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이 풀릴 조짐이 보인다. 먼지 쌓여가는 사진기를 만지작 거릴때가 왔다. 메모리도 비워두고, 충전도 해야겠다. 아침 출근전 창문을 열어 햇빛을 확인하고 펜탁스 필름카메라의 남은 컷수를 확인해봤다. 10컷정도 남은것 같다. 지난 겨울의 흔적임이 분명한 사진들. 묵혀두었다가 여름이 올 무렵에 현상해야겠다. 셔터 누르는 소리가 경쾌해지는 이즈음의 공기. 걸어도 좋을 날들이 된 것 같다. 잘 나온 것들이 있으면 이곳에도 올려야지. 근데 대부분은 '사장'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전 그 많은 사진들 처럼. 필름사진을 찍으면서 셔터를 누르는 그 결정적 순간이 좋았으니 서운하진 않다.
2. 이곳 저곳 봄을 만끽하는 기운들이 느껴진다. 의도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주말에 아이팟 리스트를 정리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마루바닥까지 드리워진 햇살에 충동적이 되었다. 고민끝에 장필순, 어떤날, 올드피쉬, 흐른을 넣어두었고, 디어클라우드, 못, 백현진, 이장혁을 지웠다. 지난 겨울, 없으면 견딜 수 없었을 음악들이지만 당분간 밝고 차분한 것들을 찾아 듣기로 했다. 춥던 불면의 밤들. "고마웠어 너희들이 있어서". 오래 머물러 있었으니 아이팟 어디 한구석에 흔적이라도 있겠지. 다시 채워넣으면 고스란히 그 자리로 찾아갈 거라 믿는다. 당분간 음이 나에게 진동을 주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가는 것들만 들을거다.
3.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봤다. 너무 먹먹해 이 영화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누구나 '파리'를 지니며 살아간다. 나에겐 어떤 것일까. 살면서 대부분은 그런 것 더이상 없다고 묻어놓고 산다. 꺼내기에는 너무 치명적이므로. 그들은 너무 쉽게 그걸 열어버렸고, 에이프릴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두툼해 보이는 일상의 벽은 얼마나 위태한지. 감추고 잘라버리고 줄타기처럼 살아가지만 무너지려면 한순간이다.
4. 계절을 느끼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봤다. 햇살과 바람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그럴려면 좀 걸어야 할 것 같다. 내딛는 발걸음. 땅을 밟으면 느껴지는 기운같은 것. 그립다. 강원도 정선을 반나절 씩이나 걷던 시간도 있었는데. 항상 아스팔트 바닥, 허공에 떠있는 빌딩 바닥만 밟으며 사는 발에게 미안하다. 네가 밟아야 할 곳이 그것 만은 아닌데 말야. 낣은 구두도 벗어던지고 싶다. 새 운동화를 사서 멀지 않은 산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5. 김은영이란 가수의 별, 바람, 그리움을 내내 들었다. 듣자마자 류금신의 바람꽃이 떠올랐다. 결은 다르겠지만 여튼 그랬다. 학교앞 서점에서 산 꽃다지 앨범이 기억난다. 어떤 의무감에 찾긴 했지만, 그 안에 박혀있던 '민들레처럼', '전화카드 한 장'의 서정이 무척이나 좋았다. 두 학번 위였던 노래패 누나가 불러주었던 '전화카드 한 장'. 취기에 헤헤거리던 모두를 숙연하게 고개 떨구게 했던 목소리. 장구소리가 날 꽉 채우던 시절. 그때도 봄이었다.
6. 한계절이 가고 또다른 계절이 오고 있다는 것. 변화쯤이야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서른을 넘긴 나이에 이런 호들갑이 부끄럽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적당히 둔감해지는 것이 나이드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근데, 그렇게 뒷짐지고 너스레 떨기엔 이 계절이 너무 눈물겹다. 그냥 그렇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