쉘 위 댄스
감독 수오 마사유키 (1996 / 일본)
출연 야쿠쇼 코지, 구사카리 다미요, 모리야마 슈이치로, 타구치 히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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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Shall we dance'를 발음할때는 '쉘 위 단스'라고 말해야할 것 같다. 영화의 끝부분,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선생 마이가 스기야마에게 손 내밀며 말하던 설렘은 그렇게 말해야 다가온다. 춤추실래요. 뱉었을때 그 끝에서 맴도는 '서울의 달'의 음습함은 쉘 위 단스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따스한 볼룸에서 펼쳐지는 우아한 춤이랄까. 춤출래. 아름다운 우리말의 설렘이 축축해진 까닭은 춤이 아닌 그 너머를 꿈꾸고, 그걸 이용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자들 탓이다. 

이 영화는 공짜표로 구경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목동의 '킴스시네마'에서 나누어주던 초대권으로 늦은 시간에 영화를 봤다. 일상의 모습을, '일상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따스함이 화면가득 담겨있었다. 춤, 몸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지는 동선이 새겨지던 플로어가 생각나고 그 춤 주변에 이리저리 자리잡은 각각의 삶들도 기억난다.

누군가는 스기야마의 중년의 위기가 너무도 깔끔하게 잘 봉합되었다는 점. 아무런 불협화음없이 현실로 돌아왔다는데서 이 영화의 비현실성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물론 갈등이 없는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영화 정서와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라 보는 내내 아무런 긴장도 주지 못한다. 일종의 양념같은 느낌이랄까. 허나, 판타지를 정색하며 따질 순 없듯이, 이 영화도 그러하다. 마냥 기쁘고, 행복한 그 영화적 현실에 딱딱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도리가 아닐듯 싶다.

이 영화 보고 춤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스기야마와 토요코가 춤대회에서 사뿐히 무대로 뛰어가던 벅찬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목동역까지 걸어가는 몇분간, 절대 티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뛸듯이 지나올 정도로 영화의 리듬은 낮게 오래 남았었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서 단정하게 차려입고 춤을 추던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쿠사카리 타미요'라는 이름을 가진 극중 '마이'의 아름다운 동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볼룸댄스에 무지한 내게도 꽂힐만큼 고혹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니 몇년 후, 어느 퇴근길(노량진역쯤이면 되겠다), 학원 창문을 여는 마이의 모습이 보인다면...참으로 뻔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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