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진다. 워낙 사는게 팍팍해서인지, 즐거운 일들도 저기 가슴 깊숙히 가라앉아있는 것만 같다. 이 영화가 다시 보고 싶었다. 보면서 잊지못할 장면들을 몇개 꼽아봤다. 고르기 쉽지 않았다. 볼때마다 울림을 주는 장면들이 너무도 많은 영화중에 하나이기 때문일거다.
이 영화를 보고나와 같이 보았던 사람의 손을 꽉 쥐어주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을까.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수만큼 다양하고, 또 같은 사랑을 하는 것 같지만 모두들 자신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한다는걸 알려준 영화. 만나고, 헤어지고, 아파하고, 가슴떨리고, 슬프고, 안타깝고, 설레이는...사랑을 하는 이들의 모든 감정을 담고 있는 영화. 리처드 커티스가 자신이 앞으로 만들 사랑 영화의 이야기를 한편에 담았다고 말하지 않았나. 연인, 가족, 부모, 친구...우리가 매일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얘기가 아름답게 담겨있는 보석같은 영화가 바로 러브 액추얼리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흘러나오는 휴 그랜트의 나레이션. 멋진 인트로. 히드로 공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했다고 한다. 생생한 그들의 모습은 나에게도 있는 그런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어 절절하다. 누구든 헤어지지 않았을까. 또 누구든 반가운 얼굴 마주하고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공항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빚어내는 표정들. 짦은 인트로로 깊은 울림을 주는 한 장면이다.
샘은 조안나라는 미국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 아이를 사랑을 해서 마음이 아프다는 아들 샘과 나누는 한마디. "내 사랑도 걔 하나 뿐이에요" 이제 사랑을 시작한 당돌한 아이가 하는 얘기치고는 울림이 있다. 샘은 모르겠지만, 살면서 더 많은 조안나를 만나, 많은 사랑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랑하고 있는 그 순간. 그건 언제나 유일하고 단 하나인거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포르노영화의 상대역으로 만난 그들. 서로 알아가기도 전에, 마음을 느끼기도 전에 무미건조하게 몸을 부대껴야 하는 그들. 한국 개봉당시에는 삭제되었지만, 나중에 이 장면을 다시 보고는 극장에서 보지못했던게 참 아쉬웠다. 왜 하필 이 장면을 삭제했을까. (나쁜 놈들) 그들의 사랑이 난 참 애틋하고 좋았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좋아해도 마음 드러내기 쉽지 않을 상황. 헤어지기전 "제가 크리스마스에 바라는 건 당신 뿐이에요"라는 말에 감격하는 그가 참 순수해보였다. 그들이 서로의 맘을 확인하고 나눈 키스 한번이, 수차례 했을 포르노 장면보다 더 떨림이 있었다는거. 사랑은 그런거다.
너무나 유명한 에피소드. 친구의 아내를 좋아하는 마크. 좋아하는 맘을 숨길 수밖에 없어 줄리엣에게 필요이상으로 쌀쌀맞게 대할 수 밖에 없다. 남편의 베스트프렌드인 마크와 잘 지내고 싶어 바나나파이 사들고 찾아간 줄리엣. 그리고 발견한 결혼식 테잎. 모조리 줄리엣만 찍어놓은 비디오를 보며 그제서야 마크의 마음을 알아챈 줄리엣. 어색한 관계. 마크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먼저 집을 나선다. 다이도의 음악이 깔리고...아, 정말 안타까웠다. 그 사랑이, 숨길 수 없었던 그 사랑이. 이 장면에서 키이나 나이틀리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패셔너블한 모자, 바나나파이를 들고 웃는 마음. 클로즈업되어 보이는 드레스입은 모습들. 그래서일거다. 마크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던 이유가.
그렇게 끝날줄 알았던 에피소드. 씁씁한 뒷맛만 남기고, 모든 해선 안될 사랑을 하는 사람의 아픔으로만 기억될 줄 알았던 마크. 그는 다시 돌아온다. 아마 며칠을 잠 못자며 고민했을 아름다운 시퀀스로. 가장 인상깊은 사랑고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장면으로 말이다. 머리 뜯으며 괴로워한 그가 선택한 방법. 후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래 이걸로 충분해"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그가 참 쿨해 보였다.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을 사랑했노라고 고백하는 그 앞에서 "우리는 그럴 수 없어요"하고 휙 돌아서지 않고, 그의 입술에 키스해주는 줄리엣이 참 고마웠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는 메시지. 동생과 아내의 외도에 충격을 받은 제이미는 글을 쓰기 위해 마르세유로 떠나고, 거기에서 포르투갈 출신 파출부 오렐리아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를 잊지 못한 제이미. 떠들석한 오페라의 한장면처럼 차려진 시퀀스에서 제이미는 이렇게 말하며 청혼한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런 말 하는거 우습지만, 때론 눈에 안 보여도 확실한 일들이 있잖아요." 그래 맞다. 눈에 안보여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오히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그 사랑을 확신할 수 있었을지도. 서로 이해하기 위해 서로의 말을 배우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겠지.
사랑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고 해야할 러브 액추얼리. 그 많은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고 다시 영화는 히드로 공항을 보여주며 끝이난다. 만나고, 헤어지고, 우리는 사랑을 한다. 사랑할 사람이 없어 힘들다가도, 사랑때문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혼자임에 감사해 하기도 하고 말이다. 또다시 아프기 싫어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결국 혼자라는 걸,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을때, 사람이 참 그리워졌던것 같다.
세상사는것이 울적해 질때면
나는 공항에서 재회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증오와 탐욕속에 산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디에나있다.
굳이 심오하거나 특별한것이 아니어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 아내와 남편...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오랜벗...
무역 센타가 비행기 테러로 무너졌을 때
그곳에서 휴대폰으로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증오나 복수가 아닌,
모두 사랑의 메세지였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 보면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영화의 시작에 흘러나오던 나레이션. 사랑은 어디에나있다. 영화는 영화일뿐이라고 해도. 이렇게 따뜻하지만은 않다고 해도. 언제나 사랑은 내 곁을 비켜가는 것 같지만, 어디에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추워지는이맘때 보면 참 좋을 영화.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다들 사랑하며 살자. 그게 어떤 사랑이든, 괜찮을거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