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기업, 몬산토

from 책글창고 2009. 12. 22. 10:34

몬산토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마리 모니크 로뱅 (이레, 2009년)
상세보기

책을 집어들고 몇 페이지 읽고나서 혼란에 빠졌다.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 몬산토라는 기업은 생명공학회사가 아니었던가. GMO라는 제초제에 강한 유전자변형 물질을 만들어내는 기업. 먹을게 넘쳐나는 세상이라지만,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는 여전히 즐비하지 않던가. 그러니 GMO가 건강에 '미약한' 해약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하더라도 생산량 확충이라는 '녹색혁명'을 통해 굶는 이들에게 풍부한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면 무조건 비난은 답이 아니라고 '바보같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몬산토가 만들어낸 GMO가 극심한 논란의 한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 비단 GMO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해온, 그리고 이 소중한 지구에 뿌려댄 해약을 보고서 이해할 수 있었다. GMO는 몬산토 공포의 시작이 아니라 그 열매다. 파괴력을 짐작할 수 없기에 더 공포스럽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책을 100여 페이지 읽다보면 알게된다. 몬산토의 역사만으로도 GMO에 대한 공포는 현실로 다가온다.

초기 사카린을 만들어 코카콜라에 납품하던 몬산토는 세계대전중에 막대한 이윤을 쌓게된다. 미국방성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맨하탄프로젝트에 가담하여 플루토늄 정제에 힘을 쏟는다. 당시 책임자는 전후 몬산토 CEO에 올랐다고 한다. 몬산토는 화학분야를 솔루시아에 매각했으나 솔루시아는 2003년 잦은 소송으로 파산했고, 1999년 12월에 파마시아앤드업존과의 합명으로 파마시아로 회사명을 개정했으나 2002년 몬산토는 제약 부문을 파이자에 매각하고 농업 관련 산업에 주력했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몬산토이다.

그러나 기업의 모태와 그 기업을 이루고있는 경영방침, 내부자들의 태도로 미루어보건데 그간 해왔던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기업활동을 현재도 지속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편견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렇게 말하기에 이들이 해왔던 짓은 상상을 초월한다. PCB하나만 봐도 그렇다. 이들이 퍼부어놓은 독극물은 현재도 잔류하여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너무도 충격적이라 인터넷을 잠깐 뒤져서 찾아본 자료인데, PCBs의 유해성은 다음의 자료만 봐도 알 수 있다. PCBs는 폐기하기도 어려운 물질이다. 연소시에 다이옥신이 발생된다고 하니 그 처리가 얼마나 골머리를 썩히는 일인지 알 수 있다. 다이옥신의 경우는 더 충격적이다. 80그램을 식수원에 뿌려도 800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만들 수 있다는 공포의 물질 DDT를 만들어 납품한 곳이 바로 몬산토이다. 베트남전에 사용된 에이전트 오렌지는 무려 8000천만리터에 달하고, 그 피해는 익히 알려진 그대로다.

앞 세단락이 100페이지 정도 읽고 나온 얘기들이다. 500페이지 가깝게 기술된 이 책. 사실 더 읽어나가기가 겁이 났었다. 한장 한장 넘길때마다 공포가 엄습해온다. 어떤 공포의 물질이 지구상을 헤매고 다닐지. 이런 기업이 아직도 이윤활동을 계속해나간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이 기업이 100여년 넘게 생산해낸 물질들이 내가 살고있는 주변에 아직도 잔류하여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실존적 두려움 탓이다.

다시말하지만 몬산토는 생명공학기업이 아니다. 그들이 현재 스스로를 어떻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들은 지구 역사상 최악의 화학물질을 만들어낸 공포의 기업이다. (현재도 라운드업이라는 제초제가 회사 매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파괴물질의 굵직굵직한 것들은 몬산토가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PCB, 다이옥신, DDT, Agent Orange, 라운드업. 고엽제. rBGH. 이런 무시무시한 물질을 만들어 막대한 이윤을 만들어온 기업이 몬산토이다. 자연분해되지 않고 체내 축적의 단계로 갈 수 밖에 없는 해약물질. 폐기도 쉽지 않은 독극물. 그 위험성을 알고서도 팔아댄 기업이 바로 몬산토이다. 이를 위해 몬산토는 대조군과 실험군을 조작한 불공정한 과학연구를 통해 면죄부를 얻었고, 정부기관과의 '회전문인사'를 통해 은폐했다.

읽으면서 내안의 독성물질이 어느정도인지 정밀한 검사를 받아보고 싶게 만드는 책. 몬산토는 번돈을 뿌려대며 스스로를 감추고 있지만, 이 책은 고맙게도 쉼없이 까발린다. 두터운 책이지만 (몬산토의 해약을 다 담기에는 그래도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고 놀라워 지루할 틈없이 읽힌다. 수많은 인터뷰와 생생한 자료가 담긴 이 책의 펄떡거리는 생명력은 상당부분 저자의 발품 덕이다. 고맙기 그지 없다.

사명감이 없었다면, 이런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공개된 자료들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책으로 엮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저 녹색혁명이라는 허울 앞에서 아직 그 폐해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GMO에 무딘 사람들. 꼭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조금 배고프더라도 쓸만한 먹거리로 우리 삶을 살찌우는 것은 존엄에 관한 문제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몬산토와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환경과 인간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 당연히 몬산토의 반대편에 설 그들에게 이 책이 큰 힘이 될 것이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




새삼 크리스마스라니. 추운 날씨, 언 손에 찬 입김을 불어대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다. 내게 크리스마스를 기억할 자격이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무겁게 누른다.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그렇다. 기억하지 않겠다 마음먹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도 시간은 잘 지나가지 않던가. 무덤덤하게 여느 휴일과 다름없이 흘러가면 그만인 것이다. 기억하기에도 짧은 그 며칠, 발 아래 툭툭 치고 묻어놓는게 어쩌면 더 익숙하다.

K가 방 한켠에 작은 트리를 켜두었다. 불빛이 환했다. 여느 겨울과 다름없던 날들이 촉촉하게 반짝인다. 힘겹게 켜놓은 그 마음을 알겠기에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맙다. 기억하고 축복하자는 마음이 되었다. 발랄한 캐롤은 아직 버겁고, 마음을 느리게 쓰다듬어주는 캐롤을 찾아듣는다. 소박하디 소박한 그런 크리스마스면 좋겠다.

허민의 피아노가 참 좋다. K손을 붙잡고, 작고 밝은 그래서 따뜻한 카페에 기어들어가 착한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노래. 피곤함 내려두고, 음악을 듣고 싶다. 잡은 그 손 놓지 않을거다.

메리크리스마스, 친구들.



,
컨버세이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4 / 미국)
출연 진 핵크만, 신디 윌리엄스, 앨렌 가필드, 엘리자베스 맥레
상세보기

첫장면. 넓은 광장에서 도청이 이뤄진다.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 단절되고 분절되어 들리는 대화. 모두에게 열려있는 광장, 그와 대비되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도청. Bird's-eye view 앵글에서 타겟으로 슬슬 좁혀지는 카메라는 눈을 잡아끈다. 인상적인 도입씬이다.

제목은 Conversation이지만, 정작 대화는 없다. 너무 조용하다. 대화는 의미 교환이 아니라 일방적이다. 누군가는 말하고, 그 말하는 것을 누군가는 몰래 훔쳐들어야 한다. 듣는 것과 다르게 '옅'듣는 것은 항상 은밀하다. 그러니 대화는 있지만, 진짜 대화는 없다는게 정확하겠다. 모든 대화는 무기력하다.

도청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해리 콜은 대화를 은밀히 듣고 그걸 의뢰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지만, 자신은 그 누구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인물이다. 대화는 비밀이 보장될 수 없고, 무의식적으로 흘린 이야기가 흉기가 되어 자신을 헤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안다. 타인의 들리지 않는 대화조차 테크놀러지의 힘을 빌어 들어야만 하는 콜이지만, 타인이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할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도청을 해야하는 그로서는 '도청당하지 않기 위해' 고독을 품안에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감추지 않으면 들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혼자이다. 영화속에서 혼자이거나 혼자가 아니어도 둘이거나 혹은 셋이다. 그때에도 건조한 대화가 이어진다. 박람회를 마치고 그의 작업실에 여러명이 모여있을때에도 콜걸을 데리고 작업장 한켠 조용한 구석으로 간다. 그의 답답하고, 고독한 삶이 애처롭다. 파편화된 소리들, 낮게 깔리는 재즈음악, 스피커를 앞에두고 연주하는 테너 섹스폰 소리, 공간은 달리 채울 수 있는 것이 없다.

대부시리즈에 비하면 7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코폴라의 소품같은 느낌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도청기계들은 지금으로 보면 '장난감'수준의 조악함이 보이지만, 옅듣는다, 옅들으려한다, 감춘다는 그 행위의 비밀스러움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청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되고, 도청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비밀스럽게 얘기를 해야만 한다.

사장의 의뢰로 넓은 광장에서 남녀의 대화를 옅듣는 해리 콜. 여자는 사장의 아내였고, 남자는 아내의 정부였다. 도청을 옅듣고 그걸 복원하면서 사장이 그 둘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된다. 자신의 도청으로 인해 이뤄질 결과에 괴로워하면서 그 장소에 있지만, 결말은 예상과 다르게 빗나간다.

넓게는 워터게이트 이후의 미국사회의 충격이 만져진다. 영화를 보며 9.11이후의 미국사회가 겹쳐지고, 한국 현대사를 뒤흔들었던 수많은 도청 및 감청사건이 떠오른다. 옅듣는 것은 그 자체로 은밀한 행위이지만, 그걸 공개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겹쳐진다면 그것은 파괴력을 가진다. 극중 해리콜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도청으로 인해 타인의 삶을 파괴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 그것에 대해 갈등하고 고민한다.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끊임없이 도청사건이 터지고, 감청이 횡횡하는 사회. 넓은 광장에서, 아니면 왁자한 카페에서 떠들면서도 문득 주변을 볼 수 밖에 없는 시대. 휴대폰도 옅들을 수 있는 가능성. 점점 개인으로 수렴하는 삶을 살고 있으나, 테크놀러지로 인해 그 은밀함도 까발려질 수 있는 공포. 내가 인터넷공간 어딘가에 로깅한 흔적이 어느 순간 흉기가 되어 나를 헤칠 수도 있는 상황. 매체는 타인을 향해 열려있으나 결코 나를 보호할 수 없다.

반전의 충격보다, 길게 남아있던 고독과 허무한 대화, 말하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기억에 남는다. 테크놀러지가 열어놓은 가능성, 매체의 확장이 가져올 그 이면의 공포를 포착해낸 예민함. 그래서 30년전 칸은 황금종려상의 수상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
경제학이 숨겨온 6가지 거짓말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피트 런 (흐름출판, 2009년)
상세보기


바꿈질이라는게 있다. 오디오나 카메라, 크게는 자동차를 대상으로 이뤄지는 것인데, 갖고 있던 물건을 중고로 내놓고 다른 기기를 새로 들여놓는 행위를 말한다. 이 바꿈질을 통해서 쓰고싶은 물건을 적은 비용으로 들여놓을 수 있고, 많은 물건을 써볼 수 있다.

이런 바꿈질을 잘하는 사람들은 중고로 물건을 팔고, 중고로 물건을 사는 행위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런 바꿈질이 활발하고 가능한 이유중에 하나는 이런 바꿈질에 참여하는 경제행위자들이 대부분 상품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 제품의 가치를 대체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특히나 오디오같은 경우는 나름의 폐쇄적인 거래망을 가지고 있어 행위참여자의 신뢰도를 가늠하기 쉽다. 고가 물건의 경우는 거래의 위험성 탓에 밀접한 인간관계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또한 물건을 구입할때 바꿈질 할 것을 예상하여 구입하기 때문에 '보유효과'(내가 소유한 것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매기는 현상)에 대해서 자유로운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을 바꾸어 일반적인 시장상황에서는 어떨까. 정보의 비대칭이 일반화되어있고, 누군가는 알고서도 사기칠 가능성이 있고, 개인은 보유효과로 인해 자신의 물건을 과대평가하고 있고, 시장의 신뢰가 무너져 행위 당사자의 건전한 거래가 불가능한 상황. 이런 상황이라면 바꿈질은 성공적이지도 참여자간의 '윈윈'도 불가능 할 것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중고차 시장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신뢰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지만 말이다.

보통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이러한 거래 실패를 저자는 MISLED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꽤 설득력이 있다. (mistake, information, surprise, luck, event, dishonest) 즉 MISLED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전통경제학이 최대이익을 보장하는 경제활동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는 더 이익일 수 있다는 점이다. MISLED상황에서라면 거래 자체가 손해를 가져온다.

예를들어, 100달러짜리 카메라, 130달러짜리 카메라가 있는 상태에서 선택하는 문제와 180달러짜리 카메라가 추가되었을때 우리의 선택이 달라지는 문제를 보자. 전통경제학이라는 가격대가 하나 추가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완벽한 정보를 통해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선택에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180달러짜리가 추가되었을때 일반적으로 130달러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 인간은 위험회피성향, 불확실성 제거라는 경제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실패확률이 적은 중간을 선택한다. 저자는 이러한 선택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경제환경에서 형성된 혹은 학습된 본능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행동주의 경제학이고, 보다 현실경제에서 설명력을 지닌다고 말한다.

문제는 남는다. 즉 의도적으로 판매자가 130달러짜리가 이윤이 가장 많이 남기 때문에 180달러를 의도적으로 끼워넣었을 경우 130달러짜리는 잘못된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즉 시장이 불합리한 이윤추구를 한 것인가 아닌가가 우리의 경제활동 본능이 바람직한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수 있다. 행동주의경제학에서 130달러짜리 선택을 경고한다면 그것은 시장의 의도를 불순하게 보는 것이고(상식밖의 경제학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듯이), 130달러짜리 선택이 실패할 확률이 적은 선택이라는 것은 시장이 불순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또하나의 판단기준(즉 시장의 건전성, 불확실성에 대한 정보)이 없다면 경제행위가 옳은 것인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고비용의 정부개입 혹은 법적 강제가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경제학이 숨겨운 6가지 거짓말이 하려는 말의 핵심은 이것이다. 즉 전통경제학이 가정하고 있는 합리적인 인간은 경제생활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링적 가정에 불과하고 수학적 용이함을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전통경제학은 경제활동을 적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저자는 행동경제학적인 입장에서 경제학을 비판하고 있다.

기본전제로 저자는 경제학과 경제생활을 구별한다. 마케토피아와 미들톤이라는 가상의 사회를 상정하여 전통경제학이 가정해온 합리성, 시장의 개념이 현실과 유리되어있는지를 설명한다. 즉 이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이 고쳐볼 수 있다. '전통경제학이 숨겨온 6가지 거짓말을 행동경제학으로 설명한다'

사실 이런 지적들이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이 책을 통해 경제학이 '나만 모르게' 감추어놓은 비밀을 파헤쳐줄거란 기대를 갖는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책 제목이 내용에 비해 너무도 '섹시'하게 뽑혔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행동경제학적인 입장들이 이미 많이 소개되었고, 기존의 전통경제학의 입장들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탄 터지듯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전통경제학의 가정들은 설명력을 잃어왔고, 비판을 받고 있지 않은가. 대안을 찾아야하는 혹은 또다른 설명을 원하는 시점에서 행동경제학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행동주의 경제학에 차분한 설명에 가깝다.

전통경제학의 보완으로서 대안으로서 행동경제학은 의미가 있다. 행동경제학적 관점을 확장하여 거시적인 경제정책이나 대안발전론에 적용하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특히나 경제행위에서의 '신뢰'나 '인간본성'에 대한 강조는 새겨봄직 하다. 그러나 매스이코노미 환경에서 수많은 경제활동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행동경제학이 일반이론을 제공해줄 것인가, 설사 부정확하더라도 미래예측이 가능하도록 해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내 생각에는 모델링의 관점 자체가 상이하지 않은가 싶다. 굳이 따지자면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 관점의 차이라고 할까. 일반화의 실패. 일반론에 대한 반대근거로는 유의미하지만, 그 자체로 일반론을 세우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제행위의 '집합'적 동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예측될 수 있고,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이렇게' 설명될 수는 있으나, 개별적인 행위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다양한 변인으로 인해 상이한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책을 덮으면서 한 생각은 행동주의 경제학이 대안이론으로서의 포지션을 갖기에는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실험심리학적인 포지션의 한계라 할 수도 있을까. 대안이라기 보다는 보완이라는 느낌이 아직은 강하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


폴리도어에서 나온 오래된 LP판이었을거다. 80년대 온갖 히트곡이 수록되어있던 음반. 앤디 깁의 노래도 있었고, Bells의 노래도 있었다. 어린 시절이니 LP를 구입할 여력은 안되었을테고, 그 앨범을 손에 넣게된 계기가 재미있다. 어느날 옆집에서 대청소를 하는지 대문앞에 책과 LP판들이 수북히 쌓여있었는데, 신기한 마음에 들춰보다가 운좋게 들고온 판 중에 하나였다. 물론 아주머니한테 허락은 받았다.

어떤게 좋은 곡인지 알턱이 없는 시절에 '잡히는 대로 몇개' 집어왔는데, 그때 들고온 판중에는 파란색으로 칠해진 Brothers In Arms도 있었으니 꽤 대박이었던 셈이다. 이 80년대 팝 모음집은 내 방에 턴테이블이 있던 시절까지 꽤 오랫동안 함께했는데, 이사를 다니다가 버렸거나 잊어버렸거나 했을거다. 아쉽게도 행방이 묘연하다.

그 앨범에서 가장 좋아했던 곡이 Irene Cara의 Out Here on My Own였다. Fame에서 이 곡을 발견한 건 그 이후였을거다. 영화에서 피아노 전주가 흐를때 놀라고도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 곡이 흐르던 씬. 단단하게 피아노를 누르며 부르던 Irene Cara의 목소리는 참 아름다웠다. 풋풋한 그 시절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 그녀 나이 스물한살. 30년이 되어가는 영화지만 터질듯한 젊음은 다시 봐도 생생하다.

영화를 다시 열어, 유튜브에 올린다. 그녀 노래를 다시 들으니 그들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어디쯤 닮아있을 내 시절이 스쳐간다. 늦은 밤 탓이다. 장구, 춤사위, 가을축제. 그 팍팍한 고등학교 시절. 두드릴 장구와 부를 노래가 있어 때론 벅차던 시절. 그 젊음이 참 아스라하다. 야속하게도. 벌써 12월이다.






,

그 자식 사랑했네

from 음악창고 2009. 11. 26. 16:48


세련되게 빠진 달큰한 사랑노래보다, 절절함이 더 다가왔던 노래. 눈뜨고 코베인의 그 자식 사랑했네. 생생하게 튕기는 가사탓이다.

"요약하자면..." 하고 주저하며 말하는 짧은 침묵. 그 뒤에 터지는 "그 자식 사랑했네"라는 외침은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수백가지 댈 수 있으나) 결국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성에 대한 자기 고백일거다. 너바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뽕짝을 좋아하는 그 자식. 그래도 좋았던 이유, 어쩔 수 없는 마음들.

소리는 촌스러워 진솔하다. 노래가 아닌 친구의 지긋지긋한 연애담같은 느낌. 깜악귀의 비음섞인 외침이 흘러나오는 지점에서 (내가 그러했듯이) 이런저런 기억에 낮은 한숨을 토해낼 수도 있겠다. "요약하자면..." 할말이 왜 없을까. 사랑은 공감하고자 하나, 공감할 수 없는 그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일테니. 누군들 이런 불일치의 경험이 없겠는가. 너바나를 좋아한다며 뽕짝을 좋아하던 그 자식. 

상처주고, 상처받고. 차이를 이해하고 보듬기가 어디 쉬울까. 그걸 알면서 사랑하기가 어디 쉬운가. "그 자식 사랑했네..." 결국은 과거형으로 토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아쉬움과 자기위안이 뒤범벅된 심정.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

더 발칙한 한국학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J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 (은행나무, 2009년)
상세보기

책에 대한 나의 감상보다 먼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두명의 인터뷰를 옮겨본다. 박노자 교수의 책을 읽었을때의 당혹감(한국인이라는 나에게 많은 부끄러움을 주었던)과 비슷했다. (한국에 여행온 것이 아닌) 한국에 살고있는 엑스팻들의 말과 행동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들이 차가운 타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이를테면 애정어린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한국이나 한국문화 중에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자기를 외국인에게 맞추려 하는 게 좀 거슬린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 성씨를 '박 Bak'이라고 하는 대신에 '팍 Park'이라고 하는게 정말 싫다. 한국 음식을 바꾸려 노력하는 것도 싫다. (중략) 사람들이 외국 사람에게 영어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싫다. "한국이라고, 그냥 한국어로 말해요!" 사람들은 "제 이름은 현수예요. 하지만 뭐라고 불러도 좋아요."라고 하는데, 그건 웃긴 일이다. 완벽하게 훌륭한 이름이 있는데! 그냥 자기 이름 써야지, 왜 그걸 바꾸는가? 외국인에 맞춰 바꿀 필요가 있나? 왜 "한국말은 배우기 어렵죠? 그냥 영어 써요. 우리가 영어 배울 테니!"라고 할까? 자기 유산에 대해 좀 더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외국인들이 똑바로 따라할 때까지 자기 이름을 25번 정도 반복하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그걸 말할 수 없다는 건 변명 아닌가? 한국인들을 그 사람들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다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 

p141 Ceda Bough Saeji 시이달 새지 (미국)

"한국의 전반적인 개발 형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나? 이곳에서는 개발이 나라의 발전에 '좋다'거나 '이롭다'는 식으로 맹종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차라고나 할까. 가령 청계천 공사는 2년 만에 해냈지. 대체로 심미적인 감각에 대해 고심하지 않은 채 개발을 위한 개발을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있나? 아니, 그저 지루한 고층 건물을 또 하나 올릴 뿐이다. 종로1가처럼 역사적인 동네조차도 그저 '새로운' 것이 좋다는 듯 밀어버린다. 콘크리트로 만든 거면 다 좋다는 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된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강남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맛골 같은 곳은 그저 '더러운 동네'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그들은 그곳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어버린다. 마치 자신들은 결코 가난했던 적이 없었다는 듯,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듯.

p182 Matt VanVolkenburg 매트 밴볼켄버그 (캐나다)

시이달은 우리 안의 문화 사대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이 땅에서 영어 못하는 것은 부끄럽고, 열등감을 느껴야할 일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외국인 앞에서 당당하게 우리말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이 보기에는 그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것이다. 여행서적에 '여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정확한 영어를 병기하는 것과 나의 이름을 외국인이 부르기 편하도록 바꾸는 것은 다르다. 외국인을 배려한다는 마음가짐 속에 우리 문화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글로벌 스탠더드, 세계화라는 허상. 그녀 말대로 우리는 그들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울림이 크지 않은가.

아나키스트라 소개된 매트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개발이데올로기에 대해 반성하게 해준다. 심미적인 감각에 대한 고민없이 개발을 위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 얼마나 날카로운가. 지금도 도처에서 행해지는 개발을 위한 개발의 시선은 옛것은 부끄럽고 더러운 것이고, 그런 역사를 '마치 그런 역사가 없었다는 듯이' 깨끗이 밀어버리는 천박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른바 '민속지'를 남기려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개발대상인 그곳의 많은 역사는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걸 안타까워하는 엑스팻의 시선이 고맙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했다.

서로 고착화된 문화적 배경으로 자라온 사람들이 타인의 문화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스테레오타입을 걷어내고 이해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거다. 외국인 노동자. 영어강사, 미군, 보따리 장사 등등등. 그런 이미지는 미디어를 통해 더 고착화 되어가는 듯 하다. 그런 인식의 벽에 막혀서 서로의 진솔한 교류나 이해가 가능하겠는가. 

한국인이 같은 외국인을 놓고 보는 시선부터 차별적이다. 백인을 보는 시선과 중동이나, 아시아 지역 외국인을 보는 시선은 말하지 않아도 다르다. 서양의 차별적 시선을 경험한 우리가 그런 서구화된 시선을 통해 외국인을 본다는 것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스콧 버거슨이 지적하듯이 백인 영어교사에 대한 시선도 그러하다. 성욕과잉이거나, 마약을 먹거나, 난잡한 생활을 한다는 시선들. 마찬가지로 엑스팻들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 또한 차별적이다. 오랫동안 거주한 이들은 그런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그들도 한국 사회에 대한 고정되고 왜곡된 시선을 거두기 쉽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양방향의 왜곡과 편견이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는 알아채기 어렵지 않다. 머리는 그렇게 간다고 해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아름다운 땅, 한국에서 살아가는 엑스팻들은 애정을 감추지 않는다. 거침없이 한국사람이라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 다양한 문화적 가치가 공유되고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의 3장을 보면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문화적 접점은 다양해야 한다. 문화는감염되어야 하고, 영향 받아야 하고, 그 경계가 흐릿해져야 한다. '국수'란 죽은 것이다. 열려있어야 하고, 영향받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문화적으로 동등한 자신감으로 마주해야하고, 이식이 아니라 어울림이 되어야 한다.

이 땅의 외국인들이 어떤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느껴보고 싶다면 읽어도 좋겠다.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탓에 일관된 메시지를 읽어내긴 힘들지만, '경험'해본다는 차원에서는 크게 부족하지 않다. 난 이 땅에 살고있는 외국인들이 더 많이 늘어나고 그들이 뿌리내려 오래도록 살아가길 원한다. 한국이 그들이 살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론 그들로 인한 부정적인 감염도 있을 수 있겠으나 결국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 줄 것이라 믿는다.

몇가지 덧붙이자면, 첫부분의 소일담은 차라리 뒤로 뺐으면 좋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책의 무게감을 도리어 해치고 있는 듯 하다. '엇! 이건 아닌데'하며 책을 덮을 뻔했다. 그리고 스콧 버거슨의 촛불집회관련한 얘기는 '그냥 패스'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정도로만 정리하는게 나을듯. 이 아저씨 조선일보를 너무 열심히 본 것 같다. 신화로 감춰진 이데올로기, 민족주의적 전체성을 촛불집회에서 읽어내려 하는 것 같으나, 그 분석이 지극히 일면적이고 내재된 의미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원인분석에서 '숨겨진 음모'를 가정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그가 이 책을 펴내면서 결국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4장이었을까.  

이 책의 백미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삶을 이뤄가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진솔한 엑스팻들의 인터뷰였다. 그리고 3부의 이야기들도 그러하다. 읽으며 그들의 삶과 생활을 깊이있게 포착한 책을 만나고 싶었다. 스콧 버거슨은 싫고, 또 다른 진지한 엑스팻이었으면 좋겠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

조금 타이밍이 늦은 것 같지만, 그날 찍었던 몇장의 사진과 간략한 후기 남겨본다. 축제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소감을 얘기하자면, 이런 경연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맘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이나 풍성했으며, 그들을 지켜보면서 우리 대중음악씬의 수준을 느껴볼 수 있었다. 포크, 재즈, 라틴기타, 사이키델릭, 일렉트로니카, 락, 발라드... 어디 한곳에 치우치지 않은 다양함이랄까. 보는 내내 기분 좋았다.

사실 헬로루키로 선정된다고 해서 한국 대중음악의 오버씬에 충격파를 던질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이 소중했던 것은 EBS의 헬로루키가 가진 지향점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진지한 자세로 음악을 하는 친구들, 이 무대가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연주하고 노래하는 뮤지션을 발굴하고자 하는 의도. 그들이 좋은 음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자 하는 의도. 그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관심 가져주어야 겠다.

현장에서 아폴로18이 대상자로 호명되었을때, 결과에 실망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앵콜공연도 보지 않고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많았고,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폴로18의 앵콜공연에 무대앞으로 나와 진지하게 지켜봐준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그들의 시디를 구매하는 사람도 많았다. (공연 끝나고 시디사러 부스에 갔을때 아폴로18은 품절이었다는)

다들 훌륭했지만, 그 중에서도 박주원과 흠의 연주는 신선하고 매혹적이었다. 이런 큰 무대에서 자주 보기 힘든 음악들이니. 특히나 박주원의 기타연주는 그 많은 관객을 일순 침묵하게 할 만큼 기량면에서 독보적이었다. 특별상이라도 받았으면 했다. 아폴로18은 상받았으면 했으나, 감히 줄 수 있을거라 생각지 못했기에 놀라웠다. 받은 500만원으로 밀린 월세 깔끔하게 갚고 더 좋은 음악 들려줬으면 좋겠다.

스크롤 압박이 있지만, 무보정 리사이즈로 올려본다. 당겨 찍어보려고 200mm망원을 들고 갔는데, 주변이 어두워서 흔들린 사진이 많다. 그래도 기록 차원에서.


펜싱경기장, 날이 추웠다



음악은 제대로 들어본 적없었던 노리플라이의 인기는 대단했다. 아폴로18이 이들의 대상을 점칠정도로. 10여년전 전람회를 기대해도 될까.



한음파의 무대.





거침없이 나와버린 브로콜리너마저. 내가 있던 자리 근처 무대로 등장에서 가까이 찍을 수 있었다. 안녕을 불렀었나, 여튼 보편적인 노래가 두번째였다.



이번엔 잔디가 백보컬을 했는데, 여전히 조금 불안정했다. 그래도 좋았다.



진행을 맡았던 장윤주의 무대. 주변에 계신 여성분들이 많이들 따라불렀다.



비눈물을 부르고나서 합창하는 장면.



인디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혹은 몸담고 있는 이들의 진행이라 중간중간 꾸미지 않은 애정이 느껴졌다.



왁짜한 분위기를 단번에 압도해버린 라틴기타. 손가락이 신들린듯 움직일때 환호가 터져나왔다. 주목해야할 뮤지션 박주원.



이날의 주인공. 아폴로18. 무대 가득 펼쳐지는 화면과 음악의 매칭이 절묘했다. 텁텁한 무대 분위기를 스산하고 차가운 산자락으로 몰고갔다.



조금은 멀리서. 세명이 만드는 음악이었지만, 무게감은 대단했다.



뒤이어 나온 검정치마의 무대. 좋아해줘와 antifreeze를 불렀다. antifreeze는 여전히 명곡이었다.



국카스텐. 연말 공연에 가볼까 고민중. '거울'과 '꼬리'를 불렀다. 이펙터에서 나오는 기타리프. RATM의 라이브 무대를 보며 놀랐던 그 기분이었다.



호응도로는 단연 최고였던 '좋아서 하는 밴드' 작년 쌈싸페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상큼한 무대를 보던 기억이. 완벽한 연주는 아닐지라도 듣는 이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날의 심사위원단. 심사결과에 박수쳐주고 싶다. 지향이 명확한 경연이 되었으면 한다.



뒤이어 이어진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



싸구려커피 한소절과. 그 남자 왜를 불렀다.



이날의 미미시스터즈는 이러고 나왔다. 댄디한 장기하 및 얼굴들과 키치적인 미미시스터즈가 주는 충돌과 불협이 언제나 재미있다.



인기가 대단했던 노리플라이의 무대. 김동률과 성시경을 잇는 감성 아티스트로의 가능성이 옅보인다.



이런 뮤지션이 이 무대에 설 수 있을 만큼, 풍성했다. 흠의 연주 무대.



이건 좀더 가까이.



신인들의 무대가 끝나고 피아의 노래와 함께 등장한 이승환. 역시나 화려했다. 10명에 가까운 브라스를 데리고 왔다.



사실 이날 좋았던 부분중에 손꼽자면 출연자들이 잼형식으로 모여 만든 무대였다. 탄탄한 연주와 실력을 가진 이들로 꾸려서인지, 보는 내내 감탄했다.



나름 감동이었던 김수철의 무대. 등장만으로도 감사했던게 사실이다.



일곱색깔 무지개를 열창하는 중.



김씨는 김수철의 무대가 이어지지 참지 못하고 진행석에서 붕붕 뜀박질을 했다. 이러저러한 세세한 설명까지 곁들여줘 고마웠다. 김수철이라는 거장이 생소한 이들도 있었을테니.



젊은 그대 떼창이후. 그런 생각을 해봤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기억하고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가지고 있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인기상을 수상한 '좋아서 하는 밴드'



특별상을 수상한 텔레파시.



대상을 받은 아폴로18



뒤이어 이어진 아폴로18의 앵콜무대. 이때는 스탠딩석이 널럴해져서 앞으로 와서 봤다.



처절하게 연주하는 열정이 아름다웠다.



기타는 대단했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조 세트리아니의 명반 Surfing With The Alien이 떠올랐다.




,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론 커리 주니어 (비채, 2009년)
상세보기

저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책을 읽는건 용기가 필요하다. 사전지식이 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릴 수도 있지만,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없이 읽는 책은 감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모험이었다고 해야겠다. 아는 것이라고는 광고카피 몇줄 뿐이었으니.

'우주적 예언'을 표제로 하는 책이었으니,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아주 잘 짜여진 SF소설이 아닐까. 혹은 코맥 맥카시의 '로드'같은 건조한 스토리는 아닐까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 초반부를 읽으면서 이건 낚인건 아닐까 싶은 옅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내밀한 가족사가 줄기였다. 롤렌드 에머리히 감독의 '2012'를 예상했으나 막상 영화는 '트레인스포팅'의 느낌이었다고 하면 당혹감이 다가올까. 책의 초반부, 주니어의 예언은 그것이 정신분열적인 것이었는지, 진실한 것이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마약과 술에 쩔어 환각을 헤매는 주니어에게 예언자의 아우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를 믿을 수 없다. 소설이 넘기기 힘들었던건 짧은 기대와 소설이 너무도 엇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갭은 책장을 넘기면서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지구가 멸망할거라는 예언은 오히려 그의 삶을 파괴적으로 바꿔놓고 주변의 비극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인물은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지만, 그것은 앞으로 닥칠 멸망과 무관하다. 이야기는 한 흐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계속 분화되고 굴절된다. 

내밀한 가족사, 성장기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탈바꿈을 하는 지점은 주니어가 불가리아에 있게 되면서 부터이다. (불가리아라고만 말하는 이유는 혹시나 스포일러가 될까 싶어서다) 이전 스토리와 완벽히 이질적인 이 부분부터 소설의 내러티브는 확장된다. 호흡도 빨라지고 이야기도 다채롭게 변형된다. 어쩌면 워치맨의 닥터 맨하탄을 연상시키는 존재감으로 갑자기 다시 태어난 주니어는 예언자로서의 운명을 위해 일한다. 

재밌는 것은 이 소설이 그런 내러티브의 확장을 그대로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끊임없이 축소된다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스케일을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지구적 재앙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이야기를 버무리는 방식이 아니라) 시점을 이동하여 다시 인간사, 가족사의 그 내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전환이 덜컥거리지 않고 나름의 흡입력으로 읽히는 것은 다양하게 변주되는 시점탓이다. 이야기마다 등장인물로 화자가 바뀌고, 번호가 매겨진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있는 전지적인 시점으로 구술된다. 번호로 매겨놓은 챕터의 화자는 주체가 불분명하지만 일관된 발언을 하고, 각각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도 다분이 다층적이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면서 큰 줄거리로 수렴하는 미국 드라마 히어로스가 떠오르고,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즐겨보고 있는 플래시포워드가 겹쳐졌다. 영화적 편집처럼 교차로 사용되는 이야기.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시절을 예측하기 힘든 방식은 책에 적응하는데 쉽지 않았지만, 새로웠다.

지극히 미국적인 소재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각각의 현대사를 나름대로의 재기로 버무린 작가의 센스는 칭찬할만하다. 공을 많이 들인 소설임에 분명하다. 소설의 일부를 가지고도 하나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작가가 집착하는 가족애는 이 소설이 헐리웃 영화를 닮아있다는 점과 무관하진 않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 얘기하자면 이 소설의 또다른 재미는 후반부에 있다. 마치 결말이 다른 감독판 영화를 보는 것처럼 순식간에 소설의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읽고나면 책표지에 새겨진 카피 하나가 꽤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구나 느낄거다. 

"영원보다 아름다운 멸망의 순간, 한 사람의 우주가 또다시 시작된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

쉘 위 댄스
감독 수오 마사유키 (1996 / 일본)
출연 야쿠쇼 코지, 구사카리 다미요, 모리야마 슈이치로, 타구치 히로마사
상세보기

어쩐지 'Shall we dance'를 발음할때는 '쉘 위 단스'라고 말해야할 것 같다. 영화의 끝부분,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선생 마이가 스기야마에게 손 내밀며 말하던 설렘은 그렇게 말해야 다가온다. 춤추실래요. 뱉었을때 그 끝에서 맴도는 '서울의 달'의 음습함은 쉘 위 단스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따스한 볼룸에서 펼쳐지는 우아한 춤이랄까. 춤출래. 아름다운 우리말의 설렘이 축축해진 까닭은 춤이 아닌 그 너머를 꿈꾸고, 그걸 이용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자들 탓이다. 

이 영화는 공짜표로 구경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목동의 '킴스시네마'에서 나누어주던 초대권으로 늦은 시간에 영화를 봤다. 일상의 모습을, '일상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따스함이 화면가득 담겨있었다. 춤, 몸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지는 동선이 새겨지던 플로어가 생각나고 그 춤 주변에 이리저리 자리잡은 각각의 삶들도 기억난다.

누군가는 스기야마의 중년의 위기가 너무도 깔끔하게 잘 봉합되었다는 점. 아무런 불협화음없이 현실로 돌아왔다는데서 이 영화의 비현실성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물론 갈등이 없는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영화 정서와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라 보는 내내 아무런 긴장도 주지 못한다. 일종의 양념같은 느낌이랄까. 허나, 판타지를 정색하며 따질 순 없듯이, 이 영화도 그러하다. 마냥 기쁘고, 행복한 그 영화적 현실에 딱딱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도리가 아닐듯 싶다.

이 영화 보고 춤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스기야마와 토요코가 춤대회에서 사뿐히 무대로 뛰어가던 벅찬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목동역까지 걸어가는 몇분간, 절대 티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뛸듯이 지나올 정도로 영화의 리듬은 낮게 오래 남았었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서 단정하게 차려입고 춤을 추던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쿠사카리 타미요'라는 이름을 가진 극중 '마이'의 아름다운 동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볼룸댄스에 무지한 내게도 꽂힐만큼 고혹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니 몇년 후, 어느 퇴근길(노량진역쯤이면 되겠다), 학원 창문을 여는 마이의 모습이 보인다면...참으로 뻔한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