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이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고향을 떠나 멀리 만주국 장춘에서 외로운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서른 무렵의 백석. 좁은 방안에서 외로움에 잠 못이루던 그는 휑한 바람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으리라. 좁다란 방, 팍팍한 생활을 잊으려, 누우면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을 바람벽에 온갖 생각을 그려놓는다. 차가운 현실을 잊으려 추운 겨울 김치를 담그는 어머니를 떠올리고(아마도 그를 먹이려했을), 그 옆에 마주앉아 저녁을 먹는 아내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그의 과거이며, 아내는 그의 미래일테다. 팍팍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통로는 과거와 미래 뿐이다.

한줄한줄 백석이 마주했을 바람벽의 무게가 느껴진다. 지친 몸을 뉘이면 엄습할 듯 다가오는 흰 바람벽. 그 고단함을 잊기 위해서는, 잠 한숨 자려면 무엇이든 그 흰 바람벽을 칠해야 했을거다. 뭐든 투영하지 않으면 견뎌낼수 없었으리라. 하여 백석의 흰 바람벽은 긴 낮잠으로 잠이 오지 않아 떠올리는 공상의 가벼움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할퀼 듯 다가오는 삶의 무게를 견뎌내려는 절실함, 절박함이다. 그래서일까 옷깃 여며주고 싶을 만큼 애잔하고, 또 애잔하다.

백석처럼 잠자리에 누워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기억에 야속해하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터.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겹쳐진다. 백석처럼 타향살이의 그리움으로 잠 이루기 힘든 시절은 없었으나, 사랑의 아픔에 뒤척이던 시절은 있었으니. 그때 이 노래를 들으며 꼬박 날 세우기도 했다. 그 때 텅빈 내 방 천정은 흰 바람벽의 다른 이름이었다. '홀로 누워 천정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에 괴로워하던 시간. 떠올리고 싶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우려해도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새벽기운이 밝아오곤 했었지.

외로움은 백석처럼 우리도 여전히 느끼는 것이다. 백석의 흰 바람벽은 이젠 비좁은 컴퓨터 모니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것도, 인터넷을 무작정 떠도는 것도, 잠 안오는 밤 흰 바람벽에 채워넣은 그림이 아닐까. 좁은 방 바람벽은 나를 바깥과 유리(遊離)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좁다란 방은 항상 춥고, 외롭다. 잠깨면 또 다시 마주하는 것이 현실이고, 잠들때까지도 잊을 수 없다. 그 흰 바람벽을 마주하는 불면의 밤은 언제나 너무도 길고, 힘겹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안에 가득 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정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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