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유감

from 생각창고 2006. 11. 20. 11:05

가끔 메이저신문을 들춰보다가 아연실색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부동산에 대한 정부정책을 비난하거나(비판이 아님) 날로 오르는 집값에도 정부는 두손놓고 '시장에 맞겨라'라고 훈수하는게 대부분 논조이다. (논조라기보다는 나불대는 주둥아리라고 표현하는게 맞겠다) 그러다가 가끔씩 여론이 너무 심하게 돌아간다 싶을때는 부동산투기, 날로 급등하는 집값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눈에 들어오는건 그 나불대는 지면 하단의 '부동산광고'들이다.

이들 거대신문의 광고 주수입원이 (대략 50%를 넘는다고 하는데) 건설사들의 분양광고이거나, 상가건물 임대수입광고라고 하니 이들의 부동산 비판기사도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신문은 각종 부동산관련 정보를 통해 투기를 부추기고, 믿을 수 없는 시세정보(대부분은 부동산투기로 먹고사는 세칭 부동산전문가라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일방적인 정보이다)를 제공하여 시세를 조종하려고 한다. 게다가 부동산관련 정부정책이라도 나올라치면 '반시장'정책이라느니, 효과가 의심된다느니, 실수요자만 피해를 본다느니 하는 딴지에 열을 올린다. (물론 정부정책이 옳다는게 아니라 건전한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분히 '소문'에 움직이는 수급불균형의 집값이 요동칠 수 밖에 없다. 정보는 만인에게 공개되어있지 않고, 제한적이고 의문스러우며 언제나 說만 파다하다. 그 說에 호가는 춤을 추고 분양가는 건설사들의 이익실현으로 인해 하늘높은줄 모르고 올라만 간다. 그 미친 부동산 열풍에 온몸던져 뛰어들지 않으면 '재테크 문외한'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고, 결국에는 긴 시간동안 많은 것을 포기하며 모은 소중한 돈을 손에 쥐고 있어도, 돌아오는건 깊은 좌절감과 '참을 수 없는 내 돈의 가벼움' 뿐이다.

어제 MBC 시사매거진 2580을 보면서 또한번 분통을 터뜨린건, 주변집값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설사들의 '분양가 장난'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좋은 마감재를 사용하고, 주변환경을 위해 조경에 많은 비용을 들이고, 이미지 제고를 위해 골프치는 미쉘위에게 10억원이 넘는 돈을 붓는다고 해도 건설사들은 담합을 통해 분양가를 올리고 있고, 그 속에서 폭리를 취하며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절대적인 수요부족과, 그래도 더 오르지 않을까라는 수요자들의 기대심리, 언론의 지원사격, 정부의 어설픈 정책이 건설사들의 폭리를 '적정가격'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셈이다.

정말 '미친 사회'이다. 집이 삶을 영위하는 수단이자 기본적인 필수요건임에도 그걸 잡기란 한국사회에서 여간 힘든것이 아니다. '얼마짜리 집에 사느냐'가 50대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동아일보의 작문인지는 모르겠다), 남은 반평생을 집값대출을 갚기위해 일해야하는 사회가 정상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4억,5억원짜리 집에 살아도 실현수익은 없고, 과도한 주택담보대출로 인해 월수입의 50%이상을 원리금상환에 쏟아부어야 하는 사회. 그렇게 유지되는 고공집값은 분명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 거품이 어떤 형태로 되돌아올지 너무 뻔한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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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500만원을 가지고도 꽤 괜찮은 집에 살 수 있는 싱가폴과 같은 사회를 벌써 바라는건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벌어 작은 집을 마련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끝모를 좌절감을 주어서는 안되는거 아닌가. 위의 씁쓸한 카툰처럼 "정말 무얼하며 살아야 하는지 헷갈리는 사회"에서 더이상 무얼 기대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스러울 뿐이다. 김규항처럼 정말 진지하게 '이민'이라도 준비해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민<씨네21>
김규항/ <아웃사이더> 편집주간 drumcom@shinbiro.com
한국을 대체 불가능한 낙원이라 여기는 한줌의 지배계급을 빼고라면, 한국은 절망적인 나라다.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어떤 부분도 한국인이 한국에서 일생을 보내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대개의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일생을 보내는 일을 달리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한국에서 일생을 보내는 방법 외의 다른 선택을 고려하지 않는 습성 때문이다.
모든 한국인이 박정희의 병사이던 시절 한때 미국 이민이 유행이었다. 박정희의 어린 병사인 나는 이런 이민자들에 반감이 컸는데, 그들이 한국을 떠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한국(당시엔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을 탈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박정희의 어린 병사답게 공산군과 싸우지 않고 도망하는 그들의 비겁함이 싫었던 건지까진 기억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뒤 내게 이민이란 늘 언짢은 일이었고 한국에서 일생을 보내는 일은 내게 늘 당연했다.
내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건 올 들어 내 딸 김단이 일곱살이 되면서, 나를 아비로 둔 두 아이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불과 일년 앞으로 박두하면서다. 한국에서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건 그 아이가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삶에 접어든다는, 그 아이의 일생이 급기야 기나긴 절망 속으로 빠져든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한 아이를 한국의 학교에 들여보내는 일은 아무래도 사람이 할 만한 짓이 아니다.
물론 다른 선택도 존재한다. 사립초등학교는 아무래도 공립초등학교보다 덜 야만적일 거고 열린 교육을 하는 중·고등학교는 대개의 한국 아이들이 들어가는 중·고등학교들보다 분명히 낫다. 쌓아놓은 돈이 더 있다면 아이를 일찌감치 외국으로 보내는 방법도 있다(이 방법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돈과 학벌이 신분을 결정하는 한국에서 그 아이는 출국심사대에 서는 순간 낙원의 문턱에 이른다).
문제는 내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선택을 감당할 수 없는 내 형편은 물론이려니와, 설사 그럴 형편이 된다 해도 나는 졸렬하나마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란 세상을 뜯어고치자는 의견을 갖은 사람이고 세상을 뜯어고치는 일이란 현재 세상에서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일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출발점에 제 삶의 조건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으로 제한하는 진보주의자의 숙명적인 도덕률이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진보주의자(혹은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는 자)는 제 아이를 제 사는 동네의 대개의 아이들이 들어가는 학교에 들여보낼 수밖에 없다.
내 일생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이민이 등장한 건 지난 여름 어느 날 후배 녀석에게서 캐나다 밴쿠버의 무색무취한 삶 이야기를 듣고서다. 주 5일 노동으로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집을 마련하는 데 반생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교육과 의료가 무료이며 도무지 세상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광활한 자연 곁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밴쿠버의 무색무취한 삶은 이민에 대해서라면 어린 시절의 반감만 존재하던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곳이 녀석의 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곳이라도 된다면 그곳에 가서 내 아이를 그곳의 학교에 보내고 조용히 일생을 보내는 것도 방법이겠구나. 내가 써내는 졸렬한 글쪼가리들이 세상에 주는 유익이 실재하는진 분명치 않지만 그곳에 가면 내 두 아이의 삶에 주는 유익은 분명히 실재하는구나. 그 두 아이를 희생시키며 졸렬한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며 사느니 한국을 깨끗이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구나.
한동안 꿈을 꾸듯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나가던 나는 불현듯 오늘 내가 도무지 이민 따윌 꿈꿀 만한 형편이 아니라는 사실과 앞으로도 그럴 형편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이민은 일생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내 머리통 한켠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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