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창고
오빠 (20090311)
시린콧날
2009. 3. 11. 17:36
대학교때 여자후배가 남자선배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오빠가 여성이 손윗남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호칭이 아니라 그보다는 알콩달콩한 '연인관계 어디쯤에서나 부르는'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여자후배들은 '오빠'라는 호칭대신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학형'의 줄임말이라고들 했다) 선배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순간 손윗 남자와 손아랫 여자라는 관계망은 무화되는 효과가 있었을거다. 처음에는 솔직히 징그럽고 불편했으나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도,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도 타인이 들었을때의 '오해'탓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서 적어도 대학내 선후배관계에서 오빠라는 호칭은 공식적으로 쓰기 힘들었다. 물론, 개인적인 대화에서나, 연인을 지칭할때는 여전히 사용되었겠지만, 예를 들어 동아리모임에서 A여자후배가 B에게 C남자선배를 지칭하면서 "C오빠의 의견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이 점은 '누나'라는 말을 사용할때도 마찬가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써서는 안될 호칭이라고 할까. 이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인식하지 않을까 싶다. 써도 될 상황과 써서는 안될 상황. 그런 점에서 '형'이라는 호칭은 대학내에서 어느정도 '씨' 혹은 '선배'와 같은 의미맥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여기까지는 '오빠' 호칭을 비판하는 의견에 대체로 동조할 수 있다. 예전에 경향신문에 실렸던 넘쳐나는 '오빠' 라는 글에서 지적한 한혜진씨나 이소연씨의 '오빠'에 대한 지적도 그 점에서 동의할 수 있다. 그것이 공적인 자리에서 타인을 지칭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점에서다. 전에 갓 입사한 여자후배가 나에게 "C오빠가 이렇게 알려줬습니다"라고 했을때 지적했던 이유와도 같다. 물론 의도한게 아니라 불러왔던 버릇이 나도 모르게 나왔던 상황이었을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나'와 '오빠'의 차별적 사용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선배'와 '오빠'와의 차별적 사용과 같은 범위에 놓일 수 없다는 말이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흔히 '오빠의 정치학'이라고도 말하는, 여성이 남성에게 '오빠...'라고 했을때, 혹은 남성이 여성에게 '오빠가'라고 했을때 느껴지는 의미맥락을 단칼에 외면할 수는 없다. (즉, 의존적이라거나, 일종의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 하지만, 그것을 모든 관계망에서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지적이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이라 비판받을 수도 있다. 소녀시대가 뭇 남성들을 '오빠'라고 불렀을때 뭇 남성들이 느끼는 '판타지'를 개인적인 영역까지 확장할 수 없는것 아닌가.
'오빠'라는 호칭이 불편하다면 부르지 않으면 되고, '오빠가...'라는 말을 들을때 내포한 의미관계가 불편하다면 '쓰지 말아주세요'라고 할 수는 있겠다. (물론 정색하며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오빠'라는 호칭에는 가부장주의, 의존성, 성적 불평등의 의미가 내포 되어있고, 다른 호칭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으므로 써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은 불편하다. 더구나 '오빠'라는 호칭은 연인사이의 언어이고, 그외의 대상에게 사용하는 것은 그 의미를 낭만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는 말에는 '엇! 이거는 좀...'하게 된다.
해당 이미지는 본문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을까 :)
남성의 입장에서 봤을때도 '오빠'라는 호칭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건 오빠라는 호칭이 놓이는 관계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어떤때는 '얘가 왜 나를 이렇게 부를까' 싶을 때도 있다. 내가 그를 '오빠'라고 부를때, 그녀가 나를 '오빠'로 불러줄 때, 그 호칭은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멀때, 뜬금없이 오빠라는 호칭이 놓인다면 불편하지 않을까. 또한 '오빠'라는 말을 던질때, 저 오빠가 무언가 해줄것을 '기대하며' 부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오빠'라 불리었을때 그녀에게 뭐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된다는 것도 좀 오버스럽다.
딴소리일 수 있겠지만, 난 '형'이라는 호칭에 인색한 편이다. 그렇게 불러도 무방한 선배들이 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다. 그렇게 부르는게 자연스럽고, 듣는 사람도 친밀함에 좋아할지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이라는 말을 쓸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오빠' 상황을 '누나'상황으로 대치해도 나에겐 그다지 다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호칭도 사회적인 구조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며 남녀사이의 꼬기꼬기한 '젠더 불평등'을 고려한다면 '누나와 오빠가 같은 맥락이라는게 말이 돼?'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마무리가 안된다. 결론은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자는 말이되는건가.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