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여 견디기 힘들었던 20대. 시로 말하고 싶어 몇날 밤을 뜬눈으로 세운 적이 많았다. 시로 적어두면 누구든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 막연한 희망으로 하얀 백지같았던 노트를 채워가던 그 시절. 부끄럽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시를 적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그 시절, 그 노트들. 지금 들춰보면 알수없는 두려움과 창피함에 채 한편을 읽어내려갈 수 없는 글들이 되었지만, 그때 그 시들은 고스란히 내 삶이었다.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다.)
김수영 평전을 읽고 나서였던가. 시를 끄적이던 내 손이 부끄러웠던 건. 그리고 감히 시라고 말할 수 없어 노트를 채우던 내 손을 거둬들였던건. 치열함이 결여되어있던, 그저 감상에 불과한 나의 시들은 너무도 가볍게 무의미로 날아가버렸다.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시들이 품고 있었던 의미, 김수영이 시를 쓰며 고민했을 숱한 시간들을 생각하니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때 그의 언설은 그렇게도 강력했고, 아마 많은 이들의 가슴을 내리쳤을 거다. 전위문학, 참여시, 불온성. 그저 내 눈앞의 현실에 바둥거리는 초라한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그때 아주 가늘게 부여잡고있던 '문학'에 대한, 다시 말하면 '직업으로써의 글쓰기'에 대한 지향을 거둬들였다.
다시 김수영의 아포리즘을 읽는다. 그의 시가 주었던 울림은 여전하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있는 雜글이 너무도 부끄러워진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 - 詩여, 침을 뱉어라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나가는가. 그러나 -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 -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詩여, 침을 뱉어라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다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 詩여, 침을 뱉어라
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의 서술이나 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진정한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 生活現實과 詩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實驗的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전위적인 문화가 불온하다고 할 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재즈 음악, 비트 족, 그리고 60년대의 무수한 앤티 예술들이다. 우리들은 재즈 음악이 소련에 도입된 초기에 얼마나 불온시당했던가를 알고 있고 추상미술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유명한 발언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암스트롱이나 배니 굿맨을 비롯한 전위적인 재즈 맨들이 모던 재즈의 초창기에 자유 국가라는 미국에서 얼마나 이단자 취급을 받고 구박을 받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재즈의 전위적 불온성이 새로운 음악의 꿈의 추구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예는 재즈에만 한한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베토벤이 그랬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세잔이 그랬고, 고흐가 그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고, 아이젠하워가 해석하는 사르트르가 그랬고, 에디슨이 그랬다. 이러한 불온성은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不穩'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우리의 38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다. 이 강파른 철덩어리를 녹이려면 얼마만한 깊은 사랑의 불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한가. 그것은 내가 느낀 목욕솥의 용해보다도 더 조용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조용함을 상상할 수 없겠는가. 이것이 다가오는 봄의 나의 촉수요. 탐침이다. 이 봄의 과제 앞에서 나는 나를 잊어버린다. 제일 먼저 녹는 얼음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철이고 싶다. 제일 먼저 녹는 철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얼음이고 싶다. -解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