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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에서의 충고, 또다시 기형도.

시린콧날 2009. 7. 2. 10:36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의 삶과 문학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박해현 (문학과지성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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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20주기(관련 기사)를 기념하여 나온 '정거장에서의 충고'. 천천히 읽고있다. 이 시는 생전에 그가 첫 시집의 제목으로 삼으려했었다고 한다. 그랬다면 시집이 주는 무거움이 달라졌을까. 김현이 고른 '입 속의 검은 잎'은 언제나 어둡고 무겁고 슬프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 노제를 지켜보며 '입 속의 검은 잎'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었다. 어떤 기억할 만한 죽음을 앞에두면 언제나 그의 시가 생각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떻게 떠나간 넋을 추억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이 아닌가 싶다.

다시 그의 시집이 미친듯이 읽고 싶어졌다.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그의 젊은 죽음이 없었다면, 신화가 되어버린 그의 부재를 걷어내고 시집을 읽을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지금처럼 기.형.도라는 이름이 주는 비극성, 김현이 말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치열하게 삶을 고민했던, 한국 현대시의 하나의 미학을 세운 시인으로 그를 읽을 수 있을까. 그랬다면 그는 지금처럼 많은 청춘들에게 읽히고 기억될 수 있었을까.

세상을 떠난지 20년이 흐른 시점에서 그 또한 자신 앞에 굳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고 싶어하진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도저한 비극성의 이미지를 벗고 싶진 않을까. 그래서 다시 시집을 읽으며 새겨진 활자 그대로 읽으려했다. 눈, 바람, 물, 빈집, 진눈깨비, 고드름, 안개의 시인. 강렬한 울림으로 다가온 잠언 혹은 선언들. 지금보다 어렸을때 내가 시집을 받아들고 날밤을 세웠던 기억도 잠재우고 현대인의 소외와 절망, 희망없는 세상을 그린 시 그 자체로서 읽으려 했다. 그러자면 내 기억, 그 시집에 내 삶을 투영하며 읽던 시절도 걷어내야 했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시를 읽으면서 처음 그의 시집을 열며 떠올렸던 갑작스런 요절을 지워낼 수가 없다. 죽음이라는 단절을 떠올리며 읽었던 말들을 이젠 날것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쩌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다. 가까운 지인들이 그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시로서 재평가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겠다. 농담을 잘했고, 노래를 잘 불렀고, 이해심많고, 타인을 배려했던 따뜻한 친구 기형도가 죽음, 어둡고, 절망적인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것이 내심 속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그럴 수 없을것만 같다.

퇴근길이었다. 비가 흩뿌리는 지친 밤에 그의 시 진눈깨비가 생각났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으나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그저 익숙함일 뿐이다. 어느새 내 얘기가 되어버린다. 걸음을 옮기며 시선이 흐르는 발끝에는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생각나고 여전히 나는 흩날리는 진눈깨비처럼 결코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기에.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던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 길 위로 사각의 서류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개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지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개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기형도

기형도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말했다. 곧 마감할 삶을 예측한 것은 아니겠지. 더 살더라도 지금까지 했던 경험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던 거다. 그런 탓일까. 그 보다 더 긴 삶을 살고 있지만 문득 살며 시가 자꾸만 겹쳐진다. 어떻게 '입 속의 검은 잎'을 여느 시집처럼 읽을 수 있겠는가. 난 그럴 수 없다. 황인숙처럼 기형도라는 이름이 더이상 나를 울고싶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슬플때 난 그의 시를 호출할 것이므로. 살아있어 힘겨울때 그의 시를 읽을 것이므로.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황인숙 - 진눈깨비2-죽은벗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