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고 기쁜마음으로 글을 쓸지는 몰랐다. 바보같은 편견일지 모르지만 텔레비전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슴깊은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오래전에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어째서 어제밤에 이 드라마를 보게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히 정봉수 마라톤 감독의 성공시대를 보려고 했다. 근데 우연히 돌리다가 보이는 이영혜의 얼굴은 채널을 강하게 붙잡았다.
처음에는 진부한 이야기기에 보지 않으려 했다. 한명의 여자와 그여자를 둘러싼 두명의 절친한 친구. 그 사이의 삼각관계. 하지만 범상치 않은 절제된 대사는 언젠가는 감정의 폭풍을 선사하리라는 믿음을 들게 했다. 드라마는 TV문학관의 색채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화면에 담아낸 연출자의 노력과 드라마로서의 다른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점점 주의깊게 보면서 계산된 하지만결코 어색하지 않고 녹록한 감성이 묻어있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보면서 이 작품은 만만치않은 극본을 쓰는 이름있는 방송작가가 썼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되었다. 보면서 내가 왜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백번은 한거같다. 미리 드라마가 하는 걸 알고'은비령'이 하는 걸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만큼 멋진 드라마였다.
자막이 올라가고 나서야 난 이 드라마의 원작이 97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이순원씨의 작품을 극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랬구나... 어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원작이 탄탄해서일까, 글이 가질수 있는 차분함을나름대로 자연스레 배어나오게 만들었고 꾸며진 화면이 아닌 의식의 흐름처럼 자연스런 시각성으로 옮긴,요즈음 머리만 복잡하고 배우의 얼굴만 상영시간내내 보게 만드는 여타 드라마와는 큰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8년을 연애한 한명의 여인과 한명의 남자가 있다.그리고 그둘은 얼마후 결혼을 한다. 그 곁에는 그 여인을 사랑하게된 또 하나의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결혼한 남자의 절친한 친구이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남자는 고시에 패스한 그 친구 곁에서 조용히 그 여인을 사랑한다. 결혼반지로 싸우는 그 둘을 보면서 소설가 친구는 어느날 그 여인에게 반지를 선물하려한다. 하지만 그 여인은 가슴아프게도 그소설가 친구가 자신이 사랑하는 준서가 보낸 사랑의 매신저로 착각을 한다. 그리고 소설가 친구는 깊은 좌절을 맛본다.
그리고 3년정도 지난 어느날 다시 만난 소설가와 그의 사랑하는 여인은 옛기억속에서 잠시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그여인에게서 친구의 죽음을 듣는다.소설가는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기는 하지만 점점더 그 여인에게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삶의 곳곳에 배어 있는 친구. 이미 친구는 죽어 없어도,여전히 남아있는 친구라는 존재.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와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관념속에 존재하는 이상한 실재. 그렇기에 소설가 친구는 섭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서로가 절망적인 갈등을 겪는다.
이제는 홀로된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친구의 환영때문에 그 둘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친구의 기억때문에 홀로 남겨 둘 수밖에 없는 정우(주인공). 어느날 둘은 서로다른 시간에 각각 그들과 친구의 삶이 묻어있는 은비령으로 여행을 떠난다.주인공은 그에게 드리워진 비극적 사랑을 친구의 존재를 통해 보상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그 여인은 자꾸만 커져가는 정우에 대한 사랑을 죽은 남편의 영혼으로 그 실재성으로 떨쳐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연이란...그둘은 서로의 다른 방향의 길에서 마주친다.그리고 그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서로를 보듬는다. 우연치않게 정우의 차는 고장이나고 그의 차 안의 시계는 계속 00:00 만을 가리킨다. 그 곳에서 정우는 그녀에게 다가가려한다. 쓸쓸한 겨울바다에서 거리를 두고 서있다가 정우는 용기를 내서 그녀 옆으로 가도 되냐고 묻는다.그 옆으로 가면 손을 잡고 싶을지도 모르는데도 당신의 옆으로 가도 되는지를 묻는다. 그녀는 말이없다. 계속 일렁이는 파도속 에서 카메라는 멀리서 그 둘을 바라보고 정우는 천천히 걸어 그녀 옆으로 다가간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둘은 늦은시간 헤어져 서로의 길을 가지 않고, 은비령에서 밤을 보낸다. 별을 보는 한 사람의 가슴깊은 얘기를 들으며 그둘은 같이 별을 본다. 아니 그 속에서 그들의 운명을 본다. 영원히 돌아올 수없는 별에 있는 사람도 다시 만날수 있나요? 그녀는 묻는다. 그 사람이 정우인지 준서인지 알수는 없다. 별지기(?)는 이렇게 말한다. 별이 공전해 다시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은 2천 5백만년이 걸립니다. 아무리 멀리있어도 또 영원히 돌아올수 없는 별에 있어도 그 시간 후면 윤회해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기다리세요...
정우에게 그녀는 슬프게 말한다. 이 밤이 지나가면 난 당신을 보지않고 그냥 갈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참을 볼수 없을지 몰라요...하지만 우리 2천 5백만년이 지나면 서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요... 그때는 서로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정우는 받아들일 수 없다.그는 말한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했노라고 2천 5백만년이 지나서 다시 만날때 엇갈리지 않기 위해, 진실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지금 이 현실에서 당신을 원했노라고 너무도 간절히 얘기한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그녀는 가고 없다.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정우는 눈을 뜬다. 그리고 고장난 차를 찾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시동을 걸고서 복잡한 마음속에서 그도 떠난다. 정리가 된 것일까? 과연 그는 2천 5백만년의 아득한 시간을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일까? 그리고 더이상 현실에서의 인연을 바로하는 걸 포기한 것일까?
알수없다. 얘기해주지도 않는다. 그의 차안의 시계는 이제막 00:01을 가리킨다. 하루간의 시간은 멈추어 버렸고, 그 둘사이의 마지막 연은 초월적 시간이었던 것을 말해준 것처럼... 이제 그의 시간은 다시 가기 시작하고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가 이제 느끼는 시간은 현실의 시간은 아닌 듯 하다. 그의 시간은 그녀를 간절히 기다리는 2천 5백만년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그녀를 다시 만날수 있을까? 윤회해서 새로운 삶으로 만날수 있을까? 아득하다. 하지만 희망이 있기에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것이다. 2천 5백만년 후의 연인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말이다.
윤석호 프로듀서의 작품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감각적 영상이 그의손에서 탄생한 작품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잘 알지 못하지만 이순원 이라는 소설가의 감수성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걸 휼륭히 극화한 강은경 (맞나?)이라는 작가의 손길도 칭찬하고 싶다. 또 하나 음악... 적절한 곳에 너무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그리그의 '솔베이그의 노래'. 애절한 그들의 사랑을 같이 얘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닷가. 그 무한의 바다에서 잔잔히 깔리던 솔베이그의 노래는 또 하나의 바다처럼 다가왔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때 나오던 사이먼&가펑클의 'Sound of Silence', 곳곳에 보이는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에릭사티의 음악들도 같이 녹아있었다.
또 하나 그들의 은비령. 그들의 바다...그 겨울의 바다. 어떻게 말할수 있을까? 정우가 그녀에게 다가서려고 하는 그 조심스런 마음의 바다. 아픔이 있는 그들을 격렬하게 흔들리며 안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의 바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아름다운 겨울바다 였다. 어디에 있는 바다인지는 모르지만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던 바다. 난 그 바다를 보면서 동해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겨울의 바다는 아니었지만 작년 늦여름 나에게 다가왔던 그 동해의 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힘들었던 나를 조용히 받아주던 그 동해의 망상 바다라고 믿고 싶었다. 그 바다를 보며 얼마나 그 여름의 동해 바다가 보고싶었는지 모른다.
바다를 만날때 그 둘 처럼 힘들거라면 난 차라리 혼자였던 나의 바다가 더 나았던것 같다. 손잡을 이는 없어도 바다와 얘기할 수는 있다. 얄궂게도 내리던 하얀 눈과 그 속에서 끊어질듯한 그 둘의 사랑...더 말이 필요없다. 힘든 촬영이었겠지만 그들의 그 노력때문에 한보잘것 없는 사람이 추억에 몸서리 치며 그들의 슬픈 사랑을 같이 할수 있었다.
난 현실의 어긋남을 남겨두고 2천 5백만년의 기나긴 시간을 한사람을 위해 기다릴 수 있을까? 그 절박한 인연을 붙잡고 기다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마도 난 내가 가진 당장의 현실을 바꾸려 아둥바둥하겠지...윤회...글세...
1999.2.어느날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일도 그런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세상의 일이란 일은 모두 2천 5백만 년을 한 주기로 되풀이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천 5백만 년이 될 때마다 다시 원상의 주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 그때 우리는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다 다시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여기에 모여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며 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은비령' 中
이순원의 97년 4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 '은비령'을 원작으로 한 TV드라마. 글보다 드라마로 먼저 다가왔던 작품인데, 그때 드라마 보면서 지릿했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읽어본 책보다 더 명징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보고나서 열병처럼 감상평을 써댔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글이 길고, 진하게 그때 생각과 감정들이 배어있다..
나에게 윤석호라는 이름석자를 각인시켜준 작품, 다시봐도 전혀 옛스럽지 않다. 탄탄한 이야기, 빼어난 영상미가 어우러진 감히 '명작'이라 칭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