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연예인의 자살, 죽음을 대하는 방식 (20080908)
내가 죽어야 한다면, 어둠을 아내로 맞이하여 내 두 팔로 껴안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3:1:80-83살아 있는 모든 이들은 언젠가는 땅 위에서 사라져 땅 밑으로 가 잊혀질 것이다. 우리가 죽은 이들에 대해 관대한 것은 우리도 죽을 존재인 탓도 있지만 죽음이 모든 가치의 우열을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관대함이란 실은 살아 있는 이들의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 연극은 그것을 삶의 주체가 되도록 실험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연극은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다. 죽은 이들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눈에는 눈,이에는 이>에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어둠을 아내로 맞이하여 내 두 팔로 껴안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오늘날 연극이 삶의 경쾌함, 발랄함, 가벼움만을 내세운 나머지 그 반대의 가치들을 잊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삶은 죽음의 지배력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삶과 연극의 천박함은 이것을 잊을 때 생긴다는 것을.
안치운/연극평론가
죽음은 모든 가치를 무화시킨다. 죽음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있다. 그리고 항상 죽음을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 삶은 죽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문재가 그의 시 '거울'에서 얘기한 것 처럼, "내가 죽어야 나의 죽음도 비로소 죽는다." 그건 숙명처럼 내 삶에 들러붙어있다. 어떤 예외도 없다.
'나는 믿는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삶은 죽음의 지배력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삶 속에서 죽음을 잊고, 매순간 죽음 앞에서 오만해진다. 허나 죽음 앞에서 모든 존재는 유한하고 그렇기에 삶은 소중함을 획득한다. 잊어서는 안된다.
또 한 명의 연예인이 자살했다. 눈 앞에서 사라지면 관심을 잃고 기억하지 못하는 게 대중이다. 그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했다면 그 존재가 오늘 내 가슴을 치지는 못했을 거다. 죽은 이들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 하는 존재이다. 죽음이 삶의 배면에 있지 않고 삶을 덮어버린 그의 자살. 그는 살아있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