 생산해내는 언론을 보면 한숨이 더 나온다. 게다가 시의적절하게 악플 단속한다는 경찰청 기사를 슬쩍 흘리는 못된 언론. 한국사회 성역인, 곪을대로 곪은 기독교문제가 전면으로 터져나오는 것을 꾸역꾸역 누르려는 느낌이 많이 난다. 사태의 본질은 도외시하고 벌써부터 온정주의, 인도주의로 분탕질하고 여론을 호도하는 그들은 또하나의 적이다.

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종교는 스스로 감화되어, '믿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어' 제발로 찾게되는 것이 아닌가. 방문 세일즈 하듯이, 타인에 대한 이해없이, 무작정 붙잡고 좋으니 믿으라고, 믿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협박하는 종교는 제대로된 종교가 아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함께하고자 하는 '선교'와 남이 싫다는 것을 시도 때도없이 억지로 강요하는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부 광신도들은 참아줄 수 없다. 전자는 믿지 않는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지만, 후자는 그들을 정복하지 못한 피정복자로만 본다. 그들이 아프간에서 배고프고 목마른 그 불쌍한 아이들을 앉혀놓고 앵무새 말가르치듯이 내뱉는 말들은 '선교'가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교화의 대상, 원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피식민주의적인 사고방식. 정말 혐오스럽다. 더구나 그런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같은 국적을 가진 이유로 우리가 받아야 하는 피해와 해악은 도저히 두고봐줄 수 없다. 그들이 무사히 살아돌아오길 바라고, 사태가 잘 해결되길 다른 한국인들처럼 기원한다. 하지만, 곪을대로 곪은, 오염된 한국의 기독교,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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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로드한 사진파일들의 크기 때문인지, 검색엔진의 인덱싱으로 4일째 400Mbyte할당받은 트래픽 한도를 넘어버렸다. 내 사이트를 접속할때마다 트래픽초과 메시지를 보게되면 '또야~'라는 짜증섞인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대부분의 트래픽들은 하루종일 웹을 돌아다니며 crawling하고 있는 로봇들의 '덕분'이기 때문이다. 로그 아이피를 보면 구글이 30%차지하고 있고, 다음, 네이버 등등의 봇들이 차상위를 떡하니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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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런 검색엔진들의 방문이 누군가 이곳을 방문하게 하는 매개라는 생각에 그런대로 버텨보려고 했는데, 한 4일째 트래픽을 넘기다 보니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트래픽 리셋을 할때마다 드는 비용은 250원. '푼돈'이기는 하지만, 그 돈이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정보를 긁어가는 검색엔진 때문이라면 노땡스다. 사람들의 관심 때문이라면 돈을 더들여서라도 용량증설 서비스를 신청했겠지. (물론 아쉽게도 현재의 추세로 볼때 순수클릭으로 허용트래픽을 넘어설것 같지는 않다)

남들은 웹호스팅 비용이라도 충당하려고 (또는 그 이상의 수익을 창출하려고) 구글의 애드센스로 블로그 이곳저곳에 광고란을 집어넣고 있지만, 근사한 밥 한끼 덜 먹는 돈이면 일년의 도메인 유지비용과 절약형 웹호스팅 비를 충당할 수 있는 마당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소중한 놀이터인 이곳을 광고로 도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어떻게하면 블로그와 자연스레 어울리게 광고를 배치할까, 어떻게 하면 부정클릭을 막고 이용자의 클릭을 유도할까 따위의 고민을 하는 일들은 내가 가진 블로그'觀'과는 그 거리가 너무 멀다. 개인 미디어인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포털스런' 고민을 하는 것은 물론 블로깅의 가치와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가끔 메타블로그 사이트를 들리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여튼, 블로그로 수익을 창출하거나 블로그 유지비용을 충당하고 싶은 맘은 없고, 그렇다고 검색엔진의 트래픽 공세에 250원씩 지불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므로 일단 최상위 디렉토리에 robots.txt파일을 생성해두었다. 물론 모두 차단으로. 그리고 원치않은 검색엔진의 트래픽을 차단하는 플러그인을 설치했다. 내일부터는 아마도 방문객수도 줄 것이고, 트래픽도 감소하겠지. 그러면 이 공간은 그 이전보다 더 아주 개인적이기만한 공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그건 싫은데.

그래도 검색엔진에 노출된다는 것이 지극히 무의미하고, 그리고 검색어를 통해 내 블로그를 방문하는 이들이 어떤 유의미한 정보를 얻어간다는 확신도 없으므로 (그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무던히도 낚시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 나의 '담장올리기'는 그런대로 만족스런 결과를 주지 않을까 한다. 원치않은 사람들을 높은 담장으로 막아놓고, 들려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쁜 문을 그 담장에 내어놓고 싶은데, 그런 다기능 담장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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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카라모자, 1980년 4월 / 마이클 웰스, 영국 [출처 동아일보]


사진을 보는 순간, 입이 다물어진다. 사진에 잡힌 현실도 이젠 30년전 과거가 되었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아프리카의 현실은 그때와 그리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사진 앞에서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에 감사하지 않을 사람 누가 있을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한컷을 바라보고 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입 꼭 다물어도 시원치 않을' 일들 뿐이다. 삶을 이어갈 최저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이 손 앞에서, 어이없는 블로그 싸움질 후기를 지켜보자니 쓴 웃음만 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은 그저 내 감정, 내 발밑만 중요할 뿐이다.

이 사진이 2월 9일부터 3월 12일까지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고 한다. 지난 50년간 현장의 기록을 모은 세계보도사진 특별전 ‘존재 그대로의 사실(Things as they are): 세계를 놀라게 한 진실들’이다. 가서 내 눈으로 보고 싶은데, 겁이난다. 그 앞에서 내 삶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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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에러메시지

from 생각창고 2007. 1. 11. 09:05
아침에 출근해서 의욕적으로 실행한 배치작업에서 에러메시지가 발생. 얼굴은 찌뿌려지고, 모니터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장사치에게 첫손님이 중요한 것처럼, 나에게도 처음 시작하는 작업이 나름 중요한데 순간 기운이 빠져버린다.

"쉽지 않은 하루가 되겠군" 한숨섞인 모노로그 한번 날려주고, 잠시 커피한잔 타마시고, 로그를 꺼내본다.

ERROR: CLI error trying to establish connection: [DataDirect][ODBC SQL Server Driver]The DataDirect ODBC driver you are attempting to access has been provided to you by SASInstituteInc for exclusive use with SQLServerOBDC64.  You are not licensed to use this driver with any application other than SQLServerOBDC64.  If you would like to purchase a driver for some other use, please call 800-876-3101 or visit DataDirect at www.datadirect.com

작업은 타서버의 MS SQLserver에서 ODBC로 데이터를 받아 배치작업을 수행하는 형식인데, 로그메시지를 살펴보니 드라이버의 라이센스가 만료된 모양이다. ODBC설정파일을 만져보면 될것도 같은데, 그것도 명확한 해결책은 아닌것 같고. 이렇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화해서 라이센스 갱신방법을 문의해보는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담당자 컨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잠깐의 여유가 생긴 것이지. 눈치 챘는지 모르지만, 그 시간을 이용해 이렇게 끄적끄적 넋두리 포스팅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다른 아침보다 감정적으로 훨씬 풍성해진 셈이다. 에러로 인한 짜증을 심적여유로 치환시키는 엄청난 마인드컨트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화엄경의 경구가 문득 생각나는 순간이다. 일로 도를 닦는다는 우스개가 다 뻥은 아닌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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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차노조에 대한 갑론을박을 읽고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조의 지나친 '내밥그릇 집착'일 수도 있고, 경영진의 약속위반이 문제일수도 있다. 나는 진실은 모른다, 일종의 판단유보다. 그리고 블로그로 끄적이는 많은 사람들도 대부분은 모른다. 언제나 기사나, 문건을 통해 사건을 접하는 경우 그것은 이미 2차적인 사실이며, 그건 관찰자에 의해 해석된 사실이다. 그들이 명백하고,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다. 하물며 대부분은 2차적인 사실에 대한 판단결과 일 수 밖에 없는 블로그의 글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혼란스럽다. 아쉬운건, 절실하고 절박한 것은 현대차의 노와 사일텐데,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것을 포기한 자들 같다. 현대차문제가 이리도 시끄러운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외부에 기대어 기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더이상 외부원인에 기대 손벌리지 말고, 알아서들 해결했으면 좋겠다.

2.
날이 춥다. 얼마전까지 겨울이 겨울답지 않음을 한탄하던 내 입방정이 원망스럽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버스에 올라탈때까지 경험한 칼바람에 마음까지 얼어버렸다. 완벽한 난방이 되야할 사무실도 서늘하다. 발이 너무 시려워 슬리퍼를 제껴두고 구두를 신고있으니, 이 겨울에 언손을 녹이며 일하고 있을 이들에 비해 난 그래도 호강한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언제나 상대적인 판단결과물이다. 예전에 들은 강의에서 홍대 김종석교수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행복이 꼭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같지 않다고 했는데, 물론 기본적인 절대빈곤이 해결되야하는 건 맞지만 그 범위를 넘어서면 갖게되는 행복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행복과는 '너무도 큰'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난 성장주의자들이 싫다.

3.
점심때 낮잠을 포기하고 읽던 '우리는 몰바니아로 간다'를 마저 읽었다. 보면서 거짓말도 이렇게 시치미 뚝때고 대하드라마식으로 하면 예술이 되는구나라고 감탄한다. 수많은 지명들, 익살스러운 묘사들, 캡션만 봐도 웃음이 나는 사진들은 뻥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다. 다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거짓말하"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쿨하다. 구리고, 불쾌함을 주는건 "거짓말을 진짜라고 말하면서 거짓말하"는 부류들이다. 문제는 그런 부류가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다.

4.
넬의 '힐링프로세스'를 듣는다. 노래로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는 그들의 포부처럼 듣고있으면 나의 아픈곳까지 불러제끼고 있다는 묘한 공감을 경험하게 된다. 없던 아픔도 끄집어내어 위로받고 싶다는 느낌이랄까. '마음을 잃다'를 들으면서 든 생각인데, 멜로디가 참 아름답다. 이들을 알게된건 참 오래되었고, 때로는 보컬의 연약함이 싫기도 했었지만 (흐느낌이 싫었던걸까) 점점 들을 수록 매력이 느껴진다. 추운날, 녹초가 된 퇴근길에 가장 잘 어울린다. 조만간 리뷰를 해볼 생각.

5.
가끔 글을 쓰기위해 블로그의 편집창을 열면 부담감에 손가락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편하게 끄적이는 이런 글이 가볍고 좋다. 다소 방관자적이고, 지극히 지나가는 관찰자적인 시선이라 거북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내블로그 다운' 글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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