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오지 않는다

from 영화창고 2009. 5. 8. 11:35

 

최근에 종종 사람들은 베케트가 자신의 구상을 반복 사용한다는데 대해 비난해왔다. 그는 도발적으로 그런 비난에 자신을 내맡겼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그의 의식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의 전 작품을 꿰뚫는 근본 형상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는 제스처는 이런 상황에 대해 꼭 들어맞는 반응이다.
Theodor W. Adorno - Asthetisch Theorie (미학이론 중에서)


나에게 사무엘 베케트라는 이름은 먼저 아도로노의 언급속에서 다가왔다. 아도르노가 진리의 마지막 도피처나 화해의 장소로서의 진정한 예술을 거론할 때 베케트의 이름은 빠짐없이 등장했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진정한 예술은 철저한 내적 형상화가 되어야 하며 또한 가장 진보된 의식의 예술이어야 했다. 베케트의 연극이 그가 말하는 그러한 진정한 예술인지 과연 어떠한 '현혹연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예술인지 난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펴보았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절대 끝장까지 읽을만한 참을성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고, 결국 지극히 피상적인 몇가지의 단어만이 남아있었다.

 

내가 아는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소위 부조리극이라는 작품을 썼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피상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는 유효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무런 사전지식없이 그렇게 멋모르게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고도'를 내 살에 와닿는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분석해야할, 또 미학적 측면에서의 의의를 논해야할 위치에 있었다면 난 그렇게 쉽게 산울림 소극장에서 재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추운 겨울날 설레이는 마음으로 찾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 연극을 보고난 뒤 한가지 마음에 와닿았던 것도 예술이라는 장르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내 삶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에 대한 막연한 고민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문학이든 영화든 연극이든 음악이든 간에 작품과 나사이의 본질적인 대화를 넘어서는 담론은 의미가 없다. 그 담론이 나의 경험, 나와 작품간의 대화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 3자의 이해를 바탕으로한 (소위 비평이라는) 담론권력 그 자체로서 다가올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작품이 어떠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고, 또 자명하게 어떠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감상과 이해를 바탕으로 내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후의 논의나 생각은 왜곡의 가능성을 지닌다. 그것은 바로 나와 작품간의 왜곡이다. 결국 작품에서도 주체적이지 못하고 그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도 주체적이지 못하게 되는 이중의 함몰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주변의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사고 작용 이전에 다가오는 본질적인 1차적 반응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난뒤 내 삶에 의미있는 것들을 찾아보려하고 내 삶에 적용시켜 보려하는 것도 결국 그 영화가 내 삶과 나라는 존재를 감응시키는 직접적인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동에는 다른 사람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전적으로 나와 영화간에 발생하는 지극히 순수한 만남이어야 한다.

 

내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에 대한 글을 쓰려하고 또 그러면서 그 연극에서 나 나름의 의미를 찾고 되새겨 보는 이유도 그 조그마한 극장에서 나와 작품이 만난 그 순수한 순간이 내 삶과 나를 분명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 극장에 들어선 순간 난 되도록 사무엘 베케트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지우려고 애썼으며, 또 그 이름을 둘러싼 다른 많은 이들의 판단과 평가를 버리려고 애썼다. 그 연극과 내가 만나는 그 자체를 간직하고 싶었고 그러한 일들이 의도적인 행위였다기 보다는 무대의 막이 오른 후에 무대를 바라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되는 일들이었다. 결코 단언하지만 그 무대위 배우들의 몸짓에서는 단 한번도 부조리라는 언어가 보인적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고도'를 보려고 마음 먹은 뒤에 걱정스러웠던 점은 내가 연극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연극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어서 내가 과연 연극과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경우에 카메라 자체가 사물과 사건에 대한 시선이기 때문에 내가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은 한번 걸러진 시선을 다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화면에서는 내 시선이 가야할 곳과 내가 영화에서 중점을 두어서 볼 곳들이 쉽게 드러난다. 화면도 드러나야 할 것들을 드러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 드러나야 할 것을 중심으로 구성되게 된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주 편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어디를 봐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고서 난 조금 당황했다. 어디를 응시해야 하는가, 어디를 보아야 극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가 명확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말하고 있는 배우를 쳐다봐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 사람의 손짓을 봐야 하는지 얼굴을 봐야 하는지 그 사람의 동선에 시선을 둬야 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배우를 봐야 하는지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봐야 하는지...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게 참 어려웠다. 최소한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어떠한 행동이든 하고 있었고, 그것들이 분명히 소홀히 될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난 곧 무대를 내 삶의 공간으로 바라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그냥 바라보면 된다는 것을...나에게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되는 것은 유심히 바라보고 내가 판단하는데 중요하지 않거나 일부러 보기 싫은 것들이라면 외면하면 된다. 나에게 연극무대가 특이하게 다가온 점은 우리의 삶처럼 내 시선이 닿는 곳, 내 생각이 머무는 곳이 나에게 진정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간단하다. 보고 싶은 곳을 바라보면 된다. 영화와는 다르게 대상에 대한 한번의 걸러짐을 내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과 수용이 가능하다는 능동성을 무대를 바라보면서 했다. (물론 이건 무대에 올려진, 또 카메라로 찍히기 이전의 연기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 특이했던 점은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연극은 지금 이순간 이 극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유일한 연극이라는 점이다. 물론 같은 내용을 오랜 시간 공연하고 수많은 연습을 통해서 그 극의 차이점은 적겠지만 그래도 미세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지금 그 연극은 유일한 것이고 결코 다시는 똑같이 재현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연극의 중요 구성요소 중에서 관객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을 봐도 즉 그 관객의 존재가 극을 이룬다는 것을 봐도 지금의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나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은 결코 다시 같은 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멋진 것이었는지 모른다. 보는 순간 다시 반복되지 않고 지금 이순간 사라지고 있는 거라는 것(어쩌면 삶의 매순간이 그렇듯이), 무척이나 특별한 경험이 아닌가?

이번 산울림의 '고도' 공연은 도코초청 공연을 기념하는 귀국 공연이었다. 평일에는 7시 공연을 했는데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보조석에 앉게 되었다. 약 75석을 구비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매를 해야 평석에서 볼수 있을만큼 성황리에 공연중이었다. (4월까지 연장공연을 한다.) 근데 보조석이라는 것이 무대 뒤편의 구석진 자리가 아니라 제일 앞줄이었다. 앉는 데는 조금 불편했지만 배우들이 관객쪽으로 조금만 다가오면 그들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온기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였다. 어느 곳에서 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거리상의 근접성으로 인해서 무대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면이 부족했고 또 내 시선쪽으로 배우가 가까이 서면 시선 끝에있는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이 연극이 극단 산울림의 대표작이고 그 극단의 처음 작품이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연극은 이 산울림 소극장에서 몇번에 걸쳐서 되풀이 올려진 극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공연과정에서 보다 우리의 말과 생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번역후의 초기 상연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이질감이 공연을 거듭하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언어로 가다듬어졌을 것이고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각색되고 수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느정도 연륜이 쌓이고 가다듬어진 극을 이제서야 처음 볼 수 있다는 것은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흘깃 팜플렛을 보니 제법 국제연극제에도 많이 참가했고, 국내외 많은 공연을 거듭한 작품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공연전에 외국인들이 산울림의 '고도'를 평가하는 글을 읽어봤는데 그들이 한결같이 원작에 충실하다는 말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재미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반응들이 었는데, 나도 연극을 보는 중간에 지루하지 않고 참 재미있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짧은 생각으로는 원작에서 많은 부분 벗어나 있지 않은가하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런 판단에는 어렵고 훌륭한 것은 즐겁지 않다는 지극히 편협한 선입견이 작용되어 있는 것이리라. 분명 연극으로 보는 '고도를 기다리며'와 수많은 비평과 책속에서 보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술작품의 감상에 있어서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된 처음에서 생각해야 진정한 감상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 된다. 만약 내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극을 보지 않고 글로서 평론으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난 고도를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보다는 심오한 철학과 형식적인 차원의 부조리로서 인간의 문제를 건드린 그러나 재미없는 어려운 극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베케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오. 그러나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많은 부분 우리는 극장에서의 경험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집에 돌아가서 해야할' 인생에 대한 생각을 그 작품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 작품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전자의 직접적인 경험이 더없이 중요한 경우가 많다. 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의 '생각'은 의미가 없다. 이건 내 스스로도 깊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원작의 본래 뜻을 살리면서 그 안에 연출가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담아낸 연극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한가지 예로서 무대에는 조그마한 언덕과 그 위에 이상스레 휘어진 나무 한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사실 베케트의 연극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나무의 형상을 지시한 점은 없는데 연출가 임영웅은 한 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무의 형상이 한국의 '소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극중에서 그들이 '목매달아 죽을까'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못내 우리의 한을 떠올리게 한 이유도 그러한 '소나무'가 주는 감정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연극을 거쳐간 배우들도 익숙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이번연극에서 안석환이 분한 에스트라공 역할을 바로전에는 '송영창'이 했다는 점도 이색적이었다. 극 전반에서 느낄 수 있었던 에스트라공의 느낌은 익살스럽고 애처롭고, 때로는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어쩐지 내가 알고 있는 송영창의 모습과는 일치되는 면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극중 포조는 김명국이 맡았는데(맥도날드 CF에서 나오는 아저씨) 평소 광고에서 보이는 면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 참 독특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그런 기존의 이미지가 유발하는 웃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알고보니 그도 연극무대에서는 잔뼈가 굵은 배우인듯 했다. 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포조역으로 여섯번째 출연을 한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눈앞에서 직접 보니 그는 무척이나 커보였다.

 

연극은 2중주, 혹은 4중주라는 말이 있듯이 철저히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포조, 럭키 4명의 떠나지 못한 자들의 지겹고 되풀이되는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연극에서 상연되는 부분은 단 이틀간의 이야기이지만 극중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단순히 그들은 이틀동안에 그곳에서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 둘이 처음 만난 그 몇십년전부터 계속 그 자리에 있어왔고 또 앞으도도 몇 년간 계속 있을 것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그렇게 많은 시간동안 덩그라니 하나의 나무가 자리한 그곳에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그 고도는 내일 오겠다는 약속만을 계속 할뿐이지만 결국 그들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지루한 기다림(어쩌면 인간 본질적인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을 덜기위해서 그들은 수많은 언어를 내뱉으며 어쩌면 아주 바보 같은 동작을 열심히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의 기다림 속에 포조와 럭키라는 주인과 노비관계의 둘이 등장한다. 이들이 어떤 상징적인 함의를 가지든 간에 그들도 마찬가지로 계속 그자리에 맴돈다. 권력관계를 암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포조와 럭키의 등장은 내가 느끼기에 극에 큰 활력이 되었고 또 이들의 이튿날의 반복된 등장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극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는 기다림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든 아니면 어떠한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든 아니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어떤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든 본질적으로 그들은 계속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그 기다림의 대상, 그들이 그토록 오도록 바라는 존재가 올 것인지 그러면 그렇지 않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데서 이들의 기다림은 비극적인 것이고, 또 불안한 것이다. 그 기다림은 기나긴 시간속에 걸쳐있으면서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난 그들의 기다림을 결코 능동적인 것으로 볼 수 없었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듯이 그들의 기다림은 주어진 것이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도 모를 그 기다림을 숙명처럼 받아안으면서 그들은 또 하루를 살아나가고 이전의 하루를 살아왔다. 이 점에서 시간은 무의미 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 한 것이 되고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흔히 말하듯이 희망적이고 진보적인 삶의 동력이 아니라 지극히 비관적이고 다를 것 없는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다. 난 이점에서 고도의 정서를 동양적인 정서로 보고 싶었다. 이것은 과연 '고도'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나 자신의 판단과도 연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고도'에서 보이는 기다림은 한점과 한점 사이에 걸쳐있는 진행이 아니라 한점에서 한점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런 순환의 기다림의 경험은 그들 넷만의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것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본다.

 

이튿날 그들은 블라디미르를 제외하고 그들이 그 전날 만났다는 것도 또한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어떠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까마득히 잊고 만다. 오직 블라디미르 만이 그 반복, 망각의 경험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전날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뒤집어 쓰고 폭포수 같은 언어를 내뱉은 럭키는 다음날 원래 벙어리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포조 또한 눈먼 장님으로 등장한다. 내가 느끼기에 전날의 그들과 다음날의 그들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동일한 감정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공유할 기억이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하루간의 차이를 조금 확대시켜본다면 그 '기다림'은 인간의 보편적인 숙명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였을 뿐이고, 그 이튿날 나타난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또하나의 존재라는 것이다. 시간을 평행적인 것으로 그래서 전과 후가 있는 일률적인 흐름으로 본다면 그들은 다시 그자리에 설 수 없고 그 지겨운 기다림도 결국 만남이라는 보상으로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다림'이라는 것이 삶의 본질적인 한 측면을 나타내 준다면 그것은 나의 삶에서도 그렇고 너의 삶에서도 그렇고 이전세대에서도 그랬고 이후 세대에서도 그럴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인간이 지녀야하는 본질적인 기다림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그렇게 지겨운 시간의 흐름속에서 기다려온 기다릴 고도는 무엇일까? 이런 고도에 대한 판단이 내 삶에서 이 연극이 의미를 지닐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한다. 앞서 말했듯이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가 너와 나의 보편적인 경험이라면 그 고도를 자리매김하는 것이 삶에서 좋은 시사점을 줄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도의 의미는 절대시간, 즉 시간의 종말이다. 헤겔의 의미에서 말한다면 절대정신, 혹은 세계정신일 수도 있고 맑스의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가 완벽한 사회로 상정한 공산사회 같은 것을 말할 수도 있겠다. 즉 내가 말하는 것은 시간의 끝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시간의 흐름이 필요없는 어떠한 상태, 즉 더 이상의 기다림이 필요치 않는 완전한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라는 존재일 수도 있다. 불완전한 신이 아닌 완벽한 해결을 지향하는 존재로서의 신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의 의미는 흔히 말하는 구원자나 어떠한 희망의 의미로서의 신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즉 '고도'를 현재 삶의 조건을 해결해줄 구원자, 현재의 기다림을 보상해줄 존재로서의 신보다는 어떤 완전무결한 상태로서의 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발전사관에서 말하는 완벽한 개념체로서의 신, 선형적인 인류발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모순이 배제된 개념으로서의 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신 개념은 서양역사가 상정하는 발전의 끝에 존재하는 상태를 포괄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도'는 올수 없다. 절대로 고도는 나타날 수 없고 고도는 우리의 기다림을 해소해 줄만한 존재로 우리에게 등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고도는 없었고, 있지 않았고 그건 우리의 삶, 즉 본질적이고 숙명적인 기다림(기다리기만 하는 삶)을 해결해줄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 개념적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를 상정해놓고 삶의 기다림의 끝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 '고도'를 기다리는 인간의 삶, 오지도 않을, 올 수도 없는 그 '고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삶은 비극적인가? 무의미하고 지겹기만한 삶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본질인가? 그렇지 않다. 고도라는 존재,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어디로 향해갈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버리면된다.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올지도 모르는 또 온다고 하고는 수없이 많은 날을 오지않은 그리고도 또 온다고 소년을 통해서 거짓말을 할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왜 우리 삶속의 기다림을 기다림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렇게 수없이 많은 날들이 반복되어 왔다면 그 기다림을 인정하고 그 기다림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기다릴 것이 없다면 기다림의 무의미한 반복도 없을 것이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는 그 언덕에서 시간을 죽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기다리지 않고도 그들의 삶 자체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극속의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면서 언젠가는 그들도 '고도'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난 베케트의 소박한 희망을 본다. 그는 우리 삶과 역사에 존재하는 막연한 기다림, 기다림의 대상을 위한 삶이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결국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살아온 삶의 의미는, 내 눈앞의 무대에서 펼쳐졌던 그들 삶의 의미는 '고도'를 기다리는 그 지겨운 반복의 과정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의 진정한 삶일지 모르는 '기다림'을 둘러싼 그들의 하루하루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들도 '고도'라는 존재보다는 하루하루 그 언덕에서 내뱉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들의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내가 연극을 보면서 '고도'라는 존재에 대한 궁금함과 언제 올것인가 하는 기다림보다는 그들의 말과 행동, 그들이 했던 과정들에 기쁨과 감동을 느꼈던건 그게 그들의 진정한 삶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시 만난 기쁨으로 두팔을 벌려 찐한 포옹을 나누는 그 장면에서 난 우리의 삶을 보았다. 결국 우리 삶은 끈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려야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가 그 기다리는 존재로서 규정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들의 삶이 '고도'로서 정해질수 없는 것과 같다. (그들 삶에 등장하지 않았던 직접연관이 없는 '고도'라는 의미에서) 그것 보다는 기다림 그 자체, 그게 우리 삶이고 무의미한 기다림이 아니라 너의 삶, 나의 삶, 그리고 또 앞으로 다른 삶을 살아갈 사람들의 삶의 의미이다. 그것은 헤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반복되는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하루하루의 고민속에서 가치를 가지는 우리 삶의 솔직한 모습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아도르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진정한 예술로 본 것은 그런 역사진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진보의 논리를 넘어서는 점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것 보다는 인간자체의 문제들, 개별자의 아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화해를 '고도'를 기다리는 네명의 삶에서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도르노 자신도 인간의 역사가 진보한다는 어쩌면 당연시되는 사관에서 자유롭고 싶었고 그 비인간성을 반성하고자 노력했던 점에 비춰보면 이러한 나의 성급한 생각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러한 격찬이 '고도를 기다리며'가 가진 이야기가 자체 뿐 아니라 기존의 형식을 넘어서는 반 이성적인 반 구성적인, 또 극단으로 치달은 논리의 부정적 기능에 대한 연극의 틀에 방점을 두는 것이긴 해도 말이다.

 

인상적으로 연출된 달밤의 어스름속에서 극이 끝나고 시계를 보니 7시에 시작했던 연극이 9시 4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중간 5분간의 휴식 속에서 내가 텅빈 무대를 응시하며 조금전까지도 꽉차있던 무대를 떠올렸을 만큼 '고도를 기다리며'는 참 아름답고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내가 처음에 걱정했던 '연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낯설음이 기우였던 것이 여실히 드러났고 결국 어떤 예술 장르나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삶을 얘기하는 것은 감동을 줄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좋은 연극을 만들어가는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다음번에 다시 '고도'를 기다릴 때 다시 그들의 기다림을 애정을 갖고 보고 싶다. 그건 결국 내 삶을 바라보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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