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계절에 (20090406)

from 일기창고 2009. 4. 6. 19:59


1. 날이 풀릴 조짐이 보인다. 먼지 쌓여가는 사진기를 만지작 거릴때가 왔다. 메모리도 비워두고, 충전도 해야겠다. 아침 출근전 창문을 열어 햇빛을 확인하고 펜탁스 필름카메라의 남은 컷수를 확인해봤다. 10컷정도 남은것 같다. 지난 겨울의 흔적임이 분명한 사진들. 묵혀두었다가 여름이 올 무렵에 현상해야겠다. 셔터 누르는 소리가 경쾌해지는 이즈음의 공기. 걸어도 좋을 날들이 된 것 같다. 잘 나온 것들이 있으면 이곳에도 올려야지. 근데 대부분은 '사장'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전 그 많은 사진들 처럼. 필름사진을 찍으면서 셔터를 누르는 그 결정적 순간이 좋았으니 서운하진 않다.

2. 이곳 저곳 봄을 만끽하는 기운들이 느껴진다. 의도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주말에 아이팟 리스트를 정리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마루바닥까지 드리워진 햇살에 충동적이 되었다. 고민끝에 장필순, 어떤날, 올드피쉬, 흐른을 넣어두었고, 디어클라우드, 못, 백현진, 이장혁을 지웠다. 지난 겨울, 없으면 견딜 수 없었을 음악들이지만 당분간 밝고 차분한 것들을 찾아 듣기로 했다. 춥던 불면의 밤들. "고마웠어 너희들이 있어서". 오래 머물러 있었으니 아이팟 어디 한구석에 흔적이라도 있겠지. 다시 채워넣으면 고스란히 그 자리로 찾아갈 거라 믿는다. 당분간 음이 나에게 진동을 주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가는 것들만 들을거다.

3.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봤다. 너무 먹먹해 이 영화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누구나 '파리'를 지니며 살아간다. 나에겐 어떤 것일까. 살면서 대부분은 그런 것 더이상 없다고 묻어놓고 산다. 꺼내기에는 너무 치명적이므로. 그들은 너무 쉽게 그걸 열어버렸고, 에이프릴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두툼해 보이는 일상의 벽은 얼마나 위태한지. 감추고 잘라버리고 줄타기처럼 살아가지만 무너지려면 한순간이다.

4. 계절을 느끼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봤다. 햇살과 바람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그럴려면 좀 걸어야 할 것 같다. 내딛는 발걸음. 땅을 밟으면 느껴지는 기운같은 것. 그립다. 강원도 정선을 반나절 씩이나 걷던 시간도 있었는데. 항상 아스팔트 바닥, 허공에 떠있는 빌딩 바닥만 밟으며 사는 발에게 미안하다. 네가 밟아야 할 곳이 그것 만은 아닌데 말야. 낣은 구두도 벗어던지고 싶다. 새 운동화를 사서 멀지 않은 산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5. 김은영이란 가수의 별, 바람, 그리움을 내내 들었다. 듣자마자 류금신의 바람꽃이 떠올랐다. 결은 다르겠지만 여튼 그랬다. 학교앞 서점에서 산 꽃다지 앨범이 기억난다. 어떤 의무감에 찾긴 했지만, 그 안에 박혀있던 '민들레처럼', '전화카드 한 장'의 서정이 무척이나 좋았다. 두 학번 위였던 노래패 누나가 불러주었던 '전화카드 한 장'. 취기에 헤헤거리던 모두를 숙연하게 고개 떨구게 했던 목소리. 장구소리가 날 꽉 채우던 시절. 그때도 봄이었다. 

6. 한계절이 가고 또다른 계절이 오고 있다는 것. 변화쯤이야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서른을 넘긴 나이에 이런 호들갑이 부끄럽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적당히 둔감해지는 것이 나이드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근데, 그렇게 뒷짐지고 너스레 떨기엔 이 계절이 너무 눈물겹다. 그냥 그렇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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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휴가. 쉼. 여백. 배낭여행. 게으름. 긴한숨. 늦잠. 포크음악. 침묵. 낡은구두. 제주도. 산티아고. 네루다. 이문재. 이륙. 잘잘못. 하품. one world ticket. 금요일 밤. 와인. 소주한잔. 5불 생활자. 스페인어. 빈노트. 농담. 포복절도. 담배연기. 빈대떡. 떠남. 재회. 대학원. 자서전. 필름스캔. 백열등. five hundred m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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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민방위 훈련이었다. 나이가 들어, 예비군에서도 처절하게 외면당한 '드디어' 민방위 세대가 된거다. 혹자는 남자로서의 정점은 이제 '바이바이' 한거라 자조 하기도 하지만, 내가 막상 밟은 민방위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일 마무리를 하고, 휘리릭 공가를 냈다. 휴가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직장인이 되고나서 남들 다 일하는데 쉴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왜 그땐 몰랐을까라며 땅을 치고 후회많이 했다.

민방위 장소는 집근처 문화회관. 가기전부터 시간 죽일 방법을 궁리했다. 잠도 안오는 상황이면 곤란하다. 아이팟에 영화를 넣고, RSS로 기사를 긁어넣었다. GRIS라는 멋진 툴로 블로그도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대강당이었는데, 의자는 무척이나 편해서 수면을 방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의는 고맙게도 화재와 가스에 대한 안전교육이었다. 전에는 이념교육을 하기도 했다는데, 그건 없어진것 같다. 강의 들어가기 전에 던지는 시시껄렁한 농담부터 철저히 외면했다. 짜고치는 고스톱이랄까.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고, 아무도 듣지 않았고, 말하는 강사는 듣는 사람을 보지 않았다.

출석도장을 받으려 줄을 서다가 좀 겁이 났다. 좀 서글프기도 하고. 내 또래임이 분명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풍경. 왜인지 모르지만 밥줄을 설때나, 예비군 훈련을 받거나, 지하철에서 일사불란하게 퇴근하는 내 또래 직장인들을 보면 좀 징그럽고 겁이 난다. 뭐랄까.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같은 생각들을 하며, 같은 장소에 집결해서 시간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나도 다르지 않다는게 서글프다. 다르고 싶지만 다를 수 없는 그 존재들. 살아간다는 것. 나란 존재는 그저 수많은 모래알에 박힌 알갱이 하나 일 뿐이라는 때아닌 존재론적 고민이 고개를 든다.

그러다가. 아이팟을 켜고 기사를 훑어봤다. 업데이트된 씨네21이 눈에 들어온다. 최보은의 칼럼에 눈이 멎었다. 제목도 도발적인 '멀쩡한 직장에 다니는 당신도 멀쩡한가'. 안그래도 생업에 종사하시다 잠깐 들르신게 역력한, 얼굴 전체에 그늘이 드리워진 사람들 무리를 보며 심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제목은 뭔가. 읽으면서 이 상황을 생각하자니 깝깝한거다. 


맞는 말인데, 어딘지 불편하다. 당연한 말인데도, 불편하다. 누가 모르나 체질과 적성에 맞지 않다는 걸. 그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번씩 되새김질 한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가 비운 자리가 쉽게 매워지는 것을 보며, 결국 내가 비운 자리도 몇초도 안되어 메워질 거라는 것. 누가 모르나 소모품처럼 버티며 직장 다닌다는 것. 글 쓰는 최보은씨는 칼럼 쓰며 밥먹을 수 있고, 글발 떨어지면 깨끗이 주변정리하고 '인생, 뭐 있다'며 돌아설 수 있겠지. (이런 반응, 너무 유치하다.) 부아가 오른다. 다 맞다. 맞는 말을 정색하며 꼬집어 지적해주니 싫더라. 어쩔 수 없음에 기대어 살고있는 건 아닐까 싶은 괴로움. 뭐가 무서워 뛰쳐나가지 못하는 걸까라는 서글픔. 내가 나에게 참 미안한 마음. 왜 모르겠나. 긁어주니 아팠다.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과 어긋나고 있다는 걸 느낄때, 남아있는 이유를 찾아 허덕이곤 했었다. 의미를 못 찾으면 못 견딜것 같은 절박함. 해답이 너무 어려워, 차라리 질문을 포기하기도 여러번이었다. 움직이기 보다 움직여지는 일상이란 참 무섭지 않은가. 시들어가는 걸 모른채 시들어 가는것 만큼 비참한 게 어딨을까. 일상의 가치를 부르짖어도 무게는 덜어내기 쉽지않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라는 무서운 질문. 아...항상 회피하고, 때론 주저했던것 같다.

민방위 출석표를 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을버스를 타려 한참동안 줄을 섰다. 옷깃을 여며도 참 많이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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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20090311)

from 일기창고 2009. 3. 11. 17:36

대학교때 여자후배가 남자선배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오빠가 여성이 손윗남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호칭이 아니라 그보다는 알콩달콩한 '연인관계 어디쯤에서나 부르는'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여자후배들은 '오빠'라는 호칭대신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학형'의 줄임말이라고들 했다) 선배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순간 손윗 남자와 손아랫 여자라는 관계망은 무화되는 효과가 있었을거다. 처음에는 솔직히 징그럽고 불편했으나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도,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도 타인이 들었을때의 '오해'탓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서 적어도 대학내 선후배관계에서 오빠라는 호칭은 공식적으로 쓰기 힘들었다. 물론, 개인적인 대화에서나, 연인을 지칭할때는 여전히 사용되었겠지만, 예를 들어 동아리모임에서 A여자후배가 B에게 C남자선배를 지칭하면서 "C오빠의 의견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이 점은 '누나'라는 말을 사용할때도 마찬가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써서는 안될 호칭이라고 할까. 이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인식하지 않을까 싶다. 써도 될 상황과 써서는 안될 상황. 그런 점에서 '형'이라는 호칭은 대학내에서 어느정도 '씨' 혹은 '선배'와 같은 의미맥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여기까지는 '오빠' 호칭을 비판하는 의견에 대체로 동조할 수 있다. 예전에 경향신문에 실렸던 넘쳐나는 '오빠' 라는 글에서 지적한 한혜진씨나 이소연씨의 '오빠'에 대한 지적도 그 점에서 동의할 수 있다. 그것이 공적인 자리에서 타인을 지칭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점에서다. 전에 갓 입사한 여자후배가 나에게 "C오빠가 이렇게 알려줬습니다"라고 했을때 지적했던 이유와도 같다. 물론 의도한게 아니라 불러왔던 버릇이 나도 모르게 나왔던 상황이었을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나'와 '오빠'의 차별적 사용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선배'와 '오빠'와의 차별적 사용과 같은 범위에 놓일 수 없다는 말이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흔히 '오빠의 정치학'이라고도 말하는, 여성이 남성에게 '오빠...'라고 했을때, 혹은 남성이 여성에게 '오빠가'라고 했을때 느껴지는 의미맥락을 단칼에 외면할 수는 없다. (즉, 의존적이라거나, 일종의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 하지만, 그것을 모든 관계망에서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지적이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이라 비판받을 수도 있다. 소녀시대가 뭇 남성들을 '오빠'라고 불렀을때 뭇 남성들이 느끼는 '판타지'를 개인적인 영역까지 확장할 수 없는것 아닌가.

'오빠'라는 호칭이 불편하다면 부르지 않으면 되고, '오빠가...'라는 말을 들을때 내포한 의미관계가 불편하다면 '쓰지 말아주세요'라고 할 수는 있겠다. (물론 정색하며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오빠'라는 호칭에는 가부장주의, 의존성, 성적 불평등의 의미가 내포 되어있고, 다른 호칭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으므로 써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은 불편하다. 더구나 '오빠'라는 호칭은 연인사이의 언어이고, 그외의 대상에게 사용하는 것은 그 의미를 낭만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는 말에는 '엇! 이거는 좀...'하게 된다.


해당 이미지는 본문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을까 :)



남성의 입장에서 봤을때도 '오빠'라는 호칭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건 오빠라는 호칭이 놓이는 관계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어떤때는 '얘가 왜 나를 이렇게 부를까' 싶을 때도 있다. 내가 그를 '오빠'라고 부를때, 그녀가 나를 '오빠'로 불러줄 때, 그 호칭은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멀때, 뜬금없이 오빠라는 호칭이 놓인다면 불편하지 않을까. 또한 '오빠'라는 말을 던질때, 저 오빠가 무언가 해줄것을 '기대하며' 부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오빠'라 불리었을때 그녀에게 뭐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된다는 것도 좀 오버스럽다.

딴소리일 수 있겠지만, 난 '형'이라는 호칭에 인색한 편이다. 그렇게 불러도 무방한 선배들이 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다. 그렇게 부르는게 자연스럽고, 듣는 사람도 친밀함에 좋아할지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이라는 말을 쓸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오빠' 상황을 '누나'상황으로 대치해도 나에겐 그다지 다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호칭도 사회적인 구조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며 남녀사이의 꼬기꼬기한 '젠더 불평등'을 고려한다면 '누나와 오빠가 같은 맥락이라는게 말이 돼?'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마무리가 안된다. 결론은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자는 말이되는건가.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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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잤다. 오전 내내 고스란히 잠에 취해있었다. 완연한 햇살의 느낌. 눈을 뜨고 30분 정도 나른함을 즐겼다. 토요일. 게으를 권리가 있는 시간. 누워서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왼손을 휘휘 저어 머리맡에 있는 아이팟을 찾았다. 아직은 눈이 부셔 가늘게 실눈을 뜨고 아이팟 화면을 바라본다. 두세번 앨범들을 훑어보다 빛과 소금의 1집에서 손가락이 멈춘다. 첫곡은 연주곡 '아침'. 쫀득한 베이스. 경쾌한 키보드. 머리가 맑아진다. 오늘 노래 참 잘 골랐다. 불멸의 히트곡 '샴푸의 요정'. 조건반사처럼 홍학표와 채시라 얼굴이 떠오른다. 이 노래 들을때는 항상 그랬다. 1990년에 발표된 앨범. 또 놀란다. 연주실력이 장난이 아니다.

갑자기 느껴지는 허기. 느릿느릿 걸어서 렌지에 올려져있는 국을 데우고, 남은 볶은밥에 참기름을 두방울 떨어뜨린다. 고소하다. 창문 하나만 열어서 밖을 본다. 아파트단지, 다니는 사람이 없어 썰렁하지만 햇살은 따뜻해보인다. 토요일 오후같은 햇살이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런게 있다. 첫술뜨면서 티비를 튼다. '아내의 유혹' 재방송이 한다. 한 3분보다가, 매번 그렇듯이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채널을 돌린다. 조금 배가 부를때까지 먹고, 가지런히 싱크대에 그릇을 담아넣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담고, 달달한 커피가 먹고 싶어 맥심티백을 뜯는다. 설탕조절해서 먹으라는 녹색부분은 가볍게 무시하고 머그컵에 가루들을 왕창 털어놓는다.

따뜻한 머그잔을 두손으로 쥐어본다. 발끝까지 뜨끈한 느낌. 밤새 틀어놓은 보일러 탓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내가 가장 편안해하는 자세.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오래 유지해야하니까. 커피는 왼쪽에 아이팟은 그 아래. 노트북을 가슴팍까지 당겨서 전원을 켠다. 아...'그대 떠난뒤'가 나온다. 이 노래 참 좋아했다.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만큼. 옛날 생각이 푸드득 날아온다. '언젠가 그대와 나는 비를 맞으며 이 길을 걸었지. 우리 서로 의지하면서. 한없이 이 길을 걸었지' 이별 뒤에 추억을 곱씹는 일. 이리도 찌질할 수가. 그러나 엄청난 호소력의 폭풍. 사랑하고 이별하는게 다 그렇지 뭐.

배도 부르고, 입 안의 커피도 적당히 달다. 한모금 들이키고 '하~'하면서 오버도 한다. 세상 가장 편안한 자세. 나른함.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 노트북 키보드를 튕기며 시간에 감사한다. 내참, 안분지족이 따로없다. 1집의 마지막 연주곡 '그녀를 위해'가 나온다. 모든게 그리 좋을 것도 없지만,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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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망자에게 관대한 편이긴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물론 조선일보 1면을 장식하기도 했던 마지막 몇년은 실망스러웠지만,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진 않다.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서있던 지점은 언제나 한 곳이었고, 변한건 사회일지도 모르니. 그 분이 쌓아온 존경을 하이에나처럼 이용해 장사해먹은 언론(놈)들이 문제겠지.

추모행렬이 24만을 넘어섰다는 호들갑스런 뉴스보도. 안했으면 하지만 당분간은 계속 보게될듯 하다. 주욱 훑어주는 카메라. 명동성당에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떠난자에 대한 아쉬움과 간절함이 보인다. 기댈언덕이 하나 또 무너져버렸다는 상실감. 그게 보였다.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추모하는 죽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전두환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이후를 생각했다면 과연 편하게 뒷짐지고 있을 수 있었을까. 그 역사의 무게를 아직도 느끼지 못하고 철없이 숨쉬며 살아가는 인간. 딱하다. 명동성당 앞에서 인터뷰한 순복음교회 조모씨도 마찬가지.

경향신문 만평이 눈에 들어온다. 그 엄혹한 시절, 이 한마디로 힘을 주었던 그의 가는 길이 편안하길 빈다.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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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추돌 (20090129)

from 일기창고 2009. 1. 29. 10:31

설에 집에가는 길에 사고가 났다. 본가가 김포라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자유로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에 3차선으로 진입을 했는데, 그만 앞차가 추돌사고를 냈고, 미처 안전거리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내 차도 그 앞차의 뒷범퍼를 치고 말았다. 정확히는 3중추돌사고였고, 나는 가장 후미였다. 차를 몬지 5년이 넘었는데,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본격' 사고는 처음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대개 이런 경우 책임소재의 우위에 서기 위해 다들 '목잡고 쓰러지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다들 보험에 가입되어있어서인지 '저질스런' 행동없이 일은 마무리 되었다.

다친사람이 없이 차만 파손된 사고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들 그만하길 다행이니 액땜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으나 와닿진 않았다.) 3중추돌에서 앞차가 먼저 제일 앞차를 들이받았고, 그 이후에 내가 앞차를 받았기 때문에 책임소재는 명확했다. 내가 앞차의 뒷범퍼에 대한 대물책임 및 앞차 운전자의 대인책임의 50%를 진다고 한다. 보험처리를 할 것이라 당장의 금전지출은 없지만 차후에 보험료 할증의 부담은 지게될 것 같다. 

9만원 압류를 해제하고 지인에게 획득한 96년식 크레도스는 본네트 절반이 구겨지고 라디에이터도 파손되었다. 대강의 견적만 100만원이 훌쩍 넘을 것으로 보여 바로 '폐차' 판정을 내렸다. 3년간 굳은일 도맡아했던 그 녀석의 최후를 지켜보자니 마음이 조금 아팠다. 파손된 처참한 모습을 볼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차를 견인하고 차 안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면서 몇몇 추억의 부스러기들이 눈에 띄어 그랬으리라. 차안에 굴러다니던 찍지 않은 필름 두통을 발견하고는 많지 않은 그 녀석과의 여행의 기억때문에 맘이 좀 짠했다. 내 부주의 탓이란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다.

사고라는게 다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앞차가 너무 급작스레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부터 앞차 뒷범퍼에 추돌하기까지 그 몇초가 꽤 느린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고맙게도 옆자리 효진이가 그나마 무던한 성격이라 그 흔한 '비명'도 없는 무미건조한 장면이었는데 나에겐 앞차의 빨간색 백라이트의 쇄도가 꽤 공격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 찰나의 장면이 프레임으로 분절되어 한 컷씩 꽤 긴 러닝타임이 되어버린 느낌. 그 장면을 떠올리며 더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원인과 과정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거다. 목숨이라는 것이 이런식으로 허망하게 가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죽기전 살아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 (그걸 증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믿기힘들었던) 그 말이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사고를 마무리 하면서 당분간은 차없이 지내볼 생각이다. 불편함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힘들지 않을것 같다. 내 눈에 맺힌 빨간색 백라이트의 쇄도. 좀 잦아들면, 다시 차를 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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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모론 (20090109)

from 일기창고 2009. 1. 9. 09:57

그냥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럽고. 분노한다.


화폐전쟁을 읽고 있다. 오늘 아침 출근버스에서 책을 펴고 읽는데, 주요 내용은 중동과 석유문제였다. 요약하면 금본위제가 폐지됨에 따라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석유가격을 폭등시켰다는 얘기. 시장에서 석유결제는 달러로만 이뤄지기 때문에 석유가격 폭등은 달러수요를 늘리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달러가치 상승을 이룰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조작으로 (누군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그들은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금은 유한하기 때문에 금에 연동되는 금본위제로는 화폐 유동성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수 없어 '그들'은 이를 폐기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자연히 금 가치 대비 달러가치가 폭락하게 되어 이를 막는 방도로 석유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달러의 석유본위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동위기는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반복된다는 얘기도 이어졌다. 70년대 중동전쟁, 그리고 80년대 아프간위기, 90년대 걸프전쟁. 2000년대 이라크전쟁. 이른바 '오일달러'를 흡수하기 위해 행해진 미국의 더러운 중동작전들이다.

여기까지 읽으며 무척이나 답답해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0이면 99.99는 반대할 가자지구 폭격을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 로켓공격이 시작됐다고 외신을 통해 들었을때 처음 든 생각은 '또 뭐야, 갑자기'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뜬금없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시점에 시작된 가자지구 폭격. 중동이 세계의 화약고라고는 하지만, 전면전쟁을 선포할 만큼 이스라엘에 전쟁명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재적인 원인도 있겠지만...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궁금하다. 이 책의 저자가 작금의 이스라엘 '악랄함'에 대해 쓴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공격이 있기전 금융위기와 그로인한 경기위축으로 석유가격은 폭락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작년 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하던, 그래서 골드만삭스는 200달러를 넘을거라고 예측하던(아마 그 즈음 상품투자로 돈 많이 벌었을거다. 나쁜 놈들) 초강세 석유가격은 불과 몇개월만에 30달러까지 내려앉았다. 이스라엘의 폭격은 정확히 그 무렵 시작되었다. 그후 유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보리 의장성명채택은 '당연히'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중동 정세불안으로 인해 석유가격은 다시 오름세로 돌아섰다. 그전과 같은 폭등세는 아니지만, 40달러를 넘어섰고, 오펙은 추가적인 감산을 실행하겠다고 결정했다.

뭐, 그렇다는 거다. 다 우연이고, 헛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무섭고 서늘하다. 세계를 독점하고 있는 '그들'의 지속가능한 이익을 위해 언제나 절대다수는 무고한 피를 흘리고 있고, 언제나 피땀흘려 모은 재산을 약탈 당하고 있는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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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끝자락 (20081231)

from 일기창고 2008. 12. 31. 15:32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한해의 끝자락을 그냥 쉬이 넘겨버리기는 쉽지않다. 2008년을 돌이켜보고 무슨일이 있었고, 어떻게 살았나를 생각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리라. 부산스런 사무실 풍경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침 출근길 졸다가 눈을 들어 보니 보신각 앞에는 무대가 마련되어있었다. 각 방송국의 차량들도 떼지어 늘어서 있었다. 쌀쌀한 날씨, 그리 기쁠일 없는 날들 탓인지 그 무대가 더 어색해보였다. 몇시간 후면 그 무대위를 장식할 억지웃음의 모습들이 생각나 씁쓸했다.

한해를 접으면서 몇가지 돌아본다. 그나마 좋았던 일 몇가지. 운동을 시작한지 딱 1년이 되었다. 한해동안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꾸준한 운동이 될거다. 온갖 귀차니즘과 업무압박을 이겨내고 단조롭기 그지 없는 트레드밀을 뛰고있는 내가 사실 대견하다. 연초보다 5kg정도 감량을 한것 같다. 일부러 감량한건 아닌데, 운동을 시작하면서 저녁식사를 줄이다보니 자연히 몸무게가 가벼워졌다. 몸이 튼튼해진걸 느낀다.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블로그. 올해 이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기하급수적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어울릴만큼. 글도 꾸준하게 적었고, 이웃들의 블로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남긴것 같다. 그들과 나눈 이야기가 힘이 되었다. 글의 치유 효과를 믿는다. 적는 것, 읽는 것이 하루하루를 사는데 힘이 되었다. 이곳 저곳 사이트나 카페를 돌아다니다, 이제는 RSS리더를 붙들고 짬나는 시간에 읽어내고 있다. 대부분의 정보, 대부분의 이야기를 그곳을 통해 얻는다. 그런 네트웍이 정보를 얻고, 삶을 공유하는 새롭고 중요한 채널이 될 것같다. 그건 2009년에도 변함이 없을테고. 작은 가능성을 본다.

음악을 많이 들었다. 찾아들었다는 말이 어울리는 게 몇년만일까. 공연을 보고 싶다, 음반을 사고 싶다는 간절함이 강해진 건 이례적이었다.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생각만이었지만)을 했다. 퇴근길에 버스정류장에서 본 '음악학원'의 기타레슨을 가슴떨리며 지켜본 것도. 3년전 드럼스틱을 쥐고 타이어를 치던 그 마음이 다시 찾아왔다. 아직 뭘 한건 아니지만, 이 맘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내년쯤에는 기타학원을 다닐지도 모르겠다. 밴드를 하는 직장인들이 참 부러웠던 한해였다.

여튼, 그랬다. 생각해보니 좋은 일을 찾기가 힘드네. 지난 일요일 채널을 돌리다가 KBS에서 하는 영상실록을 멍하니 봤다. 촛불이후의 KBS라 사건의 선택과 논조가 그닥 맘에 들진 않더라. 너무도 빨리 잊어버린 한해 일들을 몇가지 추려서 보여주는데, 2008년은 이상스럽게도 좋았던 일이 없었다. 있다면 올림픽과 김연아. 그것도 그저 기쁜일이지 내 삶에 영향을 주는 긍정적인 일은 아닐터. '아니, 이렇게 좋은 일이 없을수가 있나' 새삼스러울 정도로 2008년은 그랬던 것 같다. 나쁜 기억이 더 오래가는 법이라 그런건가 싶다가도 돌이켜보면 절대적으로 2008년은 나에게 잿빛이다.

올 2월에 지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었다. '난 2008년이 싫어. 시작부터 맘에 안들어.' 정말, 그랬다. 올 2월 설 연휴를 앞뒤로 회사일이 너무도 힘겨웠다. 심각하게 내 현재위치를 고민할 정도로 힘겨운 날들. '뭐하고 있니'라고 숱하게 반문할 정도로 힘에 부쳤다. 개인적인 일들 때문만이 아니라 작년 대선. 올해 총선. 신문 열어보기가 겁날 정도로 날선 이슈들은 '한국에서 사는 것'에 대해 심한 회의를 주었다. 2008년의 정치지형은 한국 사회를 더 암울하게 만들어놓을 것이 분명해보인다. 당장 우리삶에 직접적인 파급을 주기 보다는 은근하게 그리고 지독하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거다. 2008년은 분명히 그 시작으로 기억되겠지.

그래도 살자.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사는 거니까. 김현이 행복한 책읽기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 자살은 비겁한 거라고. 삶과의 지독한 싸움을 포기한 거니까. 사는건 지독한거다. 계속 싸워야 하는 것이고. 그런걸 나이 들면서 점점 무겁게 느낀다. 다들 내년에도 잘 살아내시길. 이 글을 읽는 저 건너의 사람들이 있어 올해 그래도 따뜻했다는 말은 2008년 끝자락에 남기고 싶다. 고마웠습니다.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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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질러라, 불 (20081215)

from 일기창고 2008. 12. 15. 15:54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화전 - 이문재



만날 수 있다는 걸로도 좋던 시절이 있었다. 허한 가슴, 후회, 부끄러움. 만나면 활활 태워버릴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기다림이 곧 타오를 기름진 재가 될것만 같던 마음들. 만나기만 해도 그 안에 새로 무엇을 심을 만한 여력이 생기던 시절. 튼실하고, 억세게 인연을 엮는다는 것. 그걸 위해서 기다림쯤이야, 흐르는 시간쯤이야 반가이 감내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기다릴 것이 많아 좋았던 때. 기다림 자체로도 맘이 벅찼던 시절.

달력에 하나둘 채워지는 연말 송년 모임들. 예전엔 좋아서 먹었고, 올해는 힘드니까 먹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이야기 한다. 지나간 일은 그저 안주거리가 된다. 달력 숫자 아래 적어둔 글씨를 헤아려보다가 더이상 설레지도, 보고싶지도, 벅차지도 않은 만남들에 씁쓸해진다. 묻고 있어도 궁금하지 않은 질문들. 대답하고 있지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답변들. 허공을 돌아다닐 말. 말. 말들... 다시 일년을 기약하면서 돌아서야 하는 그 텅빈 만남들이 싫다. 와서 화전하라고 말하는 이문재처럼,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 몇년 살아라. 라고 말할 만큼 내 맘이 말라있는 것일까. 만날 수 있다는 걸로도 좋았었는데.

한없이 이기적이 되어간다. 돌아서서 후회하는 무의미한 일들의 반복. 이것도 그저 손끝의 후회. 송년모임에서 사람을 마주하고 한 잔을 꺾으며 아무 생각없이 허허거릴거면서. 점점 생각과 일상 사이의 벽이 두꺼워진다. 아무 생각없이 지내는 시간과 고민하는 시간의 균형이 무너진다. 아니,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미안하다.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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