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느낌인지 모르지만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서 문득 정말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그전날 그 노래를 가슴에 담아둔 것도 아니고, 또 외부적으로 그 노래를 되새길 만한 계기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빨을 닦으며, 아침밥의 첫술을 뜨면서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그런 노래들은 나의 하루중에서 오랜시간 머물며 입과 머리 한켠을 지배한다.
문제는 그 노래가 항상 내가 듣길 원하던 노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럴경우 상당히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되새기기 싫고, 이제는 실증나버린 노래가 잠시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계속 반복되어 플레이 되기 때문이다. 남과 오랜시간 있을 경우라면 남 또한 핀잔에서부터 지겹다는 표정까지를 나에게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인위적으로 그 노래를 그만둘 수 있는 건 아니고, 나또한 제발 다른 노래를 듣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건 아니므로, 난 항변의 표정을 짓곤 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내가 잠시 놓아두었던 노래가 나의 무의식에서 깨어나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느낌이 들 경우, 정말 듣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내 무의식이 먼저 알아버리고 플레이 해줄경우는 여간 달갑지가 않다. 기꺼이 갑작스러운 노래를 맘껏 흥얼거리고 아주 기분좋게 그 갑작스러운 틈입을 즐긴다. 결국에는 내 소리에 지치면 시디나 테잎을 걸어놓고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하는 지경까지 가게 된다. 그러면서 한번씩 생각한다. 왜 오늘 이 노래가 나에게 찾아왔는지? 그 알수 없는 이유를 한번씩 되내이며 노래를 듣는다.
오늘 아침 자리를 털고 기지개를 한번 했을때 떠오른 노래는 하덕규의 '자유'였다. 정확히 말하면 앞의 신서사이저의 전주부분이었다. 그 전주를 지나 '자유'라고 외치면서 시작하는 노래가 정확히 한 1분정도 계속 울렸다. 왜 이 노래일까? 나의 감정상태의 반영일지도 모르는 이상한 느낌.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된건...'사랑일기'부터였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나르는 새들의 날개죽지위에' 라고 시작하는 그 노래의 투명함과 세상에 대한 따스함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이 사람이 가진 그 시선이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 너무도 달랐다는 생각도 했지만, 달리보면 그 노래를 통해서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한 느낌을 조금은 바꿔나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나중에 버스라는 것을 타고 학교를 가게되면서...아침 버스창 밖의 종로풍경이 '사랑일기'와 참 어울린다는 생각을 많이했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간에 아침 풍경은 아주 조금은 이 노래처럼 따스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나중에 본 '숲'이라는 앨범 자켓을 기억한다. 아이들의 그림처럼 두터운 크레파스 혹은 파스텔로 그린 것 같은 아주 예쁜 앨범 그리고 그 속의 아주 예쁜 노래들 그 여백과 순수함의 모습이 많이 끌렸었다.
그 후로 그가 지닌 순수함과 깨끗함이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신앙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았고, 그 종교적인 귀의 이전에 한때는 마약에도 손을 대고는 했던 절망적인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암울함에서 투명함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킨 그 일들에 대해서 난 잘 모르지만, 그 절박한 순간에서 터질듯한 자유로움, 새로운 희망, 삶의 의지같은 것을 가장 잘 표현한 노래가 '자유'가 아닌가 싶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곳이 없다고 말하던,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던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시'를 덜어버리고 아름드리 나무, 다른 존재와 함께할 수 있는 나무로 자라날 수 있었던 그 변화를 노래한게 '자유'라는 노래가 아닐까? 그의 '자유'를 들으면 자꾸 '눈물'이 생각난다.
'껍질 속에서 살고있었네, 내 어린 영혼 껍질이 난지 내가 껍질인지도 모르'던 하덕규는 그를 만난뒤 자신이 애타게 찾던게 결국 자유였음을 얘기한다. 그것은 분명히 외재적 현실속에서 난오는 외적 자유가 아니라, 삶이라는 본질적인 문제, 인간이 짊어져야할 삶의 고통과 아픔같은 껍질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내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리라...그런 점에서 안치환 아니 김남주가 말하는 '자유'와 하덕규의 '자유'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난 분명 안치환의 '자유'가 먼저 선행되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유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모든 사람이 하덕규의 '자유'를 고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 무책임한 유물 중심적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하덕규의 '자유'를 고민할 수 있으려면 안치환의 '자유'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외적 자유, '~로부터의 자유'가 없이 하덕규의 '자유'는 무책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건 하덕규의 '자유'와 같은 내 삶에 대한 진실성과 열림에서 나올 수 있다고 느낀다. 꼭 하덕규식의 종교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삶속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각자의 자유가 더 근원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은 무척이나 하덕규가 부럽다. 지금 자유를 들으면서 자유를 힘차게 외치는 얼핏 도취된 듯한 자신감이 난 너무 부럽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짜릿하고 행복한 '자유'의 경험을 가진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는 어떤 느낌일까? 그런 그가 그 자유의 희열을 잠시 가다듬고 '쉼'이라는 노래를 부른 것은 당연하다. '당신의 곁에 있어요...오랜 방황을 끝내고 이젠 돌아와' 쉬는 그 평온한 안식이 지금 난 참 부럽다.
오늘 '자유'라는 노래가 나에게 찾아온 건 그 부러움 때문일까? 봄 햇살 가득한 창밖을 보며 '난 다시 진달래로 피어 그대 타는 가슴으로 스'미겠다고 얘기한 '진달래'를 다시 들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