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유시민 (돌베개,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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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을 미루다가 후불제민주주의를 읽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책에 대해 적는건 아래에 옮긴 프롤로그 때문이다.

나는 지금 목격하는 역사의 퇴행을 나에게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인다. '나에게는 불가피한 현실'이란, 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내힘으로는 당장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의미한다. 아무리 욕하고 저주하고 한탄해도, 그 현실을 바꾸는 데는 별로 효과가 없다. 이럴 때는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욕하고 저주하고 한탄해도, 그 현실을 바꾸는 데는 별로 효과가 없다. 이럴 때는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 자신의 주관적 소망에 대해 적당히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행복학'을 강의하는 차동엽 신부가 즐겨 인용하는 말씀도 도움이 된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다. 이 역사의 퇴행 또한 지나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다음에 올 변화는 무엇일지 예측하고 준비하는 데 필요한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취하고자 하는, '원하지 않는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이다. - 후불제 민주주의 18p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는 한다. 쓰디 쓴 자조의 의미가 대부분이었다. 격분했던 2008년이 지나가고, 그 보다 더 최악의 2009년을 지나치면서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는 현실에 '무기력'할 수 밖에. 뉴스를 멀리하게 되고, 현실이 한줄 농담으로 치환되었다.

어쨌든 현 정권은 헌법이 부여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집권하지 않았나. 그 정권이 어떤 꼴을 만들던 '혁명'을 들먹이지 않는다면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물론 권력이 잘 행사되는지 감시하는 일도 있겠다. 허나, 제대로 감시해야할, 그리고 그런 의무가 있는 것들은 두 손 놓고 있고, 도리어 감추고만 있다. 스스로 분노해봐야 달라질 것 없는 현실. '무기력'은 너무도 빨리 학습되었다.

유시민이 책의 서두에 적어놓은 글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맞다. 그의 태도가 소극적이라 비판할 수 있다. 지나가기를 바라며 준비하는 것이 당장 현실에 충격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좀더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운 사람들도 있을거다.

하지만, 나에겐 '학습된 무기력'에 허우적대는, 그래서 절망까지를 떠올리게하는 상황에 괴로워하기 보다는 이 역사의 퇴행이 결국은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이후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고민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겠냐는 답하기 쉽지 않은 의문은 미뤄놓고 싶다.

지금은, 그저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만으로도 힘이 되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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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근처 성신여대 입구에는 '샌드위치 하우스'라는 작고 깔끔한 가게가 있다. 칠판으로 된 넓은 메뉴판에는 다양한 샌드위치 메뉴가 한가득 적혀있고, 탁자 없이 양편으로 길게 늘어선 긴 의자는 덩그렇다. 한편에는 여대생들이 급히 적어낸 포스트잇이 재잘대듯이 적혀있는 소박한 샌드위치 가게. 

나중에 들으니 나름 유명한 듯도 보여 깜짝 놀랐던 그 샌드위치 가게. 알게된지 3년이 넘게 있어주어 다행이다. 이 작은 가게가 걸으면 닿을 거리에 있지 않았다면 자주 가진 않았을거다. 게다가 누추한 차림새로 모자를 눌러쓰고 터벅터벅은 절대 아니었겠지. 투닥투닥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시는 여자 사장님의 친절하고 시원한 목소리가 따뜻하고, 목 깊이 삼키는 신선한 샌드위치는 작지않은 매력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토요일, 그 리듬에 지극히 충실하게도 잠결과 허기를 횡단하며 눈을뜨니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뭐 해먹기도 그저그런 타이밍. 하루종일 뒹굴거렸더니 머리마저도 띵하다. 이 느낌을 어찌 알았는지 K가 샌드위치 얘길 꺼낸다. 거부할 명분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참치 샌드위치 하나, 햄치즈멜트 샌드위치 하나를 시키고,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을 시켰다. 몇주 지난 영화 주간지를 앞에 펴놓고 한입 한입 베어무는 샌드위치는 지루한 휴일을 여유와 따뜻함으로 바꿔놓는다. 가벼운 샌드위치의 매력. 샌드위치 만큼이나 오늘은 illy커피가 제일이었다. 커팅한 햄치즈멜트 샌드위치 한 입과 바꿀만큼 따뜻하고 부드러운 커피. '하...'하는 낮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Nina Simone의 노래를 듣는다. 아까 샌드위치 하우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면 너무 좋아 덩실 춤이라도 췄을 것이다. 소박하디 소박한 토요일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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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급하게 나를 찾는다. 
귀에 물려준 이어폰에서는 차분한 노래 한곡이 흘렀다.
생각의 여름의 '골목바람'

누워 여러번 들어보다가, 멈출수 없어 몇번이고 들었다.
'추스를 틈도 없이 또다시 바람, 세차게 바람'
반복된 그 부분이 귓가를 떠나지 않고 웅웅거린다.

바람은 언제나
추스를 틈도 없이, 추스를 틈도 주지않고 불고 또 분다.
야속하거나 혹은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노래를 들으며 추운 겨울바람이 아니라 결이 깨끗한 봄바람을 생각했다.
곧 봄이 올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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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분투 설치 (20100126)

from 일기창고 2010. 1. 26. 10:44
집안에 거의 방치상태인, 더구나 아이팟 터치를 영접한 이후로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잊어버리는 구형 노트북에 ubuntu를 깔았다.  (K가 친구들과 저녁약속만 없었어도 이러지는 않았을거다) 유행병처럼 가끔은 리눅스의 손맛이 그리워질때가 있어서 ubuntu 홈페이지를 뒤졌는데, 넷북리믹스라는 배포판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넷북에 맞게 (저사양 노트북에도 맞게) 튜닝된 버전이겠거니 싶어서 냉큼 USB에 넣어서 설치.

랜선을 물려놓으니 설치과정에서 apt를 통해서 업데이트를 받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설치시간은 길어졌다. 셀러론급 2003년 노트북이라 별 기대하지 않고 깔았는데 의외로 쓸만하다. 물론 ubuntu가 리눅스 배포판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가볍진 않은 탓에 쾌적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지만, XP에 비해서 부팅 속도가 빠르고, 웹 창을 띄울때까지의 체감 속도도 만족스러웠다.

월요일이라 날밤을 세울수는 없어 새벽2시까지 가볍게 만지작 거렸는데 윈도보다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 ADSL을 쓰던 시절에는 랜카드 잡고 네트웍 잡는데만 몇날을 날려먹기도 했었는데, 게다가 한글입력까지 맞추고 그럭저럭 쓰려면 웹 문서를 이잡듯이 뒤져야 하던 시절이었다. 그에 비하면 ubuntu는 (예전 7이나 8버전때에 비해서도) 최적화가 잘 되어있는 정말 쓸만한 버전이 되었다. 이 정도면 윈도와 멀티부팅으로 리눅스를 사용하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좀더 생각해보면 이런 쾌적함은 배포판의 영민함에 있기도 하지만, PC의 사용환경이 웹 중심으로 이동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강력한 웹어플리케이션이 널려있으니 굳이 설치파일을 로컬에 다운받아 인스톨할 이유가 사라졌다. 집 PC에 윈도 재설치를 해도 오피스를 깔아본게 언제였던가. 설치하는 어플이라고 해봐야, AIMP나 아이튠하고 몇가지 트윅어플 뿐인듯 하다.

그러니 ubuntu를 깔건, 윈도를 깔건 파폭을 여는 순간, OS는 잊게되고, 기억할 필요도 없다. 웹에 연결되고 웹자원을 더많이 사용하게되면 PC는 결국 '단말'의 형태가 될 것이다. 웹 환경이 강력해지면서 MS가 위태위태한 이유도 비슷하다. 가까이는 크롬 OS에서 그런 변화의 가능성을 본다. 모바일 컴퓨팅의 확산도 그런 큰 흐름안에 있다. 바꿔 말하면 맥을 사용하더라도 별다른 부적응이 없을 거란 생각이다. 사파리만 있다면.

ubuntu를 깔고 추가적으로 설치한 리눅스 어플은 BMP와 smplayer 두개 뿐이다. 게임을 전혀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일외에는 로컬 프로그램이 필요치 않았다. NTFS마운트가 쉽게 되니 그저 열기만 하면 되더라. 이러니 쳐박아둔 구형 노트북도 다시 손안에 들어왔다. 일단, 구형 노트북 먼지를 깨끗이 털고, 리눅스로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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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산울림.

from 음악창고 2010. 1. 22. 14:31
산울림의 가사에 처음 '사랑'이 등장한건 8집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부터이다. 데뷔부터 일곱장의 앨범을 낼때까지 그 많은 노래를 펼쳐놓으면서도 김창완은 '사랑'이라 끝내 말하지 않았다. 사랑을 '사랑'이라는 언어로 개념화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일까.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는 그 순간 더이상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믿었던 걸까. 아니면 난무하는 (사랑이라는 언어없이는 노래가 안될 것같은) 사랑타령을 피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랑'한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은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말 이전에, 그 말을 내뱉기 전에 이미 느껴지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손쉽게 '사랑'이라는 말을 쓴다. 사랑을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이 사랑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사랑은 '사랑'이라는 언어 아니면 안될 것처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랑'이라는 말로 확인하려하고 표현하려 한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로 인해 빛이 바래고 그 언어는 더이상 진정성을 담지 못하는 듯 하다. 너무 쉽게 내뱉는 '사랑'이라는 말 때문에 아무도 '사랑'이라는 말의 떨림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산울림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에는 '둘이서'라는 소품같은 곡이 수록되어있다. 2분 30초짜리 짧은 노래는 흔한 '사랑'을 한번도 속삭이지 않지만, 그 둘 사이의 정경만으로도 사랑을 흠뻑 느낄 수 있다. 그 둘 사이의 밀도, 숨 막힐듯한 떨림. 찬찬히 눈을 감고 그려보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시계 소릴 멈추고 커튼을 내려요
화병 속엔 밤을 넣고 새장엔 봄날을
온갖것 모두다 방안에 가득히
그리고 둘이서 이렇게 둘이서
부드러운 당신 손이 어깨에 따뜻할 때
옛 얘기처럼 쌓여진 뽀얀 먼지 위로
은은히 퍼지는 기타소리 들리면
귓가엔 가느란 당신 숨소리

역설적으로 들리겠으나 '사랑'이라는 언어를 의도적으로 피했기에 산울림은 주옥같은 사랑노래를 남겼다. 명확하지 않으나 어떤 의도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고민들. 산울림의 바래지 않은 생명력과 펄펄뛰는 표현은 사랑을 '사랑'안에 가두지 않았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말에 쉽게 기대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건 아닐까.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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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공간 (20100122)

from 일기창고 2010. 1. 22. 13:17


16층 빌딩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분주히 전화를 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볼때면 마음 한구석 갑갑해질 때가 있다. 익숙해졌다 생각해도 좀처럼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풍경.

가끔 14층을 간다. 텅비어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바글대는 서울 한복판, 바글대는 고층빌딩. 피곤하고 지겨운 풍경. 14층 비어있는 공간을 보면 그나마 맘이 편해진다. 처음 봤을때 긴 시간 내륙의 기차를 타고 내려서 바라보는 동해바다의 시원함을 아주 잠깐 느꼈다.

오전 햇빛이 아름답다. 영화 빅이었나.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주인공이 텅빈 아파트에서 천진하게 뛰어노는 장면이 생각난다.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때에서 보였던 통유리창의 뉴욕 아파트도 생각난다. 한번도 만져본적 없는 그 고즈넉함. 언제쯤 와줄까. 

눈 앞에 쫙 갈라지듯 텅빈 공간, 처음엔 압도당했지만, 이내 친근해졌다. 열려있고 비어있는 탓이다. 딱 뒹굴기 좋은 곳이다. 햇빛을 맞기에도 좋고. 바닥에 누워 쇄도하는 햇빛을 맞고 싶다. 돌아서는데 문득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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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음반리뷰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박준흠 (선,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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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툼한 책을 책으로만 읽는다면 하루면 읽을 수 있을거다. 단, 앨범에 대한 글을 읽으며 듣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건 쉬운 일은 아니다. 잘 참다가도 몇몇 앨범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덕분에 참 오랜만에 듀스의 앨범을 찾아들으며 그루브에 몸 맡기며 팔다리를 허공에 허우적대기도 했다. (그야말로 허우적이다.)

100편이 넘는 앨범 리뷰글 중에 김민기 1집 앨범의 리뷰가 인상적이었다.

1971년에 나온 김민기의 유일한 정규 앨범은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이른바 '전설'이라 명칭에 값할 많지 않은 음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 전설은, 이 음반이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전량 압수 수거되고 이후 음반가의 초희귀본으로 고가에 거래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민기 본인이 오래 동안 정치적 박해와 금지의 사슬에 묶인 채 금기의 시절을 살아야 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나 이 음반의 가치는 그런 데에만 있지 않다. 이 음반은 당시까지 서구 모던 포크의 번안 수준에 머물렀던 한국의 이른바 통기타 가요가 한국 젊은이들의 정신과 감성을 표현하는 음악 양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음반이고, 스스로 작사 작곡하고 노래부르는 싱어송라이터 시대의 도래를 알린 음반이며, 대중가요가 그저 그런 사랑과 이별, 눈물뿐 아니라 깊은 철학적 사색과 시대적 고민을 담는 예술적 산물일 수 있음을 보여준 음반이기도 한 까닭이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음반리뷰 p56, 김창남/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대상에 무한한 애정과 경외심이 느껴진다. 김창남은 김민기 1집이 우리 가요가 청년의 정신과 감성을 표현하는 양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철학적 사색과 시대적 고민을 담는 산물임을 증명한 음반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듣기 좋은 노래를 넘어서서 '명반'의 반열에 오르려면 음악이라는 그릇 안에 시대의 정신과 감성을 표현해야하고, 응당 해야할 깊은 사색과 고민을 담아야 한다.

모든 음악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이 존재할 뿐이라는 말도 맞다. 그러니 음악을 가리는 기준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도 매 시대를 감동시키는 음악은 존재한다. 음악이 담고 있는 시대정신이 수용자에게 깊이 각인된 '명반'. 미학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명반이 짠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치있는 명반은 그걸 들으며 감동했던 이들이 함께 만드는 관계의 산물이다.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말 또한 사실 발언하는 그 시대의 재평가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이런 100대 명반 리뷰를 읽으며, 또 그 앨범들을 찾아 들으며 현재 한국 대중음악 메인스트림을 아쉬워할 수 밖에 없다. 냉소적인 시선 또한 거둘 수가 없다. 생명력 없는, 필요를 위한 음악들은 그저 듣기 좋은 음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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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출근길 눈이 내린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다. '폭설'은 이런 것이다라고 증명하듯이 눈이 쏟아졌다. 그래도 갈 길을 가야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종종 걸음을 쳤다. 눈은 계속 쏟아지지만, 눈을 '치워야'하는 이들은 묵묵히 제설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치워도 쌓이는 눈 앞에서 당장은 무의미해 보인다.


오늘 아침 창밖 풍경.



눈앞의 풍경이 생경하다. 눈이 덮어버린 길. 서울 도심이 아니라 몇미터씩 눈이 쌓이는 일본의 설국 풍경. 무사히 출근을 마친자의 헛소리겠지만, 이런 눈발 앞에서 출퇴근 걱정이 아니라 눈 자체를 즐길 수 있다면 좋을텐데 싶다.

새해 벽두부터 쌓이는 눈. 그냥 계절이 그렇고, 자연이 뜻하여 내리는 눈이겠지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런 눈은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던 기형도의 눈은 아닌것 같다. 오히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의 눈이 더 맞겠다 싶다. 그래서 다시 읽어본다. 엄혹한 시절의 최승호에겐 굵은 눈발은 백색의 계엄령이었다. 눈보라의 군단이 엄습하는 풍경. 기어코 단절시키고야 말겠다는 해일같은 눈.

이 시를 여러번 읽어봤지만 들이치듯 쏟아지는 눈을 보니 더 가깝게 읽힌다. 좋은 시다. 최승호가 이 시를 쓰던 날도 오늘처럼 눈이 왔겠지. 엄혹한 80년대가 아닌 2010년 벽두에 읽는 이 시. 시절이 하수상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최승호 - 대설주의보(大雪注意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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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싱글중에 하나. 날 사랑하는게 아니고. 오지은 2집. 올해 참 많이도 들었다. 그새 2집의 매끄러움이 익숙해졌는지 그렇게 좋아했던 1집은 오히려 손이 잘 닿지 않았다. 앨범이 다 좋았다. 그 중에서 이 노래는 처음 들었을때부터 귀에 남았다. 오지은의 가사는 김창기가 썼던 '잊혀지는 것'의 서늘함과 닮아있다. 참으로 날카로워 참으로 씁쓸해지는 사랑의 한 모습이랄까. 차이는 있겠지. 오지은은 사랑하는 사람앞에서 토로하는 느낌에 가깝다면, 김창기는 사랑이 끝난후 쓸쓸하게 돌아보며 토로하는 정서에 가깝지 않나.

김창기는 "사랑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사랑이라 말하며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는" 그 사랑을 노래로 만들었고, 오지은은 "날 사랑하는게 아니고 날 사랑하고 있다는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건 아닌지, 날 바라보는게 아니고 날 바라보고 있다는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건 아닌지" 라고 사랑을 다시 묻고 있다. 둘다 착찹해지는건 마찬가지이지만, 김창기는 되돌릴 수 없는 단절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더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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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2009년 (20091231)

from 일기창고 2009. 12. 31. 16:27

5월23일. 사진의 출처를 알고싶다.


2009년은 잊지 말아야할 기억 하나를 던져주었다. 절대 잊지 않고 곱씹어야할 고통스런 기억. 내리쬐는 태양만큼이나 강렬하던 분노. 2009년 마지막 날 다시 새긴다. 그 분노와 울분이 잊혀지기를 바라는 자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2009년을 통과하는 나에게 그것은 너무도 명확한 희망이 되어버렸다.

2010년을 끝내 살아내지 못한 2009년의 노무현. 2010년을 향해가는 나에겐 기억이 아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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