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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치 않게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문 팰리스, 미스터 버티고를 손에 잡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신선하고 새로운 글쓰기에 매료되었다가 계속 읽으면서 흥미가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점은 그 소설이 가진 판타지적인 설정 때문이었던 듯 하다. 특히나 미스터 버티고의 약간은 황당한 설정(혹자는 그게 폴 오스터의 매력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은 끝까지 읽어내는데 곤혹스러움을 주기도 했다. 그 당시 대학시절에는 사회과학서적이나 인문, 철학적인 책을 즐겨 읽었고, 대부분은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말하자면 현실에 발 딛고 있는 글들) 텍스트에 눈길이 가있는 상태라 우연히 잡은 폴 오스터의 책은 작가는 인상적이되 책은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소설에 시큰둥 했던 많은 이유들중 폴 오스터의 책도 있었을 거란 짐작은 한다.
그리고 한참 영화를 먹어치우던 시절, 스모크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제목이 주는 모호함, 가벼움, 권태… 크레딧을 유심히 보지 않는 나는 그것이 온전히 웨인왕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 강요하지 않은 웃음, 살아있는 캐릭터들, 있을 법한 이야기… 난 두시간동안 브루클린을 무대로 펼치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져 있으면서도 독립적이지 않고 또 무대 속에서 실타래처럼 얽히는 만만치 않은 이야기 구조. 잘은 모르지만 로버트 알트만 영화도 이러하리라 짐작했던 것 같다. 그 이후 그 영화가 폴 오스터의 단편 소설을 시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아~ 그랬구나”라는 놀라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뉴욕 삼부작’인지 아닌지도 모른채 말이다. 스모크는 그렇게 하나의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일하다가 회사 근처의 생활문화센터를 방문하고는 하는데, 그곳을 휘휘 둘러보다가 열린책들에서 나오는 폴 오스터의 소설들을 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이한 제목의 소설을 꺼내들었는데, 그게 바로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였다. 난 직감적으로 그것이 영화 스모크의 원작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아니나 다를까 책을 열어보니 중간 부분에는 스모크의 스틸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그 사진을 훑어보는 것 만으로 영화의 느낌이 되살아 날 정도였다.
퇴근길에, 일 시작하기 전에, 집에 돌아와 쉬는 시간에 틈틈히 읽으면서 스모크라는 영화는 폴 오스터가 뉴욕타임즈에 게재한 짧은 단편 소설에서 시작했고, 그 소설을 본 웨인왕의 컨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스모크에 대한 얘기부터,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단편이 그대로 실려있었고, 그 뒤는 스모크의 시나리오가 실려있었다. 영화에 대한 세세한 기억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읽으며 그 장면들을 떠올리는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폴 오스터가 영화를 만들어가며 느끼는 점들, 감독과 배우들과 서로 깊이 이야기 하며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인물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을 읽으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적어도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전에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내러티브가 영화적 영상보다 훨씬 더 크게 영화를 떠받치는 힘이 아닐까 자문했던 기억이 난다. 그 반대로 영화가 주는 이야기의 힘이 너무도 빈약해서 껍데기 같은, 그냥 그림에 불과한 영화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건, 영화 속에 내재한 이야기들 ,그 이야기가 나에게 발언하고자 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폴 오스터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이 책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보면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내가 스모크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그 영화 전면에 흐르는 브루클린 사람들, 그들의 일상 묘사에 있기도 하겠지만 더 큰 것은 폴 오스터가 자신의 주변에서 관찰한, 생활 그 자체를 엮어놓은 이야기에 있는 것이다. 꼭 리얼리즘의 겉옷을 입지 않더라도 그렇기에 스모크는, 폴 오스터의 이 책은 체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읽으면서 내 주변을,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도 그 비슷한 이유 때문일거다.
블루 인 더 페이스를 보고 싶다. 구하기 쉽지 않겠지만, 그 영화를 보고나서 그 일상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러다가 나도 내 삶을 빚어내고 싶은 충동이 들지도 모를일이다.
2005.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