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자주 듣지 않지만, 몇년전에는 흔히 말해서 컨템포러리 재즈음악을 자주 들었다. 정통재즈보다는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듣기 편한 음악이라 그랬던 것 같다. 감정 촉수가 말랑말랑 해져있을때라 분위기 착 가라앉은 무드송들이 가슴을 후벼파던 시절. 그때 곧잘 꺼내 들었던 앨범이 Spyro Gyra의 Love & Other Obsessions앨범이다. CD걸어놓고 있으면 언제 다음 노래로 넘어가는지 의식할 수 없이 스무스하게 쭉 흘러가는 곡들. 지금이야 조금 소원해졌지만, 추운날 집에 쳐박혀 커피한잔 들고 널부러져 있을때 들으면 참 좋은 음악이다.
이 앨범을 만나게 된 계기는 좀 특별하다. 특별하다기 보다는 이 앨범을 사게된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아있다는게 정확하겠다. Spyro Gyra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이들의 히트앨범 Morning Dance에 수록된 Catching the Sun때문이었다. 라디오를 끼고 살던 시절, 좋은 노래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때마다 하던 일 올스톱하고 종이랑 펜을 준비해놓고 디제이의 침소리까지 받아적겠노라고 잔뜩 기다리곤 했었지. 물론 요즘에야 인터넷으로 전일자 선곡리스트를 찾아보면 그만이겠지만, 그때는 놓치면 끝장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음을 흥얼거려놓고 "혹시, 아세요?" 하고 물어볼 수 있는 지식인도 없을때였으니 말이다.
다행이 비교적 노래설명을 정확히 해주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라, Catching the Sun은 별 어려움없이 받아적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김기덕은 최악이었다) 그룹 이름은 스파이로 자이라 (원래는 해조류의 이름인 spirogyra를 즉흥적으로 공연당일 클럽주인에게 말했는데, 철자를 Spyro Gyra로 잘못 쓰는 바람에 이 그룹의 이름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전설이...) 노래는 2부 첫곡쯤으로 7시경에 나왔는데, 퇴근길 노을지는 하늘을 차안이라면 더없이 좋을거라는 멘트가 이어졌다. 참 낭만적이다 싶었다.
노래를 듣고 며칠 뒤 음반점으로 갔다. 종로의 타워레코드. 자주 가던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종로 타워레코드 재즈음반 코너는 4층에 있었다. 타워레코드는 그 층마다 일하는 아르바이트가 따로 있었다. 알바의 음악적 선호도에 따라 인원배치를 했는지, 아니면 무작위 혹은 선착순 배치였는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개인적인 취향과 해당 음악 장르에 대한 깊이도 어느정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다.
Catching the Sun이 수록되어있는 음반은 저가 Stop시리즈로 나와있었다. 고민없이 앨범을 손에 쥐고 카운터로 갔더니 난데없이 알바분께서 "스파이로 자이라 좋아하세요?" 하고 물었다. 내가 여자도 아닌데, 어디서 작업질이지? (더없이 황당해하면서) 시큰둥하게 '네'하고 대답했다. 근데 다짜고짜 하는 말이 "그럼 이 음반은 사지 마세요" 란다. 무척이나 공격적으로 "왜요?"라고 반문했더니 "저도 스파이로 자이라 좋아하는데, 이 음반은 음질이 엉망이라서 후회하실거에요" 라고 하더라. 막귀를 자랑하던 난 "그냥 살게요" 했는데, 한술 더떠 그들의 다른 음반을 사라고 하면서 시디진열대에서 하나를 골라주었다. 나도 흘끔 본 시디였다. Spyro Gyra의 Love and other Obsession. 수입반이라 만팔천원을 호가하는 음반. '이런 얄팍한 상술을...'하면서 뚫어져라 보고있는데 알바분이 "조금 비싸죠? 이렇게 음질좋은 음반은 싸게 나와야 하는데..." 하는 푸념을 했다. 누구 놀리나...그런데 "이런건 꼭 들어보셔야돼요" 하더니 시디를 들고 1층 카운터로 내려갔다. 뛰어 올라와 시디를 뜯어서 다시 내밀더니 "직원은 싸게 살 수 있어요. 이거 만이천원에 제가 샀어요." 빙그레 웃으면서 그 분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때 흐르던 감동. 좋아하는 음악을 권해주고, 들려주고 싶어했던 마음이 참 고마웠다. 학생시절 6천원이면 적지않은 돈이긴 했지만, 그 보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안그래도 그만인' 우연히 마주친 손님에게 시디를 내미는 그 마음이 참 고마운 거였다. 내가 이렇게 노래를 소개하는 글을 적는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선물 받은 기분으로 그 비싼 수입음반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 그게 98년도 여름이었다. 그해 늦여름 강원도 여행을 하면서 이 앨범도 함께 챙겨갔다. 어디쯤이었더라. 정선의 남면 별어곡쯤, 늦은 저녁 버스 안에서 이 음반을 들었을때가 기억난다. 첫곡 Lost and Found가 흐를때, 산속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 풍경은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다시 시디를 꺼내 리핑을 하면서 네 곡을 골라봤다. 첫곡 Lost And Found. 그리고 이들의 아프로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 Serengeti. 진정한 컨템포러리 재즈의 달콤함은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주는 Horizon's Edge. 싱글 커트되었다면 빌보드 싱글차트에 꽤 높이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은 멋진 듀엣곡 Let's Say Goodbye. 이들 음악은 노을지는 저녁무렵,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은 비싼 식당에서 와인 한잔 기울일때 듣는다면 더없이 좋을 거다. 물론 이 음악이 깔리는 식당이라면 더 좋겠지. 매니저에게 미리 얘기해서 시디 틀어달라고 하는 센스. 올해가 가기 전에 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