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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과 조중동

시린콧날 2008. 8. 5. 12:54

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김두식 (교양인,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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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상황이 답답해 다시 집어든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 책을 띄엄띄엄 읽다보니 한달정도 들고 다니며 읽고 있다. 올 여름만큼 헌법의 가치를 다시 보게된 적이 있을까. 머리아픈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브레송의 평전을 구입했는데도, 아직 입맛만 다시고 있는 상황이라니.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한구절을 스크랩해본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를 위해서, 그 근본을 흔들고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공산당을 불법화할 수밖에 없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의 주장은 일단 타당해 보이지만,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우선 민주주의가 많이 성숙한 나라에서는 이런 논리가 실제로 적용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방어적 민주주의가 처음 구체화된 독일에서도, 1968년부터 공산당의 활동을 허용하고 있고, 통일 이후에는 동독 공산당이 이름만 바꾼 채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탄탄한 민주주의의 기반이 형성된 이후에는 공산당이라 해도 굳이 방어적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해산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나라에서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논리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박정희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걸핏하면 북한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원래는 공산주의자들처럼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사상의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알맹이는 빠져버린 민주주의의 껍질만 남게 됩니다. 여기에 방어적 민주주의의 허점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알맹이 빠진 민주주의를 자랑스러워하며 사는 허수아비 시민이 되지 않으려면, 방어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그리 쉽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닙니다. 왜나하면 무신론도 일종의 신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국에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종교의 자유를 지키려고 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지켜주는 데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자기 사상의 자유를 지키려는 공산주의자라면 기독교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지켜주는 데 남보다 더 열심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음란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예를 들어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출판되었다고 칩시다. 기독교인인 저는 그 작품에 대해 청소년의 영혼을 좀먹는 쓰레기 같은 책이라며 구입거부 운동을 벌일 수 있습니다. 서점 앞에서 "기독교인들이라면 <즐거운 사라>같은 쓰레기를 파는 이런 서점에서 절대로 책을 구입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보이콧을 선동하는 시위를 벌여도 좋습니다. 이것도 역시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 공권력이 <즐거운 사라>의 저자 마광수를 붙잡아 가려고 할 때에는, 마광수와 어깨를 걸고 함께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저의 책이 청소년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명분으로 판매금지되고 제가 붙잡혀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는 반드시 필요한 태도입니다.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일종의 형제관계이듯, 그 우산 아래 보호를 받는 우리 '이상한 사람들'도 헌법 아래에서는 일종의 형제이기 대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본권을 인정한 헌법 정신입니다. 결국 '관용' 또는 '똘레랑스'라 표현되는 '서로 받아들임'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지요.

헌법의 풍경 p230~232


김두식 교수가 그의 책 '헌법의 풍경'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최근의 조중동 광고거부 운동을 둘러싼 정부, 검찰, 언론의 삼각동조는 굳이 볼테르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지킬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 충분히 '반헌법적'이다.

밑줄 친 위의 인용문에서 <즐거운 사라>를 조중동 왜곡기사로 바꾸고(마교수님 죄송합니다) <즐거운 사라>를 파는 서점을 조중동에 광고하는 기업으로 바꾸고, 그 서점앞에서 피켓을 들고 보이콧을 선동하는 이들을 지금 광고거부운동을 하는 많은 시민으로 바꿔보라. 만약 표현의 자유, 정당한 소비자운동을 보장하고 있는 우리 헌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국가공권력이 피켓을 든 이들을 잡아간다면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그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만약 조중동이 그들이 생산해 낸 기사로 인해서 (그것이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이라면) 기자와 편집국장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처벌받는다 해도 답은 마찬가지이다.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럴리 만무하겠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싸우고 저항해야 한다.

국가공권력은 대다수 시민에게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제어와 감시의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헌법적 가치, 법의 테두리, 적극적 행동을 통해 공권력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눈을 부릅떠야 한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조중동이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공권력을 이용하려 하고 군불을 때려하는 상황은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그들. 언제나 정신을 차릴지.