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첫롤의 설레임

from 사진창고 2007. 4. 22. 20:31

필름을 펜탁스 KM에 넣고, 나름 쉽게 셔터를 눌렀다. 펜탁스 수동카메라에 찍힌 모습들이 궁금해서. 이런 기다림은 디카를 쓸때는 느낄 수 없는 느린 템포, 그래서 어색했는지도 모른다. 36장을 다 찍어내는데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다시 지울수도 없고, 되돌려 다시 찍을 수 없는 필름이기에 충분히 생각했고, 충분히 망설였다.

36장을 다 찍고나서 서툰 솜씨로 다시 필름을 감았다. 천천히 이미 기록된 시간을 되돌려 감는 기분. 손끝으로 느껴지는 촉감, 드르륵 거리는 필름 소리. 참 편안했다. 디지털은 절대 아날로그를 재현할 수 없다는 걸 점점 깊숙히 느끼고 있었다.

한롤을 현상 + 디지털스캔하는데 1500원을 받는 놀랍도록 저렴한 코스트코. 막히는 동부간선을 예상하고 일요일 조금 일찍 길을 나섰다. 맡기고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하다가 1시간후에 결과물을 받아들었다. 설치된 피시에서 썸네일을 잠깐 보았는데, 독특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발걸음이 바빠졌다.

집에 돌아와 피시를 켜고, 시디에 담겨진 사진들을 훑어보면서 필름이란 이런것이구나, 필름의 느낌이란게 이런 것이라는걸 한장, 한장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 나이보다 오래된 펜탁스 KM카메라가 만들어내는 한컷은 지금 그 어느 디지털도 재현해낼 수 없는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게 대견했고, 행복했다.

피사체를 보는 감각이 아직은 부족하지만, 수동필름 카메라의 느낌은 그걸 조용히 덮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후지 오토오토 200이 만들어내는 필름색감은 진득하고, 디지털의 쨍함이 날려버린 편안함과 따뜻함을 되살려주고 있었다. 신기한 것이, 내가 찍는 주변사람들의 표정과 느낌도 DSLR을 대할때와 달랐다. 그들도 자연스럽고, 그 프레임 안에서 편안했으며 그래서인지 그 안에 이야기까지 담겨있는 것 같은 느낌마져 받았다.

디지털과 필름이 굳이 반대편에 서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 또한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사진을 알게해준 필름 카메라가 고맙다. 사진이 기록의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대한 관심, 빈곳을 채워주고, 나의 감성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디지털이나 필름이나 같은 곳을 향해있는 거 아니겠는가. 다른 느낌으로, 다른 감성으로.

아래 사진들은 모두 스캔된 이미지 그대로이다. 이 느낌에는 어떤 후보정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슬슬 한장 한장 조심스레 인화를 해서 집 한구석에 사진벽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겠다.


책상앞에서 처음 필름을 끼우고 찍었던 한컷.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친구결혼식이 끝나고 선릉역의 카페데베르에서 몇장 찍었다. 바깥 풍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입사동기 모임의 맏형. 기동형. KM의 인물느낌을 보여주려, 초상권의 압박을 무릅쓰고 올려본다. 노이즈가 아닌 필름그레인의 편안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페안 풍경. 아이맥의 테크놀러지도 옛날 기계의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사 맞은편 찻집이라서인지, 그쪽에서 근무하는 남정네들이 이 분을 좋아라 했다. 필름 50mm화각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사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줄지어서있는 커피 사진. 의미없는 막샷.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야기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한컷. dslr의 무거움이 때론 영민하게 시간을 조각낸다면, 필름카메라는 그때의 느낌을 편안하게 이어준다. 영화의 한장면 같은 자연스러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페안의 공간감. 백열등 빛이 예쁘게 맺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헤어지기 전에 카페 앞에서 한컷. 묵직하고 진득한 색감때문인지 시간이 프레임 안에 멈춘 것 같은 착각마져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토요일, 거의 떨어져가는 목련꽃을 찍어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집 옆 주차장 석벽. 벽을 타고 흘러내였을 물기. 깊은 흔적을 남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토요일 낮이었는데도, 놀이터에 아이들은 없었다. 가끔 그네타는 아이들이 있긴 했었는데, 항상 이곳은 외롭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인없는, 그네. 하지만 쇠사슬의 단단함. 아직은 비워질때가 아닌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 다시 봤는데, 하루밖에 안지났는데도 더운 날씨 탓인지 한뼘은 자란 느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