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화전 - 이문재
만날 수 있다는 걸로도 좋던 시절이 있었다. 허한 가슴, 후회, 부끄러움. 만나면 활활 태워버릴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기다림이 곧 타오를 기름진 재가 될것만 같던 마음들. 만나기만 해도 그 안에 새로 무엇을 심을 만한 여력이 생기던 시절. 튼실하고, 억세게 인연을 엮는다는 것. 그걸 위해서 기다림쯤이야, 흐르는 시간쯤이야 반가이 감내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기다릴 것이 많아 좋았던 때. 기다림 자체로도 맘이 벅찼던 시절.
달력에 하나둘 채워지는 연말 송년 모임들. 예전엔 좋아서 먹었고, 올해는 힘드니까 먹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이야기 한다. 지나간 일은 그저 안주거리가 된다. 달력 숫자 아래 적어둔 글씨를 헤아려보다가 더이상 설레지도, 보고싶지도, 벅차지도 않은 만남들에 씁쓸해진다. 묻고 있어도 궁금하지 않은 질문들. 대답하고 있지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답변들. 허공을 돌아다닐 말. 말. 말들... 다시 일년을 기약하면서 돌아서야 하는 그 텅빈 만남들이 싫다. 와서 화전하라고 말하는 이문재처럼,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 몇년 살아라. 라고 말할 만큼 내 맘이 말라있는 것일까. 만날 수 있다는 걸로도 좋았었는데.
한없이 이기적이 되어간다. 돌아서서 후회하는 무의미한 일들의 반복. 이것도 그저 손끝의 후회. 송년모임에서 사람을 마주하고 한 잔을 꺾으며 아무 생각없이 허허거릴거면서. 점점 생각과 일상 사이의 벽이 두꺼워진다. 아무 생각없이 지내는 시간과 고민하는 시간의 균형이 무너진다. 아니,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미안하다.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