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창고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렵다 (20081119)
시린콧날
2008. 11. 19. 16:15
나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어떤 날은
꿈 속에서도 불안했다.
며칠 못 보아도 불안했고
자주 만나도 불안했고
함께 있어도 마음이 안 놓였던 것은
그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가면 갈수록 벌어지는
'현실'이란 틈새,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그 작은 틈새가 나는 두렵다.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렵다 / 이정하
이정하의 시. 많이 좋아하진 않았다. 좋다. 싫다. 사랑한다. 힘들다. 아프다.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그의 시들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감추어도 새어나오는 절절함이 아니라, 조금의 감정도 담아두지 않고 내뱉는 설익음. 그런 휘발의 느낌이 싫었을 거다. 사랑시는 사랑한다고 내뱉는, 그런 직선의 감각은 아니지 않나. 참을 수 없는 감정을 곱게 말려두는 느릿한 곡선의 감각에 가깝지 않은가. 시를 두드릴때마다 그 말린 자욱이 슬며시 스며드는 그런 사랑시가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몸을 움츠리고, 코트깃을 여며도 폐부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오늘 아침 초겨울 바람처럼. 이 시가 가슴 가득 들어온다. 그가 말하는 '현실'의 스펙트럼이 너무 큰 탓에 그가 두려워한 작은 틈새가 어떤 것인지 알기는 힘들다. 허나, 너와 나의 관계망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라는 무서움은 이해할 수 있다. 너와 나를 둘러싼, 지극히 이차적인 것이어야 하는 그 현실의 무게가 내리 누를때 느끼는 두려움. 그래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틈새. 그렇기에 못 보아도, 함께 있어도 편할 수 없는 거다.
그럴때, 현실은 너와 나를 둘러싼 배경이 아니라 너와 나를 가르는 벽이 된다. 작은 틈새는 결국 두터운 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