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창고

휴식, 빛과 소금 (20090221)

시린콧날 2009. 2. 21. 18:14

늦잠을 잤다. 오전 내내 고스란히 잠에 취해있었다. 완연한 햇살의 느낌. 눈을 뜨고 30분 정도 나른함을 즐겼다. 토요일. 게으를 권리가 있는 시간. 누워서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왼손을 휘휘 저어 머리맡에 있는 아이팟을 찾았다. 아직은 눈이 부셔 가늘게 실눈을 뜨고 아이팟 화면을 바라본다. 두세번 앨범들을 훑어보다 빛과 소금의 1집에서 손가락이 멈춘다. 첫곡은 연주곡 '아침'. 쫀득한 베이스. 경쾌한 키보드. 머리가 맑아진다. 오늘 노래 참 잘 골랐다. 불멸의 히트곡 '샴푸의 요정'. 조건반사처럼 홍학표와 채시라 얼굴이 떠오른다. 이 노래 들을때는 항상 그랬다. 1990년에 발표된 앨범. 또 놀란다. 연주실력이 장난이 아니다.

갑자기 느껴지는 허기. 느릿느릿 걸어서 렌지에 올려져있는 국을 데우고, 남은 볶은밥에 참기름을 두방울 떨어뜨린다. 고소하다. 창문 하나만 열어서 밖을 본다. 아파트단지, 다니는 사람이 없어 썰렁하지만 햇살은 따뜻해보인다. 토요일 오후같은 햇살이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런게 있다. 첫술뜨면서 티비를 튼다. '아내의 유혹' 재방송이 한다. 한 3분보다가, 매번 그렇듯이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채널을 돌린다. 조금 배가 부를때까지 먹고, 가지런히 싱크대에 그릇을 담아넣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담고, 달달한 커피가 먹고 싶어 맥심티백을 뜯는다. 설탕조절해서 먹으라는 녹색부분은 가볍게 무시하고 머그컵에 가루들을 왕창 털어놓는다.

따뜻한 머그잔을 두손으로 쥐어본다. 발끝까지 뜨끈한 느낌. 밤새 틀어놓은 보일러 탓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내가 가장 편안해하는 자세.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오래 유지해야하니까. 커피는 왼쪽에 아이팟은 그 아래. 노트북을 가슴팍까지 당겨서 전원을 켠다. 아...'그대 떠난뒤'가 나온다. 이 노래 참 좋아했다.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만큼. 옛날 생각이 푸드득 날아온다. '언젠가 그대와 나는 비를 맞으며 이 길을 걸었지. 우리 서로 의지하면서. 한없이 이 길을 걸었지' 이별 뒤에 추억을 곱씹는 일. 이리도 찌질할 수가. 그러나 엄청난 호소력의 폭풍. 사랑하고 이별하는게 다 그렇지 뭐.

배도 부르고, 입 안의 커피도 적당히 달다. 한모금 들이키고 '하~'하면서 오버도 한다. 세상 가장 편안한 자세. 나른함.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 노트북 키보드를 튕기며 시간에 감사한다. 내참, 안분지족이 따로없다. 1집의 마지막 연주곡 '그녀를 위해'가 나온다. 모든게 그리 좋을 것도 없지만,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