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셋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2004 / 미국)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버논 도브체프, 루이즈 르모이네 토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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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영화를 본다. 왜 다시 꺼내보았는지 말하고 싶진 않다. 영화란 그런것이니. 마음 한구석 원했을거다. 속편 개봉 소식을 들었을때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 봤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9년의 단절쯤은 아무것도 아닐거라 생각했기에 그들이 처음 만난 시점부터 다시 따라가고 싶었다. 그들이 함께 눈뜨던 어스름 공원처럼, 나 또한 새벽을 채우며 비포 선라이즈의 엔딩을 봤을때, 맘은 얼마나 뜨거워졌던가. 서로에게 남아있는 짧은 시간. 그 사이를 채우던 감정. 그들이 다시 만나기를 바랬기에, 그들의 재회가 너무도 궁금했다.

영화의 시작. 서점씬. 셀린의 얼굴이 보이자 제시는 당황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뛰어나가길 바랬지만, 제시는 행사를 대강 마무리하고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hi", "hello", 9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건조한 인사들. 이런. 이게 뭐야. 뜨겁게 포옹이라도 해야지. 비포 선셋을 보던 20대의 끝무렵, 난 그들의 뜨거운 재회를 원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으며, 재회란 휘발되지 않은 감정을 되살리는 생생한 어떤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이 속편은 '사랑, 그 후'가 아니라 '추억, 그 후'를 말하고 있다는 걸.

깊은 고민없이 걷는다. 망설임은 별로 없다. 서로의 일상에 고개 끄덕이고, 기억을 조용히 보듬으며 말을 이어가는 그들. 그게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그들만큼 나이들었기 때문이겠지. 그렇겠지. 스무살이었다면 더 뜨겁지 않아서 아쉬웠을테지. 다시 만나서 처음 만날 때 만큼의 열정으로 부딪힌다면 어떻게 견뎌낼수 있을까. 그들이 되새기며 확인했던 것처럼 추억은 감당할 만큼만 아름다운 것이니 말이다.
  
Memory is a wonderful thing, if you don't have to deal with the past.

파리의 햇살, 카페, 공원. 삶. 제시와 셀린의 로맨스는 6개월과 9년 사이 어딘가쯤에 놓아둔 것 같다. 건조하고 차분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6개월 후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정이 있었고,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기다렸니. 왜 나오지 않았어, 너를 찾아 헤메였어라고 말하지만, 그 뿐이다. 어긋나버린 운명을 나무라지 않고,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에 눈물 흘리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히 지나버린 추억을 더듬어 갈 뿐 추궁하지 않는다. 한다해도 어쩔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나이니까. 이야기가 놓이는 화면은 무디고 건조하다. 그래서일까. 제시의 고백은 내뱉기까지의 망설임이 느껴진다.

- (Jesse) In the months leading up to my wedding, I was thinking about you, all the time.
  I mean, even on my way there...
  I'm in the car, and a buddy of mine is driving me downtown, 
  and I'm staring at the window...
  and I think I see you. Not far from the church, right.
  Folding up an umbrella, and walking into a deli, on the corner of 13th and Broadway.
  And I thought I was going crazy, you know?
  But now I think it probably was you...

- (Celine) I lived on 11th and Broadway.
- (Jesse) You see.

그래, 왜 생채기가 없었겠는가. 마주선 지금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운 시절은 아닐지 모르지.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조금 무뎌졌을 뿐이지 왜 아프지 않을까. 아득하지 않을까. 그런 제시에게 나 또한 그리웠노라고 셀린은 바로 답하지 않는다. 영화 끝무렵, 끝도 없이 이어지던 말 대신 동화같은 노래로 그녀는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제시와의 아름다웠던 그 밤을 노래하며. 이 노래는 그저 'Waltz'에 대한 노래라며. 




말의 성찬. 아무나 붙잡고 볕좋은 벤치에 앉아서 실컷 수다를 풀고 싶을 만큼 언어는 풍성하다. 말은 서로 어긋나지 않고 끄덕임 속에, 응시 속에, 짧은 긍정의 단어 속에서 차분히 자리잡는다. 그러고 보면 할말이 남아있다는 건 얼마나 벅찬 일일까. 9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마주섰음에도 어색하지 않게 재잘거리며 재회할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해 말이 통한다는 건.

물끄러미 앉아 그들의 얘기를 마저 듣는다. 이렇게 할 얘기가 많으면 좋을텐데. 그리워, 보고싶었어. 사랑했었어. 기다렸었어. 내뱉은 말끝의 어색함이 두려운 뜨거운 말들, 그래서 공허할 말들로 채우지 않고 살아온 이야기, 하는 생각, 주변이야기로 그간의 그리움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참 멋지다.

왈츠에 대한 노래가 끝나고 제시가 가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걱정하는 것일까 아쉬워하는 것일까 의도를 할 수 없는 셀린의 말. "아마, 이러다간 너 비행기를 놓치고 말거야." 다시 이별하며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이 느껴질때, 제시는 묘한 표정으로 셀린에게 대답한다. "알고 있어".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를 덮어둔채 영화는 끝난다.

- Maybe. you are gonna - miss - that - plane!
- I know.

질문은 다시 반복된다. 제시는 비행기를 탔을까, 타지 않았을까. 아니면 다음 비행기를 탔을까. 알 수 없다. 게다가 속편은 더이상 없을 것이니. 그러니 그저 "알고 있어"라는 제시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짐작해볼 뿐이다. 또다시 반복되는 질문. 답은 어디쯤에 있을까. 있기는 한 것일까.

셀린의 집으로 가는 차 안. 격하게 감정이 부딪히는 장면. 9년이 지난 그들의 삶은 쉽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때 만났으면 어땠을까." 힘든 결혼생활, 꿈, 셀린에 대한 그리움. 눈물이 맺히고, 조용히 듣던 셀린은 살짝 손을 들어 제시를 만지려 하다, 결국 손을 거둔다. 느껴지는 감정의 결. 나만큼이나 힘들었던 너의 삶. 너도 힘들었구나. 그렇게 위로한다. 그 걸로 된거다. 또다시 만났을까. 모르겠다. 제시를 향해가던 떨리는 그 손이, 반복되는 질문에 대한 그들 나름의 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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