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김대중

from 생각창고 2009. 8. 19. 11:25

1. 어린시절 일이다. 매년초가 되면 학교에서는 일종의 '호구조사'를 했다. 아버지 직업은 뭐고, 본적은 뭐고, 집은 자가인지 전세인지 같은...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조사였지만 새로 배정받은 담임에게 나의 물적토대를 다 까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으며 이유없이 부끄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런 정보가 그 아이를 '교육'하는데 어떤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담임의 어떤 차별적 시선에 영향을 미쳤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때 다른 항목도 그랬지만, 본적란을 쓰는데도 머뭇거리곤 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전남 영광이었고, 나의 본적도 전남 영광이었다.

2. 87년이었나, 상도동에 살때 동네가 들썩인 적이 있었다. 동네 이곳 저곳에는 김대중 후보의 유세를 알리는 벽보가 나붙었다. 장소는 개장한지 1년남짓 되었던 보라매공원이었다. 아버지는 들떠 보였다. 그날 아버지는 어린 내 손을 끌고 유세장에 갔다. 소풍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물과 도시락을 싸주었다. 선거유세에서 동원된 인원이 그 후보의 지지세로 환원되던 그 시절. 난생처음보는 사람들 물결, 노란색 깃발들.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던 김대중의 목소리. 생경한 이미지들이 계속되었고, 난 아버지의 그런 열광을 이해하지 못했다.

3. 몇해 뒤, 아버지는 나의 본적을 서울로 옮겼다. 새학년이 시작되던 날, 아버지는 본적란에 써넣을 주소를 알려주셨다. 왜 옮겼냐는 질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때 본적이 전남으로 되어있으면 불이익을 받는다기에 그렇게 했다고 하셨다. 그깟 본적을 옮기는 일이 뭐 대수라고, 세상이 예전과 달라 그런 호남차별을 하지는 못할 거라 얘기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순진하다고 말했다. 아직 세상이 그렇지 않다고. 여소야대 정국을 뒤집어버린 3당합당이 있었고,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시절이었다.

4. 아버지에게 호남은 드러냈을 경우에 받게될 불이익으로 인해 감추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목소리를 그나마 대변해 줄 김대중에 대한 심정적 지지는 깊어졌다. 지역을 삼분할 했던 3김 정치의 한가운데에 김대중이 있었다. 김대중도 자신의 지역적 기반을 자산으로 삼기도 했으나 그는 적극적으로 이용했다기 보다 지역주의의 피해자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호남출신이라는,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을 안고있는 한계로 인해 김대중은 폄하되고, 좌익용공으로 덧칠해졌다. 호남은 헤게모니 싸움에서 철저히 소외되었고, 정치적 필요에 의해 호남고립론은 심화되어갔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김대중을 사랑했고, 신문을 보며 욕을 내뱉는 일이 잦아졌다. 그를 열렬히 지지해주는 호남사람들로 인해 김대중의 정치적 스탠스는 오히려 좁아졌고, 그를 내내 붙잡았다.

5. 서경원방북사건으로 안기부에서 구인장을 발부했을때, 김대중은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검찰출두 장면이 TV에 방영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동교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두를 결정했을때, 그가 자신의 집 앞에서 검찰로 가는 차에 올라설때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내 눈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최초의 눈물이었다. 검찰조사를 하러 차에 오르는 그의 기우뚱한 모습. 아버지가 왜 그리도 서러운 눈물을 흘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즈음 나에겐 김대중 자신도 처참한 시대상황의 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해주었냐고 묻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6. 김대중은 내 손으로 뽑은 최초의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을 뽑았을 때처럼 세상이 바뀔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뛸듯이 기뻐했다. 날밤을 세우며 개표방송을 지켜보셨고, 신문을 뚫어져라 읽으셨다. 혹처럼 달고있던 김종필.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외환위기가 잦아들 무렵, 권력분배 문제가 점차 수면위로 올라섰고, 잡음은 계속되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절름발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김대중은 그가 지닌 한계를 행동을 통해 이겨냈다. 그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가장 많은 대통령이었다.

7. 그가 세상을 떠났다.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는다. 허나, 시대가 그를 너무도 폄하했기에, 그가 가진 가치를 온전히 바라보지 않았기에 그 억울한 마음을 역사에 돌리고 싶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삼키기 힘든 가시를 비루하게 맘에 새긴다. 그의 서거소식을 지켜보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긴 울음을 우셨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김대중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기에, 선뜻 전화드리지 못했다. 내가 느끼는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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