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고종석 (개마고원,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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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5공화국 초기 삼청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구비구비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석 - 감염된 언어

책을 펴고 얼마 읽지 않아서였다. '감염된 언어'는 긍정의 의미였음을 알고 적잖히 충격을 받았던건... 언어의 감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감염을 통해 언어는 풍부해졌기 때문에 언어를 순화해야 한다는 모든 시도는 전체주의적이고 내재된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고종석의 이야기. (너무 나간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읽고서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돌이켜생각해보면 국어의 오염을 걱정하는 사람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언어 순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닌것 같다. 특히 중국, 일본어에 영향받은 말들을 이야기할때 그렇다.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으로 우리말이 중국어와 일본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건 사실이다. 그로인해 기존에 사용했던 우리말이 밀려나 차용된 언어로 대체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제는 우리말이 되어버려 의미를 획득한 언어를 모두 순화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언어는 이미 사용자에 의해 (다수의 지위를 획득한) 선택된 언어이고, 이미 그 언어는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를 순수한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는가? 번역어 성립사정이라는 책에 나오는 많은 언어들, 일본인들이 만들어냈지만 차용되어 이미 우리말이 되어버린 그 말들을 순화해야 하는가? 설사 합의를 이루어 고쳐나간다고 해도 많은 불편과 혼란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감염된 언어의 한구절을 꺼내어 읽은 이유는 최근 읽기 시작한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표현의 한계는 언제나 느끼는 것이기에 좀더 다듬고 싶어 골랐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취지는 공감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꼭 이렇게 바꿔야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의문. (단편적인 예가 되겠지만) 매표소 -> '표 파는 곳' , 독서하는 -> '책 읽는', 재개 -> '다시 열어', 감속운행 -> '속도 줄 일것' 과 같은 수정은 공감하기 힘들었다. 사실 좀 답답했다.

'的', '超', '大' 따위의 불필요한 말의 사용, '~에 있어서의' 같은 일본식 번역표현, 외계어는 물론 꾸준히 바꾸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말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말들, 표현들, 한국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긍정적인 감염에는 조금 너그러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언어와 언어, 문화와 문화가 치열하게 부딪히고, 상호영향을 받는 요즘같은 시대에 '순결성에 대한 집착'은 가능하지도 않고, 부자연스럽고, 고종석이 말하듯 오히려 우리말에 대한 '죽임의 충동'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고종석의 얘기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고종석의 '영어 공용화론'(뿌리는 복거일의 논리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요약하면 영어 헤게모니, 즉 영어의 언어적 지위는 강화될 수 밖에 없고,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그런 실용적 필요를 무시하고 민족주의라는 담장과 울타리로 쌓아놓아서는 안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영어의 공용어화를 미룰 이유는 얼른 발견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하지 않는 것이다. 영어의 공용어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적극적으로 영어공용어화를 추진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영어가 공용어로 되어가는 추세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추세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벽돌로 담장을 두른다고 해서, 영어의 물결이 그 담장 바깥에 머물러 있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법령으로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한국인들의 영어학습열기는, 대부분의 비영어권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날이 더 커지고 있다. 그 흐름을 막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어려서부터 가르친다면, 사람들이 이중언어 사용자가 되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고종석 - 감염된 언어


짧은 생각으로 영어의 실용적 필요성때문에 영어를 우리말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을 필요도, 그래서도 안된다는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감염된 언어의 긍정성은 우리말을 풍부하게 하고, 우리말의 외연을 넓힐때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말의 당연한 특권적,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까지 민족주의로 공격하는 것은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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