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창고

은비령, 2천 5백만년후의 만남

시린콧날 2006. 12. 4. 13:01

드라마를 보고 기쁜마음으로 글을 쓸지는 몰랐다. 바보같은 편견일지 모르지만 텔레비전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슴깊은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오래전에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어째서 어제밤에 이 드라마를 보게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히 정봉수 마라톤 감독의 성공시대를 보려고 했다. 근데 우연히 돌리다가 보이는 이영혜의 얼굴은 채널을 강하게 붙잡았다.

처음에는 진부한 이야기기에 보지 않으려 했다. 한명의 여자와 그여자를 둘러싼 두명의 절친한 친구. 그 사이의 삼각관계. 하지만 범상치 않은 절제된 대사는 언젠가는 감정의 폭풍을 선사하리라는 믿음을 들게 했다. 드라마는 TV문학관의 색채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화면에 담아낸 연출자의 노력과 드라마로서의 다른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점점 주의깊게 보면서 계산된 하지만결코 어색하지 않고 녹록한 감성이 묻어있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보면서 이 작품은 만만치않은 극본을 쓰는 이름있는 방송작가가 썼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되었다. 보면서 내가 왜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백번은 한거같다. 미리 드라마가 하는 걸 알고'은비령'이 하는 걸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만큼 멋진 드라마였다.

자막이 올라가고 나서야 난 이 드라마의 원작이 97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이순원씨의 작품을 극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랬구나... 어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원작이 탄탄해서일까, 글이 가질수 있는 차분함을나름대로 자연스레 배어나오게 만들었고 꾸며진 화면이 아닌 의식의 흐름처럼 자연스런 시각성으로 옮긴,요즈음 머리만 복잡하고 배우의 얼굴만 상영시간내내 보게 만드는 여타 드라마와는 큰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윤석호 프로듀서의 작품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감각적 영상이 그의손에서 탄생한 작품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잘 알지 못하지만 이순원 이라는 소설가의 감수성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걸 휼륭히 극화한 강은경 (맞나?)이라는 작가의 손길도 칭찬하고 싶다. 또 하나 음악... 적절한 곳에 너무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그리그의 '솔베이그의 노래'. 애절한 그들의 사랑을 같이 얘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닷가. 그 무한의 바다에서 잔잔히 깔리던 솔베이그의 노래는 또 하나의 바다처럼 다가왔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때 나오던 사이먼&가펑클의 'Sound of Silence', 곳곳에 보이는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에릭사티의 음악들도 같이 녹아있었다.

또 하나 그들의 은비령. 그들의 바다...그 겨울의 바다. 어떻게 말할수 있을까? 정우가 그녀에게 다가서려고 하는 그 조심스런 마음의 바다. 아픔이 있는 그들을 격렬하게 흔들리며 안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의 바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아름다운 겨울바다 였다. 어디에 있는 바다인지는 모르지만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던 바다. 난 그 바다를 보면서 동해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겨울의 바다는 아니었지만 작년 늦여름 나에게 다가왔던 그 동해의 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힘들었던 나를 조용히 받아주던 그 동해의 망상 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그 바다를 보며 얼마나 그 여름의 동해 바다가 보고싶었는지 모른다.

바다를 만날때 그 둘 처럼 힘들거라면 난 차라리 혼자였던 나의 바다가 더 나았던것 같다. 손잡을 이는 없어도 바다와 얘기할 수는 있다. 얄궂게도 내리던 하얀 눈과 그 속에서 끊어질듯한 그 둘의 사랑...더 말이 필요없다. 힘든 촬영이었겠지만 그들의 그 노력때문에 한보잘것 없는 사람이 추억에 몸서리 치며 그들의 슬픈 사랑을 같이 할수 있었다.

난 현실의 어긋남을 남겨두고 2천 5백만년의 기나긴 시간을 한사람을 위해 기다릴 수 있을까? 그 절박한 인연을 붙잡고 기다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마도 난 내가 가진 당장의 현실을 바꾸려 아둥바둥하겠지...윤회...글세...

1999.2.어느날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일도 그런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세상의 일이란 일은 모두 2천 5백만 년을 한 주기로 되풀이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천 5백만 년이 될 때마다 다시 원상의 주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 그때 우리는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다 다시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여기에 모여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며 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은비령' 中

이순원의 97년 4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 '은비령'을 원작으로 한 TV드라마. 글보다 드라마로 먼저 다가왔던 작품인데, 그때 드라마 보면서 지릿했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읽어본 책보다 더 명징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보고나서 열병처럼 감상평을 써댔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글이 길고, 진하게 그때 생각과 감정들이 배어있다..

나에게 윤석호라는 이름석자를 각인시켜준 작품, 다시봐도 전혀 옛스럽지 않다. 탄탄한 이야기, 빼어난 영상미가 어우러진 감히 '명작'이라 칭하고 싶다.


2006.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