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에 찍어놓은 이태원 사진들을 만지작 거려본다. 공간과 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 천천히 움직이면서 사진 한컷 찍는걸 좋아하는데, 요즈음은 걷는 시간이 참 많이 부족했다. 자연히 카메라를 들고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꽤 추웠던, 봄을 기다리던 늦겨울 쯤이었을거다. 겨울치고는 가벼이 옷을 입고 돌아다니다 감기에 걸렸을만큼 바람이 매서웠다. 



녹사평역 맞은편 초등학교가 자리잡은 언덕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생활공간으로서의 이태원을 만날 수 있다. 외국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랄까. 몇걸음 걷다보면 터키음식점부터, 사진에서 보이는 호주관련샵, 인도음식점, 이슬람가게를 만날 수 있다. 이 곳을 지나면서 꽤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고급스러운 느낌의 잘 차려진 가게들은 아니지만 소소한 이국의 정취를 맞볼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의 문화를 지나치게 포장하거나 꾸며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상이 '고국'의 동포들일지 모른다는 점에서 진솔하다고 할 수 있을거다.



거리를 걷다가 예쁜 간판을 보면 나도 모르게 셔터에 손이 간다. 참을 수 없는 셔터 본능이랄까. 위의 호주샵을 지나 조금 걷다가 발견한 가게였다. 강남이나 삼청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느낌의 가게일지도 모르겠으나 이태원 뒷골목에 위치한 곳이라면 들어가서 한끼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지중해의 비스트로라니, 왠지 태양볕이 가득해야 더 어울렸겠지만, 이날 그늘이 드리워져있었고, 날은 꽤 쌀쌀했다.



이태원을 걷다보면 재미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용산구에있는 쓰레기관련 경고문에는 3개국어가 인쇄되어있다는 것. 한글, 영어, 아랍어. 아랍어가 인쇄되어있는 경고문이라니. 무미건조한 경고문인데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살고 있는 거다. 삶으로 말이다. 일본어와 중국어가 없다는 게 이상했지만, 당연하게도 이 공간은 관광지가 아니라 거주지 아닌가. 구청도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아랍어를 적어두었는데(내용이야 어찌됐든), 우리의 이명박 정부는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다.(갑자기 울컥) 소통은 이해와 노력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거 아닌가. 



까사벨라, 매종, 비발디, 티파니, 일마레, 켄트, 카르멘. 그리고 꽃과 나무. 벽이 낡아 칠해놓은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졌지만 이태원이기에 그 언어는 울림이 있었다. 로즈 스트릿이라니. 이태원 거리를 걷는 소소한 기쁨.



이태원 뒷골목을 걸어내려와 조금 걷다보면 골동품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있는 공간을 만나게 된다. 이태원을 걸어도 항상 한남동쪽 리움주변이나 아니면 해밀턴호텔 주변을 걷다보니 모르고 있었는데, 독특한 느낌의 앤틱 상점들이 꽤나 많이 늘어서있다. 그저 구경만 하고 지나친다면 나쁘지 않을것 같은데 마음에 들어 구입하고 싶다면 꽤 비싼 비용에 고개를 흔들게 될것 같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아놓고 핸드폰 번호를 적어두었는데, 사러온 사람이 적어서 그렇기도 하겠고, 사지도 않을 사람들의 서성임이 싫어 그럴 수도 있겠다. 문은 걸어 잠궜지만 쇼윈도를 마주하고 찬찬히 둘러보면 고풍스러운 유럽의 안방, 혹은 거실을 느껴볼 수 있다. 이 곳을 둘러보면서 지브리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며'가 생각났다. 고양이 백작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



화려한 촛불도 있고, 샹들리에도 있고, 옛스런 유럽풍 가구도 있고, 흠집마저 아름다운 책장도 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이 단단한 가방이었다. 족히 몇십년은 되었을 법한 낡은 가방. 다락방에서 열어보면 추억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이야기가 잔뜩 쌓여있을 가방이 온갖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뭔가 추억할 거리를 차곡차곡 넣어두고 싶었다.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아서였을까. 이태원 유흥골목은 스산했다. 시장근처 맥주집에는 오후인데도 음악을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는 흑인 몇몇이 있긴 했지만, 오픈을 준비하는 술집들은 오랫동안 닫혀있던 것처럼 어둡고 침울했다. 누구에게는 불온한 해방구였을수도 있고, 말초적인 본능이 부딪히는 공간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이 공간도 점점 밀려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 걸었더니 배가 고팠다. 해밀턴 호텔 옆에 자리잡은 '마이 타이'라는 태국음식점. 홍석천이 운영하는 가게라고 하는데 꽤 잘되는지 볼 때마다 사람이 많다. 성적취향으로 인한 차별을 심하게 겪은 사람이기에 이런 사업적인 성공이 반갑다.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사회 동성애자의 권리향상에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 음식맛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던데 내 스타일은 아니라서 그닥 땡기진 않는다. 이 주변은 굳이 비싼 레스토랑에 가지 않아도 테라스있는 가게들이 많아 길 쪽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볕이 좋은날에는 샌드위치에 커피한잔을 마시고 앉아있어도 꽤 근사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밥을 먹고,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 고민없이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스타벅스야 어디나 다 똑같지 않겠냐마는 (심지어 음악마저 본사에서 제공하니) 이태원의 스타벅스는 장소탓에 외국인이 많아 이질감이 조금 더 느껴진다. 내외국인의 비율이 60/40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게 커피를 즐기는 외국인들이 많다. 하긴 그들에게는 익숙한 커피를 제공하는 곳이니. 근데 우리는 왜 외국에 가면 한정식집보다 오히려 스타벅스나 맥도날드가 편하게 느껴지는 걸까. 미국식 스탠더드가 물밀듯이 파고들다보니 그게 이미 로컬이 되어버린거다. 커피와 머그가 촘촘히 쌓여있는 풍경은 내 눈에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라, 그걸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맘이 편안해진다.  



이태원 메인도로변은 화려한 레스토랑이나 음식점, 세련된 옷을 파는 곳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아직도 '짝퉁'을 파는 가게들도 많고, 뻐꾸기처럼 불러대는 호객행위를 피해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다양한 옷가지나 가방, 신발들을 구입할 수 있다. 이 골목은 세련과는 조금 다른 이태원의 한 모습이라는 생각에서 찍어봤다. 문은 다 닫혀있었지만, '대학과 잠바'라는 가게이름에서 보듯이 이 곳에서 오랜 세월 머물렀던 집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낮이 되면 미국대학의 로고부터 각종 대학의 문양을 달아놓은 옷들을 볼 수 있다. 



이태원 뒷골목모습. 정확히 어디쯤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이태원 대로변에서 조금 떨어진 낡은 주택은 재개발의 바람이 불고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태원, 한남동쪽 지금은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고있을 그 공간도 재개발이 되고, 재건축이 되면 다른 사람들로 대체될 거다. 그때 쯤이면 이 곳의 모습도 꽤나 달라져있겠지.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있는 서울의 재건축, 재개발은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거주민의 재정착율이 채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통계만을 봐도 그렇다. 그건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다르지 않을거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밀려나 다른 곳으로 쫓겨간다.



이태원을 걸었던 그 시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고민스럽네. 너무 예뻐 담아본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알게모르게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고있다. 단군아래 한민족은 동일한 핏줄을 가진다는. 일종의 순혈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일본의 귀화정책에 대해서는 격분하면서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눈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같은 외국인인데도 서구와 비서구를 바라보는 차별적인 시선은 여전하다.

이태원은 분단이후 미군주둔이라는 특수성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공간이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나며 많은 외국인들이 그곳에 둥지를 틀면서 우리들만으로는 절대 가질 수 없을 다양성을 지닌 공간이 되었다. 조금만 둘러보면 느낄 수 있을 만큼 이태원은 독특한 문화적 가치가 있다. 이 사진의 아이가 우리 사회의 배타적인 시선에 힘들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충분히 열려있으면 이태원은 지금처럼 다양한 문화, 언어, 인종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갈 수 있을거다. 이태원은 그럴 가치가 충분한 공간이고 삶의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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