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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예수. 두번째
시린콧날
2009. 10. 7. 22:14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어떤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일 수 있으며,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죽어 하느님이 뭔지 예수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제3세계의 수많은 인민들 가운데에도 하느님 보시기에 참신앙을 가진 사람이 허다한 것이다.
보수교회에선 이런 사실을 엄격하게 부인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을 타협없이 섬기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태도는 실은 하느님을 자신들의 교회 체제에 가두어 놓으려는 말도 안 되는 수작일 뿐이다. 우리가 한낱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도, 혹시라도 내 생각이 그의 본디 생각에 못 미칠까 걱정하며, 그런 걱정을 함께 전하는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 오만하고 권위에 찬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어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예수전 P68~P69
이 땅의 한국 보수 기독교에 대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관습화된 현대 교회와 교리체계에 대한 강력한 발언이기도 할터이다. 그의 이런 견해가 반갑다. 자신만의 신, 자신만의 교회를 얘기하고 그것만이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라 말하는 신이라면 그런 신은 믿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확실한건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은 그런 협애한 하느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전 도처에 보이는 김규항의 교회비판은 날이 서있다. 강독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간에 뾰족하게 드러나있다. 나 또한 그에 동조하는 입장이라 책장을 눌러 넘기게 된다. 교회가 믿음을 독점할때, 교회를 통해서만이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고 말할때, 우리는 그 말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 혹은 독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는 자들로 하여금 사적이익을 취하기 위함이라면 우리는 과감히 "그건 교회가 아니다"라고 선언해야 한다. 예수가 그랬듯이. 다 그런 거지 뭐. 그렇게 눙칠 일이 아니다. 그 폐해는 역사가 증명하고, 현재 한국사회가 증명한다. 그들은 사회악이다.
기독교가 지닌 역사적, 공간적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특수성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일이 우리에겐 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그당시 사회체제 내에서 배태된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니 그 시대의 풍경으로 이해하고, 공부해야할 필요도 많을 거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행한 가치를 설명하고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이 땅의 종교지도자들이 해야할 일이 참 많다. 허나 그들은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고, 더구나 그럴 필요도 없는 듯 하다. 그게 문제다.
기독교에서 교리적 특수성을 걷어내고, 예수의 행동을 다시 읽으면 기독교가 다시 보이지 않을까 한다. 거듭 말하지만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와 가능성은 굳어진 기독교를 걷어낼때 획득될 수 있다. 예수의 헌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석해주는 작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김규항의 책이 다 옳은 방향은 아닐지라도 예수전이 고마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