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창고

민방위 훈련장에서, 그는 (20090324)

시린콧날 2009. 3. 23. 18:07

어제는 민방위 훈련이었다. 나이가 들어, 예비군에서도 처절하게 외면당한 '드디어' 민방위 세대가 된거다. 혹자는 남자로서의 정점은 이제 '바이바이' 한거라 자조 하기도 하지만, 내가 막상 밟은 민방위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일 마무리를 하고, 휘리릭 공가를 냈다. 휴가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직장인이 되고나서 남들 다 일하는데 쉴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왜 그땐 몰랐을까라며 땅을 치고 후회많이 했다.

민방위 장소는 집근처 문화회관. 가기전부터 시간 죽일 방법을 궁리했다. 잠도 안오는 상황이면 곤란하다. 아이팟에 영화를 넣고, RSS로 기사를 긁어넣었다. GRIS라는 멋진 툴로 블로그도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대강당이었는데, 의자는 무척이나 편해서 수면을 방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의는 고맙게도 화재와 가스에 대한 안전교육이었다. 전에는 이념교육을 하기도 했다는데, 그건 없어진것 같다. 강의 들어가기 전에 던지는 시시껄렁한 농담부터 철저히 외면했다. 짜고치는 고스톱이랄까.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고, 아무도 듣지 않았고, 말하는 강사는 듣는 사람을 보지 않았다.

출석도장을 받으려 줄을 서다가 좀 겁이 났다. 좀 서글프기도 하고. 내 또래임이 분명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풍경. 왜인지 모르지만 밥줄을 설때나, 예비군 훈련을 받거나, 지하철에서 일사불란하게 퇴근하는 내 또래 직장인들을 보면 좀 징그럽고 겁이 난다. 뭐랄까.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같은 생각들을 하며, 같은 장소에 집결해서 시간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나도 다르지 않다는게 서글프다. 다르고 싶지만 다를 수 없는 그 존재들. 살아간다는 것. 나란 존재는 그저 수많은 모래알에 박힌 알갱이 하나 일 뿐이라는 때아닌 존재론적 고민이 고개를 든다.

그러다가. 아이팟을 켜고 기사를 훑어봤다. 업데이트된 씨네21이 눈에 들어온다. 최보은의 칼럼에 눈이 멎었다. 제목도 도발적인 '멀쩡한 직장에 다니는 당신도 멀쩡한가'. 안그래도 생업에 종사하시다 잠깐 들르신게 역력한, 얼굴 전체에 그늘이 드리워진 사람들 무리를 보며 심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제목은 뭔가. 읽으면서 이 상황을 생각하자니 깝깝한거다. 


맞는 말인데, 어딘지 불편하다. 당연한 말인데도, 불편하다. 누가 모르나 체질과 적성에 맞지 않다는 걸. 그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번씩 되새김질 한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가 비운 자리가 쉽게 매워지는 것을 보며, 결국 내가 비운 자리도 몇초도 안되어 메워질 거라는 것. 누가 모르나 소모품처럼 버티며 직장 다닌다는 것. 글 쓰는 최보은씨는 칼럼 쓰며 밥먹을 수 있고, 글발 떨어지면 깨끗이 주변정리하고 '인생, 뭐 있다'며 돌아설 수 있겠지. (이런 반응, 너무 유치하다.) 부아가 오른다. 다 맞다. 맞는 말을 정색하며 꼬집어 지적해주니 싫더라. 어쩔 수 없음에 기대어 살고있는 건 아닐까 싶은 괴로움. 뭐가 무서워 뛰쳐나가지 못하는 걸까라는 서글픔. 내가 나에게 참 미안한 마음. 왜 모르겠나. 긁어주니 아팠다.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과 어긋나고 있다는 걸 느낄때, 남아있는 이유를 찾아 허덕이곤 했었다. 의미를 못 찾으면 못 견딜것 같은 절박함. 해답이 너무 어려워, 차라리 질문을 포기하기도 여러번이었다. 움직이기 보다 움직여지는 일상이란 참 무섭지 않은가. 시들어가는 걸 모른채 시들어 가는것 만큼 비참한 게 어딨을까. 일상의 가치를 부르짖어도 무게는 덜어내기 쉽지않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라는 무서운 질문. 아...항상 회피하고, 때론 주저했던것 같다.

민방위 출석표를 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을버스를 타려 한참동안 줄을 섰다. 옷깃을 여며도 참 많이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