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앤 세바스찬의 부클릿에서 스미스를 알게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거다. 그들의 송 라이팅은 스미스를 닮아있었고, 그들은 그걸 감추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크렌베리스, 블러, 그리고 오아시스까지. 브릿팝의 영역에서 스미스의 자장은 꽤 넓다. 벨 앤 세바스찬의 앨범을 들으면 들을수록 스미스의 곡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벨 앤 세바스찬의 본류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스미스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시장에서 큰 성공을 한 것은 아니지만 스미스는 얼터네이트 락의 가장 중요한 아이콘이고, 그 영향력 면에서, 그리고 그 스타일면에서 80년대 중요한 밴드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금은 뭐하고 있는지 꽤나 궁금한) 성문영의 글들이 아니었다면 스미스의 노래를 들어볼 생각은 안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벨 앤 세바스찬이나 스미스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이 평론가에게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성문영의 브릿팝에 대한 애정, 특히나 스미스에 대한 애정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들의 모든 곡을 번역했고, 관여한 잡지마다 그들의 특집기사는 빠지지 않았다. 훌륭한 스미스 팬사이트인 onthesidewalk을 방문하면 확인할 수 있다.




앨범으로서 스미스와의 첫 만남은 95년 발매된 Singles였다. (이 인상적인 앨범 커버의 주인공을 알고싶다면 이 곳을 들려보면 된다.) 대표곡들이 망라되어있는 앨범이라 스미스를 듣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처음 플레이를 했을때 모리시의 다소 부담스런 목소리, 그리고 어쩌면 '촌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을 단촐한 연주는 그닥 호감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 자니 마의 기타와 모리시의 노래를 듣고서 스미스의 음악을 '무자극 낭만주의'라 불렀다. 심심하고, 붕떠있고, 가슴을 찌르는 멜로디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밸 앤 세바스찬 탓이었을까. 스튜어트 머독의 목소리는 모리시 보다는 감미로웠고, 이소벨의 첼로는 자니 마의 기타보다 매력적이었다. 그땐 벨 앤 세바스찬의 포크락. 그 세련, 처절한 멜랑꼴리가 날 꽉 채우고 있어서였을거다. 지금이야 스미스 특유의 낭만적인 멜랑꼴리를 좋아하고, 어느 시대든 존재하는 '인간전형'을 노래한 시니컬한 가사를 사랑하지만 말이다.

처음 스미스의 가사가 눈에 들어온 건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를 들으면서였다. 냉소라고 해야 할까. 인간관계에 대한 체험적 발언일까. 정말 내가 살거나 죽거나 내가 누군인지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시간을 주어야 하나. 내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내어줄 시간도 충분치 않은데 말이다.


In my life
Why do I give valuable time
To people who don't care if I live or die ?

사회와 인간에 대한 관계망이 촘촘해지고 복잡성이 증가하는 시기에 스미스의 이런 노래는 루저의 한탄일 수도, 사회를 모르는 젊은이의 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요즈음의 인간관계는 (나에게 관심이 있던 없던) 상대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들 하니까. 그게 인적자본이라고 얘기를 하니까. 하지만,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걸 알아가면서, 그리고 외로움 같은 것에 힘들어 하면서 '그래, 그까짓 것' 하면서 공감을 하게 됐다. 나에게 관심조차 없으면서 그들은 나를 왜 힘들게 하는가. 왜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 그들에게 내 감정을 낭비해야 하나 하는 분노같은것.

벨 엔 세바스찬의 빨간앨범(If You're Feeling Sinister)의 첫번째 트랙 "The Stars of Track and Field"의 가사에서도 이런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네가 죽으면 내가 너를 위해 레퀴엠을 쓸 수 있을까. 너와 나의 관계란 어떤 것일까.


Could I write a requiem for you when you're dead?

밴드 이름인 The Smiths는 모리시의 말로는 "지극히 평범해서 어디에나 있는 이름"이라 선택했다고 한다. 평범하게 노래하고 평범하게 기타치고 평범한 가사를 쓴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자니 마의 피킹기타는 경쾌해서 질리지 않고, 모리시의 가사와 목소리는 이슈를 제기하고, 폐부를 찌른다. 누군가 얘기했던 것처럼 '솜뭉치에 감춘 비수'라고 할까. 비수는 스미스의 가사에서 나오고 솜뭉치는 보컬과 담백한 연주에서 나온다.




요 며칠 스미스의 곡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허전한 마음을 위무해줄 수 있는 친구들. 엘리엇 스미스나, 데미언 라이스, 또 벨 앤 세바스찬은 너무 처절해서 선뜻 손이 가질않고, 스미스는 가벼움이 느껴지는 토닥임이라 그럴거다. 스미스의 곡들은 전주가 무척 짧다. 때로는 모리시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좌우로 정렬한 느낌이 든다. 기타도 그렇고. 느끼하고 밋밋하다는 느낌이 오히려 편하고 공감을 준다. 무자극의 낭만주의, 시니컬한 스미스의 멜랑꼴리는 견딜만 하다.

가장 좋아하는 트랙인 Girlfriend in a Coma를 듣는다. 목을 졸라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친구가 심각하다고, 회복될 수 있겠냐고 '파렴치범'스런 얘기를 하는 시니컬한 80년대의 스미스를 싫어할 수 있을까. 혼수상태의 여자친구를 사랑하기는 한걸까? 아, 이들은 왜 그리 빠르게 해체해 버린걸까.

혹시 유튜브를 가서 스미스의 곡을 듣더라도 최근의 모리시의 라이브 실황은 삼가는게 좋을것 같다. 한때는 뭇 게이 남성들을 졸도시켰던 모리시. (아래 올려놓은 그 당시 실황을 보면 Where are the female fans?라는 코멘트에 적극공감하게 된다.) 그도 세월은 비켜가지 못했다. 그 목소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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