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감상문을 써봤다...숙제가 무섭긴 한건지...일이 밀릴것 같아 마감시간 조금 당겨서 썼다. 시작할때는 너무 쓰기 싫었는데...그래도 쓰고나니까 후련한 기분...쓰면서 여러자료 읽고 참고하고 쓰면서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것 같은 느낌이 든다...내가 읽는 방식이 타당한가는 나중 문제지만...어찌됐건 그래도 영화를 이렇게 뜯어보는건 개인적으로 싫다...그것이 난해한 베르히만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
나는 당신의 눈썹이 검고 귀가 갸름한 것도 보았습니다. /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 당신이 사과를 따서 나를 주려고 크고 붉은 사과를 따로 쌀 때에 당신의 마음이 그 사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의 마음> 中에서
제7봉인의 포스터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은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물론 어떻게 영화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가치관과 인식틀에 달린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베르히만’의 영화를 베르히만의 문제제기 안에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은 철학적 경험이다. 제7의 봉인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게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숨어버린 신’의 존재에 대해, 죽음에 대해, 나아가 인간의 구원에 대해 질문하는 그의 영화는 그래서 쉽지 않다. 베르히만의 영화가 더 난해하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영화적 상황 속에서 질문 던지는 일만 계속할 뿐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신과 인간에 대한 그의 사유는 그 자체로 철학적 질문으로서 정확한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오히려 그는 ‘물음’속에 이미 ‘해답’이 있다는 것처럼 ‘실존적 물음’ 그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생각하지 않는 이 시대, 인간에게 던지는 큰 화두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제7의 봉인을 통해서 ‘신’에 대한 그의 질문을 조금은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질문 자체도 그가 제기하는 질문의 영역 안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베르히만이 제기하는 형이상학적 물음이 나에게 의미 있는 질문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그리고 내 삶 속에서 보다 가치 있는 자극으로 남기 위해서 ‘신’의 의미를 다른 식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서구적 신관의 영향에서 조금은 벗어나있고, 또한 아직까지 종교를 갖지 않은 내가 이 영화와 대화하는 방식이다. 베르히만이 제기하는 신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그 질문은 현대 한국사회를 ‘아무런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어떤 화두가 되는가 하는 것을 간략히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베르히만에게 있어서 신이란 무엇일까? 거칠게 말하면 그의 신은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의 하나님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제7의 봉인은 타락한 인간 사회에 대한 반성과 신의 구원에 대한 영화로 읽힐 수 있다. 베르히만은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기독교적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유년 시절 교회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특히 교회 안의 중세 벽화에 그려져 있는 신비로운 신상(神像)과 숱한 죽음의 이미지와 고통받는 인간 모습을 접하며 자랐고 따라서 그가 만든 영화도 그 종교적 가치관 안에서 사유하며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제7의 봉인이라는 제목이 묵시론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요한 계시록의 “7번째 천사가 봉인을 뜯고 뚜껑을 열자, 이 세상은 지옥과 같은 종말의 세게로 변한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는 사실 또한 베르히만의 신이 기독교적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점이다. 이처럼 그는 영화 제7의 봉인 속에서 도대체 희망이란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삶에서 신의 의미를 물으며 신의 현현(顯現)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비참한 현실 속에서 아무런 해결책도 던져주지 못하고 인간의 호명에도 ‘침묵’하고만 있는 신에 대한 원망을 풀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토니우스 블록이 저승사자를 신부로 오인하고 던지는 의문은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구체화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감각으로는 도저히 신을 잡을 수 없는 겁니까? 왜 신은 더듬거리는 약속과 보이지 않는 기적이라는 안개 속에 숨어있는 겁니까?” “나는 앎을 원합니다. 믿음도 가정도 아니고 자식을 원합니다. 나는 신이 나한테 손을 내밀고 모습을 보이고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무서운 공포입니다. 모든 것이 무라는 것을 알면서 죽음을 바라보며 살 수는 없습니다.”
제7봉인의 포스터
인간의 삶은 바로 막막한 공간 속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비극적인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고립되고 절망적인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은 삶의 다른 가치들을 위한 시도를 배제하고 오직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신을 추구하고 희구하고 갈망하는 희망뿐이었다. 그런 관념 속에서 결국 모든 인간이 이르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신에게 이르는’ 그래서 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신은 아무런 구원의 손길도 보내지 않았고 인간이 겪는 고통의 깊이는 더욱더 크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벌주려 내린 재앙이라는 ‘페스트’라는 것도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수많은 인간을 절망적 상황에 빠뜨릴 수 있는가 하는 절규, 그것이 제7의 봉인에서 보이는 기독교적 의미의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관은 좁은 의미의 ‘서구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인간 보편의 문제라는 것을 앞에 인용한 한용운의 시 구절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마음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신학’ ‘신에 대한 질문’이 결국 인간에 대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에게 바라는 것, 신에 의한 구원은 결국 ‘여기’ 아닌 ‘다른 곳’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삶 속에서 부딪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7의 봉인에서 보이는 신의 이미지를 이와는 다르게 파악할 수는 없을까? 주지하다시피 제7의 봉인은 14세기 중엽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기사이자, 신에게 저항하려고자 했고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와 진정성을 찾고자 했던 안토니우스 블록이 겪는 귀향기 형식의 이야기이다. 그가 직면한 세계는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말세적 공포상황이다. 페스트, 처형당하는 소녀, 미쳐가는 사람들…. 결국 그에게 삶은 ‘참을 수 없는 공포’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블록이 화형당하는 소녀와 나누는 이야기이다. 그는 소녀에게 악마를 본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공포에 휩싸인 소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블록이 가졌던 의문은 소녀가 느끼는 공포는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그녀의 절망적인 삶은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의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허상이 아닐까? 신에게 의탁하고 신의 대답을 바라고 신의 침묵에 절망하는 것은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인간이 느끼는 공포가 아닐까하는 질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문 속에서 신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공포를 해소해주는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결국 그것은 인간 삶 자체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물음 속에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은 기독교적 의미의 하나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 속에서 인간이 맹목적으로 믿어왔고 그 안에서 대답을 원했고, 구원을 그려왔던 이성, 합리, 과학 등 그 모든 이념이 될 수 있다. 다음의 언급을 보자.
니체의 신의 죽음의 선언은 그의 미학적 태도의 개인적 표명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단지 불신앙의 공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신’은 기독교 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 이후 진리이자 진정한 실제 세계로 받아들여져 온 이성과 이상으로서의 외재적 세계 일반을 의미한다. 앨런 슈리프트 ‘니체와 해석의 문제’ 中에서 p.53
이렇게 신을 바라본다면 제7의 봉인에서 제기하는 물음은 비극적 세계상황에 대한 문제의식, 파괴적인 현대 문명 속에서 인간이 겪는 삶의 공포에 대한 알레고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가 2차대전 이후 피폐한 인간성, 인간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보다 타당성을 지닐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되어있다. 신이라는 절대이성, 이상적 세계를 바라보고 달려온 인간 역사는 이미 곳곳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근대성, 물질주의,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인간 역사는 역설적으로 인간 세계와 고립되어 있다. 침묵과 구원, 신성과 인간성, 삶과 죽음, 선과 악. 이 양 극단의 대립항 속에서 현대인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를 포기하고 이전처럼 ‘신’의 대답만을 염원하며 ‘신’의 구원을 향해 해바라기 하거나 아니면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인간의 삶 속에서, 그 세계 속에서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영화 제7의 봉인은 후자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베르히만이 제기하는 ‘신’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끝으로 이러한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을 언급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결국 신을 거부했던 사람, 신을 따랐던 사람, 신을 알고자 했던 사람들은 죽음의 신을 따른다. 그러나 오직 욥 부부만은 죽음의 신을 따르지 않는다. 신에게서 대답을 원하지 않고 삶 속에서 노래 부르고 천진하게 삶을 살아내는 인간, 베르히만은 그에게서 희망을 본 것이다. 신이 내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것은 한용운처럼 ‘신의 마음’을 보는 것도 아니고, ‘신의 침묵’에 대해 절망하는 것도 아니며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운 장면중 하나에서 안토니우스 블록은 아름답고 착한, 욥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입니다. 고요와 여명이 깃들인 한 접시의 산딸기와, 한 그릇의 우유와, 저녁 빛에 감싸인 당신의 얼굴과, 당신네 아들 잠든 미카엘과, 칠현금을 연주하던 욥과, 우리들이 나눈 얘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