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지골로(American Gigolo), 그 시절의 스타일리쉬
주말에 그동안 미뤄놨던 영화들을 꺼내봤다. 본래는 여러편을 보려고 했는데, 맘 같지가 않아서(집중력 결여) 1980년작 아메리칸 지골로(American Gigolo)와 1971년도 '베니스의 죽음'을 봤다. 너무 심각해서 보는 내내 집중 또 집중해야 하는 영화는 엄두가 안나서 먼저 골라놓은게 아메리칸 지골로였다. 리차드 기어가 처음으로 자의식을 가지고 접근한 영화라고 하는데, 나에겐 영화 자체보다는 리차드 기어와 주변 인물들이 뿜어내는 스타일이 더 인상적인 영화였다. 말이 필요없다. 인트로만으로도 그 스타일을 느껴볼 수 있다.
인상적이지 않은가. 뭔가 좔좔 흐르는 느낌. 제목의 Gigolo가 '기둥서방'이라는 것만 빼면 어느 잘나가는 재벌 2세쯤의 생활이라고 할만큼. 팔팔한 리차드 기어의 세련미도 눈을 사로잡는다. 우리나라 개봉시에는 아메리칸 플레이보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는데, 기둥서방과 플레이보이는 엄연히 다른 만큼 적절한 제목은 아니었던 셈. 기둥서방은 직업이고, 플레이보이는 취향이랄까. :)
블론디(Blondie)의 Call Me는 귀를 사로잡는다. 데보라 해리의 농염한 목소리가 야릇한 상상을 하게 한다고 할까. 음악을 담당한 조르지오 모로더는 이 영화로 일약 스타 음악감독으로 부상하게 된다. 디스코풍의 Call Me는 가벼운 팝음악이지만, 묘한 분위기로 영화 전반을 규정한다. 시원스런 고속도로를 달리는 벤츠세단, 바람에 날리는 수트도 영화적 현실을 구축한다.
몇가지 재미있는 얘기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줄리앙이 입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수트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의상중 하나로 꼽힌다. 영화에 등장한 아르마니 수트는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게 된다. 몇벌인지 세어보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갈아입는 리처드 기어의 수트. 정말 지금 가져다 입고 싶을 만큼 스타일이 살아있다. 정장 수트의 단정함과 딱딱함에서 벗어나 섹시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리처드 기어가 입은 수트를 세계를 뒤흔든 10벌의 수트중에 하나로 꼽았다. (마오쩌둥의 수트가 제일 먼저 올라있다.) 타이틀롤에서는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성공으로 그는 메이저로 진입하게 된다. 영화에는 리처드 기어의 전라가 한번 등장한다. 정사신 후의 다이얼로그 장면인데, 지금이야 불교에 귀의하신 분위기있는 영화배우시지만, 이 당시 섹시가이로서의 아우라를 조금은 느껴볼 수 있다.
1980년 미국. 기름기 좔좔 흐르는 팜스프링이 배경인 이 영화. 세세한 망원경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레이건이 들어서던 그 무렵의 미국. 그 터질듯한 경제적 풍요가 느껴진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요즈음 시절을 떠올리면 '그 시절, 참 좋았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만큼. 종반부, 얼굴에 기름때 묻히고 누명을 벗기위해 동분서주하던 그가 처참해 보였던 건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지만, 그 뒷맛은 그래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