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다

from 책글창고 2009. 11. 6. 13:25

어루만지다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고종석 (마음산책,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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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이 쓴 어루만지다를 읽은지는 좀 되었다. 읽고나서 몇자 적어보려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보탤 구석이 별로 없다. 우리말의 속살을 긁어내어 펼쳐보인 글에 더 보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감탄했고, 지극히 평범한 표제로 글을 풀어내는 능력에 고개 숙였다. 읽으면서 틈틈히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보았다. 이렇게 한 문장씩 떼어내어 보면 맥락과 동떨어지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다시 보니 발췌해놓은 글로도 힘이 느껴진다. 잘쓴 글은 한 문장안에도 깊이와 생명력을 담고 있다.


가냘픔은 일종의 결핍이다. p49

심지어 자위행위 역시, 그것이 전제하는 것은 위로하는 육체와 위로받는 육체의 관념적 구별이다. p55

손톱은 슬플때 마다 돋고 슬픔은 기쁠때 마다 돋는다. p63

이별이 열정을 키우는 것은 부분적으로 기억의 미화작용 때문이다. 어렴풋한 기억속에서, 먼 곳의 연인은, 이미 죽은 연인은 한없이 고귀하게 치장된다. 그때 부재의 사랑, 곧 그리움은 최고의 사랑이 된다. p111

불교에서는 결과를 내는 직접적 원인을 인이라고 하고 외적 간접적 원인을 연이라 한다. p123

우리들 대부분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신론자다. p130

간지럼의 쾌감은 아무런 고통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간지럼은 부드럽고 절제있는 쾌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쾌감에 견줘, 죄의식이 따르지 않는 쾌감이기도 하다. p148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진 뒤에야, 그 스스럼은 점차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진다. 가슴 두근거림도, 얼굴 붉어짐도, 어눌함도 차차 잦아들어 이윽고 없어진다. 그것은 열정이 탈바꿈을 겪는다는 뜻이다. 열정은 정으로 도타워진다. 스스럼은 정다움으로 바뀐다. p176

어루만짐이라는 형태의 스킨십은 사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사람의 살은 다른 사람의 살과 닿을 때 생기를 얻는다. p234

순전한 사랑은 그 주체끼리 으뜸의 자리와 버금의 자리를 맞바꾸는 행위다. 또는 최소한, 자기 다음의 자리, 즉 버금 자리에 한 타인을 세우는 행위다. p247

의식 속에 한점 그늘, 한 점 구김살, 한 점 주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겪지 못하고 생을 지나쳐온 것이리라.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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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피의 목소리

from 음악창고 2009. 11. 2. 18:40




계피 목소리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담백하면서도 진한 맛이 난다. 보통 여운이 남는다고 말하면 적절하다. 노영심의 목소리가 겹쳐지지만, 계피가 보다 더 깔끔하다. 둘다 모나지 않은 목소리이지만, 노영심에 비해 똑부러진 야무짐이 배어있다. 나른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여백이 있지만 엉성하지 않다. 연애를 하고, 결국에는 돌아선 후, 남겨진 미련을 다루는 방식이 노영심과는 다르다.

앵콜요청금지를 통해 계피 목소리를 처음 만났을때 멍하니 느껴지던 충격. 복고는 현대적인 의미망 안에서 복고라 불리울 수 있다. 회고가 아닌 복고는 그래서 트렌드가 된다. 장기하가 그렇고, 문샤이너스가 그렇다. 계피의 목소리가 더더욱 소중했던 이유가 그것 만은 아니다. 복고의 신선함을 걷어내더라도 그녀 목소리를 지렛대 삼아 인디음악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계피의 목소리는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갈증을 주었다. 몰랐으면 지나쳤을 갈증 탓에 많은 음악을 찾아들었고 또한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보드카 레인의 시원한 보컬과 함께 부른 숙취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노래의 생명력은 감정선의 어느 지점을 건드리는 순간 느껴진다. 그건 가사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멜로디 혹은 연주에서 오기도 한다. 이 노래로 말하자면 당연하게도 계피의 목소리일 것이다. 브로콜리 너마저로서는 섭섭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이젠'전' 보컬이 되어버린 계피의 부재가 너무도 아쉽다. 덕원의 예민한 감성을 콕 집어 전달해주던 계피의 목소리. EP를 들으면서, 1집을 들으면서 아쉬워한다.

뭔가 뚝뚝 떨어져 내릴것만 같은 노래를 듣는다. 앵콜요청금지를 좋아하는. 그리고 유자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따뜻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따뜻한 차한잔으로 멀리 달아날 한기라 믿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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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오연호 (오마이뉴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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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노무현 대통령관련 책이 많이 늘었다. 참여정부 비서실에서 펴낸 정책집도 있고, 치밀하진 않으나 그의 일생을 다룬 서평도 있다. 가능한 한 다 읽고 싶으나 아직 단단한 무게의 책으로 엮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듯 싶다. 몇장 더듬거렸는데도 설익은 책들이 보인다. 옥석은 가려지게 될 것이다. 그중 지난 6월 출간된 오연호 기자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꺼내어 들었다.

이상하다. 5개월 남짓 흘렀을 뿐인데도, 꽤 오래전 일인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스스로 잊지 말자고, 그의 죽음을 기억하자고, 그래서 노무현은 아직 현재진행으로 남겨야 한다고 다짐하였기에 그에 대한 기억과 말을 읽고 새긴다.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다.

블로그 왼쪽에 자리한. 그를 기억하자는 작은 배너를 볼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상처와 고통의 기억은 엷여지는 것이 당연하기에 5월의 기억으로 그를 호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 죽음이 주는 무게와 그 일생이 주는 가치는 무거운 짐이다. 말과 말 사이에 오연호 기자가 바라본 노무현에 대한 단상이 내내 기억에 남는다.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그저 노무현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장 한장 넘기며 읽었다. 그게 아니라면 차분히 읽어내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인터뷰가 생생해서인지, 글을 읽으며 그가 아직 살아있을 것만 같은 생각을 했다. 살아서 이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그를 죽음의 이미지로 씌우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의 말이 현재도 '꺼리'를 주고 있지 않은가. 현실에 대한 방향. 어떤 식으로 삶을 대하고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를 세심히 찾아보고 싶었다.

읽으며 또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참 여렸다. 그를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내칠 수 없었고, 끊임없이 그것을 의식했으며 그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을 가슴 아파했다. 그는 여느 대통령처럼 강하지 못했고, 강했으면 했으나 강하지 못하여 지지자를 힘들게 했다. 그런 그를 존경한다. 적어도 그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겸손했다. 부족함을 알았고, 그 부족함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위치에서 어디 그게 쉬운가.

쉽게 읽힌다. 한줄 밑줄도 긋지 않고 읽어내려갔다. 죽은 이에 대한 이런 복잡한 감정이라니. 언제쯤 정리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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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loved you so long

from 영화창고 2009. 10. 27. 10:19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감독 필립 크로델 (2008 / 프랑스)
출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엘자 질버스타인, 로랑 그레빌, 클레어 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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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은 아들을 죽인 혐의로 15년을 복역했다. 영화는 왜 줄리엣이 그랬어야 하는지 저간의 사정을 좀처럼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영화적 장치라기보다 쉽게 입밖에 낼 수 없는 가슴아픈 일에 대한 침묵에 가깝다. 그 침묵은 그 자체로 그녀를 짓누르고, 어쩌면 그녀는 그 고통을 당연히 받아야할 형벌처럼 품에 안고 살아간다. 

가족으로부터, 동생으로부터, 손에 쥐고 있었던 삶으로부터 외면당한 세월.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던 시절, 석방을 며칠 앞두고 동생이 찾아오고 뜻밖에도 동생은 함께 지내자고 말한다.

편견과 오해는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다. 노력은 하지만 쉽게 걷어낼 수는 없다. 아들을 죽인 혐의. 그녀는 지나친 주변의 편견에 저항하지도 않고 그저 감당해야할 짐을 들듯이 아들 죽인 엄마라는 시선에 몸을 내 맡긴다. 15년의 감옥생활, 어쩌면 그녀는 평생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어 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줄리엣은 동생 가족과 지내면서 점점 마음을 열게 된다.

이 영화는 아들을 위해 아들을 죽여야했던 한 여인의 적응기라 할 수도 있겠다. 내 것이 아닐 것만 같았던 따스한 삶, 벅차게 기다렸을지 모르는 생활에 다가가는 과정은 지난하다. 허나 차분히 삶에 다가설 만큼 그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연기는 표정에 긴 여백과 한숨이 있다. 아이죽인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된 사장이 그녀를 내쫓을 때 그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분노도 아니고 체념도 아닌 표정. 한마디 반항하지 못하고 뒤돌아서는 그녀. 지릿한 쉼호흡을 하게 만드는 얼굴.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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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영도 (황금가지,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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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받기전에 추리소설 걸작선을 읽고 있었다. 요즈음 주로 사회과학이나 교양서적을 위주로 읽다보니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정신을 쏙 빼놓는 이야기의 매력을 느끼고 싶었다고 할까. 그런데, 잘 읽히지 않더라. 잘 와닿지가 않았다. 사건에 빠져 몰입이 되기 보다는 생뚱맞게 관조의 시선이 되더라. 이 책에 실린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실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어쩌면 현실이 더 소설같은 시대라 그런가 싶기도 하다. 소설읽는 감성이 퇴화되어버린 것인지 여튼, 다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그래서, 이 책이 부담스러웠다. 우연치 않게 티스토리 대쉬보드를 보고 신청을 했고, 감사하게도 '서평단'에 선발이 되었지만, 하필 여러권 중에 이 책이라는게 난감했다. 공지를 늦게 확인하여 다른 책을 신청했으나 수량관계로 손에 들게된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소설 모음집이었고, 게다가 환상문학 단편선이었다.

환상문학을 접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다. 누나의 서가에는 SF부터 추리소설까지 온갖종류의 소설이 꽂혀있었으나, 한번도 탐해본 적이 없었고, 블레이드 러너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읽지 않았다. 핑계일까. 멍석이 두텁게 깔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을 받아들었으니 서평이란걸 써야 하는데 그게 부담스러웠던 거였다. 책을 손에 쥐고 책장을 넘기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소요되었던 이유도 그것이고.

책은 쉽게 읽혔다. 두툼하게 10편의 소설이 실려있으나, 첫 작품을 읽고 다음 작품에 바로 손이 갔다. 물론 단편선집이다보니 모든 작품이 동일한 무게감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편차는 있다. 평가의 차원은 아니고, 개인적인 호불호라고 해야겠다. 모든 작품의 소재가 신선했다. 소설적 공간을 구성해내는 번득이는 촉수는 다들 파릇하게 날이 서있었다. 어쩌면, 환상문학의 성패가 소재에 달려있지는 않은가 싶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실망스런 작품도 있었다. 아래 짧게나마 적어낸 글들은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다. 

'학교'는 영화시나리오를 연상시킨다. (그걸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구성은 많은 학원영화들에 빚지고 있다. 배틀로얄이 겹쳐졌고, 고사도 겹쳐졌다. 충격적인 결말은 에일리언의 한장면이 생각났다. 아이에 대한 공포가 어디서 왔는지 좀더 생각해보고 싶었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이유는 학교가 가진 알레고리 때문이다. 학교와 사회, 그리고 숲의 대비는 우리의 공포가 어디를 향해있는가를 보여준다. '학교'의 비극은 학교가 아닌 '숲'에 있다. 숲은 두려움의 대상이다가, 삶의 희망이 되었고, 결국은 다시 죽음의 공간이 된다. 결국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고, 사람사이의 관계이다. 이 소설의 진짜 이야기는, 학교가 아닌 '숲'에 있다. 주인공의 죽음이 연민없이 다가온 까닭은 부적응의 관계가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야비한 이야기이지만, 선택은 두가지이다. 적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중간지대는 없다. 그들이 연명할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회가 숲이고 학교이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길이가 아쉬웠다. 흥미로운 소재였고, 이기적인 이타주의. 그 인간 군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으나, 많은 이야기가 남은채로 글이 마무리 되었다. 소재를 끌고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구상했으나 쓰지 않은 것인지, 더 다듬어진 글을 쓰기위한 초고인 것인지 의문이다. 작가가 더 세밀하게 써주었으면 좋겠다. '천국'으로 가기 위한 선행이라는 것이 환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천국'을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대치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행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현실에서, 천국에 가는 점수를 얻기위해 착한일을 하는 이들은 주변을 보듯 자연스럽다.

'노인과 소년'은 한편의 교훈소설이다. 논쟁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 흠잡기도 어렵다. 묵직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머리 탁치는 가르침이 아니라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같은 느낌이다. 꼭 노자 도덕경에 있을 것 같은 얘기. 환상문학이라는 장르가 혼란스러워진다.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얘기라고 할까. 너무 의도가 느껴져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표제작이기도 한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실험소설일까. 몇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반복되고 변주된다. 변주되는 지점은 흥미롭다. 화자는 바뀌지만, 말하는 바는 동일하다. '왜' 반복하는가. '또'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름대로 답을 말하고 싶었으나 명확하진 않다. "현실은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는 현실을 낳고, 그 둘은 서로를 낳으면서 우리의 삶을 만들었다"는 문장으로 힌트를 얻을 수는 있겠다. 이야기는 그렇게 변주되고, 수없이 반복되면서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이야기가 된다. 그게 환상이 아니고 뭘까.

'은아의 상자'는 편지글 형식을 띄고 있다. 상자를 둘러싼 두 친구의 편지글인데, 상자를 놓아둔 친구와 그에 대한 감사 편지 두통이다. 이야기의 초점은 당연하게도 친구의 답신이다. 진수의 편지는 분위기를 점점 고조시켜가며 선혜의 답신에서 '탁'하고 터진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하다. 은아의 상자는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은아의 상자는 보상이었을까. 은아의 상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글이 너무 길어진다. 가벼운 의무감으로 글을 쓰다보니 말이 많아진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 책을 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책장을 넘기며 작가들이 풀어놓는 환상의 공간, 그 이야기들을 즐기면 될 거다. 작가가 창조한 환상적 공간, 그 소재들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더더욱 좋을 듯. 단편선을 읽다보니 두툼한 소설책 한권을 읽고 싶다. 10권짜리 대하소설은 부담스럽고, 탄탄한 단행본 한권. 날도 추워지는데, 꽤 괜찮을 선택이 될 듯 하다.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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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 K와 저녁을 먹으러 대학로 근방을 서성이다 건조한 회벽에 힘없이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봤다. 무방비로 내 눈앞에 펄럭이던 다섯 글자. '안녕 노무현'. 늦은 퇴근 탓에 목구멍까지 넘어 오던 허기를 꾸역꾸역 삼킬 만큼, 플래카드는 눈 앞에서 거칠게 흔들렸다.

그게 8월 한여름이었다. 입술 꽉 깨물며 잊어야만 한다는 단호함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을. 생생히 기억하려해도 자꾸만 지워지는 기억이 야속하다. 어떤 맘으로 살고 있는가. 죽음 앞에 '안녕'이라는 말조차 건네고 싶지 않았던 5월의 기억. 하루하루 지나치며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이미 그를 멀리 보낸건 아닐까. 머리를 쥐어 뜯는다.

노무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참여정부는 어떤 정부였나. 추억과 울분이 아닌, 역사의 이름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의 이름 석자를 두고 울컥해지는 마음은 어쩌지 못하겠다. '빠심'이라고, 감상주의라고 해도 좋다. 도저히 냉정해지기 힘든 것도 있는 법이다. 눈물은,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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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have been loved, Sia

from 음악창고 2009. 10. 15. 17:39



날이 서늘해져서가 맞다. 듣다가 끄적이는 이유가. 그러고 보니 음악얘기가 참 오랜만이다.

땀띠나게 더웠던 지난 여름, 홍대에서 열린 이장혁 공연에 갔었다. 소규모 카페였다. 자기 노래가 이런 더운 여름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면서도 노래를 들려줬는데, 아이스커피 한잔 들으며 듣는 노래도 괜찮았기에 속으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데 요며칠 이장혁 2집을 다시 들으니 아닌 것 같다. 그의 노래가 스며드는 느낌이 다르다. 계절에 맞는 노래. 계절이 오면 듣는 노래. 계절이 오면 쌓이는 노래는 분명 있는 것 같다.

Sia의 앨범도 그렇다. 특히 You have been loved는 더더욱. Sia의 앨범은 올봄부터 틈나는대로 찾아들었는데, 이 계절, 음이 다가오는 느낌이 참 다르다. 절절하게 부르는 후렴부, 그리고 깔리는 피아노와 현이 애잔하다. 사랑의 뒤안길. 그 쓸쓸함 탓일까 싶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만은 아닌게 분명하다. 오히려 귀로만 듣는 음악은 소모적이고 도구적이지 않나. 음의 울림이 닿는 지점. 떨림. 음이 흔드는 기억들. 그런 것들이 외려 듣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은 음악은 쌓이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적어도 다시 찾아듣게되는 음악. 듣지 않고서는 안될 것 같은 절박함은 그 음악을 온몸으로 들었던 그 기억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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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굿 (20091008)

from 일기창고 2009. 10. 8. 13:27

날이 선선하니 사랑시가 읽고 싶어진다. 언제나 계절이 바뀌는 시절의 바람은 생경하고 낯설다. 한여름을 지나 불던 바람은 시원해 좋았는데, 지금의 바람은 차갑고 날카롭다. 바람은 달라지지 않은 듯 한데, 이상하다. 살갗에 닿는 결이 몸을 움추리게 만들고 걸음을 멈추게 한다.

언제쯤이면 환절기에 익숙해질까. 언제나 계절은 불현듯 다가오고, 우린 준비없는 상태에서 계절을 맞이한다. 계절이 바뀌니 맘이 바빠지고, 변한 시절에 당황한다. 무섭게 흘러버린 시간에 흠찟 놀라기도 하면서. 달력이 넘어가는 것보다 계절이 바뀌는 건 더 두렵다. 뭐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계절은 이렇게 바뀌어가는데 어쩌나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든다. 이 땅에 사는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계절이 한결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할까 새삼 궁금하다. 환절기가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람을 혹은 시간을 맞이할까. 가끔 그려보는 지중해 시절. 한해에도 몇번씩 환절기를 경험해야하는 이 피곤함에 지칠때면 가본적 없는 지중해가 그리워진다.

옷깃을 여며야 하는 바람 탓인지 따뜻한 사랑시가 아니라 차갑고 매몰찬 사랑시를 읽는다. 그냥 그렇게 있고 싶은 날이다. 


그대는 단 하루도
나의 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한 적이 없다

끝없는 어둠에 밀려
암초에 부딪쳐도
새벽을 피해
어둠으로 숨어든다

무덤의 
세월 속에서
잠깐 동안
나의 꿈이었던 
그대

잊어버림만이
최선이니
내가 그대를 잊기 전 
떠나라

사랑굿 146 - 김초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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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예수. 두번째

from 책글창고 2009. 10. 7. 22:14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어떤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일 수 있으며,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죽어 하느님이 뭔지 예수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제3세계의 수많은 인민들 가운데에도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이 허다한 것이다.

보수교회에선 이런 사실을 엄격하게 부인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을 타협없이 섬기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태도는 실은 하느님을 자신들의 교회 체제에 가두어 놓으려는 말도 안 되는 수작일 뿐이다. 우리가 한낱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도, 혹시라도 내 생각이 그의 본디 생각에 못 미칠까 걱정하며, 그런 걱정을 함께 전하는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 오만하고 권위에 찬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어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예수전 P68~P69

이 땅의 한국 보수 기독교에 대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관습화된 현대 교회와 교리체계에 대한 강력한 발언이기도 할터이다. 그의 이런 견해가 반갑다. 자신만의 신, 자신만의 교회를 얘기하고 그것만이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라 말하는 신이라면 그런 신은 믿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확실한건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은 그런 협애한 하느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전 도처에 보이는 김규항의 교회비판은 날이 서있다. 강독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간에 뾰족하게 드러나있다. 나 또한 그에 동조하는 입장이라 책장을 눌러 넘기게 된다. 교회가 믿음을 독점할때, 교회를 통해서만이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고 말할때, 우리는 그 말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 혹은 독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는 자들로 하여금 사적이익을 취하기 위함이라면 우리는 과감히 "그건 교회가 아니다"라고 선언해야 한다. 예수가 그랬듯이. 다 그런 거지 뭐. 그렇게 눙칠 일이 아니다. 그 폐해는 역사가 증명하고, 현재 한국사회가 증명한다. 그들은 사회악이다. 

기독교가 지닌 역사적, 공간적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특수성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일이 우리에겐 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그당시 사회체제 내에서 배태된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니 그 시대의 풍경으로 이해하고, 공부해야할 필요도 많을 거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행한 가치를 설명하고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이 땅의 종교지도자들이 해야할 일이 참 많다. 허나 그들은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고, 더구나 그럴 필요도 없는 듯 하다. 그게 문제다.

기독교에서 교리적 특수성을 걷어내고, 예수의 행동을 다시 읽으면 기독교가 다시 보이지 않을까 한다. 거듭 말하지만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와 가능성은 굳어진 기독교를 걷어낼때 획득될 수 있다. 예수의 헌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석해주는 작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김규항의 책이 다 옳은 방향은 아닐지라도 예수전이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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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래도 그 연휴의 첫날이 지나간다. 명절을 앞둔 한주간 참 많이 바빴다. 신규업무 적용으로 인한 시스템 메가 릴리즈가 있었고, 그 메가 릴리즈에 끼어 큰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작업도 있었다. 필요이상으로 분주했고, 긴장했다. 그 탓인지 연휴를 앞두고 일이 좀 진정되어 마무리 되어가는 것 같아 심적으로 편안하다. 다음주 월요일과 화요일 변수가 남아있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큰 문제없이 마무리 될거라 기대하고 있다.

당연하기도 하고, 또한 신기한건 시스템 변경이나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할 때, 릴리즈전 수행한 테스트가 품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테스트의 중요성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신기하다고 말한 이유는 테스트에 투여된 물리적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나의 심리적 태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테스트를 수행하면서 애초에 설계나 분석과정에서 문제점을 미처 고려하지 못해 근본적인 수정이 가해지는 케이스는 나에게 그다지 많이 발생하지 않는 듯 하다. 내가 꼼꼼하게 일해서 그렇다는게 얘기가 아니라, 변경을 진행하면서 가능한 많은 발생케이스를 생각하며 일하는 습관 때문인것 같다. 다시 말해 내가 생각하는 테스트는 릴리즈 여부를 결정짓는 최종테스트와 동일한 무게감을 지닌다고 하면 비슷하다. 

테스트 단계는 완벽한 상태를 또 한번 검증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건 일의 습관의 차이인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테스트를 개발 과정의 일부로 생각하기도 한다. 얼개를 맞추어 놓고, 테스트를 통해 수정하고 개선하는 것이다. 허나 나에게 테스트는 '최종검증'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래서 테스트 과정에서 근본적인 오류가 발견됐을때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큰일이 난 것 같은 불안함도 때론 느낀다. 게다가 그것이 애초의 설계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라면 더더욱.

이런 상황에서 테스트에 들인 노력, 관심이 있었던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지극히 심리적인 것으로 "뭐, 이정도 했는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천운'이 없어서 그런거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여튼, 관심이 적었던 업무는 꼭 문제가 생겼다. 업무가 업무인지라 잘못된 릴리즈가 대형사고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업무'이다보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보다 덜 위험한 업무는 관심을 덜 쓰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완전히 소홀히 하다가 한방 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탓에 이번처럼 메가 릴리즈 사이에 끼어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업무가 더 걱정이 된다. 더욱더 엄밀하게 테스트를 진행해야했으나, 검증이 미진했기 때문이다. 미신적인 얘기일지 모르나, 좀더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쓴 업무는 '하늘'도 도와주는게 아닐까 싶다. 좀 우스운데, 일종의 '보상'이 이뤄지는거란 생각. 그나저나 이런 변경이 있을때마다 사실 긴장되고 잘 될까 걱정되는게 장난이 아니다. 때로는 위험수당도 요구하고 싶을 만큼.

추석연휴 시작날 늦은 시간에 업무얘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배부른 저녁식사 탓인거다. 명절에 포식하면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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