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창고

엘자를 추억함...T'en va pas

시린콧날 2008. 9. 29. 09:29



오랜만에 프랑스 여가수의 노래를 들어본다. 난 사실 남자가수가 부른 샹송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한건가 싶기도 하고...) 유명한 몇몇곡을 제외하고는 별로 '찾아서' 들어본 기억도 없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제인 버킨을 좋아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듣게되는 세르주 겡스부르가 있다.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인지 '샹송 = 여성보컬'의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도식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몇 명 특히나 좋아하는 가수를 열거하자면 아까 말한 제인 버킨, 그리고 그녀의 딸 샤르롯 갱스부르, 프랑소아즈 아르디, 아나이스, 거의 팝가수라고 해도 이상이 없을 빠뜨리샤 까스 (특히 그녀의 라이브 음반) 요상하고 도발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밀렌 파르메르 정도가 되겠다. 이 리스트는 당연히 중고등학교 시절 자연히 형성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마지막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73년생 프랑스 여가수 엘자(Elsa Lunghini)가 있다.


이쁘다. 이 자켓을 보면서 나를 위해 노래를 속삭여주는 상상을 했었드랬다.


예전에 엠티비 물결을 타고 한국에서도 뮤직비디오라는 것이 각광을 받게 되었을 즈음, 아니 그 이후 암튼 지구촌 영상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월간 잡지로도 발간되었다) 음반을 사모으는 게 부담되던 쪼들리던 중고등학교 시절이라 이때 틈틈히 보여주던 뮤직비디오를 보기 위해 금요일 7시인가 방영했던 그 프로그램을 꼬박 시청하고는 했다.

어느날 처럼 티비를 보다가 시선을 멈추게 하는 화면이 나왔다. 화면에는 한 여름의 백사장(미국의 LA쯤 되어보이는)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한 놈(이라고 하면 너무 심하겠지만 그땐 그런 맘이었다)과 아주 매력적이고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 하나가 웃으면서 뛰어다니고 있는 뮤직비디오였다. 한놈은 글렌 메데이로스(Glenn Medeiros)였고, 다른 여자아이는 엘자였다. 글렌 메데이로스는 반짝이 팝가수라고 하면 서운해하겠지 다 알겠지만 하와이출신 가수로 약관 17세에 조지 벤슨이 불렀던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를 리메이크해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가수이다.




그 노래가 영어로는 Friend, You Give Me a Reason이었다. (불어로는 Un Roman d'amitie) 그 풋풋하고 예쁜 목소리가 깔리고, 그 위로 하얀 백사장을 뛰어다니던 엘자라는 여자가수는 그날 저녁 내 시선을 붙잡았다. 괜히 그 곁에 서있던 글렌, 그 놈을 못내 구박하면서(지금도 흥분을...) 엘자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그 이후로 이리저리 그녀의 음악을 찾아다니다가 친척형 집에서 그녀의 1집 테잎을 빌릴 수가 있었다. (그리곤 안돌려줬다. 미안해 형) 다 좋아했지만, 거기에 있었던 Mon Cadeau라는 노래를 많이 들었었다. 소녀적인 감수성이 뚝뚝 떨어지는 노래. 가사와 함께 들어보자.




참 예뻤다. 그녀의 노래, 아니 목소리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어의 발음이 주는 이질감과 달콤함이 더 강했던 것 같지만 팝음악(물론 음악적으로는 프렌치 팝이지만)에서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목소리에 더 끌렸던 것 같다. 게다가 청순미, 내 또래 아이가 불러주는 것 같은 느낌에 그 당시 내 감정선이 심하게 튕겼을 수도 있다.

그 뒤로 결정적으로 엘자라는 여자가수를 내 마음의 아이콘으로 삼게된 한곡의 노래가 있다. 지금은 김민석(이라고 쓰고 김민새라고 읽는다)부인으로 살고 계실 김자영이라는 아나운서가 KBS2 FM에서 11시에 하던 프로그램. 드물게 제3세계 음악을 소개해주곤 하던 그 방송의 특집이 바로 엘자였다. 

프로그램 중간인가 끝부분쯤 엘자의 가수 데뷔곡이라고 하면서 노래 한곡을 소개해줬다. 그녀가 13세에 ‘Ia femme de ma vie’ (내 인생의 여자)라는 영화의 삽입곡을 노래했는데, 지금 틀어주는 판이 아주 구하기 힘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이야 베스트 음반에서 쉽게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제인 버킨이 출연해서 잊지않고 있는 그 영화에 삽입된 곡. 아무튼 그 노래는 T'en va pas였다.





'아빠, 떠나지마세요'라는 제목의 곡. 들어보면 알겠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노래. 더구나 13살에 부른 노래라는 묘한 매력이 겹쳐지면서 (이상한 상상은 아니다...) 난 엘자라는 여자아이에 푹 빠졌다. 곁에 있던 카세트데크에 녹음테잎을 넣고, 나중에 부랴부랴 이 노래를 녹음해서 들었다. (비극적인 것은 앞부분 시작이 짤렸고 게다가 끝부분에는 김자영 멘트가 들어있었다는 점. 그때 녹음해서 들을때는 빈번한 일이었다. 특히 김기덕의 2시에 데이트는 그 중 최고)




뭐 사실 말해서 엘자를 좋아하게된 기간은 길지않다. 그 강도야 말할 필요없을 정도로 강렬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이런 소녀적 감수성의 음악은 더이상 날 사로잡지 못했다. 게다가 음악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전의 아이돌의 느낌이 줄어들다보니 노래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문득문득 기억나긴 했지만 그녀 목소리에 떨리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라고 해야 정확할거다. 그녀의 인기는 적어도 한국내에서는 판을 거듭할 수록 사그러 들었다. 전체적으로 팝음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수록 이런 3세계 음악에 대한 소개와 관심은 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3집의 독특한 노래 Supplice chinois의 Toop too-too toop하고 시작하던 부분은 그녀의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런 식으로 어필해나갔다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나 혼자만 생각한다 (에로틱하고 끈적한 느낌이랄까. 소녀적인 감수성을 언제고 가질 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 모습의 엘자는 아래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도 매력적임을 부인하긴 힘들다.





내가 왜 갑자기 엘자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엘자의 옛 베스트 앨범 (Elsa - LEssentiel 1986-1993)을 들으니 예전 생각이 나서 그랬다. 그녀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새삼 궁금하기도 하고...참, 엘자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선수였던 리자라쥐와 결혼해서 2002년에 남편과 함께 내한하기도 했다. 노래 들으니까 예전에 1집을 빌려와서 더빙했던 그 스매트 60분짜리 테잎도 기억난다. (그게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때 아니면 중학교 초반때였으니까 꽤 된 셈이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노래를 간만에 들으면 너무 많은게 떠오른다. 마음이 심난하거나 슬프거나 외로울때 그런 기억이 많이 새겨져있는 노래를 듣는건 금물이다. 물론 때로는 그걸 즐기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하지만 오늘 듣는 엘자는 아주 상큼한 기억들로 수놓아져 있어서 참 다행이다. 더빙 테잎 보물처럼 쥐고, 맘 설레며 노래 들었던 그 시절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