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다른 정보를 몰랐다면 단지 우연히 보게된 영화 예고편 때문에 영화를 놓치게될 뻔했을지도 모르겠다. 흥행을 보장해야 하는 예고편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겠지만, 예고편은 영화를 제대로 왜곡하고 있다. 그 짧은 클립을 보고나면 이 영화가 서구시각으로 편집된 뻔한 테러무비, 일종의 스릴러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걸 기대하고 본 사람들은 '낚였다'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인터넷에서 보이는 감상평이 극단으로 갈리는건 그 때문이다.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브래드피트의 이름이 예고편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것도 그가 이전에 보여줬던 이미지에 기대려는 것이겠지만 웬걸, 이 영화의 브래드피트는 전혀 브래드피트 같지 않다.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보고나면 주절주절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을 가중시키고 분열과 싸움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글을 쓰는 것이 나를 타인에게 이해시키려는 것이라면 이 즈음에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나면 '침묵은 금이다'라는 옛 어르신들의 명언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노자 도덕경의 '道可道 非常道'(말할 수 있는 도는 항구적인 도가 아니다)도 휘릭 스쳐간다.  영화에서도 그나마 갈등을 봉합하고 작은 화해를 말하는건 말이 아닌 몸짓이다. 마주잡은 손, 짙은 포옹, 눈빛... 때론 그게 진실이라는것을 이 영화는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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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해 돌아온 멕시코에서 아들과 포옹하는 아멜리아. 그 서글픔을 끌어안듯이 둘의 짧은 포옹은 여운을 남긴다.


에두아르 부바가 찍고 미쉘 투르니에가 글을 붙인 '뒷모습'이란 책을 보면 진실은 말을 하는 앞모습이 아니라 말을 끝내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있다라는 걸 알게된다. 표현하려고 하는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현대사회에 살면서 살면서 매일 타인과 이야기를 하고, 소통하기 위한 수단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지만, 진정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은 점점 더 아득하기만 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오해만 늘고, 통하지 않는다는 단절감이 더 짙어만 진다. 영화에서 보이는 단절감은 언어차이가 일차적인 원인으로 보이지만 같은 말을 쓰고 있어도 다를건 없다는걸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에서는 중첩된 단절이 존재한다. 언어적인 장벽, 인종적인 장벽, 문화적인 장벽, 공간적인 장벽...그 어느하나 쉽게 뚫고 소통하기 힘든데 이 영화에서는 그게 중첩되어 사건을 만들고, 갈등을 빚어낸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때까지 답답해진 가슴은 해소되지 않는다. 인종적인 차별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크래쉬를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더 잔향을 남기는건 그 렌즈를 미국사회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공간속에서 조명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인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보편성을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공간을 엮어가는 매개들이 다소 억지스러운 점은 있지만 시간을 뒤집으며 자연스레 이어붙인 편집은 스토리의 우연을 덮어준다.

뻘소리 한마디 더 한다면,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이론을 제시하며 "오늘날에는 곳곳에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있습니다. 저는 이 안개가 걷힐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 했다지만 아직은 저 멀리 있는 꿈이다. 그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 아닐까.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문제가 아니라 점점 제대로 '의사소통'하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현대사회. 그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적 기능을 넘어서, 논의와 담론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합리성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지만, 바벨을 보며 느낀건 지금 필요한건 합리성, 이성적 의사소통 이전에 말하기, 대화하기, 이해하기, 듣기...그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화가 제시한 사람 사이에 놓인 중첩된 단절을 뚫고 너와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차가운 이성보다 따뜻한 감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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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추방. 오해, 저들이 나를 이해해줄수 없다는 절망에서 나오는 도피. 그 끝은 살아온 곳에서의 추방이다.



인상적인 몇가지들,

아드리아나 바라자, 영화의 주연으로 멕시코 가정부 아멜리아를 연기한 이 분을 꼽고싶다. 황량한 샌디에고 사막을 헤매이던 그녀의 발걸음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남겨진 아이의 눈망울보다 빨간색 드레스가 다 헤지도록 걷고, 걸었던 그녀의 몸짓이 더 짠했다. 구멍난 스타킹보다 전날 사랑을 나눌때 빛나던 그 드레스의 남루함이 더 눈가에 남더라. 그녀가 피부색 다른 아이를 키우며 십년을 넘게 살아온 미국사회에 언어는 소통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히스패닉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는 더이상 벌어진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넘어설 수 없는 소통불가의 벽이 된다.

케이트 블란쳇, 영화에서는 그닥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않지만, 총맞기 직전 버스창가에 앉아 황량한 모로코 풍경을 응시하는 모습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빛이 났다. (전혀 영화와 무관한 감상.) 영화초반 무작정 이곳에 데려온 남편을 원망하며 '이 곳 물을 먹고 죽을 수도 있다'며 다이어트 코크를 찾던 신경쇠약직전의 여자는 총맞은 이후 별다른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짧은 시간 모로코 빛도 안드는 그 집에 머무르고나서 마음가짐에 변화가 있었을거라고 짐작해볼 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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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물이 더욱 깊어져 짐캐리처럼 스스로의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브래드 피트, 그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던걸까. 동분서주, 말도 안통하는 이역만리에서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던 그의 모습은 잘빠진 마초의 모습이 아니라 남편이자,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도 이렇게 늙어가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브래드 피트의 영화를 보며 그 얼굴에 담긴 마음을 읽고싶어질줄은 몰랐다. 일이 마무리되고 공중전화에서 마크와 통화하며 울컥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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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화를 볼 때 소위 말하는 대박이라는 영화를 기피하는 편이다. 바보 같은 편견인지 모르지만 '나만'이라는 단어가 주는 은밀한, 독특한 감정의 경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에 대한 내 감정이 젖어들기 전에 다가오는 선입견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태도는 독서법에서나 음악감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매니아적인 폐쇄성은 아니다. 또 내 감상법이 깊이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피상적인 이해를 경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 삶의 느낌들이 녹아있는 나만의 것일 수 밖에 없는 책과 음악이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지는 순간, 어느 정도의 감상변화를 나에게 요구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미 우리사회에는 나만의 것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상품이든 문화든 널리 알려지고 소비되는게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박하사탕을 다시 봤다. 신문에서 보이는 영화기자들의 평가도 칭찬일색, 또 들리는 관객들의 반응도 기대이상...게다가 극장을 잡지 못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가 오직 작품성으로 극장을 확보하고 있다는 소문...이정도 되면 난 선입견의 안테나를 곧게 세운다. 그 '문화적 생산장려' 뒤에서 실망하는 적이 많았다는 실존적인 경험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그 언론매체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느낌, 아주 바보 같지만 그 느낌 때문이었다.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이창동 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설경구 등이었다. 그 중에 내 느낌이 닿은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적 장치였다.

우리의 삶은 흘러가기만 한다. 거기에 반대명제는 있을 수 없다. 생체시계처럼 인간의 상대적인 인식 차이로 속도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의 반대편에 설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얘기하고 싶은 곳은 우주적 차원의 시공간이 아니고 바로 지구, 그리고 나와 너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 때문에, 그 시간과 더불어 삶과 죽음이라는 궤적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번쯤 그 반대를 꿈꾸고, 삶 속에서 그 시간의 저편, 우리가 지나온 그 시간들을 추억하고 기억해낸다. 어쩌면 아프게 어쩌면 빙그레 웃음지으며 자신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설경구를 알게해준 이 영화가 나에겐 설경구 최고의 영화라고 하면 그는 서운해 할까?

이 박하사탕은 그 인간의 꿈과 기억을 다분히 영화적인 편집으로 우리 앞에 다시 되살려 놓는다. 그 무당굿 같은 스크린 앞에서 마음 편하게 앉아 한 사람의 망가진 삶, 고통 속에 흘러간 시간의 궤적을 마치 깨어진 조각을 이어 맞추듯이 하나씩 하나씩 되살려 놓는다. 하지만 창조된 김영호의 인생을 보면서 결코 내가 편할 수 없었던 이유, 그의 절규하는 표정과 쓴웃음의 얼굴을 바라보며 결코 가벼이 볼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그 영화적 현실이 내 삶의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저주했던 시간의 흐름이 내 앞에도 어느새 쉼없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의 시간역행구조는 결코 역행이 아니다. 김영호 그 자신도 70년대 소풍 길에서 되내었듯이 '어디서 본 것 같은' 순환,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하사탕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의 당연한 흐름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나 이제 돌아갈래' 돌아갈 그의 과거는 과거가 아닌 흐르는 현재일뿐이다.

박하사탕의 영화구조는 철저히 역행구조를 따라가며 성립하는 인과관계의 역전이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호의 삶을 하나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삶이 어째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왜 그가 그런 얼굴로 삶을 마감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영화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살기 전에는 난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호의 삶에서 난 눈을 떼지 못했다. 난 그 삶의 궤적을 내 스스로 유추해보며 그가 겪어야 했던 사실들을 떠올렸다. 그런 내 속의 과정들이 이뤄지고 있을 때 영호의 삶은 나의 것이 된다. 그런 추측의 과정에는 내가 살아온 삶, 내가 보아온 삶들이 진하게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현재모습을 이해할 수 없듯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어렵고 불투명한 것이며 그 과거모습이 나에게 주는 이미지는 나의 삶, 바로 그것이었다.

□ 다리를 절다. 스스로 설 수 없는 현실속에서

99년 봄 옛사랑 순임의 병실을 나서며 그는 다리를 절며 걷는다. 죽음의 문 앞에서 그토록 간절히 자신을 보기 원했던 옛사랑, 그 앞에서 박하사탕 한 병을 내어놓고 그는 울음을 터트린다. 그 울음이 그녀 앞에서 당당히 설 수 없는 자신의 모습때문인지, 그토록 사랑했지만 아픈 과거로 인해 외면해야 했던 현실에 대한 울음이었는지, 자신을 잊지 않은 순임에 대한 고마움에서였는지, 이제는 죽을 그녀의 삶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를 찾아온 옛사랑의 남편에게 총을 겨두던 영호가 따라나선 그 길에서는 상큼한 박하향 보다는 군화발에 밟힌 탁한 박하사탕 냄새가 났다. 그가 하나하나 모으던 하지만 그 모으는 시간이 무색하게 깨어져 버린 박하사탕이 고스란히 모아져 그녀앞에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결국 자신앞의 현실, 삶 속에서 똑바로 서지 못하고 다시 다리를 절고 만다.

순임의 마지막을 보러가는 길에 그는 박하사탕 한 웅큼을 산다. 군화발에 짖밟힌 모든것을 되돌리고 싶었던 걸까?

87년 군산의 어느 여인숙에서 첫사랑이 되어주겠다는 여인과 옥탑방에 누워 그는 운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그녀의 울먹이는 채근 앞에서 그는 순임의 이름만을 되내일뿐이다. 외롭지 않은 밤을 구걸하기 위한 그의 수작을 그는 그 순간 깊이 반성하지 않았을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의 첫사랑, 그 아픈 기억을 이해해주겠다는 그녀 앞에서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미 더러워진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한다. 다음날 아침, 눈부시도록 시린 아침에 결국 또 그는 다리를 절고 만다. 그는 그날 밤 그 방에서 순임 아닌 순임 앞에서 눈물로 용서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럴 수 없었음을 이해해달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 울음과 눈물로 깨어난 아침 다시 닥치게 되는 너무도 다른 굴레 같은 현실속에서 그는 다리를 절 수밖에 없다. 결국 또 하나의 기다림을 옆에 두고 그는 떠나게 된다. 그의 사랑의 일그러진 모양새처럼 다시 생활로 돌아가는 그의 곁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진 붉은 피를 토해내는 한 사람이 있다.

그도 묵묵히 그 시절을 살아낸 것이다. 영호 또한 그 시대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걸 부정할 수 있을까?


84년 가을 영호는 이발소 그림처럼 아니 그보다 더 훨씬 추하게 걸려있는 전두환의 사진 앞에서 사람을 짓밟고 두들긴다. 그 사진의 모습, 전두환이라는 문자이미지가 주는 고정된 사실, 뼈아픈 역사는 그의 내리치는 주먹 속에서 나타났다. 난 그의 폭력, 눈물을 내보이는 폭력을 그 속에 내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단지 외부적 폭력,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폭력적 현실속에서 배워간 것일 뿐이다. 그의 내면은 내가 믿기에는 순수하다. 그가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었던 건 인간적 연민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바보 같은 소리일까?

그가 삶을 피해 조그만 경찰서로 기어들어간 후에 그는 순임의 방문을 받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극도의 공포가 배어있는 똥냄새가 쉽게 지워질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할수록 그 아픔의 골은 더 깊어간다. 그 때묻은 손으로 순임을 맞을 수 없었던 영호는 홍자의 몸을 더듬으며 자신의 변한 삶을 증명하려하고 그 속의 괴로움을 꾹 누르며 순임을 떠나보낸다.

자전거, 사진기, 박하사탕 이창동감독이 배열해놓은 소품들은 때론 영화적 현실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이들의 기차역에서의 이별장면은 스르르 움직이는 열차를 사이에 두고 애틋하게 손흔드는 장면이 없다. 단지 받을 수 없는 선물을 다시 돌려주는 무덤덤한 장면이 있을 뿐이다. 영호는 자신의 더러운 손으로 순임이 주는 순수함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다. 그 이별의 뒤에서 영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리를 절고 만다. 그녀가 돌아갈 열차의 반대편을 향해 걸으며, 그 악독한, 그 비열한 현실의 공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그는 제대로 걸어갈 수가 없다. 삶의 무게 때문에 그는 다리를 전다.

여기까지도 난 무언가 본질적인 원인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영호를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했다. 아직도 왜 그가 경찰이 되었는지, 왜 먼길을 돌아온 순임을 그 더러운 손을 씻지 못하고 보낼 수 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눌러왔던 삶의 아픔을 그는 '구령조정 3회실시' 속에서 얘기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우로 정렬' '군기' 속에서 난 점점 영호의 삶의 시원으로, 그가 그렇게 다시 돌아가서 다시 살아내고 싶었던 그 처음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삶은 내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정해진 운명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 그렇게 가슴을 쳤다.

80년 5월 그 시간의 이름만으로도 난 가슴이 무거워졌다. 난 그 몇 단어로서 거만하게도 그 날의 영호의 삶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랬구나...영호의 삶이 결국 그때부터 어긋나고 있었구나...난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영호의 삶은 정확히 한국 현대사를 대변한다. 아니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만을 대변한다. 이 좁은 땅에 태어나게 되면 짊어지게 되는 원죄, 그 조여듬을 그도 이고 살았던 것이다. 결국 그때부터 였던 것이다. 순임의 면회도 휘파람과 조롱 속의 트럭 안에서 확인하게 되고 그 전에 이미 그는 하나의 지탱하는 끈이었던 박하사탕을 긴급출동소리와 함께 떨어뜨리고 만다. 영호는 광주에 있었다. 그 광주에서 그는 내내 다리를 절고 있다. 아니 걸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런 자신의 모습도 '워커에 물이 차서 못 걷겠다'는 말로 대신한다. 스스로의 아픔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억압되어있었고, 개인은 간간히 들리는 총소리처럼 허무하게 스러져갈 뿐이다. 나의 아픔도, 슬픔도 내뱉을 수 없고, 그걸 확인할 수도 없이 살아야 하는 삶, 아니 지금의 삶, 도대체 변한 것은 무엇일까? 영호의 삶이 시간을 거슬러가면 갈수록 그의 삶은 점점 지금의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난 그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무서웠다. 영호는 설 수가 없었다. 뛰어만 가는 사람들 속에서 주저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주저앉음이 한 생명의 이어짐을 끊어놓고 그 부딪힘 후에 그의 삶도 휘어갔음은 분명하다. 그를 비추는 수만개의 플래시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묻고 그 속에서 그는 영원히 되돌아가지 못한 그 아이를 안고 '지나가야지...'라고 말한다. 스스로에게 아님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것이 죄스러웠을 시절,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불안하고 안타깝다.

79년 가을 영호는 다시 소풍장소에 선다. 거기서 들리는 '나 어떡해'를 들으며 난 2시간전 영화가 시작하면서 뜬금없이 불러 제끼던 영호의 '나 어떡해'를 다시 떠올렸다. 그 속 깊은 울음을 다시 생각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살아온 삶에 대한 무력감. 그는 정말 '나 어떡해'라고 외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는 싱그럽기만한 그 장소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그는 '언젠가 와봤었다'는 말을 하고 결국 나에게는 이 시점에서 영화적 시간이 결코 거슬러 간 것이 아니라 똑바로 진행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긴 시간을 지나 그 자리에 다시 선 것이다. 그가 죽었던 그 장소에, 아름다울 것 같던 사랑의 옆에서...이제는 더 이상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칠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것이다. 이제 영호는 어떻해 해야할까? 그를 덮치던 기차에 몸을 실어 갈 곳이 더 이상은 없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눈물, 스크린 가득 보이는 눈물의 의미는 바로 그것이었다. 수없이 다리를 절게 될 그 힘겨운 삶을 피할 수 없이 여기까지 와 버린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 몇가지 아이러니들

박하사탕에는 잘 짜여진 세세한 상징과 단초들이 많다. 이창동 감독의 고민이 그대로 배어있는 이런 사건들은 굵은 줄거리만큼이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 뒤에 쓴 아픔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 하나하나의 장면이 박하사탕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홍자는 영호에게 자전거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그게 홍자가 영호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항상 휙휙 지나치는 영호에게 홍자가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건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자전거다. 그런데 어찌보면 '내일을 향해 쏴라'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는 그 장면이 나에게는 아이러니 하게도 슬프게 느껴졌다. 그건 하나의 비극이다. 난 94년 홍자의 불륜을 떠올렸다. 홍자는 그때도 배우는 것으로 자신의 관심을 표현했었다. 그건 영호가 아니고 운전강사였고 그 대상도 자전거가 아닌 자동차였다. 하지만 영호가 순임과의 어긋난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홍자를 선택했던 것 처럼 94년 홍자는 영호와의 어긋난 삶에 대한 보상으로 불륜을 택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영호와의 삶에 대한 아픔의 표시였을지도 모른다.

자전거는 몇몇 씬에서 변주되지만 이 씬의 자전거가 가장 낭만적이다. 갑갑한 영화속에서 그나마 숨을 틔어주는 장면중의 하나


운전기사와의 불륜이 들키고 난 뒤에 새로 장만한 집들이에서 홍자는 음식을 먹기전에 기도를 하자고 한다. 그때 극장에서는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었다. 단순히 극성스런 신도로 읽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여편네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홍자는 84년 그 여관방의 기도를 떠올렸을 것이다. 어쩌면 현재의 삐걱거리는 삶의 원인을 그때 기도를 하던 그곳으로 홍자는 생각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 영호가 홍자를 받아들이는 빨간 불켜진 여관방에서 홍자는 기도를 했다. 불안한 사랑에 대한 단 하나의 믿음으로 그녀는 기도를 했을 것이고, 또 그렇기에 더 삶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들의 삶이 깨어져 버린 94년, 그녀는 절망을 대신해서 기도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울 수밖에 없다. 잔인한 삶의 편린들이다. 너무도 정확하게 그려진 삶의 모습이다.

영호는 여직원과의 섹스가 끝나고 한 음식점에서 누군지 모를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그 사람의 아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개 흉내를 내면서 그들은 만나게 되는데, 어쩐지 심상치가 않다. 그들은 화장실에서 다시 만난다. 그 남자는 꺼리는 눈빛을 보낸다. 분명 그들은 편치 않은 관계임에 틀림없다. 거기서 영호는 '삶은 아름답다'라는 선문답 같은 말을 던진다. 도대체 무얼까? 87년 영호는 그 남자를 취조하고 있다. 너무도 유명한 고문경찰은 영호이고 그 남자는 학생운동 가담자를 불라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다. 그 이후는 명백하다. 왜 94년 그 남자는 영호를 꺼렸고, 또 영호는 왜 '삶은 아름답다'는 말을 던졌는지? 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다시 물었는지? 그때의 기억은 누구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박하사탕이 그 남자의 이야기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도 박하사탕은 지금의 박하사탕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박하사탕이 얘기 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은 쉽게 건져올릴 수 없는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 난 87년 그 취조실 안에서 또 그들이 짜장면을 먹는 모습 속에서 임철우의 '붉은 방'을 생각했다. 고문 받는자, 고문하는자의 각각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소설이었는데 난 그 소설을 읽고서 우리 역사가 단순히 한사람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 쉽게 판단내릴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살아야만 했던 자의 슬픔' 아직도 현재 한국사회에 남아있는 그 문제들, 같은 역사를 통과해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워진 그 질곡의 역사가 쉽게 제거될 수 없는 것임을 박하사탕을 보면서 또 느낄 수 있었다.

□ 영화적 표현에 대해서

난 박하사탕을 보면서 야속한게 한가지 있었다. 정말 그 상황에 빠져 울음이 나올 것 만 같았는데,그래서 한번쯤은 깊게 잠겨서 울고 싶기도 했는데, 감독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영화내내 난 펴즐을 풀듯이 머릿 속으로 가슴속으로 영호의 삶을 재구성 해야했고, 그나마 호흡이 긴 장면에서도 이전에 펼쳐진 내용들을 떠올려야 했다. 해야 할 말이 많았는지, 아니면 관객이 슬픔, 기쁨등의 감정으로 영호의 삶을 색칠하지 않기를 바랬는지 모르지만 정말 여지없이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었고, 그 뒤에 기차는 항상 또다른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해갔다.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밀도있게 다루고 있음에도 감독은 철저히 감정을 숨긴다. 단지 보여줄 뿐이고 생각하게 만들 뿐이다. 그걸 구현하기 위해서 시간을 거스른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인과관계가 명백한 서사구조에서는 아무래도 관객의 감정 이입이 손쉬울 테니까 그만큼 감독은 영호 삶에 대한 지극히 객관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한 판단, 울음과 웃음의 몫은 관객이 영화를 본뒤에 이뤄지길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계속 반복되어지는 기차 장면은 어딘가 부자연 스러워 보였고 인위적인 단절을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차의 메타포가 장면 전환, 세월의 거스름의 이미지로 사용된 것 뿐만 아니라 영화적 사건들의 배경 혹은 이미지를 이루는데 핵심적인 요소이기는 하다. 그러나 사실 다른 사건과 기차길의 장면은 너무도 이질적이다. 그래서인지 자꾸 나에게는 낭만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렇게 감정을 방해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거꾸로 가기는 했지만 그 화면의 철길 또 뷰유하는 듯이 울려펴지던 음악은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이것도 일종의 대비의 역할이었다면 할말없지만, 같은 기차의 메타포를 사용하려 했다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한다. 영화 처음에 나오던 강렬한 기차의 이미지는 단 한번이었다.

스크린으로 문소리를 마주했을때 그녀가 지금처럼 알려진 배우가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끝장면의 '나 어떡해'를 다시 떠올린다. 영호가 지금 그토록 가슴 아프게 부를 수 밖에 없었던 그 노래가 순임과의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던 그때의 그 노래라는 걸 영호는 알고 있었다. 가리봉 동창회 자리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 자신의 처지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그 소중한 사진기를 단돈 4만원에 팔아버려야 했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죽음에 대한 책임은 그가 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면 병실의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던 그때의 그녀를 겹쳐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순임을 보고 돌아와 다시 처음 그 자리에 서서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들꽃을 꺾어주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녀가 싸던 천개의 박하사탕중에 하나를 건네는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이미 팔아버린 사진기를 생각하며 다시 사각의 손가락사이로 그녀를 그려넣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결국 그는 또다시 '언제 와본 것 같아. 익숙해'라고 말할텐데, 또 그 질곡의 삶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되풀이 될텐데 그는 똑바로 서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박하사탕'을 하루에 천개를 싸야했던 순임이 박하사탕을 결국 좋아하게 되었을까? 오랜만에 너무도 가슴 아프고 슬픈 영화를 보고난 후에 잠들지 못하는 밤에 내게 남아있는 의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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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이 시작된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신작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봤다. 영어제목은 Memories Of Matsuko로 얌전한데, 우리나라 영화의 영어제목도 본래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어이없이 짓는 경우가 많은 걸로 봐서는 '혐오스럽다'는 제목이 정확하고 적절한 것 같다. 일어를 잘 모르지만 한글로 옮긴 제목도 원 의미와 일치하는 듯 하다. 근데 영어제목의 Memories 앞에 적절한 형용사를 첨가해도 괜찮았을 듯 한데, 왜 얌전한 제목으로 영작을 해놓았는지 의문스럽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의 느낌은 한 여자의 일생을 얼마나 혐오스럽게 그렸을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다소 '변태적인' 일본영화에 대한 기억이 있는 탓에, 그리고 살짝 훑어본 시놉을 보고서는 "그럼 그렇지"라는 지레짐작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영화를 다보고 나서 종합해본 표면적인 이야기 구조야 "정말 있을 수 있을까"라는 자조 섞인 한숨이 들 정도로 파괴적이고 괴팍하긴 했다.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불행한 여자의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뭘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영화를 통해 감독은 뭘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이 영화까지 포함해서 단 두 편의 필모그래피가 전부인 테츠야 감독. 보진 않았지만 소문만 들었던 '불량공주 모모코'라는 영화가 전작인 걸로 봐선, 그리고 어리지도 않은 50이 다되어가는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파격'으로 비춰볼 때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빗나간 해석이라는 지적을 각오하고 답해본다면,

그래도 내 나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영화가 어떤 철학적인 심각함이나 삶에 대한 끈질긴 성찰의 결과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하나 마츠코를 통해 그녀가 살아온 일본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목적도 없는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사회'나 '현실'은 빠져있고, 오직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있다. 그리고 그녀가 혐오스러운 삶을 살게 된 원인도 그녀가 처한 상황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녀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품'때문이다.

살인

우발적? 살해, 이 일로 그녀는 8년간의 복역생활을 하게된다.


영화 속에서 마츠코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살아만 간다. 배신당하고, 얻어맞고, 사랑을 주고, 받진 못하고, 결국 아주 늦게 "이제 더 이상 내 삶에 아무도 들여놓지 않을거야"라는 다짐을 하며 혐오스럽게 죽어간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랑을 주기만 하는 '하나님'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에게 받는 걸로 삶을 평가되지 않고 남에게 주었던 것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말, 그래서 온갖 핍박을 받고 죽어가는 그녀의 마지막을 곱씹어 봐야한다는게 이 영화의 일종의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조금 억지스럽고, 엷은 결론이긴 하다.

류를 기다리는 장면

마츠코 삶의 첫번째, 그리고 다섯번째의 남자인 '류' 그를 위해 마츠코는 모든것을 바치지만 류는 사랑받는 것이 두려워 그녀를 버린다...


오히려 내가 이 영화에서 받은 인상은 내용적인 측면보다는 형식적인 풍성함과 화려함에 있다.

첫번째는 영화 스크린에서 표현하고자 한 비주얼적인 시도와 그와 완벽히 어울리는 오디오의 앙상블이다. 그간 보았던 일본영화와는 다르게 화려한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이 영화의 색채감은 화려하다 못해 탄성을 자아낼 지경이다. 시종일관 실사의 느낌을 보여주지 않는 색채는 상황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변화해간다. 화면 구성을 위해서 감독이 얼마나 짱구를 굴려야 했는지 느낌이 온다.

happy wednesday

화면이 밋밋하다는 일본영화에 대한 편견을 날려버린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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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강변, 같은 장소라도 분위기에 따라 색감을 달리 사용해서 색다른 느낌을 준다.


잘짜여진 화면, 적절히 사용된 컴퓨터그래픽(특히 후반부 마츠코가 쌓아둔 쓰레기더미가 까마귀로 날아가는 장면은 훌륭했다), 영화전반에서 반복되지만 화면의 에너지에 따라 적절히 변주를 거듭하는 음악은 그 자체로 극영화가 아니라 뮤지컬 영화의 느낌을 준다. 어쩌면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로 불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등장인물들도 디테일이 풍성한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의 독특함과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래도 마츠코를 제외하고는 다들 단선적인 느낌이다)

영화는 두시간 가량 이어지는데 한 여자의 일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주다 보니 다소 길게 느껴진다. 한 여자의 일생을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함께 경험하다 보니 압축되어 보여져야 할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백하건데 영화를 보면서 마츠코의 영화적인 인생이 지나칠 정도로 너무 괴로워서 감독에게 짜증이 나기도 했다.

우스꽝스런 표정

당황할때마다 나오는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영화를 보고나면 애잔한 느낌을 받게된다


하지만 보면 웃음이 나와야 할 나오는 마츠코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슬퍼보이는 건 , 그리고 류의 출소를 기다리다가 심하게 얻어맞고 눈밭에 쓰려져 내뱉는 "왜"라는 한마디가 가슴을 울리는 건, 그리고 아무도 없는 그래서 혼자여야만 하는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다녀왔습니다"를 되뇌는 그녀의 독백은 어쩌면 나도 한번쯤은 경험해본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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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야메카와 테츠야가 죽기전에 남긴 글.


누군들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의미없는 삶에 지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해보는 것. 이 비현실적이고, 우스꽝스럽고, 동화 같은 이야기가 나의 현실과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마츠코의 일생은 '혐오스럽지만은 않은' 일생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혐오스러울때가 있었던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우리 모두의 삶처럼 말이다.

"하지만 혹시...이 세상에 하나님이 있어서
그 분이 고모처럼 사람에게 웃음을 주고 사람에게 힘을 주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지만 자신은 늘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지고 고독하고 패션도 너무나 촌스럽고
그런...철저하게 바보스러운 사람이라면
나는 그 하나님을...믿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카와지리 쇼 (조카)의 독백


"굽히고 펴서 별님을 잡자
굽히고 까치발로 하늘에 다다르자
조그맣게 둥글려서 바람과 이야기하자
화알짝 팔을 벌려 해님을 쬐어요
굽히고 펴서 별님을 잡자
굽히고 까치발로 하늘에 다다르자
모두모두 안녕 내일 다시 만나자
굽히고 펴다 배가 고파지면 집으로 가자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자"

"어서 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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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가슴이 묵직해지는 영화를 만났다. 치열하게 나에게 발언하는 영화, 참 오랜만이다. 좀처럼 힘겨운 영화에 손을 내밀지 않는 나에게, 선물처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왔다. 대학시절 "랜드 앤 프리덤"을 보면서 느꼈던 묵직함을 켄 로치가 다시 나에게 던져주었다.

노장의 시선이 부드러워지는 것일까. 물론 이야기는 쉽지 않았다. 영국 출신인 그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생하게 아일랜드를 그려낸다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의 카메라는 참 아름답다. 이전의 영화보다 짙은 '영상미'가 느껴지는 화면이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아일랜드가 이런 곳이었던가? 엔야의 음악을 뿌려놓은 것 같은  깨끗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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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름다워서인지 영화속 그들의 삶은 참 힘겹고, 아프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도) 자꾸만 비춰지는 우리의 역사에 한숨쉬면서 두시간동안 치열하게 영화를 봤다. 한번도 가본적없었던 아일랜드가 지금 나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귀기울면서.

영화는 거칠게 얘기하면 두차례의 대결구도로 나뉠수있다. 영국對 아일랜드, 그리고 자유파對 공화파. 데미언은 그 중심에서 아일랜드편에 서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최후에는 타협에 반대하는 공화파에 맞서 싸우다 결국 붙잡혀 자유파에게 총살당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한마디가 있다. 난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무거운 이야기였던 셈이다. 동료를 배신했기에, 결국 아일랜드를 배신한, 어쩌면 죽어 마땅하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크리스. 그를 그 아름다운 아일랜드 언덕에서 쏘면서 독백처럼 내뱉은 데미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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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ope this Ireland we're fighting for is worth it"

켄 로치가 나에게 던진 화두는 이것이었다. "그들이 싸운 아일랜드가 정말 그럴 가치가 있었던 것인가"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바쳐진 데미언의 삶은 과연 의미있는 것이었을까.데미언이 삶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시네이드를 버리고,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그 아일랜드가 과연 그럴 가치가 있었던 것인가? 그들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고 그토록 힘겹게 살아야 했던 것일까.

떠나지 않는 의문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아름다운 아일랜드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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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제국주의적인 침탈에 두손들고 일어나 저항한 것이,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사회주의적인 가치가, 그들이 나고자란 아일랜드를 손수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열정이 헛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박한 삶, 삶의 가치를 송두리째 던지고 냉혹한 현실속에 휩쓸려야했던 그들의 삶이 너무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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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신이 쏴야했던 크리스처럼 처참하게 총살당한 데미언. 그 사형을 집행해야만 했던 테디. 죽은 데미언 곁에서 결국 오열하고 마는 테디를 보면서, 가슴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원했던 원치않았던 어쩌면 "이렇게 살수밖에 없었던, 살지 않을 수 없었던, 살아내야했던" 그들 모두는 역사의 피해자이다. 그리고 단언하건데 그들이 싸웠던 아일랜드가, 역사가, 민족이, 그들 각자의 삶의 무게에는 미치지 못한다. (지금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가치없는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삶이 이렇게 우리와 닮아 있을까. 켄 로치가 얘기하는 아일랜드의 역사적 현실은, 박제된 옛날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아일랜드 뿐만아니라, 그 당시를 살았던 그리고 그 이후를 살고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1920년대 무기력한 소총에 픽픽 쓰러져가는 허망한 죽음이 그렇게도 가슴을 울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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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언이 새벽녘에 닥쳐올 죽음을 기다리며 시네이드에게 남긴 편지, 그걸 다시 찬찬히 읽어보며 좀더 생각해보고 싶다. 그의 삶은 무엇이었는지를, 그에게 아일랜드는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Dear Sinead
시네이드에게

I tried not to get into this war And did
난 이 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 했지만, 그렇게 되버렸어.
And now try to get out and can't
그리고 지금은 빠져나오려 하지만 그럴수가 없어.
Strange creatures we are, even to ourselves
우린 참 이상한 존재야, 우리 자신에게 마져도
I treasure every bit of you, body and soul, in these last few moments
이 마지막 순간까지 난 네 몸과 네 마음을, 네 모든것을 소중히 여길꺼야.
You once said you wanted your children to taste freedom
I pray for that day, too, Sinead
언젠가 네 아이들에게 자유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지.
나 역시 그날을 기도했어, 시네이드
But I fear it will be longer than either of us have imagined
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것보다 오래 걸릴것 같아 두려워
Dan once told me something I've struggled with all this time
댄이 언젠가 나에게 한 '내가 언제나 싸워왔던' 말이 있었어
He said,
그는 이렇게 말했어
'It's easy to know what you're against, quite another to know what you are for'
네가 무엇에 대해 싸우는지 알기는 쉽지만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기는 어렵다
I think now, I know, and it gives me strength
난 지금 생각해, 그리고 알것 같아, 그게 나에게 힘을 줘
Hup Hup
In time, look after Teddy
이제, 테디를 보살펴줘
I'm afraid, inside, he's already dead
내 안에서 그는 이미 죽은 것 같아 두려워
As the clock ticks on, I imagine your heartbeat under my hand
시계가 째깍거릴때마다 네 심장이 내 손아래에서 뛰는 것 같아
I hold the medal you hung around my neck and I tremble inside
네가 내 목에 걸어주었던 메달을 손에 쥐고있는데 떨려와
It will give you courage, too
그것 역시 나에게 용기를 줄거야.
Goodbye, Sinead
안녕, 시네이드
I love you now, and always will
널 사랑해, 항상 사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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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고 기쁜마음으로 글을 쓸지는 몰랐다. 바보같은 편견일지 모르지만 텔레비전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슴깊은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오래전에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어째서 어제밤에 이 드라마를 보게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히 정봉수 마라톤 감독의 성공시대를 보려고 했다. 근데 우연히 돌리다가 보이는 이영혜의 얼굴은 채널을 강하게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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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진부한 이야기기에 보지 않으려 했다. 한명의 여자와 그여자를 둘러싼 두명의 절친한 친구. 그 사이의 삼각관계. 하지만 범상치 않은 절제된 대사는 언젠가는 감정의 폭풍을 선사하리라는 믿음을 들게 했다. 드라마는 TV문학관의 색채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화면에 담아낸 연출자의 노력과 드라마로서의 다른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점점 주의깊게 보면서 계산된 하지만결코 어색하지 않고 녹록한 감성이 묻어있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보면서 이 작품은 만만치않은 극본을 쓰는 이름있는 방송작가가 썼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되었다. 보면서 내가 왜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백번은 한거같다. 미리 드라마가 하는 걸 알고'은비령'이 하는 걸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만큼 멋진 드라마였다.

자막이 올라가고 나서야 난 이 드라마의 원작이 97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이순원씨의 작품을 극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랬구나... 어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원작이 탄탄해서일까, 글이 가질수 있는 차분함을나름대로 자연스레 배어나오게 만들었고 꾸며진 화면이 아닌 의식의 흐름처럼 자연스런 시각성으로 옮긴,요즈음 머리만 복잡하고 배우의 얼굴만 상영시간내내 보게 만드는 여타 드라마와는 큰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윤석호 프로듀서의 작품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감각적 영상이 그의손에서 탄생한 작품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잘 알지 못하지만 이순원 이라는 소설가의 감수성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걸 휼륭히 극화한 강은경 (맞나?)이라는 작가의 손길도 칭찬하고 싶다. 또 하나 음악... 적절한 곳에 너무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그리그의 '솔베이그의 노래'. 애절한 그들의 사랑을 같이 얘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닷가. 그 무한의 바다에서 잔잔히 깔리던 솔베이그의 노래는 또 하나의 바다처럼 다가왔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때 나오던 사이먼&가펑클의 'Sound of Silence', 곳곳에 보이는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에릭사티의 음악들도 같이 녹아있었다.

또 하나 그들의 은비령. 그들의 바다...그 겨울의 바다. 어떻게 말할수 있을까? 정우가 그녀에게 다가서려고 하는 그 조심스런 마음의 바다. 아픔이 있는 그들을 격렬하게 흔들리며 안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의 바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아름다운 겨울바다 였다. 어디에 있는 바다인지는 모르지만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던 바다. 난 그 바다를 보면서 동해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겨울의 바다는 아니었지만 작년 늦여름 나에게 다가왔던 그 동해의 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힘들었던 나를 조용히 받아주던 그 동해의 망상 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그 바다를 보며 얼마나 그 여름의 동해 바다가 보고싶었는지 모른다.

바다를 만날때 그 둘 처럼 힘들거라면 난 차라리 혼자였던 나의 바다가 더 나았던것 같다. 손잡을 이는 없어도 바다와 얘기할 수는 있다. 얄궂게도 내리던 하얀 눈과 그 속에서 끊어질듯한 그 둘의 사랑...더 말이 필요없다. 힘든 촬영이었겠지만 그들의 그 노력때문에 한보잘것 없는 사람이 추억에 몸서리 치며 그들의 슬픈 사랑을 같이 할수 있었다.

난 현실의 어긋남을 남겨두고 2천 5백만년의 기나긴 시간을 한사람을 위해 기다릴 수 있을까? 그 절박한 인연을 붙잡고 기다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마도 난 내가 가진 당장의 현실을 바꾸려 아둥바둥하겠지...윤회...글세...

1999.2.어느날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일도 그런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세상의 일이란 일은 모두 2천 5백만 년을 한 주기로 되풀이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천 5백만 년이 될 때마다 다시 원상의 주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 그때 우리는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다 다시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여기에 모여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며 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은비령' 中

이순원의 97년 4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 '은비령'을 원작으로 한 TV드라마. 글보다 드라마로 먼저 다가왔던 작품인데, 그때 드라마 보면서 지릿했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읽어본 책보다 더 명징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보고나서 열병처럼 감상평을 써댔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글이 길고, 진하게 그때 생각과 감정들이 배어있다..

나에게 윤석호라는 이름석자를 각인시켜준 작품, 다시봐도 전혀 옛스럽지 않다. 탄탄한 이야기, 빼어난 영상미가 어우러진 감히 '명작'이라 칭하고 싶다.


2006.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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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파티드를 봤다. 마틴스콜세지의 이름값, 오랜만에 보는 레오의 연기를 기대하며 망설임없이 선택했는데 역시나 무간도의 아우라에는 미치지 못하는것 같다.

미국식 갱영화로 생각하면 그다지 나쁠것도 없고, 오히려 스토리에 신선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도몰래 무간도와 비교 매핑해보는걸 보면 원작을 뛰어넘을 힘은 없는 것 같다. 역시 이 이야기는 어느 시공간에서도 들어맞는 보편성을 지닌게 아니라 (적어도 나에게는) 홍콩이라는 공간적, 시간적 배경에서  빛을 발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보면서 느낀 점은 이야기구조가 너무 느슨하다. 무간도 특유의 긴박감이나 압박은 느껴지질 않고, 맥빠진 후일담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잭 니콜슨의 연기도 냉혹함이나 야비함이 없는 '늙은이 발악'에 불과한것 같고, 대사 또한 계속 이어지는 욕설, 거슬리는 목소리들로 인해, 원작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비장비를 오히려 망쳐놓은것 같다. 이게 마틴스콜세지의 의도라면 할말없지만, 그래도 너무 재미없다. 차라리 드라마 소프라노가 더 낫다.

그리고 레오의 모습도 아쉽기 그지없다. 그의 눈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예전의 잔상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그를 이렇게 기름기낀 장년의 아저씨로 만들어놓은 세월의 무상함이 야속하기만 하다. 배스킷볼 다이어리나, 토탈이클립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볼살이 부풀어오른 그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의 이미지와 가장 닮은 사진


하지만 나에게 이 영화의 수확은 무간도의 진혜림역으로 나오는 '베라 파미가'이다. 처음 멧데이먼과 마주치는 엘리베이터 씬도 그렇고, 이후의 모습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가을분위기가 물씬 난다. 영화에서 이지적이지만, 감정적으로는 연약한, 그래서 연민을 자아내야 하는 역에 적절한 것 같다. (그에 비해 진혜림의 모습은 좀 '못되 보인다'고 할까. 목소리는 아니지만)

모습이 부드럽고, 보기에 부담가지 않는다. 무간도의 진혜림보다는 훨씬 '상담받고싶은' 모습인듯. 73년생이라서 그런지 세월의 깊이도 보이지만 영화에서는 어쩐지 보호받고 싶은 연약함도 엿보인다.

IMDB에서 필모를 보니 '맨츄리안 캔디데이트'가 보인다. 약혼녀인가로 나왔던것 같다. 한 배우가 이렇게 다른 임팩트를 줄 수 있다니. (아님 내 감정구조에 걸려들었거나) 디파티드 이후 촬영중이거나 예정인 영화가 몇편 보인다. 그 중에 Never Forever이라는 영화가 눈에 띈다. 한국인 영화감독(Gina Kim)이 만드는 영화인데, 이 배우, 앞으로 눈길좀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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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의 저 미소는, 홍콩느와르 그 자체다. (클릭을 권한다)



얼마전 느즈막히 무간도를 봤다...1편이 개봉했을때, 홍콩느와르의 부활이라며 호들갑떨던 친구의 성화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던 나였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 미래사회에 대한 불안과 그로 인한 존재의 불투명이 고스란히 투영되던 홍콩영화...어딘가 암울하고, 어딘가 어둡지만 그 자체로 인간을 말하고 있던 홍콩영화가 어쩐지 대국에 반환되고 나서는 힘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었다...홍콩영화는 자연히 관심에서 멀어졌던 터였다...

무간도 1,2,3를 보고나서 어쩌면 이 영화가 홍콩 느와르의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잘 짜여진 스토리에 홍콩 특유의 끈끈함, 그 배경이 한씬 한씬에 녹아있었다...어쩌면 이야기 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홍콩의 디테일, 홍콩에 살고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뒷골목, 음식들이 영화를 더 잘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3편을 내리보며 떠올린건, 영웅본색에 대한 희미한 추억과, 중학교시절 시험끝나면 으레 보러가던 이름도 기억안나는 2류극장의 홍콩영화였다...그 기억이 다시 오지 않는 것처럼, 홍콩 느와르도 다시 우리곁에 오기 힘들것이다...

이 영화가 소중한건 그때문일지도 모르겠다...여튼, 잘만들었고 재미있었으며 날로 잔머리만 늘어가는 날 쉼없이 몰아세우는 영화였다...Farewell to HongKong Noir!


음향기기 앞에서 "高音準 、中音清、低音勁... (고음은 정확하게, 중음은 맑게, 저음은 강하게...)"라는 대사와 함께



하나더, 영화 첨밀밀의 '첨밀밀'처럼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떠올릴 곡인 피유망적시광...자동실행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 곡이 잠깐 정도는 블로그에 흘러도 좋겠다는 바램에서 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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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엠피를 구매한 이유로, 쓸만한 컨텐츠를 찾아 헤메는 일이 잦아졌다...무슨 포탈의 컨텐트 기획자 처럼, 좋은 '꺼리'를 찾아 피엠피에 넣어두고픈 욕망이 극에 달했다는 말...

출퇴근길에 디엠비 시청도 시들시들할때 딱 좋은것이 드라마다...이놈들을 피엠피로 보기 시작하면서 출퇴근길의 막히는 길도, 피곤하고 지친 시간들도 무섭지가 않다...^^; 오히려 버스에 올라 피엠피를 꺼내보는 재미로 출근을 한다는 '감정적 역전'을 경험하는지도 모르지...(익숙한 느낌? ^^)

딴얘기지만 정말 요즈음의 디지털 세상에서 mobility는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누구든 digital nomad가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구조 속에서 그 사이를 비집고 fun을 느끼려면 digital device의 이동성은 필수조건이 아닌가 싶다...인간이 집이 아닌 곳에서 헤메고 다니는 시간이 증가할 수록 mobility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지 않을까?...내가 출근길 버스 안에서 피엠피로 느낄 수 있는 행복, 그걸 구현하는 digital은 앞으로도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각설하고,
요즘 보는 미국드라마는 '소프라노'하고 '프리즌 프레이크'이다...소프라노는 99년도에 방영했던 1시즌부터 보기 시작하고 있는데, 자극적인 재미를 준다기 보다는 일종의 관조적인 재미를 준다...잘짜여진 마피아가족의 극 영화를 보는 느낌...


그리고 내가 요즘 빠져있는 또하나의 드라마는 프리즌 프레이크이다...동생의 권유로 1시즌 10편쯤 할때 부터 봤는데, 최근 2시즌을 시작하면서 네티즌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것 같다...본래 24시라는 드라마의 땜빵으로 방영되었던 드라마인데 대박을 쳤다...개인적으로는 탈옥을 기획하고 감행하는 (아마도 처음 기획은 여기까지였으리라) 1시즌이 훨씬 짜임새 있고 재미있었고, 요즘은 탈옥후에 유타주에 숨겨놓은 돈을 찾아 탈옥수들이 집결하는 내용이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구조가 약간 처지고,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느낌이 드는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매주 수요일 자막까지 만들어지면 한시간씩 그들의 탈옥에 동참하는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몇시즌까지 계속되어서 매주 '감질나게'만들지 모르지만 근사한 탈옥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힘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끝까지 궁금하게 만들것 같은 예감...아직 못봤다면 각오하고 입문해도 괜찮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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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트 가드너

from 영화창고 2006. 7. 9. 09:45

최근에 구입한 pmp덕분에 출퇴근길에 영화를 잠깐씩 보곤 한다...예전에는 그냥 흘려지나갔던 영화들이 이젠 내 시야에서 오랜 잔상을 남기게 된것이다...잠이 모자란 아침 출근길, 피곤이 겹겹이 쌓여있는 저녁 퇴근길에 영화를 본다는건 어쩌면 낯설은 일일지 모르지만, 잠깐잠깐씩 일상과 유리된 어떤 경험을 준다는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최근에 본 영화는 (무려 3일간에 걸쳐서 봤다...) 콘스탄트 가드너였다...제목 자체는 주인공 저스틴의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결과적으로 그는 끊임없이 테사의 삶을 가꿔왔을지도 모르겠다...직접 개입하지 않으나 주변에서 그녀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켜보며 관심쏟는 존재...그것이 그녀의 죽음 후에 급작스럽게 변하게 된다...그래서 힘겨워보이고 무기력해보인다...



서스펜스 보다는 하나의 아름다운 로맨스에 기울어있는 영화...그 서스펜스도 완결된 형태라기 보다는 아프리카를 화면에 담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버릴수 없었던 이야기 같다...그래도 하나의 다큐멘터리같은 화면은 꾸며진 이야기보다 하나의 현실처럼 다가온다...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소리높여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현실이 주는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는 끝내 보는 이의 마음깊이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심어놓는다...아주 자연스럽게...


인상깊었던 것은 아프리카의 풍광...더이상 아름답게 담아낼수 없을것 같은 화면은 휑하면서도 비움의 공간감을 준다...없고, 부족하기에 아프리카를 찍은 모습이 아름다워보이는 역설...페르난도 메이엘레스 감독의 다른 영화 시티오브갓을 보면서 속도감과 아름다운 화면에 감탄했었는데, 이 영화도 그의 영화답게 아름답다...


우연히 pmp에 담아두었다가 꺼내보면서 감탄하는 영화들이 많다...최근에 본 클로저, 매치포인트가 그랬고, 미앤유앤에브리원유노도 그랬다...이 영화도 놓치기엔 너무 아찔한 아름다운 영화다...

I don't have home, Tesa was my home...저스틴의 이 말을 이젠 나도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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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영화감상문을 써봤다...숙제가 무섭긴 한건지...일이 밀릴것 같아 마감시간 조금 당겨서 썼다. 시작할때는 너무 쓰기 싫었는데...그래도 쓰고나니까 후련한 기분...쓰면서 여러자료 읽고 참고하고 쓰면서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것 같은 느낌이 든다...내가 읽는 방식이 타당한가는 나중 문제지만...어찌됐건 그래도 영화를 이렇게 뜯어보는건 개인적으로 싫다...그것이 난해한 베르히만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

나는 당신의 눈썹이 검고 귀가 갸름한 것도 보았습니다. /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 당신이 사과를 따서 나를 주려고 크고 붉은 사과를 따로 쌀 때에 당신의 마음이 그 사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의 마음> 中에서

제7봉인의 포스터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은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물론 어떻게 영화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가치관과 인식틀에 달린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베르히만’의 영화를 베르히만의 문제제기 안에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은 철학적 경험이다. 제7의 봉인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게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숨어버린 신’의 존재에 대해, 죽음에 대해, 나아가 인간의 구원에 대해 질문하는 그의 영화는 그래서 쉽지 않다. 베르히만의 영화가 더 난해하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영화적 상황 속에서 질문 던지는 일만 계속할 뿐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신과 인간에 대한 그의 사유는 그 자체로 철학적 질문으로서 정확한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오히려 그는 ‘물음’속에 이미 ‘해답’이 있다는 것처럼 ‘실존적 물음’ 그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생각하지 않는 이 시대, 인간에게 던지는 큰 화두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제7의 봉인을 통해서 ‘신’에 대한 그의 질문을 조금은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질문 자체도 그가 제기하는 질문의 영역 안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베르히만이 제기하는 형이상학적 물음이 나에게 의미 있는 질문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그리고 내 삶 속에서 보다 가치 있는 자극으로 남기 위해서 ‘신’의 의미를 다른 식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서구적 신관의 영향에서 조금은 벗어나있고, 또한 아직까지 종교를 갖지 않은 내가 이 영화와 대화하는 방식이다. 베르히만이 제기하는 신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그 질문은 현대 한국사회를 ‘아무런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어떤 화두가 되는가 하는 것을 간략히 탐구하고자 한다.


200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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