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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시린콧날
2009. 11. 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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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이 쓴 어루만지다를 읽은지는 좀 되었다. 읽고나서 몇자 적어보려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보탤 구석이 별로 없다. 우리말의 속살을 긁어내어 펼쳐보인 글에 더 보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감탄했고, 지극히 평범한 표제로 글을 풀어내는 능력에 고개 숙였다. 읽으면서 틈틈히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보았다. 이렇게 한 문장씩 떼어내어 보면 맥락과 동떨어지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다시 보니 발췌해놓은 글로도 힘이 느껴진다. 잘쓴 글은 한 문장안에도 깊이와 생명력을 담고 있다.
가냘픔은 일종의 결핍이다. p49
심지어 자위행위 역시, 그것이 전제하는 것은 위로하는 육체와 위로받는 육체의 관념적 구별이다. p55
손톱은 슬플때 마다 돋고 슬픔은 기쁠때 마다 돋는다. p63
이별이 열정을 키우는 것은 부분적으로 기억의 미화작용 때문이다. 어렴풋한 기억속에서, 먼 곳의 연인은, 이미 죽은 연인은 한없이 고귀하게 치장된다. 그때 부재의 사랑, 곧 그리움은 최고의 사랑이 된다. p111
불교에서는 결과를 내는 직접적 원인을 인이라고 하고 외적 간접적 원인을 연이라 한다. p123
우리들 대부분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신론자다. p130
간지럼의 쾌감은 아무런 고통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간지럼은 부드럽고 절제있는 쾌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쾌감에 견줘, 죄의식이 따르지 않는 쾌감이기도 하다. p148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진 뒤에야, 그 스스럼은 점차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진다. 가슴 두근거림도, 얼굴 붉어짐도, 어눌함도 차차 잦아들어 이윽고 없어진다. 그것은 열정이 탈바꿈을 겪는다는 뜻이다. 열정은 정으로 도타워진다. 스스럼은 정다움으로 바뀐다. p176
어루만짐이라는 형태의 스킨십은 사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사람의 살은 다른 사람의 살과 닿을 때 생기를 얻는다. p234
순전한 사랑은 그 주체끼리 으뜸의 자리와 버금의 자리를 맞바꾸는 행위다. 또는 최소한, 자기 다음의 자리, 즉 버금 자리에 한 타인을 세우는 행위다. p247
의식 속에 한점 그늘, 한 점 구김살, 한 점 주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겪지 못하고 생을 지나쳐온 것이리라. p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