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창고
이제그만, 여기까지 (20081121)
시린콧날
2008. 11. 21. 17:43
한달넘게 나를 괴롭혔던 일을 오늘 끝냈다. 그 일만 줄곧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여잡고 끙끙대던 그 일을 손에 놓으니 한결 홀가분하다. 게다가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라니. 하는 일의 성격상 별탈이 없이 일이 마무리되면 스스로 '잘한거'라고 위안주고 싶지만, 나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고 그냥 덜컹거리지 않으면 '본전' 혹은 '당연한 일'쯤으로 다들 생각한다. 뭐 매번 느끼는 것이니 새로운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마무리하고 돌아앉아 있으면 조금 서운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테스트하고 전전긍긍하고 조바심내고 심지어 잠들기전에 그 일 생각에 고민하는건 오로지 나 뿐이니.
젠장스럽게 변화무쌍한 요구사항들, 쌓이는 테스트 자료들, 수정요구 사항들 때문에 허덕이기도 하고, 때론 예민해져서 전화기에 대고 필요이상으로 까칠하게 굴기도 했다. 반성한다. 아직 수행이 부족해서 은근하게 감정을 숨기는 걸 자주 잊어버린다. 일에 있어서 프로란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을 숨기고, 해야할 말을 정리해서 얘기해야 한다. 다만 그렇게 하다보면 나만 손해보는 것 같은 느낌에 같이 '질러버리곤' 한다는게 문제. 후회는 하지만, 그 순간엔 그렇게 안하면 홧병에 뒷목잡고 쓰러질까 싶어서 참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협의를 회사공용 메신저, 혹은 전화로 하기 때문에 오해도 많고, 실제 감정 이상의 반응도 보이게 된다.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메신저로 내용을 조율하다가, 안되겠다 싶어 전화로 얘기하다가 감정이 격해져 서로 언성을 높이고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두고보자...' 점심 때가 돼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아까 그 사람을 딱 마주친거다. '식사 잘하세요'하고 멋쩍게 서로 웃는데, 아깐 왜 그랬나 싶더라. 얼굴 마주하면서까지 화내기는 "그렇게 해봐!"라고 해도 쉽지 않다. 사실, 직장에서 크게 싸울일은 없는 것 같다. 실망은 한다해도. 일로 부딪히는 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성의의 문제이니까. 상대가 그것만 보여준다면, 아무리 거지같은 감정의 상대라도 싸울일은 없다는게 지난 5년간 축적한 짧은 경험이다.
뭐, 다음주부터 새로 분석해야할 업무도 있지만, 아까 "이만, 여기까지"하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비웠다. 어떤 노래를 들을까 하다가 노라 존스의 One Filght Down을 듣는다. 맥심 아라비카 부드러운 블랙믹스 한잔을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요 녀석 꽤 괜찮다. 16층 빌딩 창문에서 보는 북한산 능선에 깨끗한 햇살이 드리워졌다. 늦가을 지는 해가 따뜻해 보인다. 가끔 이렇게 누리는 잠깐의 여유, 일 마친 옅은 만족감이 좋다. 일할 수 있음에 잠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제, 두 팔을 곱게 펴놓고 음악을 들으며 나의 옛모습을 보러갈 시간이다.
In this place
Where your arms unfold
Here at least you see your ancient face
Now you know
Now you know
One Flight Down / Norah Joh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