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ebs-지식채널

개인적으로는 황선홍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대는 홍명보에 비해, 잘생긴 그의 얼굴은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프로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그의 활약을 볼 기회도 없었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보고 제대로 평가할만한 여유도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그는 언제나 무기력했다. '결정적 킬러본능'은 물론이고 꼭 넣어야 할 골도 넣지 못하는 최전방 공격수 황선홍. 한국대표팀 경기에 대한 답답함은 고스란히 그에게로 쏠렸고, 냄비언론처럼 나도 경기결과를 황선홍 한명에게 쏟아부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상을 보면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무기력함과 답답함은 온전히 그의 몫이 아니었던것 같다. 그건 그때 우리의 축구수준, 그걸 반증하는 것이었을 뿐. 황선홍은 그걸 뛰어넘을 만큼 천재적인 선수가 아니었지만 한골을 그 누구보다 바랐던 성실한 축구선수였음을 인정해주고 싶다.

우리사회는 종종 개인에게 능력이상의 무게와 책임을 지우고, 결과에 대해 그 이상의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다. 축구가 한사람이 하는 운동이 아닌게 분명하다면 드러나는 문제의 원인은 그 축구팀 모두의 문제로 환원되어야 하는게 당연하다. 정작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온데간데 없고 격렬한 비난만 난무하는 익숙한 모습. 그저 우리는 배고픈 동물처럼 욕하기 쉽고, 탓하기 좋은 대상을 찾아서 비난을 퍼부던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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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수도 런던의 영국도서관 앞에서 직원 조 타이트 씨가 24일 신문을 쌓아올려 만든 의자에 앉아 있다. 이 특별한 ‘신문 의자’는 25일 개막되는 신문전시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런던=AP연합)



아침 출근길 신문에서 본 사진...오른쪽의 여자처럼 자리에 앉아 신문을 들고있다가 시선이 멈추었다...부흐홀트의 책 그림이 낭만적이었던것처럼 이 사진속의 신문도 편안하고, 유익해 보인다...(우산의 산뜻함이란)

한장만 넘기면 온갖 비난이 난무하고, 욕하고 헐뜯어대는 하이에나같은 신문속 세상...하루의 시작을 신문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내 오랜 버릇이 요즘처럼 힘겨운 적이 없었다...어쩌면 요즘 한국의 신문의 존재가치는 읽는것이 아니라 쌓아두고 깔고 앉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신문을 읽으며 난 그 신문의 편집인과 기자와 외부 기고자들과 치열하게 싸운다...
"난 너의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네가 지적하는 시선은 편파적이다"
동의하지 않겠다며 날선 대립각을 세우며 한장한장 넘기다 보면 멍해진다...의도가 빤히 보이는 편파적인 기사를 보면 "저런, XXX"소리도 절로 나온다...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에 무릎을 탁치고,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큰 통로였던 신문...요즘은 1면을 넘기며 크게 쉼호흡을 해야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안보면 그만이지? 쉽게 말하지만, 어쩌면 나 또한 그런 무의미한 싸움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신문 의자처럼 내가 신문을 읽으며 편안해 했던적은 초등학교 시절 읽던 '소년동아'밖에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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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은데...글이 써지지 않는다...'쓰기'버튼을 누르면 머리가 하얗게 되버리는 걸까? 9월이 되고 8월은 지나가고 내 주변은 또 달라지는데...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는 내 생활처럼...아무렇지도 않게 글 쓰여지는 것이 꼭 내 생활 같다...8월에 내 삶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한것이 못내 서운하다...여기 아닌 다른 곳의 하늘을 꼭 보고 싶었는데...왜 못했는지...개강을 하고 짜여진 시간표 속에서 난 내 8월을 원망할거 같다...

후련하게 글을 쓰고 싶다...새로 듣게된 노래...새로 읽는 책이야기...소소한 내 삶의 이야기들...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의 삶 이야기라도...이곳에 앉아 몇시간이고 주절거리던 그 기억들...왜 난 길을 잃었을까? 담아두지 못하고 내가 받아들이는 것들...이젠 한낱 고민조차 하지 않고 내쉬어 버리기 때문일까...너무 가벼워진걸까...생각하지 않으려 하는걸까...점점더 현실...아직 현실조차 되지 않은 未현실의 것들에 허우적 대고 있는 걸까...

새로 시작이다...그치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시작의 반복일 뿐이다...어디 하나 새로운 것은 없으므로...그래서 그 반복이 지겨울 뿐이다...그걸 알면서 또 두려워해야하고 또 흘려보내야 한다...그 속에서 잠깐 고개 들어 이곳을 보면...난 멍해져서 지금처럼 헤매고 있겠지...

기다림에 익숙해지고 싶다...5분, 10분, 잠깐의 기다림에 조바심 내지 않고...꼭 다시 오겠지라는 기대 같은건 하지 않고...그냥 막연히 기다릴 수 있는 그런 차분함을 배우고 싶다...언제나 그랬던 것처럼...내가 적어내던 그 빈 노트 혹은 빈 게시판처럼 기다리고 싶다...오늘처럼 게시판에서 길을 잃어 당황스러워 하지 않도록...그냥 기다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삶이라는 것도 이와 같으리라.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더 환해 보이지 않는가. 상처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진짜 보는 것인지나 아닌지.' 김혜순 - 들끓는 사랑 中에서

지금 길을 잃고 있는 것이...상처였음 좋겠다...답답해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어쩌면 삶을 '진짜 보는것'이었으면 좋겠다...그리고 더 환해 보였으면 좋겠다...9월의 어느날...누구라도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다...

20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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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을 반겨줄 길 하나쯤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가면서 숱하게 걷는 길중에서 어느 하나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감정이 생길때 찾아가는 자신만의 길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처음에 어떤 길이 좋아지면 찾는 일도 많아진다. 당연히 길과 맺어지는 기억들도 늘어나고 결국에는 길은 그길 자체로 남아있기 보다는 길과 연관된 사건, 기억들과 함께 남아있게 된다.

나에게 그 길을 묻는다면 난 종로를 꼽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쉬이 달려나가 보고싶은 곳을 찾아 가볼 정도로 내가 언제나 편히 갈 수 있는 곳은 종로이다. 사실 한동안(이사하기 전) 내 문화생활의 중심은 종로 였다. 고쳐말하면 문화 생활이란 것을 하기 시작한 것도 종로부터이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마음이 허전해서 영화보러 간다고 할때도 종로에 즐비한 극장중 한곳을 찾아간다는 말이고 (여기에는 명보극장도 포함되는데, 항상 먼저 종로를 들려 을지로 지하도를 건너가기 때문이 다.) 너무나 읽고싶은 책이 있어 책사러 간다고 할때도 종로를 간다는 말이다. 라디오에서 얼핏들었던 노래를 찾아 언제나 뒤지는 곳은 종로 의 대형 음반점이고 옷이 없어 동대문에 옷사러 간다고 할때도 종로는 언제나 지나친다.

집에서 학교를 갈때는 종로를 지나야 했다. 드물게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면 아침일찍 버스를 타고는 했었는데, 언제나 그 시간 종로거리는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난 지친 학교 등교길에 자그마한 힘을 얻곤 했었다.아직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어쩌면 내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를 그들의 삶. 아침의 해 때문이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출근길은 나에게 싱그러움을 주곤했다.

한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해가 오는 마지막날. 별 의미없을 그날이 그래 도 가슴에 남는 건 보신각의 은은한 종소리 때문이었다. 종로를 지나 치며 항상 보는 그 종. 한해동안 단 하루. 그것도 33번의 종소리만 울 리며 남은 시간을 침묵하는 보신각종은 차라리 서글픔이었다. 그 종은 사람들의 긴 외면을 한해의 마지막 날 보상받는지 모른다. 그 긴 기다림. 한해를 맞는 우리는 그래야 하리라.

대학 입학후 얼마뒤, 난 처음으로 데모에 참가했다. 철거민 시위였던 걸로 기억한다.학교안에서 모여 집회를 가지고 버스를 타고 종묘에 집결했다. 그 떨림. 두려움. 종로의 바닥에 앉아서 한참을 안절부절 못 했다. 이유도 모르는 떨림 때문이었다. 두려움을 감추고 소리내고, 주 먹을 쥐고 노래불렀다. 펄럭이던 깃발들...하지만 난 명동성당까지 가 투를 가지 못했다. 난 그때도 종로를 걸었다. 싸우고 있을 명동성당의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보이던 종로가 그때는 싫었다. 처음 으로...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평소에 난 만남을 강요하지 않는다.억지스런 것은 언제나 탈이 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애를 만나고 싶어 며칠동안 사정을 했다. 예매도 하지 않았던 표를 이미 네 몫까지 예매했다고 거 짓말하고, 정말 시간이 없다는 그애의 마음을 간신히 하루만큼만 돌렸 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애를 만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미치도록 보고싶었는데 쉬이 만날수는 없었다. 그때 힘들게 보았던 그 공연 장소가 종로 연강홀이었다.난 광화문에서 미리 내렸다. 종로1가부터 5가까지 길을 걸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나에 대한 실망과 알수없이 휘어지는 내 사랑에 대해...수많은 연인들이 걷는 종 로, 나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때 선배의 꼬임에 넘어가 난 독서토론회라는 걸 했었다. 책읽 는 재미보다는 형, 누나,그리고 내 또래 친구들을 만나는 재미에 고등 학교 2년간을 빠져보냈다.일요일 아침마다 읽은 책을 소중히 챙기면서 많이도 부풀었었던 것 같다.그 독서토론회 장소는 종로옆의 을지로 청 소년회관이었다. 공부를 보충해야 할 일요일에 외출을 하는 난 당연히 부모님의 꾸중을 들어야했고, 점점 무거운 독서실 가방을 메고 도둑놈 처럼 몰래 참석해야할 날이 많았다.그 토론회의 뒷풀이는 언제나 종로 였다. 꽉막힌 고등학교 시절,난 일요일마다 경험하는 터질듯한 자유스 러움을 즐겼던 것 같다. 그래서 일까? 돌아오는 종로길은 새로 시작되 는 월요일 때문에 가슴이 한없이 무겁곤 했었다.

제작년 겨울 모처럼 인사동 갤러리를 찾은 날 우연치 않게 마음에 드 는 그림을 발견했었다. 몇시간을 죽치고 그림을 봤었는데,한참을 지나 다시 종로로 나오니 펑펑 첫눈이 왔었다. 그림의 느낌은 눈을 보자 다 사라지고 이렇게 쓸쓸히 첫눈을 맞는다는 서글픔.결국 난 혼자 인사동 지대방이라는 찻집에서 모과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고 나서니 주인 아 저씨가 나한테 말했다. 바람맞았냐구, 그래서 기다리다가 혼자 가냐구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면 좋으련만,이 렇게 바보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첫눈 오는 날, 그날 종로길은 참 아름다웠다. 눈내리는 거리는 어디나 아름답다.

학교끝나고 금전적인 여유가 있으면 난 집에 오지 않고 종로에 내렸다. 그냥 술이 고프면 피맛골에 자리를 잡고 난 친구들을 불렀다. 내가 부 르는 이들은 항상 동대문 방향에서 웃음 혹은 울음 짓는 표정으로 나 를 항해왔다. 아니 울음짓는 적이 많았던 것 같다.때로는 술을 못견뎌 쓰러지기도 했었다. 그래도 종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붙잡 지도 않고, 가라고 밀지도 않고...항상 그렇게 있었다.

몇번째 생일이었을까,정말 오래전에 시계다운 시계를 처음 차게 된 것 은 종로 시계방에서였다. 당시 아이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돌핀스 디지털 시계를 차곤했었는데, 내가 그애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던 건 아버지가 처음으로 아날로그 어른 시계를 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검 은 가죽 줄에, 이름난 회사는 아니었지만 째깍째깍 움직이던 그 시계 가 너무도 소중했었다.밤마다 9시만 되면 난 시계를 꺼내들고 뉴스 차 임에 맞춰 시간을 맞췄다. 내 소중한 시계가 한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그짓을 몇 달을 했었던 것 같다.시계유리가 깨지 기 전까지...

한동안 내 밤을 같이 보낸 그 금성 아하 미니 카세트.지금 생각해보면 투박하기 이를데 없는 그 카세트는 한동안 내 소중한 보물이었다.당시 로서는 파격적인 스테레오 사운드를 들려주었고, 꽤 깨끗한 음질을 들 려주던 그 카세트를 산 곳은 세운상가의 뒷골목이었다.그 카세트를 켜 놓고 난 황인용의 영팝스를 즐겨들었다.이수만의 방송도 들었던 것 같 다. 가사도 모르는 팝송을 흥얼거리다 언젠가 난 처음으로 수잔베가의 루카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좋아 얼마후 난 그녀의 LP를 샀다. 두손을 턱에 괴고 예쁘게 웃고있던 그녀 앨범의 자켓에 난 매료 됐고,앨범 타이틀이었던 solitude standing이라는 제목은 그녀의 목소 리와 어울려 꽤 오래 가슴에 남았었다.

대학 첫 미팅했던 성신여대 그 아이랑 두번째 만났던 곳은 종로의 KFC 였다. 그리고나서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걸었는데,걷다가 우연히 발견 한 예쁘고 조그마한 배재 공원을 보고 서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 리고 나서 그애와 난 결국 종로로 돌아와 코아아트홀에서 영화를 봤다.그때 종로가 얼마나 따뜻했는지는 아무도 모를거다. 왜 그렇게 종로를 걷는 것이 벅찼는지 아무도 모를거다.그리고 일년정도 후에 난 교보문 고 외국서적 부근에서 지나치는 그애를 보았다. 그애도 날 봤던 것 같다. 놀란 것은 한참뒤였고, 본능적으로 난 얼굴을 돌렸다. 바보같이...

근데 점점 마음에 안드는 것이 종로에 하나둘 생겼다. 종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잡은 삼성플라자.우루과이 건축가가 설계 했다는 그 초현대식 건물은 다른 빌딩보다 훨씬 더 밉다. 종로길과 평 행하게 서있지 않고 길에 거슬러 삐딱하게 서있는 것도 정말 싫다. 어 디에서나 풍기는 자본의 냄새.하긴 종로도 이미 자본에 길들여져 있지 만 새로 생긴 거대자본의 결정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 그냥 그렇게 놔두면 될 것을 단장 한답시고 관철동 젊음의 거리라 고 부르는 것도 우습다. 길이 어떻게 젊은이들의 것인가? 종로는 열려 있어야 한다.누구나,종로 어느 곳이나 편하게 거닐수 있어야 한다. 종 로 파고다 주변을 할아버지들의 거리, 반대편의 관철동을 젊음의 거리 라고 나눌수 있을 것인가? 꼭 그렇게 종로길을 구분지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땅을, 거리를 가르면 길은 생명력을 상실한다. 죽어가 는 거리, 난 정말 보기 싫다.

종로에 하나둘 생기는 요상한 나이트 클럽의 휘황찬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밤이되면 누구든 아랑곳없이 달려와서 머리에 때 낀 것 같은 머리를 하고 호객행위하는 애들도 정말 싫다.걷다가 술한잔 하고 싶으 면 알아서 찾아갈 텐데, 또 종로의 술집은 기다리고 있을텐데, 억지로 끌어들이는 건 몹쓸 짓이다.

걷고 싶으면 무작정 나와 종로를 향해간다.누군가와 함께라면 넓고 사 람많은 종로 대로를 걷고 혼자라면 인사동을 지나 사람이 드문 안국동 한적한 길을 걷는다. 작년 한해는 안국동,그길만 많이 걸었던 것 같다.내 주변의 모양새에 따라 내가 길을 걷는 것도 많이 다르다. 올해는 수많은 연인들처럼 종로 큰 길을 걸어서 영화를 보고싶다.그러다가 배 고프면 보신각 종을 보며 파파이스 치킨도 뜯고 싶다.

하지만 비록 홀로 걷더라도...그래서 종로 큰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럽 더라도...내 쓸쓸함에도 항상 손흔드는 종로의 따뜻함은 변함없었으면 좋겠다. 내삶이 묻어있는, 그런 종로가 난 너무 좋다.

19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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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도 눈오던 날에...

from 생각창고 2006. 5. 22. 16:47

눈이 왔다...
아니 몰랐다...눈이 오는지...
하도 답답해서 창문을 보고있었는데...낮설은 뭔가가 날렸다...
처음에는 눈인지 몰랐다...아니 눈일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근데 눈이었다...정말 함박눈이었다...그날 밤에...
눈 내리는 걸 보고 아무것도 안했다...그냥 눈만 봤다...

한 시인은 눈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바람에 날리는 눈은 땅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자꾸만 날린다고...
내리고 싶고 땅에 스미고 싶지만 바람때문에...
아니 땅이 밀어내기때문에 내리지 못한다고...
근데 그날의 눈은 너무도 포근히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다행이다...
제 자리를 찾아서 사뿐히 내리는 눈이 그렇게 대견할 수 없었다...
잠이 다 뭔가...난 눈만 봤다...

눈은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지 않는다...
만지려하면 녹아버리는 無의 존재지만...
곁에서 바라보면 반투명의 흰색으로 반짝이는 큰 존재다...
눈은 내리면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자신을 기억하라고...받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모습 그래로 조용히 내린다...
그런 눈이 너무 좋다...

눈같은 사랑이면 좋겠다...
나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나의 사랑 그대로 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포근함...눈과 같은...
붙잡으면 사라지지만...그대로 바라보면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그런 사랑이면 좋겠다...

눈은 내린 자리가 어느 곳이었던 간에 혼통 순백으로 덮어버린다...
아파하건...힘들건...상처입건간에 눈이 내린 곳은 하얗게 변한다...
사랑도 그래야 하리라...
사랑하는 이가 어떤 모습이던지...아프던지 힘들던지...괴롭던지...
그에게로 향하는 나의 사랑으로 인해...
님은 편할 수 있어야 하리라...아프지 않아야 하리라...

하지만 눈은 결코 집착하지 않는다...
눈의 흰색은 변하지 않는 흰색이 아니다...
싱그런 해가 뜨면 또 지나칠 만한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기꺼이 녹여 하나된다...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

내 사랑도 그래야 하리라...
결코 영원히 님의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님이 멀어지는 날 조용히 녹아...그 곁에서 떠나야 하리라...
님의 아픔과 괴로움만 내 맘속 깊이 두고...
난 떠나야 하리라...언제까지나 남아서는 안되리라...

눈이 그친 아침날...
해가 그리 맑은 이유는...
눈은 자신을 녹일 해마저 그냥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미워하지 않고...햇살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도 날 미워하는 사람마저 사랑할 수 있다면...
그리도 맑을 텐데...
내 사랑은 그렇지 못하기에...
항상 불투명이다...항상 쇠소리가 난다...둔탁한...답답한...

★장마가 시작된다는 6월말에 일년전 눈이야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장마비처럼 눈이왔으면하고 바라는건 미친짓일까?
갑자기 눈쌓인 학교 교정이 그립다...

20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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